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유자에게

댓글: 2 / 조회: 935 / 추천: 2


관련링크


본문 - 12-02, 2019 11:47에 작성됨.

역마살이라는게 있다. '살'이라는 것은 떼어내고 싶어도 떼어지지 않는 것이라 지독한 것이라 여겨지지만, 때론 그 역마살이라는게 부럽기도 하다. 어디도 정착하지 못하는 방랑자를 뒤집어 생각한다면 어디든 속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사이타마현의 소도시의 작은 병원에서 태어나 근처의 대학을 나오고 직장까지 완전히 그 주변으로 뿌리내어버린 나 같은 사람과는 전혀 다른 팔자다. 태어난 곳에서 아직 살고 있다는게 낭만적인 것 같다고? 낭만이라고 한다면, 그야...

"슌야. 오늘은 타임세일 날이니까 오는 길에 몇개 부탁할게."

"문자로 보내줘."

"오빠~ 미코가 토끼인형 뺏어갔어~"

"아니야! 토끼인형 원래 미코꺼란 말이야!"

"얘들도 참, 조용히 하지 못하니? 오빠 출근해야하잖아. 너네도 장난감 얼른 정리하고 학교갈 준비 해!"

"그치만~. 이건 오빠가 미코한테 사준 인형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이건..."

어렸던 내가 저런 장난감 하나로 웃고 울고 했었던 자리를 이렇게 사랑스럽고도 귀찮은 여동생들이 차지하고 있을 때는, 새삼스럽게 감상에 젖곤 한다. 방금 마쳤던 식사 - 쪽파와 연두부가 들어간 된장국과 계란말이 또한 과거의 어느 날 내가 같은 자리에서 했었던 식사일테고, 찰기있는 흰 쌀밥은 젊으셨던 날의 아버지가 사용하던 밥그릇에 담겨 내 앞에 놓여있었지. 내가 쓰던, 로봇 장난감의 사진이 프린트되어있는 교정용 젓가락은 이제 여동생의 차지고, 아버지의 커다란 금속 수저가 이제는 나의 식사를 담당한다. 서서히 흘러가는 시간만큼의 변화가 이 곳에서는 유독 도드라진다. 한 편, 늘 보던 풍경과 같은 소리는 내가 이 도시에서 가장 평안함을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어느 날 이 장면이 한번에 뒤집혀버린다면 나는 견디지 못하고 그 날로 기차표를 끊어 사이타마의 우리 집에 돌아와버릴지도 모른다. 굳어져버린 지루함과 과거에 대한 낭만은 정말로 한 끗 차이구나.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는 현관 앞의 전신거울을 보면서, 옷매무새와 함께 일명 '나돌아다닐 팔자'에 대한 미련도 가다듬었다. 

"그럼 다녀올게."

그리고,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신발을 꺼내면서 신발장 위의 가족 사진에도 인사를 한다. 변하지 않은 의례다. 

그 뒤로도 내가 보는 시야는 어제와 한치의 다름이 없다. 문을 나서면 좁은 마당이 있고, 마당 옆쪽에는 차고와 자전거가, 다른 한쪽에는 우리 집과 거의 비슷하게 지어진 다른 집과 유자나무가 있다. 이 집과, 가족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것 같아서 보는것만으로도 기운이 난다. 게다가 열매가 열리기 시작하는 오월에는. 실제로는 다른 집의 전유품이지만 속으로는 이미 우리집 마당으로 도둑질한 채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친 지금까지 계속 봐왔던 유자나무니까 나와도 어느 정도까지는 정신적 소유권이 있는걸로 봐도 괜찮지 않을까. 매일 출근길에 인사하고, 또 퇴근길에 인사하니까 말이야. 잠기운이 남아있는 아침에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언젠가부터 유자나무가 고향의 오랜 친구같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정말로 고향을 떠나버린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친구. 그런 유자나무인만큼 오늘도 쌀쌀한 아침 바람을 받아 내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 또한 그 집의 마당에 누가 없는지 확인한 후 유자나무에 손을 흔들어주었다. 평범해서 평화로운 출근길을, 오늘도 걸어간다.

.....이 아이를 보기 전까지는 마음이 평화로웠다.

"으으..... 나빠, 나빠, 나빠...."

저렇게 저주 아닌 저주 섞인 말을 중얼거리며 담장 앞에 웅크려 앉아있는 아이를 보면, 누구라도 마음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저 아이는 내가 아는 아이였다. 알기만 하는 아이. 내가 대학생일 때부터 동네 꼬맹이들과 엄청 몰려다니기 시작했고, 장난이란 장난은 다 치고 다니는지 혼나거나 집 앞에 서 있는 모습도 꽤 봤다. 물론 그 정도라면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출근길마다 걸어가는 유자나무의 방향으로 있는 집에 '키타미'라는 문패를 수도없이 보았으니까. 그 집에서 그 아이가 나오는 것까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얼굴만은 확실히 알고, 아마 이 아이도 나를 알 거라고 생각한다.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니 그냥 넘어갈수 없었다. 

"저기.... 무슨 일 있어?"

"....참견하지 마세요."

아이는 칼같이 대답을 하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어, 지금 보니까 꽤 컸었구나. 교복을 입은걸 보면 중학생 정도 되려나. 그래서인지 헤어스타일도 바뀌었네. 헛웃음이 나왔다. 부끄럽기도 하고, 어느덧 훌쩍 커버린 나 자신이 슬프기도 했다. 여중생 일에 참견하는 아저씨라.. 진짜 최악이네. 나도 언젠가는 중학생이었는데.

"그래, 미안하다."

"아저씨."

"응?"

....아저씨라고 불리는게 부자연스럽지도 않구나.

"동정할거면 먹을걸로 주시던가."

요즘 애들은 거침 없다더니 이 아이도 참 당돌했다. 조금은 황당했지만 늘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미코를 위해 밀크 캬라멜을 들고 다녔기에 그게 생각이 났다. 매일 유자나무를 보게 해주는 대가로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괜찮다.

"자. 그런데 함부로 낯선 사람이 주는 걸 받으면.."

"아저씨는 낯선 사람이 아니잖아?"

"......."

"거의 매일 보는걸. 옆집이고. 나, 미코랑도 아는 사이고."

"....그랬구나."

전혀 몰랐다. 

"출근시간일텐데 신경쓰지 말고 얼른 가. 나는 괜찮으니까."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

"저기....!"

"응?"

"아니야... 안녕히 가세요."

".....아 그래."

캬라멜을 받았으니 감사인사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예상을 완벽히 빗나갔다. 그 대신 주섬주섬 뭔가를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니 가방을 매고 내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당연히 학교를 가야할 시간인데, 속상할 일이 생겨서 잠시 분을 삭이고 있었던 것 같다. 친구 문제? 가족 문제? 그거야말로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겠지.

***

"다녀왔습니다. 여기 장 본 거."

"아, 고마워! 냉장고에 좀 넣어줄래?"

"어, 저녁은?"

"오늘은 애들 데리고 나가서 먹고 왔지. 냉장고에 남은 거 있어. 아니면 시켜먹어도 되고."

"알았어.."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돌아오니, 엄마는 모처럼 동생들과 거실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바닥에 못 보던 저렴한 느낌의 장난감이 섞여 있는걸 보면 어린이 세트라도 시켜먹은 모양이다. 조금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남은 걸 데워먹는 수밖에. 냉장고를 열어 채소칸에 대충 모든 것을 집어넣고 있는데, 엄마가 좀처럼 사오지 않는 고급 베이커리의 케이크 상자가 있었다. 

"뭐야, 이 케이크는?"

"그거, 아까 옆집 애가 쪼르르 와서 주던데? 미코랑 아는 사이라면서."

그럼 설마....

"응, 유즈 언니가 줬어. 오빠랑 미코랑 나눠먹으래!"

"미코만? 나도 먹고 싶어!"

"유즈 언니는 미코랑만 친하단 말이야! 그러니까 미코랑 오빠랑만 먹을거야!"

"어차피 한조각밖에 안 되는데 싸우지 마. 그냥 삼등분해서 먹으면 되잖아? 아니면 나는 안 먹어도 되니까 반으로 나누던지."

"아니야, 오빠도 먹어도 돼! 허락해줄게. 오빠는 늘 회사에서 가축처럼 일하잖아."

인정해줘서 참 고맙다.

"그 대신 우리는 지금 먹고 싶은데... 오빠 것만 남겨두고 지금 잘라주면 안 돼?"

"응,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냉장고에서 반찬통과 케이크 상자를 꺼냈다. 먼저 반찬통에서부터 그릇으로 옮긴 다음 전자레인지에 1분을 맞춰둔다. 그리고 나서 상자를 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미 누군가가 열어둔 것처럼 이상한 형태로 닫혀 있었다. 이런 베이커리의 상자는 초보가 열면 다시 닫기가 어렵다. 이거 혹시, 미코나 미나 중 한 명이 이미 먹고서는 대충 닫아둔게 아닐까. 만약 그런게 맞으면 차라리 내 몫을 포기하고 남은걸 둘에게 나눠줘야겠다. 만약 '누가 먹었어'라고 말하면 둘은 또 싸울테고, 그러면 저녁 시간이 시끄러워질테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케이크는 멀쩡히 한조각이었다. 맨 위의 딸기도 무사했고 생크림도 건드린 흔적이 없다. 조금은 의아하게 케이크를 꺼내는데, 상자의 바닥에 메모지 하나가 있었다. 

"......하하."

'실례했습니다. 아까는 고마웠어요. 미코한테만 주지 말고 아저씨도 조금 먹어요!'

당돌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의 일로 이런 조각케이크를 사들고 처음 오는 집의 초인종을 누르다니 의외로 순수한 아이일지도 모른다.

어쩐지 그렇게 아끼는 동생의 몫을 자르는게 아깝게 느껴졌다. 


그 뒤의 출근길에 아이, 그러니까 유즈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유자나무라면 계속 보고 있었지만. 가는 방향도 전혀 다르고 출근 시간과 등교 시간 또한 미묘하게 다르니까 당연했다. 그런데 퇴근길에 여중생들이 모여 놀만한 장소는 조금 더 눈여겨봤는데도 없는건 약간 의외였다. 전에는 분명 여러번 본 것 같은데, 왜 의식하기 시작하니 사라져버린걸까. 그렇다고 케이크의 답례라고 어중간한 걸 들고 키타미 가의 앞으로 찾아갔다간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을게 분명하다. 내가 여중생의 부모인데 어느 남자 직장인이 집에 찾아와서 유즈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간식 같은 걸 건네준다면 분명 경계할 것이다. 그러니 우연히 패스트푸드점 같은 곳에서 마주쳐 콜라나 감자튀김이라도 하나 사줄만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번번히 퇴근길을 실패하기만 하다가 주말이 왔다. 

주말 아침이라고 햇살을 맞으며 거리에 나가 해야할거라고 하는게 고작 편의점에 가서 과자와 담배를 사는 것이었다. 그런 무방비한 상태에서 익숙한 여자아이를 보게될 줄이야.

"아저씨?"

유즈가 내게 말을 걸었다. 웃으니 초승달처럼 가늘어지는 눈초리에 긴장하고 말았다. 기껏 유즈가 말까지 걸어줬는데도 뭐라고 화답을 해야할지 머리 속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안녕, 아저씨~ 케이크 맛있었어?"

"어? 응. 안녕. 맛있었어. 고마워. 미코랑 미나도 좋아했고. 아, 미나는 미코의 언니야."

"응, 그것도 알아. 아저씨가 '슌야 오빠'지?"

"....맞아. 옆집에 살면서 나만 모르고 있었네."

미코와 유즈가 아는 사이라는 것도, 유즈의 이름이 유즈라는 것도 몰랐다. 선물을 사서 여중생네 집으로 가지 않아도 충분히 불쾌한 어른이다. 계속 유즈를 의식하고 보고 있었는데도 계속 모른체했다는게.

"그렇지만 항상 유자(柚子)를 보고 있었잖아. 옆집을 몰랐다는게 말이 돼?"

유즈()를 계속 알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나... 나는 정말 불쾌한 어른이었구나. 

"그건... 굳이 이름같은걸 물어보기는 좀 이상하잖아."

"매일 보는데 이름도 몰랐단 말이야? 유자(柚子)는 유자인걸."

역시 여중생이다. 늘 본다고 해서 이름을 아는건 이름표를 붙이고 다니는 중학생끼리나 아는건데,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조금이라도 신경을 쓴다면 알수야 있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기분 나쁘다. 멋대로 이름을 알아낸 것처럼 보이니까. 

"그런데 왜 항상 유자(柚子)를 보고 있었어?"

"어? 항상... 은 아닌데."

잠깐, 나 그렇게 스토커처럼 보였나? 최근에는 찾으려 하긴 했지만 그 전에는 그냥 보이니까 본 수준이었는데...

"아니, 그러니까... 그게 바로 옆집이니까 어쩔 수 없이 보이잖아? 나도 여동생이 있으니까 성장을 지켜보는 것 같기도 하고... 신경써서 보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보일 때는 봤지."

"으응, 그렇구나. 이해는 안 되지만... 아! 혹시 먹고 싶어서?"

"어?"

"원하면 가져다줄 수도 있지만 유월이 되야 청으로 만들기에 딱 좋아질걸? 유자(柚子)를 먹는데에도 시기가 있다고~"

"아, 아아.... 그렇겠네."

......유즈가 아니라 유자나무를 말한거였구나.

유즈는 다소 어색하게 대답하는 나를 보더니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혹시, 유즈도 보고 있었어?"

"......."

"흐흥~ 역시 그랬구나. 유즈만 아저씨를 본게 아니었네. 쌤쌤이였구나아~"

"옆집이니까 당연하잖아?"

"응,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자, 그럼 서로 보기만 하다가 정식으로 말을 튼 기념으로 악수하자! 나는 키타미 유즈! 14살!"

"...나는 이와쿠라 슌야. 26살이야."

"으엑, 나이 많아! 유즈네 선배들보다 나이 많아!"

"그야 중학생보단 나이 많겠지... 직장인인데."

"그래도."

유즈가 손을 내밀길래 나도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서로 맞지 않았다. 

...아, 습관적으로 오른손을 내밀어버렸구나. 유즈는 왼손잡이였나... 팔을 바꾸자.

"아니, 그럴 필요 없잖아?"

"......."

"자, 손 잡았고, 흔들흔들~ 이러면 악수지 뭐! 그렇지, 근데 아저씨는 여기 뭐 사러 온거야?"

"...그냥 과자. 너도 뭐 사줄게. 케이크 잘 먹었으니까."

"오~ 정말? 음음, 그럼 뭘 고를까아..."

유즈가 깍지를 꼈던 오른손이 허망하게 떨어졌다. 악수는 원래 오른손과 오른손, 아니면 왼손과 왼손이 해야 짝이 맞다. 그런데 꼭 오른손과 왼손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게 손 깍지다. 그러니 유즈의 말대로 '손 잡았고 흔들흔들'이 악수의 정의라면, 서로 오른손과 왼손을 낸 상태에서 손 깍지는 별게 아닌 거겠지.

"편의점 갔다가, 뭐할거야?"

"별로 할 일은 없는데. 주말이니까."

"그럼 유즈랑 놀자."

스스로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유즈는 차가운 녹차를 골랐다. 나는 그냥 과자만 하나 샀다. 유즈의 제안대로 하천으로 향하는 돌계단을 내려가는데, 쉴새없이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덕에 정적이 생기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 풀밭에 적당한 자리를 잡자마자 유즈가 말투를 바꿨다.

"나 말이야, 사람들이 자꾸만 떠나가는게 싫어. 이제 중학생이 되니까 입시를 위해서 사립중으로 옮기기도 하고, 어학 연수도 가고, 그런단 말이야. 나는 계속 이 도시에 살고 있는데... 입시도 중요하지만, 유즈랑 같이 보내는 학창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구!"

아마 '유즈랑 놀자'라는건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

".....혹시 그 날은, 친구가 전학가기라도 한거야?"

유즈가 말 없이 녹차캔을 벌컥벌컥 마셨다. 긴 한입이 끝나고 캬아, 하는 것까지, 왠지 맥주캔을 마시는 어른을 흉내내는 것 같아서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나만 가만히 있는 것 같을 때는, 조금 속상하지? 초조하기도 하고. 나도 태어났을 때부터 계속 여기에서 살았으니까.... 나 같은 사람은 정말 드물거든. 다들 대학은 여기저기로 떠나버리고, 직장 단계에서는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떠나는게 더 많지."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계속 여기서 살았구나..."

"그렇지. 유즈는 아직 여기가 안 질려?"

"응, 여기 살만한걸. 공기도 좋고, 우리 집도 좋고, 친구들도 좋단 말이야. 아저씨야말로 안 질려?"

"그 나름의 낭만이 있으니까, 가끔은 좀 그렇지만 여기가 좋아. 아침에 밥을 먹고, 마당으로 나오면서, 유자나무를 보면서.... 그러지 못할 때는 시간이 흘러가지 않을거라고 망상한적도 있는걸. 언제라도 집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있는건 좋잖아."

"아저씨는 우리 집의 유자를 정말 좋아하네."

"좋아하는 일과니까, 유자(柚子)를 보는건."

유즈가 웃는다. 좀 전에 녹차를 들이켰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유월에는 잘 익은 유자를 맛보게 해줄게. 그러니까 그 때까지도 유즈랑 사이 좋게 지내줘."

***

유월의 어느 저녁이었다. 누군가 오지 않을 것 같은 시간에 초인종이 울렸다.

"유즈!"

"아저씨 안녕. 이거 우리집 유자청이야. 내가 담아온건 저것밖에 없으니까 아껴먹어야 돼."

"정말로 가져와줬네."

"응, 다 되면 가져온다고 했잖아! 난 거짓말 같은거 안 해!"

"어머니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몰래 가져온거라 고맙다고 하면 안 되는데... 기회가 되면 전할게. 아, 그리고 아저씨. 이거. 나중에 열어봐."

유즈는 작은 종이봉투를 건넸다. 너무 가벼워서 뭐가 들어있을 것 같지도 않았는데, 펼쳐보니 종이 포장지에 싼 다른 무언가가 나왔다. 대체 뭐가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는데, 유즈는 학교 숙제를 해야한다며 바로 문을 닫고 집으로 가버렸다. 내가 엄마한테 유자청을 보여주자 엄마는 미코에게 '유즈 언니'의 칭찬을 하러 거실로 들어갔고. 나는 냉장고에 유자청을 넣어둔 후 내 방의 침대에 앉아 유즈의 선물을 열어보았다. 종이봉투 안에는 물기가 살짝 남은 지퍼백에 유자 씨앗 몇개, 그리고 케이크 때와 같은 메모지가 있었다. 

'아저씨, 유자를 좋아하지? 엄마가 유자청 만든거에서 버리려던 씨앗을 잘 씻어서 가져왔어. 이제 저 유자는 아저씨 거야. 이름도 지어서 잘 키워줘야해♪ 유즈'

"유자 씨앗을 심어서 유자나무를 키우라니....."

참 귀여운 발상이다, 라고만 생각했는데 검색을 해보니 실제로 유자 씨앗을 심어 나무를 키우는 사람도 있더랬다. 

그 다음 날, 나는 유자씨앗들을 얇은 거즈로 덮고 어두운 곳에 두었다. 싹눈이 나오자 하나는 화분에, 나머지는 마당의 화단에 각각 심어뒀다. 화분에 둔 유자의 이름은 꺼림칙하게도 유자(ゆず, 유즈)였다. 그해 여름 ゆず는 건강히 자랐고, 여름 날의 유즈는 계절이 바뀌어갈수록 15세로 성실히 나아가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유즈와 나누는 대화의 내용도 바뀌어간다. 그것은 내가 담장 너머로, 골목길에서 본 초등학생의 유즈와도 다른 속도의 성장이었다. 반면 나의 ゆず는 겨울이 올수록 좀처럼 자라지 못했다. 유즈는 ゆず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동질감을 느꼈는지, 그 안타까운 성장 속도에 분함을 숨기지 못했다. 늘 위로받던 유자나무의 자손이지만, ゆず가 잘 자라지 못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기에 그건 나에게 그리 슬픈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런 유즈를 보고 있자면 나도 아쉬운 표정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ゆず가 얼른 우리 집 나무처럼 자라야될텐데."

"뭐, 나는 너네 나무를 보면 되는걸."

"그치만...."

"항상 너네 집의 나무를 봤으니까, 앞으로도 그 정도면 돼."

".....아저씨는 ゆず를 좋아하기는 하는거야?"

"당연히 좋아하지, ゆず는."

"유즈를 좋아한다고...."

"응."

"유즈도 아저씨를 좋아해."

"ゆず가 과연 그럴까.. 내가 심긴 했지만."

유즈가 나를 보았다. 웃는데, 재밌어서 웃는게 아닌 것 같은 그런 미소였다. 

"나, 내일이면 15살인데~"

"그럼, 다시 나이차이가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가게 되네."

"그렇게 되나~?"

"그렇게 되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유즈랑 아저씨랑은 한결같이 사이 좋게 지냈네."

"응."

"전에, 출근할 때 보는 유자나무가 없으면 시간이 흘러가지 않을 것 같다고 했었잖아. 그럼 이제 말이야. 출근은 아니라도 아저씨의 일상에 내가 생겼잖아? 유즈가 없어도 아저씨의 시간은 무사히 흘러갈 거라 생각해?"

".....너 어디로 가?"

순식간에 마음에 불안이 싹텄다. 분명히 먼저 다른 곳에 가버린 친구를 원망하던 유즈니까, 무심코 어딘가로 가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었다. 유즈가 없는 내 하루 일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나는 항상 같은 집에서 같은 아침 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같은 일을 하다가, 퇴근을 하는 것이 다니까. 

하지만 유즈가 사라진 '나'라면 어떨까. 나에게는 엄마와 미코와 미나가 있다. 가끔 사이타마 현의 다른 도시에 사는 친구들이 내려오기도 하고, 내가 휴가를 내어 간단히 여행을 가면서 만나는 친구들도 있었다. 전에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의 인생에 유즈가 필요해졌다. 

"...정상적으로 흘러가진 않을거야."

"데헤헤, 그렇구나."

"데헤헤는 무슨. 비정상적으로 된다는데..."

"있지, 나 훌쩍 떠나게 될지도 몰라. 엄마가 고등학교는 좋은 학군으로 옮기고 싶어-라고, 그러셨거든."

좋은 학군이란 말은.... 유즈와 참 안 어울렸다.

"그렇지만 이거 하나는 약속할게."

"뭐?"

"내년 유월에도 아저씨한테 유자를 가져다 줄게! 그 때는 방학일테니까 아저씨랑 계속 놀아줄 수 있을거야~"

"........"

"그러니까 그 때까지도 유즈랑 사이 좋게 지내줘. 우리 집의 유자나무처럼, 변하지 않고."

꼭 그럴게, 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럼 내년 유월까지 유즈를 볼 수 없다는 것을 확인사살하는 것 같아서 그럴 수 없었다. 그 대신 나는 ゆず를 소중하게 잘 돌보아 주겠다는 말을 했다. 

"그럼 유즈도 소중하게 돌볼만한 걸 선물로 줄래? 아저씨를 못 만날동안 말이야."

"살아있는 거?"

"아니, 뭐든지 유즈에게 주고 싶은 거면 돼! 잘 볼테니까."

나는 그러겠다고 하고 그 날 유즈를 돌려보냈다. 내 방에서 유즈가 나가고 나서도 유즈는 미코와 잠깐동안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즈가 집에서 미코와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집이 밝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즈가 떠나는 것에 대해서도 상기하지 않을만큼 말이다. 유즈가 없어도 나는 미코와 미나와 엄마와 계속 살 것이다. 직장을 부득이하게 옮기게 되지 않는 이상 계속 이전과 같은 집에서 먹고 자고 살겠지. 여태까지의 삶을 보면, 내가 이 사이타마현의 소도시에서 뿌리를 뽑아 먼 곳으로 갈 일은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같은 자리에서 나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죽는 나무처럼, 내면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채 변화하는 내 몸과 변화하는 주변을 보면서 언제까지나.... 어느 날 유즈와 같은 바람이 찾아온다면 나뭇가지로 손을 흔들기도 하고, 또 가버린다면 다시 손을 흔들어 배웅하기도 하고. 흘러가는대로.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울적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일은 나와 유즈가 '만나게' 된 기쁜 날이다. 그 날이 없었으면 따뜻했었던 오월의 그 날도, 항상 지켜보기만 하던 유자나무에서의 유자ゆず가 찾아올 일도 없었을 거다. 모든것이 전부 유자나무에게서, 유즈에게서, 그 손을 거쳐 나에게로 온 거니까.

그러니 그 날을 맞이하는 기쁨을 소중히 하자.

나는, 거실의 따사로운 소란스러움을 만끽하며 편지지를 꺼내들었다.


유즈에게.

15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2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