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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호와 어린 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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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24, 2019 07:58에 작성됨.

딩동댕, 맑은 종소리가 들리고 류브리카 행성의 언어로 녹음한 육성이 덜컹거리는 열차 안에 울려퍼진다. 곧 정차를 하려 이 커다란 금속 기계의 수많은 몸뚱이들이 흔들리고 있는데도, 유키호는 편안히 차에 꿀을 섞었다. 찻잔 안에서 달그락대는 소리에, 예티는 기분이 좋아진 듯이 몸을 떨고 눈동자를 반짝거린다. 파블로프의 개. 개에게 종소리라는 조건이 반응으로 이어진다면, 예티에게는 달그락대는 소리가 반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다만, 아직 어려서 그런지 참을성이 없다. 조금만 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바로 입에 넣어줄텐데 꿀이 전부 녹아내리기도 전에 성급하게 울어댔다. 유키호의 일행인 내가 보기에도 좋지 않은 광경에 걱정이 앞섰다. 아니나다를까, 옆자리의 불꽃 인간이 쯧쯔, 하고 혀를 찼다.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온도가 조금 더 뜨거워진 것 같다. 유키호는 하얗게 질려서는 연신 사과를 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유키호와 반대로 예티는 원하는 것을 얻어 들뜬 것 같다. 어미가 사과를 하는 사이, 새끼는 귀신같이 그 기회를 노려 찻잔을 털복숭이 손으로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그 안의 내용물을 전부 목구멍으로 쏟아낸 어린 욕심쟁이는, 몸에 떨어진 한방울 한방울까지 고양이가 그루밍을 하듯 행복하게 햝아먹었다. 유키호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이전의 여행지에서 공수해온 고급스러운 붉은 손수건으로 예티의 입 주변을 닦아주었다. 손수건에 달린 금빛 술에는 작은 종이 하나 달려있었는데, 예티는 그 소리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이게 좋니?"

"아바- 아바바-"

"응, 그래. 가지고 놀아도 돼."

한바탕 소란이 있었던 탓에 정차를 하는지도 누군가 들어오는지도 몰랐다. 상황이 진정되고 보니 열차에는 꽤 손님이 늘어있었다. 이렇게 많은 머리들은 전부 어디서 오는걸까? 이 역은 어떻게 알고, 또 티켓은 어디서 구하고, 좌석은 어떻게 알아서? 모를 일이지. 게다가 전부 동승자가 있다.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다들 친근히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 같다. 우연히 만난 앞자리의 손님이 친절하고, 아름다우며, 또 상식적일 확률은 상당히 낮으니. 하지만 유키호는 그랬다. 못말리는 어린 아이를 보호자로서 데리고 있을 뿐, 그녀 자신은 교양있고 기품있는 귀부인 같았다. 아니, 귀부인이라 하기에는 나이가 어리려나. 어쨌거나 좋은 집안에서 잘 자란 아가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한지는 고작 다섯 역 남짓이지만, 그 사이에 그녀가 들려준 여행 이야기들은 도망자로서의 아픔을 잊기에 충분한 예술이었다. 헤어져야할 때가 오면 확실히 섭섭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그녀가 어디에 내리는 지를 모른다. 그게 앞으로 좀 많이 남았다는 점을 제하고는 아는것이 없다. 

"창밖이 아름답네요~ 지구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에요."

열차는 그녀가 살던 지구와도 이제는 상당히 멀어졌다. 지구라는 행성은 대기권이라는 기체층으로 단단히 보호되어 그 밖을 나오지 않으면 평생 하늘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유키호에게 들은 이야기로 미루어 앞의 문장으로 요약하였는데, 좀처럼 흥분하지 않던 그녀가 조금은 화가 난 듯이 부정했다. 지구에서는 파래서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하늘과, 구름이 녹아버린 흐린 하늘과, 눈부시도록 붉은 하늘이 있고, 또 그 하늘은 종종 특별한 선물을 준다고. 이 하늘과는 조금 다르지만, 정말로 소중한 하늘이라고. 하늘이 주는 선물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묻자 유키호는 예티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눈이에요. 그건, 하얗고 포근한 작은 덩어리들이에요. 앞을 바라볼 수 없이 새차게 내리는 눈도, 빛이 멈춰버린 듯이 천천히 내리는 눈도, 전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덮어줘요. 눈이 이불처럼 소복이 쌓이면,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해져요."

어째서?

"소중한 기억들이 떠오르거든요. 제가 태어난 날은 그레고리력... 아, 그러니까 지구에서 쓰는 달력에서는 12월 24일로, 성탄절의 바로 전날이에요."

성탄절이라면 성인이 태어난 날로, 크리스마스. 그 전야는 이브라 하여 통칭 크리스마스 이브.

"잘 아시네요! 그럼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는 뭐라고 할까요?"

.........선물의 크리스마스?

"후훗, 그것도 정답으로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해요...."

유키호는 다시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 눈부신 설산에서 예티를 만난 기억을 회상하며. 예티는 제 이야기를 하는줄도 모르고 유키호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늘어져 꾸벅꾸벅 선잠을 자고 있었다. 듣자하니 정말로 선물로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티와 마주한 것은 인생의 행운이랄까, 의도한 선물보다도 더한 무언가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그에 이어 여기에 오기까지 수많은 여행을 했고, 그만큼 값진 보물들도 얻었지만, 예티같은 인생의 동행을 얻기는 천만분의 일의 확률이라고도 첨언했다.

"그 날은 눈이 참 많이 내렸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키호는 감상에 젖어 창가를 바라보았다. 아니, 속눈썹이 아래로 내려간 것을 보아 잠을 자는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그 이후로 유키호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예티도 세상 모르게 자고있다. 어쩌면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더는 오지 않을 선물에 대한 덧없는 꿈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주에서 가장 행복한 생명체처럼 생기있던 그녀는 이제 잠의 신이 앗아가고, 묵직한 털코트와 하얀 엠파이어 드레스 속에 숨어있던 슬픈 소녀로 변모하여 먼 옛날 크리스마스에 태어났을 성인의 품으로 날아가고 있다. 경건하고 조용히? 아니, 조금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제는 예티가 눈을 떴다. 언제 사고를 칠지 몰라 불안한 악동같았는데, 지금은 어미의 감정을 알아챈건지 기가 죽은 모습이다. 유키호를 관찰하던 예티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그녀를 대신하여 예티의 찻잔을 가득 채우고 꿀을 섞었다. 이제 보아하니, 아까 난동을 피운건 유키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구나. 영악한 예티는 이번에는 달그락 소리에도 반응하지 않고 얌전히 자신이 마실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유키호가 하듯이 조심스레 예티의 입에 찻잔을 대고, 각도를 맞추어 입구멍에 따뜻한 찻물을 부었다. 달콤한 것이 들어가자 비로소 예티는 진정한 마음 속의 평온을 되찾은 것 같다. 푸근한 미소를 짓는 예티를 보자 나조차도 유키호와 함께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꿈을 꾸고 싶을 정도로 나른해졌다. 지구의 하늘 아래, 무수히 떨어지는 눈을 맞는 최후 -- 그런 아름다운 꿈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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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축하해 유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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