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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다가온 오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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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26, 2019 00:35에 작성됨.

커다란 캔버스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손에 들린 것은 붓과 팔레트. 팔레트는 그녀가 들기에 차갑고도 무거웠고, 물감조차 묻어있지 않은 붓은 손의 떨림에도 반응이 없다. 표현할 수 있는 색은 그곳에 다 있다는 듯이. 그녀의 발치 근처에는 수많은 페인트통이 놓여 있다. 수백 개의 원통이 저마다의 색을 몸통에 붙여 놓고 그녀를 바라본다. 흰 화폭을 채울 도구들은 다들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만 같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든다. 시야를 가리는 캔버스는 아까보다 더욱 커지고 있다. 점차 다가갈 수 없는 벽이 되어버린다. 그 주위로 풍경이 사라진다. 오로지 백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양손을 지면으로 떨군다. 붓과 팔레트, 혹은 연필이라던가 조각칼이라던가 하는 온갖 물건이 바닥을 향해 끝없이 떨어진다. 손을 타지 않은 물건들은 차갑게 바닥에서 튀어 오른다.

한다 로코는,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흰 벽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


어느 날, 이윽고 여름이 막 끝나가려는 무렵. 일본의 어느 부호가 자신의 집을 방송사에 공개한 사건이 있었다. 그 부호는 재계와 정계에서도 꽤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비밀이 많아 출연을 꺼렸던 여타 다른 이들과는 달리 방송에서도 간간이 보이던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이제는 자기 집 대문까지 열어젖힌다니. 촬영 소식을 건너 건너로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부호의 의중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사람들은, 부호가 그의 집을 보여주려는 이유가 그가 가진 미술품을 과시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부호는 각종 미술 재단과 에이전시에 대해 후원자를 자처하기도 했고, 예술작품의 경매 행사와 방송에서 빠짐없이 모습을 보이곤 했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예술작품을 몇 점 골라 제일 높은 가격으로 사들이고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쇼와도 같아 보였다. 어떤 이는 그 모습을 탐탁지 않아 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가 문화예술의 선을 실현한다며 부호를 띄워주었다. 부호는 경매장의 자리를 뜨며 미술품을 사들이는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묻는 기자를 향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미술은, 예술을 위한 유일한 예술이기 때문이죠.

방송으로 송출된 부호의 집은 그의 소문에 걸맞게 현대적이면서도 화려했다. 빛이 곧 조명이 되도록 설계한 천장과 거실에 놓인 단출한 가구, 그리고 거실 앞으로 뚫린 커다란 창 너머로 보이는 정원에는 여러 종류의 꽃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양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그런 거실의 창을 마주 보고 있는 하얀 벽에는 방의 분위기와 꽤 잘 어울리는 거대한 그림 하나가 걸려 있다. 부호는 그 앞으로 걸어 나가며 MC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그래서 더욱 눈에 밟히도록 일부러 거실에 놓아뒀죠. 무채색 계열의 색을 전체적인 기반으로 해서, 현대의 개인적이고 염세적인 인간군상을 표현했고, 그 이미지를 밝은색으로 덧대어 대비했어요. 이는 작가가 가지는 목표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미지가 작품 전체와 대비되어 실존적인 고독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은 마구잡이로 흩어진 불균형으로 나타나는데, 주위의 무채색 계열 속의 차가운 색으로 작가의 내적 불안감이 표출되죠. 그리고 밝은 이미지와 다시 한번 섞여 들어갑니다. 예술인에게 영감을 주는, 뭐, 그런 작품입니다.

부호는 대사를 읊듯, 벽에 걸린 유화를 자랑스레 소개하며 미소를 지었다. 카메라는 그런 부호의 모습을 클로즈업했다가 다시 작품을 향해 줌인했다. 그림은 언뜻 봐서는 추상화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낯선 거리의 모습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세심한 붓질과 물감의 거친 흩뿌림이 양분되어 제법 빠져드는 구석이 있었다. 앵글은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화면에서 그림이 빠져나가고 작품을 소개하는 푯말이 들어왔다. 금테가 덧대어진 나무판자에는,

『금붕어, 다섯 명의 조각상 – 한다 로코』

……라고 쓰여 있었다.


***


그러니까 사건은 이렇게 시작한다. 녹화된 영상은 지상파의 황금시간대를 쥐고 있는 연예·사회 정보 프로그램에 방영되었다. 프로그램의 인기 코너에 공개한 부호의 저택, 그 거실에 놓인 미술 작품은 아티스트 아이돌 한다 로코의 것. 과장된 효과음과 함께 출연진의 요란한 소리가 스튜디오를 채웠다. 이후 그들은 가지각색으로 로코의 작품에 대해 품평하기 시작했다. 일본 미술, 이대로 둬도 괜찮아? 저 부호, 분명 그녀의 팬이겠군요. 이내 특별 출연진 중 한 사람인 미술평론가가 그녀의 작품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자, 아무도 그녀의 작품이 부호의 거실에 자리 잡은 것에 불만을 토로하지 못했다.

이후 「한다 로코의 아트 목록」이라는 제목의 우드록이 제작진을 통해 사회자에게 전달되었고, 그네들끼리 그녀의 작품을 일일이 설명하고 품평을 해댔으며, 프로듀서는 재빨리 TV의 전원을 꺼버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꺼진 TV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프로듀서가 중얼거렸다. 고개를 돌리자 아리송한 미사키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품에 든 서류를 놓지 않으며 그대로 서 있다. 프로듀서는 머리를 재빨리 굴리기 시작했다. 로코의 그림이 왜 저기에 걸려 있는 거야. 기회인가? 아니면? 갑자기 일어난 일에 머리가 지끈해진 프로듀서는 미사키에게 사무실의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빨리, 로코 좀 불러와 줘요.


아티스트적으로 필링은 나이스지만, 음… 잘 모르겠네요.

765 프로덕션의 사무실, 의자에 앉아있는 로코는 태연하게 녹차를 후후 불며 마시고 있다. 프로듀서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은 불어오고 햇살은 사무실의 유리창을 넘어 쏟아지고… 머리가 복잡할수록 세상은 평화롭구나. 멍하니 있던 두 눈이 코토리를 마주 보았다. 코토리는 프로듀서와 눈이 맞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인터넷의 실시간 검색어에는 로코의 작품이 상위에 걸려 있다. 자,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프로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로코 또한 별다른 반응이 없으니, 지금 이 상황이 진짜 화젯거리가 되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의외로 무덤덤하네, 너. 어쨌든 유명해진 거니 좋아할 줄 알았는데. 프로듀서가 침을 삼키며 말하자 로코는 녹차가 든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는 흐흠, 콧소리를 냈다. 당돌해 보이는 그 표정에 프로듀서는 그녀가 기분이 좋은 건지, 싫은 티를 내는 건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로코아트는 리치 파워로 유명해지기를 호프하지 않은 거예요. 페이머스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도 은근 좋긴 한가 보구나.

배드하다고 말하면 그건 아니지만…… 애초에 저 아트는 로코가 아마추어 아티스트일 때 크리에이션한 아트라구요. 어째서 저곳에 디스플레이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어요.

프로듀서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는 로코는 손가락을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아티스트로서 인정받고 그녀의 작품이 방송의 전파를 타고 사람들에게 각인된 것은 필시 기분 좋은 일일 터였는데, 당최 그녀의 마음은 기쁨보다는 의문으로 가득했다. 분명 예전, 화방을 운영하는 화상이 그녀의 그림을 보고 몇 점을 골라 사간 적은 있었지만 그게 저 집에 걸려 있다니.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녀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이내 별일 아니겠지,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사이 프로듀서는 머리를 싸매는 시늉을 하며 무언가 주절거리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덮을까… 로코의 아트는 세상에 나오면 안 돼… 그보다 저 그림이 왜 저기에 걸려 있는지 난 아직도 모르겠어.

우으, 로코아트는 패셔너블하고 마뷸러스하다구요! 무시하지 마세요!

볼을 부풀리며 팔을 버둥거리는 로코. 프로듀서는 그녀의 그 모습을 보며 무심코 귀엽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었다. 아니, 아니, 이건 농담이고. 프로듀서는 몸짓을 멈추고 팔짱을 꼈다.

그래도 이왕 저질러진 일이니까. 저렇게 로코에 대한 관심이 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음, 그래도 역시 회의를 좀 해봐야겠는데.

프로듀서는 소파에서 일어나 코토리와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로코에게 잠시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사장실로 향했다. 그동안 로코는 사무실의 TV를 켜고, 하염없이 흘러나오는 뉴스며 음악 방송을 시청했다. 해가 약간 기울어졌고, 그녀가 서늘한 기분을 느껴 몸을 움츠리려 할 때쯤, 프로듀서가 목을 좌우로 돌리며 사장실에서 나왔다. 로코는 소파에서 일어나 프로듀서에게 다가갔다. 그녀를 바라보는 프로듀서의 입가에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정해졌어, 앞으로의 방향성 말이야.

네?

프로듀서는 손을 들어 로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회는 언제나 찾아오는 게 아니니까. 극장의 모두가 연기나 광고, 예능 등으로 색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는 있지만, 본래의 개성 또한 중요하고. 로코의 경우는 기왕지사 아티스트로서의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여서 말이지. 입지를 다질 기회라 생각하자고.

그러면서 그는, 로코와 눈을 마주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마음껏 표현해봐.


빠른 속도로 봄이 지나갔다. 작은 소동이 일었던 날은 가물가물해지고, 해는 점점 길어져 바깥은 어느새 여름. 그동안 극장은 몇 번의 사건으로 즐거운 혼란을 겪고 있었다. 여러 스폰서와의 협업이라던가, 새로운 예능과 다큐멘터리 출연 등 모두가 각자의 장소에서 쉴 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사건을 꼽으라 한다면, 당연 로코의 활약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말 한마디는 짧지만 큰 파급력을 갖는다. 그녀에게 닥친 어마어마한 유명세의 물결 또한 그 말 한마디가 상당 부분 작용했으니까. 로코가 극장의 무대 세팅을 하는 날이면 매진율이 높아졌고, 얼마 전에는 뛰어난 유닛 프로듀스와 인터넷 생방송 채널 송출로 그녀의 입지를 단단히 다지게 되었다. 일본의 모 유명 에이전시와도 계약을 맺어 그녀의 작품이 갤러리와 경매장에도 걸리기 시작했다. 모두 그녀의 노력과 입소문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해의 끝자락이 강물에 길게 늘어질 무렵, 극장의 동료들은 퇴근하거나 바람을 쐬러 옥상에 나가거나 했지만 로코는 대기실에서 혼자, 핸드폰으로 자신의 그림이 나오는 경매 방송을 보고 있었다. 아티스트로서의 성공은 이러한 경매 방송에서 로코의 작품이 계속 팔려나가는 덕이 컸다. 그녀는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나무망치 소리를 들으며 탄산음료 캔의 뚜껑을 땄다. 캔에 맺힌 물방울을 손으로 쓸며 탄산음료를 쭉 들이켰다. 그래도 답답한 속은 풀리지 않았다.

이백사십만 엔, 이백사십만 엔에 낙찰되었습니다. 다음은……

경매사의 말소리가 들리자 로코는 핸드폰의 홈 화면을 눌렀다. 냉랭한 기운이 몸속을 휘감았다. 차가운 음료를 마신 탓일까. 그녀는 소파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포개어진 손등에 톡톡 두드린다. 무심결에 넘겨버리고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도리어 떠올리게 된다. 안개처럼 희뿌연 불안감을.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쯤 탁자에 놓인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프로듀서의 메일이었다.

이번에 좋은 프로젝트가 하나 들어왔어.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하얀 화면에 동글동글한 글자가 반투명한 그녀의 모습을 넘어 비췄다. 그 단어가, 그녀는 왠지 모르게 낯선 언어처럼 느껴져 고개를 파묻었다.


765 프로덕션의 사무소를 찾아온 여자는 자신을 ‘일본 예술인 복지재단’의 이사라고 소개했다. 프로듀서는 이사를 사장실로 안내했고, 이사는 고동색 소파에 앉아있는 사장의 오른편에 풀썩 앉았다. 로코는 프로듀서와 함께 앉아 이사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에서 본 이사는 잘 차려입은 옷가지와 행동거지가 멋들어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보는 눈매가 작위적으로 뒤틀려있었다. 로코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마주 보지 않으려 애썼다. 사장은 가운데에서 프로듀서에게 손짓을 섞어가며 대화를 시작했다.

저번에 한 번 의논했던 것이니, 구체적인 계획은 잘 되었겠지?

물론입니다. 아직 확정된 건은 아니지만, 시도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프로듀서는 미리 준비한 얇은 종이뭉치를 꺼내어 이사와 사장, 그리고 로코에게 건넸다. 첫 페이지에는 큼직한 글씨로 「예술인의 기업 참여 예술 활동 지원 계획」이라고 적혀있었다. 로코는 꽤 무거운 제목에 쓴웃음을 지으며 손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표지는 거창한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도 쉽게 넘어갔고, 이후 로코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없이 빼곡한 글씨의 바다였다.

이사는 종이를 받아들고는 읽지도 않고 탁자에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매를 매만지며 로코를 바라보았다.

쉽게 설명하자면, 국비를 통해 해외에서 잠시 거주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고, 그 시간 동안 로코 씨의 예술 활동을 지원해 주는 것이에요. 이후 일본에 돌아오면 기업과의 협력으로 로코 씨의 작품의 전시회나 공연을 열 요량이고……. 어떤가요?

가벼운 말투와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주제에 로코는 부담스러운 듯 무심코 마주 보는 눈을 피했다. 새삼 알 수 없는 압박감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것이 이사의 말 때문인지, 종이뭉치의 무게 때문인지 헷갈릴 즈음, 이사는 시원스레 과장된 웃음을 지으며 프로듀서에게 손짓했다.

뭐, 아직 일정에는 얼마 정도 시간이 있으니까, 고민할 시간 또한 필요하겠지요. 신중하게 결정하셔도 됩니다.


이사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강세가 실려 있었다. 실의 끊어진 부분을 다시 매듭지은 정도의 거슬림이 느껴지는 목소리. 회의가 끝난 뒤 극장으로 돌아와 레슨을 마친 이후에도 그 미세한 이질감은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로코는 의자에서 일어나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보기도 하고 기획서를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했지만, 그녀의 생각은 머릿속 무의식의 구멍으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기획서를 돌돌 말아 탁자를 향해 살며시 내리쳤다. 통, 통, 통. 이메지네이션, 인스피레이션……. 엇박자로 흘러가는 노랫가락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천장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그녀의 노랫소리 또한 멈췄다.


***


망설이더라도 줄곧 나아가던 때가 있었다.

깜빡이는 백열등과 같이 그 발자국은 위태롭고 비틀거렸다.

항상 그랬었기에 더욱.

나는 어째서 추락할 때도 웃고 있어야만 했을까.


***


뉴욕은 그 도시의 인기와 명성대로 대중들의 인식과 관심이 시시각각 변하는 곳이었다. 경제와 사회, 정치, 예술, 심지어는 매일 거리에 나와 있는 푸드트럭의 메뉴와 도시 관광 여행의 코스까지. 그들이 매일매일 다르게 채워져 뉴욕이라는 하나의 다채로운 색깔을 완성했다. 하지만 로코는 그것이 결국 몰개성이라고, 온 거리가 그저 검은색으로 물들어있다고 느꼈다. 그 변화의 물결이 하수구의 오수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는 트리니티 교회가 보이는 맨션의 꼭대기 층에서, 그저 하얀 캔버스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이든 그릴 수 있던, 표현할 수 있던 예전의 여러 가지 가능성에도 지금의 로코는 붓을 들다 내려놓기만을 반복했다. 긴 정적을 그녀의 한숨이 깼다. 로코는 눈을 감고 머릿속에 상상력을 떠올려보았다. 수많은 이미지, 그것들이 서로 얽혀 묶이고 사라지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머릿속은 절인 동물, 발랄한 색채의 그림, 떨어지는 도자기 등의 이미지로 전복되다가 다시 백지로 돌아온다. 그녀는 몽롱한 듯 눈을 떴다. 뉴욕에 오고서 무언가 해야만 한다는 의지는 넘쳐났지만, 정작 이렇다 할 결과는 하나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그 생각은 강박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왼손으로 매만지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깨끗한 물통에 붓을 집어넣었다. 검은 물감은 붓을 타고 투명한 물에 스산하게 퍼져갔다.

굳은 몸을 이끌며 그녀는 부엌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프로듀서가 아침에 사놓고 간 샌드위치가 있다. 그녀는 냉장고 맨 위 칸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고 포장을 천천히 까 한 입 베어 물었다. 묵은 토마토와 소스에 젖어 눅눅해진 빵의 맛이 혀에 스며들고 다시 목구멍에 달라붙었다. 한여름에 땀에 절어버린 셔츠 같은 불쾌한 식감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차가운 냉기와 눅눅함을 곱씹으며 로코는 포장을 쓰레기봉투에 버리고 어질러진 거실을 바라보았다. 비닐과 포장지,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르는 염소 머리 모형과 그림 도구 등이 난잡하게 흩어져있었다. 새삼 정리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그녀는 다시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방으로 들어갔다.

창작의 의욕이 사라질수록, 그 불씨가 점점 꺼져갈수록 일상의 리듬을 반복하고 유지해야 했다. 규칙적이고 일정한 일상의 리듬이 다시 예술의 의욕을, 동기를 불어넣어 주니까. 마치 매일 노트북을 켜 타자를 두들기고, 어딘가를 향해 무심한 시선을 보내는 일처럼. 로코에게 세상은 마치 하나의 커다란 리듬이었고, 불분명한 각자의 규칙으로 만들어지는 수많은 오브제의 조합이었다. 뜬 눈으로 아침 해를 보고, 매일매일 펜을 들고 붓을 들고, 그런 세상 속에서 혼자만 엇박자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로코는 캔버스 뒤의 창밖을 보며 실감 나게 느끼고 있었다. 고층 맨션의 바깥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리듬을 유지했다. 그녀는 그 모습을 초점 없이 바라보았다.

입가에 묻은 소스를 휴지로 대충 닦은 후, 로코는 다시 화폭을 정면에 두고 앉았다. 흰 캔버스는 어떤 미동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코는 무의식적으로 느껴지는 그 시선을 마주하다가 캔버스 상단 우측에 검은 스크래치가 긁혀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그 스크래치를 문질렀다. 로코의 손에 묻은 얼룩은 옅어지기는커녕 흰 부분을 거멓게 물들여갔다. 그녀는 캔버스를 바꿔 끼웠다. 내동댕이쳐진 얼룩진 캔버스가 방을 나뒹굴었다. 캔버스와 부딪힌 도구를 담은 통이 난잡하게 흐트러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 머리를 짚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실패는 언제나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익숙하게 웃어넘기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로코는 한 갈래로 묶은 머리를 풀어 헤치며 방을 빠져나왔다.


로코는 활동하기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맨션을 빠져나왔다. 선선한 바람이 뺨을 타고 느껴졌다. 늦여름 날씨는 여전히 꿉꿉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무언가 생각이 나지 않고 복잡할 때는 두서없이 걷는 게 좋았다. 그녀는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건널목을 지나 거리의 인파에 묻혀갔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프로듀서가 맨션으로 조용히 걸어오고 있었다.

무거운 서류 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 열쇠를 문고리에 꽂았다. 열쇠는 헛돌았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오자 이리저리 어질러진 방이 그를 맞이했다. 프로듀서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가방을 거실 책상에 놓아두고 쓰레기를 줍기 시작했다. 손아귀에 잡히던 쓰레기는 제법 큰 봉투 두 개를 순식간에 채웠고, 개중에는 로코가 무언가 만들려다 실패한 것들도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한데 모아두려 했으나, 그 실패작들은 하나같이 찢어지고 망가져 있었기에, 조심스레 봉투에 넣어 거실의 구석에 놓아두었다.

어느 정도 보기에 깨끗해지자 프로듀서는 부엌으로 가 그라인더에 원두를 채워 넣었다. 적막한 공간에 원두 가는 소리가 퍼져갔다. 그는 원두를 빼내어 커피머신으로 가 여과지에 원두를 쏟고, 물을 채운 뒤 버튼을 눌렀다. 곧 물 끓는 소리가 났다. 커피가 추출되는 2분 남짓한 시간 동안 프로듀서는 그 소리가 증기기관차의 경적, 철로의 마찰음과 같이 느껴져 신경이 거슬렸다. 적막 속의 소리는 엄청난 소음을 동반했다. 그는 왜 로코가 맨션에 온 뒤로 계속 헤드폰을 쓰고 있었는지 이해가 갔다.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 만들어낼 리가 없지. 전혀 다른 걸, 이 공간은.

처음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새로운 장소와 질 좋은 작업환경. 그것만으로 그는 새로운 예술이 나타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자신이 보아온 예술인들은 창작을 위해 떠나고, 새로움에 열광하고, 약간의 괴짜 같은 면도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는 그것이 사람들이 만들어낸 예술가라는 환상이라는 것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그렇다는 믿음을 가졌던 과거의 자신을 후회했다. 적어도 로코는 그가 가진 믿음에서 예외로 존재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의 이런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로코는 이미 자신만의 새로움을 찾아 떠나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그 자신이 그녀의 예술을 위한 여행을 멋대로 중단시킨 것만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그는 머그잔에 커피를 담아 들고 의자를 빼 앉았다. 커피를 마시며 가방에서 서류를 빼 날짜와 중요도에 맞게 이리저리 정리했다. 그러다 녹색 서류철에 물건 하나가 치여 식탁 밑으로 떨어지려는 것을 그는 재빠르게 잡아냈다. 차가운 느낌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왔다. 그 물건은 공과 같은 형태였는데, 구라고는 볼 수 없었고, 미묘하게 타원 같은, 하지만 어딘가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와 있는 모양새였다. 그는 이것도 로코가 만든 작품 중 하나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맨션에 들어오고 나서 바로 만들어낸 작품 같기도 했다. 그는 그 물건을 만지며 꽤 마음에 들었다. 골프공만 한 사이즈, 손바닥에 느껴지는 꽉 찬 느낌이 퍽 기분 좋았다.

그는 공을 공중에 던져보았다가 잡기도 하고, 손 안에서 이리저리 굴려보기도 하며 재미있어했다. 자세히 보니 공의 표면은 절반 정도가 회색, 나머지 절반은 어두운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색의 경계는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프로듀서는 그것을 보고는 무언가 가슴 속에서 복잡한 느낌이 일었다. 그는 수평과 수직, 모노레일의 궤도, 아스팔트 위의 노랗고 하얀 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떠올렸고, 그 미묘하고 흐린 선에서 외줄 타기를 하듯 위태롭던 그녀를 떠올렸다.

예술의 가치를 인정받고 많은 이들이 그녀의 가치를 다시 확인했지만, 이제는 그 평가가 진심인지조차 분간되지 않았다. 정작 그녀의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지지 않은 듯 보였다.

그는 처음으로 로코의 작품을 온전히 느꼈고, 다시는 이런 감정을 가질 수 없을 거라는 확신에 슬퍼졌다.


***


허드슨강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 로코는 강변이 잘 보이는 벤치에 앉아 잠시 몸을 누였다. 날씨는 티끌 없이 맑았고, 사람들은 여유롭게 조깅을 하거나, 개를 산책시키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코는, 하염없이 고개를 숙인 채 자신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라고, 그러면서 뉴욕은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거품같이 떠 있는 자신과 단단히 굳혀진 이 땅은 정말이지 이질적인 것이었다. 자신은 너무나도 정체되어 있었고 이 도시는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했다. 보글거리는 감정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부터 끓어올랐다. 그 느낌은 선명하게, 그리고 서늘하게 온몸을 관통했다. 햇빛이 따가웠다.

뉴욕에 온 지 일주일이 넘었을 무렵, 예상치 못했던 뉴스가, 그것도 속보로 인터넷과 SNS에 올라왔다. 웬일인지 작업에 영 집중하지 못하던 로코 또한 그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 뉴스의 내용은, 로코의 아트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해준 부호의 이야기였으며, 미술품으로 자신의 재산을 세탁하고 은닉해오던 행위가 밝혀졌다는, 다소 충격적인―대중들에게는 그렇지 않겠지만―소식이었다. 굳게 닫혀있던 창고가 열렸고, 요란한 카메라 셔터음과 함께 미술품들이 쏟아져나왔다. 개중에는 경매장에서 보이지 않던 작품까지 숨어있었다. 로코는 그 소식을 듣고도 삼십 분은 더 캔버스에 물감으로 칠을 하다가, 조용히 붓을 내려놓고 방을 빠져나왔다.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세 번이나 했지만 얼굴의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TV 속 사람들의 명암이 교차했고 그녀의 눈앞은 계조처럼 흐려졌다. 부호의 저택에서 다른 작품들과 함께 트럭에 담겨 실려 가던 것은, 분명 로코 그녀의 그림들이었다.

소식은 신문 사회 지면의 전체를 차지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전의 그것보다 더욱 뜨거웠다. 미술계의 어둠을 떠들던 사람들이 이런 사건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리가 없었고, 얼마 전까지 부호를 띄워주던 방송사에서도 쥐를 잡듯 ‘미술계, 이대로 괜찮은가?’ 따위의 제목을 내걸며 줏대를 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로코의 그림은 빠짐없이 등장했는데, 「한다 로코의 아트 목록」 우드록은 아직도 남아 패널들이 요긴하게 쓰고 있었으며, 화랑을 운영하는 미술품 딜러는 그네들이 미술계 얘기를 꺼내니 상처는 우리가 떠안는다며 한탄했고, 평론가들은 되려 로코의 그림을 선택한 부호의 안목을 확인하기에 바빴다. 순식간에 지나간 사건 속에서 로코만이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한동안 매스꺼운 기분에 시달렸다.


잊히는 데는 아무런 대가가 필요하지 않았다. 조용히 숨을 죽이면 사람들은 다른 이슈에 집중했다. 세상에는 연예며 경제며 범죄며 너무나도 집중할 것이 많았고, 그녀도 그 카테고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얼굴을 보여야 했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일주일 전에는 몇몇 기자들이 와 그녀의 근황을 묻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로코는 짐짓 당당하게, 여유가 넘치는 척 기자들 앞에서 인터뷰에 실릴 사진의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어느새 ‘작업속도는 더디지만 예술적 영감을 충전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귀국한 뒤에 펼쳐질 자신의 전시회를 기대해 달라’라는 객기까지 부리고 있었다. 기자들은 그 말에 만족한 듯 빠르게 펜을 놀렸다. 기자들 사이에 껴있던 요시자와씨는 그녀의 분위기를 눈치챈 듯 침묵을 지켰다.

서서히 무너져가는 기분이었다. 물을 주지 않아 서서히 말라가는 화분 속 식물처럼, 얼음이 녹아 밍밍해지는 콜라처럼 의욕은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삼 일 전부터는 방에 들어가 캔버스를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제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거리를 헤맬 뿐이었다. 아주 사소한 계기, 그것 하나면 충분했는데. 처음 그림을 그려나갔을 때처럼 순수한 즐거움이.

나무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로코가 앉아있는 벤치에까지 그림자가 닿자 그녀는 벤치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고 부호의 말이 문득 귓가를 맴돌았다. 예술을 위한 예술. 그건 한다 로코의 ‘예술’이었을까, 아니면 ‘한다 로코’의 예술이었을까. 예술을 팔아 돈을 얻고 다시 돈을 팔아 이름값을 올리고. 그렇다면 그건 예술이고 뭐고도 아니지 않을까. 아니면 그것이야말로 미술의 본질일까.

이름값에 의해, 새로운 사조에 의해 작품의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시장의 특성상, 미술은 돈을 빼돌리기에 최적의 분야였다. 흔적이 남지도 않으며 가지고 있는 작품이 많으면 많을수록 예술을 사랑하는 애호가, 미술의 가치를 아는 지성인으로 보이니 손해를 볼 일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일은 부호와 같은 재벌들의 사이에서 은밀하게, 어찌 보면 대담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사간 그림은 금방 재조명되었고 화가의 이름값 또한 올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미술계는 그들의 놀이터였고, 에이전시나 평론가에게는 좋은 돈벌이 장소였으며, 로코와 같은 아티스트에게는 기회의 발판이었다.

그 창고가 열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그 모든 것 뒤에는 돈이 있었다. 돈이 없으면 안 되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건 너무 심했잖아? 라고 할 정도의, 강력한 압력이 기저에 깔려있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어쩌면 미술이란 처음부터 그런 바닥인지도 몰랐다.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을 것만 같아 그녀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림자는 벤치 앞의 산책로마저 집어삼키고 있었다. 로코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시원한 바람이 강에서부터 불어왔고, 그녀는 덩그러니 놓인 하루를, 처음으로 텅 비어버린 시간을 마주했다. 그 시간은 매우 고요했다. 헤드폰 속의 어지러운 목소리와, 시끌벅적한 극장의 소리와는 비교도 못 할 정적이 숨 막히듯 그녀에게 다가왔다.

강의 표면이 눈부시게 희어졌다. 그늘의 그림자와 그녀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그녀의 모습이 더욱 짙어졌다. 모노톤으로 일그러지는 그녀의 색과, 낮은 음자리표로 곤두박질치는 그녀의 생각이 자꾸만 어깨를 짓눌렀다.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신경과 의식을 거미줄처럼 늘어뜨리고 있을 무렵


설마, 한다 로코?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세 발치 앞에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늦여름 날씨에도 기다란 하얀 바지에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고,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졌지만 어딘가 다부지고 멋들어진 구석이 있었다. 검은 선글라스 너머로 남자가 로코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로코는 잠시 당황하다가 자세를 고쳐 앉아, 얼떨결에 ‘네?’라고 답했다. 남자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가 드러나도록 웃어 보였다.

빙고.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남자는 로코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진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아르마니인지 지방시인지, 분간하기 힘든 냄새가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로코는 그 냄새가 싫지는 않았으며,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남자의 인상이 그녀의 경계를 조금이나마 풀어주었다. 남자는 정성 들여 다듬은 듯한 콧수염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유명한 아티스트를 여기서 보다니, 영광이로군. 난 당신의 팬이에요.

반투명한 선글라스 속 남자의 눈이 빛난다. 로코는 어떻게 자신이 뉴욕까지 알려졌는지는 몰라도, 지금 자신의 눈동자와는 완연히 다른 또렷한 눈빛에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남자는 그런 로코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다 의뭉스레 눈썹을 추켜세웠다.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군요. 당신다운 말투도 보이지 않고.

그 말에 로코는 몸을 움찔했다. 남자를 바라보던 시선을 자신의 맞잡은 두 손으로 가져갔다. 정곡을 찔려 당황했지만 그녀는 남자를 향해 애써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로코는 슈르하고 팝한, 언제나 패션이 넘치는 아티스트라구요? 다만…… 그냥, 고민이, 아주 조그만 고민이 있을 뿐이에요.

남자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끄덕임은 로코가 느끼기에 꽤 길었고, 남자는 고개를 돌려 고요하게 반짝이는 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고민이라. 나라도 괜찮다면 들어줄게요. 이래 봬도 미드타운 맨해튼에서 이십 년은 족히 화방을 꾸려가고 있죠. 그전에는 MoMA(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일했었고 말이지. 덤으로, 가끔은 이렇게 멀리까지 나와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며 퍼포먼스를 하죠. 이 모습, 어딘가의 누구와 많이 닮았죠?

어수룩하지만 당당한 남자의 모습에 로코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그렇네요, 똑같아요. 많이 닮았어요. 데칼코마니예요.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하자 남자는 콧수염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벤치에서 일어나 몸짓을 과장하며 걸어보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는 듯한 시늉도 곁들였다. 그녀는 남자의 행동이 모두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고, 복잡하고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문득, 순수한 호기심으로 그가 왜 록펠러 공원까지 와서 이런 퍼포먼스를 하는지 궁금해했다. 남자는 그것은 어려운 질문이 아니라는 손짓을 취하며 말했다.

간단해요. 보여주고 싶으니까. 재미있거든요, 이 생활은.

남자는 동작을 멈추고 똑바로 서 팔짱을 꼈다. 다문 입술 너머로는 다음 말을 고민하는 눈치가 보였다. 로코는 그 모습이 꽤 신비로웠고, ‘보여주고 싶다’라고 말한 남자의 말을 곱씹었다. 그사이 남자는 음,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작은 일탈이라 생각하면 좋을지도 모르지. 화방을 하다 보면 말이죠, 똑같은 일상과 앞으로도 그럴 하루하루가 반복해요. 일정한 박자라고 해야 할까,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고 데이미언 허스트니 로버트 고버니 하는 예술가들 얘기를 떠드는 동안 내가 정체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죠. 고정된 틀에 박힌 채 사는 거죠. 오선지에 정갈하게 놓여 있는 음표와 박자들, 화폭 안에 수놓아진 고정된 인물같이.

로코는 그의 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똑같은 풍경만을 보았던, 빈 화폭에 몰두했던 자신을 생각했다. 프로듀서와 동료들과 함께 보았던 새로운 경험을 떠올렸다. 그 풍경은 하나도 같지 않은, 모두가 각각의 기억과 감각을 갖고 있었다. 일상의 탈피는 겉으로 봐선 예측할 수 없는 점과 선의 프랙털처럼 이미 그녀의 곁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남자는 로코의 고민을 눈치챈 듯, 팔짱을 풀고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당신도 고민하는 게 많겠죠.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 불안한 위치, 하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아요. 보여줘요, 당신의 번져가는 열정을. 모두가 볼 예술을 하세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에요. 앨런 카프로는 이렇게 말했죠. ‘예술이 꼭 예술다운 예술로 보여야 할 필요는 없다네.’라고.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씨익 웃어 보였다. 네 개의 덧니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듯 드러났다. 남자는 로코에게 손짓했다.

당신에게 아트는 무엇이죠?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녀는 머뭇거렸다. 두 손을 모아 꽉 쥐었다. 항상 해오던 말인데도 지금의 그녀는 입 밖으로 말을 꺼내는 것조차 고민스러웠다. 선글라스 너머의 두 눈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고, 그녀는 용기를 내어 천천히 입을 뗐다.

로코에게 아트란... 로코나이즈하게 이뤄지는 패션의 매니페스토이고, 그것이 존재로 표출되면 이노베이션을 디스커버리하는...

기어 나오는 말소리로 이야기하던 그녀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남자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표정은 한없이 맑았고 그녀는 그가 일부러 그런 표정을 짓는 것만 같았다. 그제야 그녀는 남자의 의중을 헤아렸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두근거림이에요.

그녀는 말을 마친 후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조심스레 선글라스를 벗었다. 주름지고 순박한 두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봐요, 이미 갖고 있잖아요. 자기만의 리듬을.


***


빗물을 머금어 키가 큰 잔디가 노을빛에 붉게 물들었다. 강의 물결이 해의 그림자를 넓게 퍼트리고 있었다. 노을이 진 공원을 바라보는 로코의 두 손에는 남자의 명함이 들려있었다. 남자는 그녀의 작품을 팔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녀는 흔쾌히 명함을 받으며 악수했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느껴졌고, 그녀는 프로듀서와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상기했다.

반사되는 빛이 색을 바꾸며 서서히 세상에 퍼져갈 동안 로코의 심장은 충격을 받은 듯 두근거렸다. 그녀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양된 감정에 기분이 좋았다. 그 사이 하늘은 점점 진해졌다. 그녀는 그 풍경을 모두 다 담겠다는 듯 한참을 벤치에 앉아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을 피부로 느꼈다.


쏟아지는 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반짝이는 도시를 걸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림을 그려야겠다.

이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하듯, 오늘을 소중히 간직해나가면서.


바지 주머니 속 핸드폰에서 미세한 진동이 울렸다. 프로듀서였다. 조용히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는 그녀의 두 눈에서는 하나의 장소가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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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아이커뮤에는 정말로 오랜만에 방문해봅니다. 예전에 블로그에 올렸었던 단편을 하나 들고 와보았습니다. 미술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초짜다보니 이래저래 실수가 많을 수도, 틀렸을 수도 있으니 유념해주십사 합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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