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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나비와 벚꽃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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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19, 2019 00:29에 작성됨.


  꿈을 꾸었습니다. 

  한 마리 호랑나비가 날아와서, 만발한 벚꽃에 살포시 앉는 꿈. 그러나 그 꿈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입니다. 호랑나비는 여름에 날개를 피고 날아다니니까요.

  아아. 저는 언제부터 호랑나비를 보고 사랑에 빠졌을까요. 이미 한 차례 저를 지나치고 가는 나비를 보고서 그렇게 꽃잎을 떨구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은 흩날리는 벚꽃의 꽃잎 한 조각처럼 또르르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차마 그분 앞에서는 이 눈물을 보일 수는 없어요. 저는 그분의 담당 아이돌이니까요. 제가 눈물을 보인다면, 분명 그분이 저를 걱정하실 거예요.

  처음 아이돌이 되어서, 아이돌의 세계에 대해 알아갈 때만 해도 제 마음은 바람에 흩날리진 않았어요. 프로듀서 씨는 저를 스카우트하시고, 저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셨죠. 얼어붙어 있었던 마음에 봄이 찾아왔어요. 

  그 때부터였어요. 마음이 따스해져서 아파지기 시작한 것은. 그 사람을 보고 있자면 옛날 일이 아지랑이처럼 아련하게 피어오르기 때문이었죠.

  제가 아직 어른이 되기 전, 모든 것이 풋풋했던 시절. 세상의 모든 것이 저를 사랑해주었어요. 저는 커다란 벚나무였고, 많은 이들이 제 벚꽃을 보고, 귀에도 걸고, 자리에 머물다 가기도 했어요.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제가 늘 바라보던 나비는 제가 피운 꽃에 앉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쳤어요.

  일을 하러 가시는 프로듀서 씨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저는 눈을 감고 그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그 아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부단히 매달렸던가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무개성한 사람이었어요. 반대로 이야기하면 다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네.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이었죠.

  저는 그 다정함에 끌렸어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가급적 다 해 봤어요. 도시락을 싸 주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웠지만-가슴을 보여주면서 유혹해보기도 하고, 러브레터를 써서 그 남자애의 신발장에 넣기도 하고. 제멋대로 손을 끼기도 하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얻어 보려고 애를 썼어요.

  하아. 하지만 저는 끝끝내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어요. 지금도 생각이 나요. 그 때 그 사람이 했던 말들, 그 사람과 단 둘이 있던 순간. 그 사람이 저를 오후에 공원에서 보자고 했을 때만 해도 무척 설렜답니다. 드디어 내가 해온 일이 결실을 맺는구나 싶었어요. 그러나 그것은 제 착각이었을 뿐이었어요.


  ‘불러줘서 고마워.’

  ‘어. 그래.’

  ‘저기, 사실. 난 너를…….’

  ‘내가 널 부른 이유는 할 말이 있어서야.’

  ‘그게……. 뭔데?’

  ‘미안해. 사실 나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그 자리에서 무릎에 힘이 탁 풀려서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어요. 지금도 기억해요. 이후에 눈가에 눈물이 점점 고였던 그 느낌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무척 억울해했어요.


  ‘그럼……. 그동안 내가 해줬던 것들은 왜 다 받아준 건데? 대체 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진작 말했으면 되었잖아……!’


  제 절규에도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어요. 오만가지 감정이 섞인 채로 뒤돌아서 자리를 떴어요. 저는 그를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엎드려 누워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어요. 그 때 생각했어요. 다시는 내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는 없겠구나. 라고.

  설마 그 생각이 이제 와서 흔들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제 이상형은 이미 예전부터 무의식적으로 정해 두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학창 시절에 끌렸던 그 사람도 프로듀서 씨처럼 다정하고, 자신의 일에 성실했던 사람이었죠. 


*


  다시 시간을 지금으로 돌려서, 프로듀서 씨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를 해 볼까 해요. 프로듀서 씨는 전에 제가 매달렸던 그 사람보다는 더욱 적극적인 사람이에요. 저에게 먼저 권유를 하고, 일거리에 대해서 늘 저와 상의해주시고, 저를 늘 서포트해주시죠. 이끌리지 않으려 했는데, 어느 새 저는 프로듀서 씨에게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프로듀서 씨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같이 있자니 때때로 프로듀서 씨가 바쁘고, 커져가는 마음을 털어놓자니, 우선은 제가 아이돌인 데다가 혹시라도 또 그 때처럼 차이면 어쩌지 하는 불안 때문에 선뜻 나설 수가 없었어요. 프로듀서 씨는 저만 프로듀싱 하는 게 아니니까요. 게다가 이젠 어른이니까 그 때처럼 마구 들이댈 수도 없어요. 

  안 되겠지. 안 될 거야. 이래선 안 돼. 

  그렇지만, 사랑받고 싶어. 프로듀서 씨를 원해. 그래선 안 돼? 

  제가 프로듀서 씨를 부르면, 프로듀서 씨는 늘 몸을 돌려서 저를 바라봐주세요. 그리고 웃어주시죠. 근데, 그 미소는 저한테만 보여주는 건 아니에요. 다른 아이돌들도 프로듀서 씨를 믿고 따르죠. 그래서 저는 오늘도, 프로듀서 씨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할 말이 없는데도, 딱히 마땅한 이유가 없는데도 프로듀서 씨를 부릅니다. 아아. 저는 언제까지 이렇게 스스로를 애타게 만들어야 할까요.

  이대로는 안 되겠죠. 오늘만큼은 무리를 해서라도 프로듀서 씨에게 제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려드려야겠어요. 저는 시어터 극장 내 복도에서 프로듀서 씨를 불렀습니다.


  “저. 저기.. 프로듀서 씨?”

  “네. 부르셨어요?”


  이번에도 프로듀서 씨는 몸을 돌려 제 눈을 마주보면서 대답하셨습니다. 아아. 어째서 지금 이 순간 제 마음이 가시로 쿡쿡 찌르는 것 같을까요,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서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아요.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아요. 안팎으로 몇 번씩 숨을 고르면서 간신히 다음 말을 이었어요.


  “저. 오. 오늘. 저녁에... 스케줄이 어떻게 되죠?”


  아냐. 이게 아니야. 내가 말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야. 근데 왜 이런 말이 나왔지? 


  “어디 보자... 네. 한 건 있네요. 라디오 프로그램.”

  “아. 맞아요. 깜빡하고 있었어요. 그럼, 준비할게요.”

  “네? 아직 시간은 많은데...”

  “그래도요. 미리 준비해야 지장이 없을 테니까요.”


  저는 프로듀서 씨 앞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 나오지 않아, 다른 말로 마음을 숨기고는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대기실에 돌아오고 나니. 두 손이 절로 얼굴을 감쌌습니다. 무서워요. 거절당하는 게. 또 사이가 멀어지는 게. 손바닥이 살짝 젖음을 느낍니다. 저는 눈물을 뒤로 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한 곡 들었습니다. 요즘 이 곡이 유난히 귀에 쏙 들어오더라고요. 포르노그라피티의 노래. [호랑나비] 

  멜로디는 정말로 흥겨운 데, 가사가 꽤 애달픈 노래라서 끌리나 봅니다. 마치 지금의 제 모습 같아요.


  ♬그대를 만난 것만으로도 좋았어

  세상에 빛이 넘쳤지

  꿈속에서 만나는 것만으로도 좋지만

  사랑받고 싶다고 바라고 말았어

  세계가 표정을 바꿨지

  세상의 끝에서 하늘과 바다가 섞이네


  오늘따라 왠지 시간이 더 안 가는 느낌이었어요. 스케줄을 소화하는 내내 속으로 아까 프로듀서 씨에게 말을 걸었을 때를 후회하고 있었으니까요. 덕분에 스케줄이 끝나고 오프가 되니까, 유난히 술이 마시고 싶었어요. 코노미 언니와 리오에게 전화를 걸어서 두 사람을 불러서 단골 이자캬야에서 만났습니다.

  인사를 나눈 다음 한 짓은……. 퍼 마셨어요. 내가 아닐 때까지. 술 한 잔에 웃고, 술 한 잔에 울고, 술 한 잔에 대답을 하고, 술 한 잔에 마음을 털어놓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새 집에 와 있었고. 시간은 새벽 2시였어요. 핸드폰은 배터리가 다 되어서 꺼져 있어서 탁상에 있는 알람시계로 시간을 확인했죠. 충전기로 배터리를 약간 충전하고 전원을 켜 보니, 프로듀서 씨에게 문자가 와 있었네요. 여느 때처럼 저를 걱정하고 격려하는 내용이었어요. 

  술이 덜 깬 모양인지 머리가 좀 아파요. 오늘 하루는 정말로 잠들기 힘들 것 같아요. 프로듀서 씨. 저는 어쩌면 좋아요?


=====


  그녀를 작년 가을 처음 만났을 때, 지금까지 다른 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특별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음악대 속에서 또렷하게 들렸던 그 노랫소리. 새의 지저귐보다 더 아름다운 그 목소리를 놓친다면 프로듀서로서, 아니, 한 사람으로서 분명히 후회가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로듀서는 정말로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직종이다. 일은 잘 알아도 여자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이 없어서, 여자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영 쉽지 않다. 그래서 두려울 때가 종종 있다. 거절당하면 자신감이 깎인다. 그러나 물러설 수 없을 때가 있다. 바로 그 때처럼. 두려움보다 강한 영감이 나를 사로잡았을 때, 그 때 나는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정말로 잘 한 선택이었다. 원석을 발굴해서 잘 다듬어 빛나는 보석으로 나올 수 있도록 했으니까. 비록 처음엔 붙잡지 못하는 줄 알았다. 첫 인상부터가 굉장히 우아해서였을까. 마치 절벽 위에 핀 한 송이 꽃 같았으니까. 그녀는 처음 내가 스카우트 제의를 했을 때 자신이 과연 아이돌이 될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거절이 아닌 걱정’ 바로 이것이 내가 결정적으로 큰 용기를 내서 그녀를 아이돌로 스카우트하게 된 계기였다.

  그런데 지금, 그 때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해졌다. 계절이 바뀌고 봄이 찾아왔을 때, 봄바람이 내 마음 속에 새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간 것이었다. 

  요즘 매일 그녀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우아하면서, 다정하고, 늘 최선을 다하며, 아이돌 일을 즐기고, 어린아이를 좋아하고, 때로는 어린아이 같이 순수한. 정리해서 말하면 아름다운 아가씨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나만을 향해 피는 벚꽃이 되길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그 마음을 전할 수가 없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프로듀서와 아이돌이라는 표면적인 관계도 하나의 이유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내가 연애에 대해서 1도 아는 게 없는데다가, 그동안 교제를 해 본 적이 없고, 의외로 이런 쪽으로 새가슴이라 어떻게 마음을 전달해야 할지, 아니, 그전에 마음을 드러냈다가 차이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차인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 그녀가 나를 멀리하면 어쩌지? 나와 서먹해지면 나는 그녀를 어떻게 봐야 하지?

  후. 그래도 일단은 이 마음 때문에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나는 그녀의 담당 프로듀서다. 그녀 앞에서만큼은 언제나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지. 그렇지만, 내 마음을 언제까지, 그녀가 보는 앞에서 의연하게 숨길 수 있을까. 가뜩이나 거짓말엔 서툰데.

  그녀가 나를 부를 때면 심장이 철렁한다. 한창 프로듀싱에 열중할 때만 해도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가 익숙했는데, 요즘은 왠지 낯설다. 오늘도 그녀가 나를 불렀다.


  “저. 오. 오늘. 저녁에... 스케줄이 어떻게 되죠?”


  그녀가 내게 오늘의 일거리를 물어본다. 그녀의 표정이 왠지 평소보다 조금 어두워 보인다. 그렇다면 나는 담당 프로듀서로서, 미소를 보일 수밖에…….


  “어디 보자... 네. 한 건 있네요. 라디오 프로그램.”

  “아. 맞아요. 깜빡하고 있었어요. 그럼, 준비할게요.”

  “네? 아직 시간은 많은데...”

  “그래도요. 미리 준비해야 지장이 없을 테니까요.”


  그녀는 평소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그녀는 먼저 준비하러 가겠다는 말을 하고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괜찮을까. 무슨 고민이 있는 걸까. 나에게서 멀어지는 모습, 점이 되어 가는 모습에서 나를 떠나가는 것만 같은 느낌은 왜 드는 걸까. 단순한 착각이었으면 좋을 텐데.

  그녀가 대기실로 들어간 후, 나는 사무실로 가서 이어폰을 꽂고 노래 한 곡을 들었다. 포르노그라피티의 노래. [호랑나비]. 멜로디가 흥겨워서 흥얼거리고 다녔는데, 가사를 곱씹어 보니까 딱 내 이야기였다. 특히 이 구절.


  ♬황야 저편에 피었던 호랑나비

  흔들리는 그 풍경 저편에

  가까이 갈 수는 없었던 오아시스

  차가운 물을 줘

  가능하다면 사랑해 줘

  나의 어깨에 날개를 쉬어 줘


  내 서랍장에 숨겨 뒀던 반지 상가를 꺼내서 살며시 열어봤다. 가느다란 줄에 벚꽃이 예쁘게 세공된, 그녀를 위한 반지. 이 반지를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가 하루를 마무리 할 때면 늘 나에게 문자를 보냈었는데, 오늘은 아무리 기다려도 먼저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오늘 밤은 잘 들어갔을까?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어요. 카오리 씨. 카오리 씨는 아침에 약하시니까, 푹 주무세요. 내일 하루도 카오리 씨의 미소를 보여주세요.’


=====


  ‘술을 잔뜩 마신 그날 이후로 또 며칠이 지났어요. 벚꽃은 한철인 게 맞는 모양인지 어느덧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했어요. 코토리 씨가 말하길, 저희 프로덕션은 벚꽃이 다 지기 전에 단체로 꽃놀이를 간다고 해요. 다 같이 꽃놀이를 간다면 분명 프로듀서 씨랑 함께 간다는 이야기겠죠?

  지난번에 코노미 언니랑 리오에게 제 사정을 털어놨더니, 두 사람은 무지 놀라면서도 저를 다독여줬어요. 그리고 격려를 해줬죠.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까, 이참에 꼭 붙잡으라고. 그 말을 듣고 나자 정신이 들었어요. 코노미 언니 말이 맞아요. 어차피 안 된다는 것을 가정했을 때, 감춰 두다가 끝내 전달하지 못한 채 두고두고 후회하기보다는, 부딪치고 나서 마음을 정리하는 게 더 좋을 것이라고.

  결심했어요. 오늘은 반드시 프로듀서 씨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기로. 꽃놀이를 가는 오늘 밤, 벚나무 아래에서 프로듀서 씨를 마주보겠어요. 설령 그 끝이 호랑나비를 그냥 떠나보내는 것이 된다 하더라도.’


  ‘며칠 동안은 늘 비슷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각자 자신의 일에 충실한 나날. 그 와중에 내 마음만큼은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바로 오늘, 765 프로덕션 단체 꽃놀이 일정이 잡혔다. 오늘만큼은 모두가 일이건 고민이건 싹 다 잊고 떠들썩하게 놀 수 있겠지만, 나는 거기서 예외일 것이다. 아무래도 카오리 씨가 신경이 쓰인다. 언제까지고 마음을 감춰 둘 수는 없다.

  코토리 씨에게 상담을 했다. 내가 카오리 씨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나는 어찌하면 좋냐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커져서 멈출 수가 없다고. 코토리 씨의 답은 내가 듣고 싶었던 답을 해 주셨다. 안 된다는 건 스스로에게 댄 핑계가 아니냐고. 카오리 씨 같은 여자는 평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사람이니 꼭 잡으라고. 

  밖으로 나갈 때 마침내 서랍에 숨겨 뒀던 반지 상자를 챙겨 품에 넣었다. 오늘 그녀의 손에 이 반지를 끼울 수 있다면 좋겠다. 만약 그녀가 내 어깨에 앉지 않는다면, 이 반지는 끝내 주인 없는 반지가 되겠지.’


  ‘즐거운 시간은 보통 순식간에 지나가요. 어린아이들이랑 같이 있을 때 행복하고, 또 제 또래의 친구들과 같이 꽃구경을 하니 즐거웠어요. 물론 마음 한편엔 뭔가가 걸린 것 같았지만요. 오늘따라 프로듀서 씨에게 자꾸 시선이 갔어요. 그런데... 프로듀서 씨의 시선도 유난히 많이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이었을까요?’

  ‘그동안 한숨 돌릴 틈이 없다 보니 오늘 이렇게 벚나무 아래에서 노는 시간이 참 각별했다. 그러나 내 신경은 꽃놀이보다도 언제쯤 카오리 씨랑 단 둘이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쏠려 있었다. 인원이 하도 많기도 하고, 프로듀서로서 이들을 통솔해야 했기에 카오리 씨만을 신경쓸 수는 없었다. 그래도 카오리 씨가 오늘은 마음 놓고 놀기 위한 날인만큼, 카오리 씨가 더 많이 웃어주길 바랬다. 틈틈이 카오리 씨의 얼굴을 확인했다. 다행히 카오리 씨는 오늘은 웃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원에 있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고, 슬슬 자리를 뜰 시간이었어요. 이대로 해산해 버리면 타이밍을 놓치고 말겠죠?’

  “여러분들은 먼저 가셔도 돼요.”

  ‘자리에 있던 모두가 저를 주목했고, 몇몇은 제게 이유를 물었어요. 저는 뒷정리를 하고 가겠다고 적당히 이유를 붙여 대답했죠. 그런데, 프로듀서 씨도 저와 같은 이유를 대면서 남겠다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해산할 시간, 지금이 아니면 카오리 씨랑 단 둘이 있을 기회를 만들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뒷정리를 구실로 카오리 씨를 불러야겠다... 싶었는데, 카오리 씨가 먼저 내가 생각했던 이유를 대면서 남아 있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허둥지둥하면서 말을 덧붙이고 구실을 만들었다. 아아. 이제야 같이 있을 수 있게 되었어. 그래.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


  ‘모두가 먼저 자리를 뜨고, 검푸른 하늘이 깔린 저녁. 저와 프로듀서 씨는 같이 정리를 마치고 단 둘이 남았습니다. 짐을 정리하는 동안 제 손이 연거푸 프로듀서의 손과 겹쳤습니다. 프로듀서의 손을 만질 때마다 프로듀서의 손이 참 따스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손을 겹칠 수 있는 게 오늘뿐일까요? 이제는 말을 해야겠어요.’

  “저, 프로듀서 씨.”

  “저, 카오리 씨.”

  ‘아. 서로의 말이 손을 잡을 때처럼 겹쳤다. 카오리 씨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먼저 말씀하세요.”

  “아. 아뇨. 프로듀서 씨가 먼저 말씀하세요.”

  ‘서로의 시선이 마주친다. 서로 머뭇거리기만 할 뿐, 내가 선뜻 말을 꺼내기가 참 애매했다. 정적을 깬 건 카오리 씨였다. 카오리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벚나무를 등지고 서서 나를 불렀다.’

  “프로듀서 씨. 저... 프로듀서 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이젠 도망치지 않겠어요. 저는,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 저... 프로듀서 씨를..!”

  ‘카오리 씨가 저 말을 하자, 온 정신이 퍼뜩 들었다. 동시에 죄책감이 들었다. 아아. 카오리 씨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구나. 그런데도 알아주지 못했다니. 카오리 씨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입장에서 절로 마음이 아팠다.’


  “좋아해요. 정말 좋아해요. 프로듀서 씨가 정말 좋아서, 그런데 그동안 말하기가 겁나서, 또 실연당하는 건 아닐까. 무서웠어요. 너무 괴로웠어요..! 윽. 흐윽... 으...”


  ‘저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마음을 드러내는 게 굉장히 힘들고 괴로운 일일 줄이야. 눈물에 빛이 맺혀 모든 게 뿌옇게 보일 정도였어요.’

  ‘카오리 씨가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이야기할 때, 때마침 바람이 불어 벚꽃잎이 휘날렸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곧바로 달려 나가 카오리를 힘껏 안았다. 힘껏 안고서, 나도 나지막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사실.. 저도 카오리 씨를 좋아해요..! 그동안 저도 용기가 없었어요. 미안해요. 알아주지 못해서. 카오리 씨를 애타게 해서. 카오리 씨에게 선뜻 말하지 못해서...”


  ‘카오리 씨는 내 품에 안겨서 목을 놓아 울었다. 애처롭게 우는 카오리 씨를 보자 나도 한 방울 눈물이 흘렀다.’

  ‘저와 프로듀서 씨 둘 다,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고 말았어요. 그렇지만 이젠 괜찮아요. 후련해요. 프로듀서 씨가 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제 마음이 마침내 전해지고, 바람이 이루어졌으니까요.’

  

  “맞다. 이걸.”

  

  ‘따스한 포옹으로 인한 감상에 젖어 자칫 잊을 뻔했던 것을 꺼내 카오리 씨에게 건넸다.’

 

  “열어보실래요?”


  ‘프로듀서 씨가 건네준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벚꽃 장식의 반지가 들어 있었어요. 저는 크게 감동받아서, 손으로 입을 절로 가리게 되었어요.’


  “저. 정말로 기뻐요...!”


  ‘카오리 씨의 왼손을 살며시 잡은 뒤, 정성스레 반지를 끼웠다. 보드라운 손에 벚꽃 모양 장식의 반지가 무척 잘 어울렸다. 퉁퉁 부은 얼굴이지만, 카오리 씨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스러웠다.’

  ‘프로듀서 씨가 제게 해준 것처럼, 저도 프로듀서 씨의 손에 반지를 끼워드렸어요. 이 다음은 누가 먼저 할 것이 없었어요. 지그시 눈을 감고 프로듀서 씨와 입을 맞췄습니다.’

  ‘이제야, 호랑나비를 바라만 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호랑나비가 벚꽃을 향해 날개를 쉬어 가게 되었어요. 서로의 몸이 겹쳐있는 이곳에, 벚꽃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


  “이거, 한번 해 보고 싶었어요.”

  ‘이른 아침, 프로듀서랑 함께 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프로듀서와 잠자리를 함께 한 후, 프로듀서가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매려 할 때 제가 손수 프로듀서의 넥타이를 매 드렸습니다.’

  “아.. 고마워요. 카오리 씨.”

  ‘사랑받는다는 건 정말로 행복한 일이구나. 그동안 일만 하면서 이런 감정은 느끼지 못했었는데. 나를 챙겨주는 카오리 씨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하루를 함께 한 후 나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앞으로 카오리 씨를 톱 아이돌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 그리고 카오리 씨를 반드시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것.’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꿈이 이루어졌어요. 제 곁에 호랑나비가 살며시 내려앉은 지금 이 순간이 꿈은 아니겠죠? 프로듀서 씨에게 조금만 더 욕심을 내고 싶어요. 앞으로도 제 곁에서 호랑나비가 되어 머물러 주세요. 오직 당신을 향해 사시사철 피는 벚꽃이 되고 싶으니까요.’

=

네. 정말 오랜만에 정규 팬픽으로 돌아온 나그네시인입니다.

창작이야기판에 예고했던 대로 카오리 씨를 주인공으로 한 순애물을 쓰겠다고 했었는데, 한 차례 실연의 아픔을 겪었던 사람이 고백을 하기 위해 용기를 내는 과정을 그려냈습니다. 

스토리 라인을 이렇게 짠 이유는 하필 카오리 씨 동인 만화 중에 유난히 카오리 씨가 실연의 아픔을 겪는 만화가 일종의 밈이 되어버린 바람에, 그 내용의 안티테제를 노리고 쓴 것이었습니다.

물론 초고를 그대로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빠바박 작업하고 나니 중후반에 좀 힘이 딸린 느낌이 들 수도 있겠지만요. 새삼 팬픽에다가 막 정규 소설처럼 힘을 들여서 쓸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제목이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모티브는 포르노그라피티의 노래 호랑나비고. 사랑이 이루어지는 이야기에 걸맞게 내용을 맞춰 썼습니다. 

다음에 여유가 있으면 좀 더 내용을 다듬어보죠. 그럼, 달달하게 읽어주세요.

P.S. 암시가 있는 부분은.. 눈치가 빠르신 분들이라면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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