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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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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26, 2019 20:33에 작성됨.

아키가 죽었다.
네가 죽었다.


사인은 프로덕션 내에 침입한 사생팬에게 습격당해 칼로 목이 베였고,
재빨리 119를 부르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사생팬은 도망갔고, 아직까지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잡힌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나는 프로덕션에 들어와서 나가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날카로운 눈초리 속에서 몸둘 바를 몰랐다.
심지어 개중에는 대놓고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키를 살려내라고.
어떻게 그렇게 죽일 수 있냐고.


네가 인간이냐고.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내가 아키를 죽인 범인이다.
아니, 아키를 죽인 범인이 되어버렸다.



나는 아키와 오랜 소꿉친구 관계다.
아키가 아이돌을 시작할 때부터 첫 번째 팬이었고, 그 이후로서도 꽤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관계는 오직 프로덕션 밖에서만 유지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프로덕션 안에서는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당연할 수밖에 없다. 난 일반인이니까.
아키는 아이돌이고, 난 일반적이고 흔한 팬1이니까.


그런 관계를 이해할 수 있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했다.
항상 아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데, 이대로라면 언젠가 난 아키의 기억에서 밀려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키가 오프일 때 만나서 대화를 나누던 중 그런 심정을 토로하게 됐다.
토로했다고는 해도 사실 그냥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하는, 일종의 고민 털어놓는 식의 말이었다. 아키도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런데 아키는 의외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나도 최근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 앞으로 더 바빠지면 내가 널 못 보는 게 아닌가 싶었지.


이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아키가 이런 일에 대해서 의외로 진지하게 생각하는구나.


아까도 얘기했지만, 난 아키가 이 일을 딱히 무겁지도 않게 넘길 거라고 생각했다.
나 또한 속내 털어놓고 마는 식으로 그냥저냥 넘어가게 될 거라고 생각했고.


그러나 생각보다 진지하게 이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다음 날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 들려왔다.
전화가 걸려왔는데, 아키의 프로듀서로부터 온 것이었다.


-여보세요?
-저는 야마토 양의 프로듀서입니다.


-프로듀서님이시라고요? 어쩐 일이십니까?
-미나미 씨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가요? 아키가 뭐라고 하던가요?
-야마토 양 당신과 미나미 씨의 관계를 죽 말씀하신 뒤, 미나미 씨를 야마토 양의 매니저로 삼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괜찮으시다면, 내일부터 와주십시오.


이 말은 생각지도 못한,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나는 하루아침에 매니저란 직업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 궁금한 점을 프로듀서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조금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네, 무엇이든지요.


-프로듀서와 매니저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일종의 저의 보조역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보조역이라, 프로듀서가 바쁘면 내가 권한대행을 하게 된다는 거군.
그리고 한 가지 더, 이건 중요한 문제다.


-저에게 매니저 역할을 맡기시는 게, 괜찮은 일일까요?
-그 말씀의 의미를 가르쳐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를 매니저로 채용하시는 것을, 허락한 분이 누구신가요?
-저입니다만, 제가 야마토 양의 의견을 수용해 미나미 씨를 매니저로 채용하고자 합니다.


-즉 그것은, 프로듀서님의 독단적인 채용인 건가요?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어떤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그러니까, 저는 형식적으로라도 하는 정식 입사절차조차 밟지 않고 들어가는 게 아닌가요?
즉 다시 말해, 낙하산 인사가 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음...사실은 저도 그 문제에 대해 고민을 했었습니다.
이 말이 나온 것은, 내 질문으로부터 10초 정도의 텀이 지나고 난 후였다.


-원하신다면 정식적인 입사 절차를 밟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감사드릴 것 같습니다.


아이돌 야마토 아키와 프로듀서의 추천이 있었던 이상, 사실은 그냥 들어가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형식적이나마 정식적인 절차를 밟으려고 했던 건, 낙하산 인사라는 말은 죽어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다음 날 바로 입사 오디션을 보았고, 결과는 다들 아는 대로 합격했다.
아키 쪽으로 배정되고 나서는 ‘아키랑 얼마나 오래 있을 수 있느냐’ 가 내게 가장 큰 중점이 되었다.


아키의 매니저 직을 수행하면서, 의외로 평범한 라이프가 계속되었다.
아키와 함께 있기 위해 시작한 매니저 직인데, 막상 같이 있으니까 딱히 좋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키가 싫다는 건 아니지만.


아키와 같이 있으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때는 프로덕션 안에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프로덕션 밖에서 만나니까 기분이 좋아지고 엔돌핀이 샘솟았다.



그로부터 두 달 정도가 체감조차 없을 만큼 휙 지나가 버렸다.
오랜만에 오프를 갖게 된 아키와 나는 예전처럼 둘이서 대화를 나누었다.


-아키.
-무슨 일이야?


-내가 네 매니저를 하면서 한 가지 느낀 게 있어.
-그래? 그게 뭔데?


-역시 난 그냥 팬으로 있는 게 더 좋은 것 같아.
-그렇게 있으면 날 못 만날지도 모른다고 하더니만 갑자기 왜?


-매니저 일을 하면서 너와 가까이 있으면 언제나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안 그렇더라. 여러 가지 일에 치여서 좋은 기분보다는 피곤함이 앞서더라고.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어. 나도 그렇거든.
여러 방송에 나가서 이 소리 저 소리 다 듣고 있으니, 저절로 기분이 썩는 것 같아.


-아키.
-응?


-너 지금 아이돌이지?
-당연한 걸 물어?


-어때? 기분이. 아이돌이 된 것에 후회는 없어?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아. 힘든 일들이 있지만, 그래도 웃을 수 있으니까.


내가 두 달간 매니저를 하면서 본 연예계는 방송 조작, 베개 영업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사람 있을 곳이 아니었다.
어른들의 더러운 사정이 끼치는 영향을,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속에서도 뼈가 시리도록 알 수 있었다.


하물며 나보다도 연예계 경력이 긴 아키로서는 그 현시창스러움을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런 진흙탕, 쓰레기장, 시궁창 속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아키가, 나는 신기하면서도 씁쓸했다.



매니저에 취직한지 D+78일, 즉 3달 하고도 18일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조금 일찍 사무소에 와서 프로듀서의 보조업무 중 하나인 스케줄 조정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 분위기가 흉흉하다.
다들 뭔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듯했다.


-무슨 일인가요? 무슨 큰 일이 난 건가요?
유령이라도 나타난 겁니까?


마찬가지로 안색이 좋지 않은 치히로 씨에게 물었다.
치히로 씨라면 알고 있는 게 있겠지.


치히로 씨가 대답했다.
-이 회사에 신원불명의 괴한이 나타났다고 해요. 아마도 사생팬인 것 같네요. 정신이상자라는 얘기가 있으니 미나미 씨도 조심하세요.


사생팬, 그것도 정신이상자.
누구를 좋아하는 건지는 몰라도 그 아이돌은 지금 많이 두려워하고 있겠네...


-그 사람이 찾는 아이돌은 누구인가요?
-미나미 씨의 담당이신 야마토 양이에요.


뭐라고? 아키? 아키를? 아키를?
내 소중한 친구 아키가, 그런 대가리병신 사생팬한테 노려지고 있다고?


꽝,
화가 나서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경찰은 부르셨어요?
-안 그래도 경찰을 일단 부르긴 했는데, 빨리 와주셨으면...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X발, 아키가 위험에 처했는데 난 대체 뭐하는 거야.


내 친구가 위험한데,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난 도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도저히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고,
결국 책상을 다시 한 번 꽝 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미나미 씨 어디 가세요?
-조심하셔야 해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사생팬이 마지막으로 나타났다는 장소는 4층 기숙사.
아키의 기숙사에 쳐들어가려는 용도인 거겠지. 그럼 4~6층을 전전하고 있을 거야.


어림도 없어. 절대 아키에게 손끝 하나 못 대게 할 거야.
닿았다가는 손모가지부터 날아갈 테니까 각오하라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기숙사층에 올라갔다.
일단 4층부터 둘러보았을 때, 4층에는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딱히 숨을 만한 곳도 없고.


5층에서도 녀석이 있지 않았다.
여기에도 딱히 숨을 만한 공간은 없으니 남은 건 6층이겠군.


-아키, 무서워하고 있어?
속으로 생각했다.


-아키, 혹시 벌써 희생된 건 아니지?
괜한 걱정이 앞섰다.


생각하며 6층에 올라왔다.
여기에도 없으면 꽤나 의외라고 생각이 들 것 같다.


6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양 옆으로 기숙사의 넓은 통로가 보였다.
그리고 녀석은, 어느 문 앞에서 하악거리고 있었다.


찾았다.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한 몇 걸음 다가가자, 녀석도 나를 발견했다.
그 놈 참 생긴 것에서부터 정말 제정신이 아니게 생겼구만.


-넌 머야?
-내가 할 말이다. 넌 뭐야.


녀석이 코트 안쪽을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꺼냈다.
흉기, 단검, 맥가이버칼.


저 새끼, 아키를 해치려고 한 건가?
한 순간 이성의 끈이 끊기고 머리가 돌아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녀석은 매우 피떡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이성을 잃어서 원X스의 가프마냥 주먹질을 한 것 같다.


동시에, 내 팔에도 상처가 나 있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는지, 별로 아프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 경찰이 6층으로 올라왔고,
피떡이 된 녀석을 연행해 끌고 갔다.


-참으로 빨리도 오시는군.
속으로 비웃듯이 생각했다.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사람들의 두려움이 반절이었을 텐데.
속으로 아쉽다는 듯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그제야 정신이 차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경찰이 녀석을 체포한 지 오래지만, 완전히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약 1시간 후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너무 과잉대응을 한 것 같네.
폭행죄로 나도 잡혀가지 않으려나.


녀석을 피떡으로 만든 게 생각나자 괜히 불안해졌다.
아하하, 아하하하, 아키, 내가 사생팬 한 명을 너무 때렸나봐. 널 괴롭게 한 사생팬이니 상관없지?


잘했다고 포상휴가라도 받을 줄 알았지만, 휴가 대신 회사 차원에서 얼마의 사례금을 받게 됐다.
딱히 불만은 없다. 아이돌의 매니저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오히려 이번 일을 통해 쉬고 싶은 마음이 다 사라졌다.



날이 또 지나고, 매니저 취직한 지 100일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업무를 처리하다가, 내 눈을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보게 되었다.


[인기 아이돌 야마토 아키 열애]


마침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덕분에 다 뿜었다.
아키가 날 이렇게까지 놀라게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동시에, 속에서 열불이 활활 타올랐다.
열애설이라니, 정말 나한테 빅엿을 먹이네.


리아무가 염상지르는 걸 보는 프로듀서의 심정이 이런 거겠지.
아주 그냥 장작을 스스로 발밑에 쌓아놓았잖아.


어쨌거나, 아키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
친구가 망테크를 타는 건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다.


여보세요, 기자부인가요? 네, 네, 기사 좀 묻어주세요. 네, 부탁드릴게요.
여보세요? 잡지부죠? 네, 네, 이 기사 좀 묻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할 수 있는 백방으로 연락해서, 아키의 열애설 기사를 최대한 묻어버렸다.
이 일에 대해 나중에 아키에게 한 소리 좀 할 예정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아키가 사랑한다는 건,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그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예상치 못하게 일어났다.


아키, 날 배신한 거야?
나를 사랑한다더니, 가장 사랑하는 친구라더니, 너무해, 정말.


누군가가 보면 괜히 실없는 거 가지고 슬퍼한다고 뭐라 할 법도 하지만,
그 괜한 실없는 슬픔에, 한동안은 빠져 살았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흘러간다. 흐르고 보니 한주 반 정도가 지나있었다.
그때 난 실없는 슬픔 속에서 막 헤어나오고 있을 참이었다.


아침 8시 40분, 마침 오전 스케줄이 있어서 아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오늘은 왠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키가 전화를 안 받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아직 자고 있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 시간은 아침 10:00, 아키는 늦잠자는 애가 절대 아니다.


사무소에 도착하도록 몇 번을 다시 걸어도 아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상하네...이런 애가 아닌데...


아키에게 문자를 보내두었다.
아키, 아직 자? 오늘 스케줄 있어. 이 문자 보면 답장 줘.


꺄아아아아아아아악!!!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달려오는 사람은 마에카와 미쿠.
무슨 일이야, 마에카와?


미쿠는 공포에 질린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키가...아키가 죽었다냐.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아키가 죽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와서 보라냐. 아키가 살해당했다냐.
하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머릿속이 진동했다.
살해당했다니, 누구에게? 뭘로? 어떻게?


머릿속의 진동은, 아키의 사체를 보자 더욱 강해졌다.
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웅!!!


죽었다. 아키가, 정말로 죽었다.
어떻게 된 거야...아키...?


아키의 상태는 처참했다.
시력 나쁜 사람이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목의 상흔.


뭐야...죽었잖아...어째서인 거야...
누가 널 이렇게 만든 거야...?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큰 절망 때문에 눈물도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아키...아키...아키...
어째서인거야...누가 널...아키...


그렇게 울지도 못해 탄식했다.
나오지도 못하는 눈물에 내 눈 앞이 가려졌다.


그렇게 울고 난 후,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고,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겨우겨우 짜내 말하였다.


-CCTV를 돌려봐요.
아키를 이렇게 만든 호로자식을 잡아냅시다.



경비실의 CCTV는 아주 정확한 밀도를 자랑한다.
경비원 아저씨가 그렇게 말씀하셨다.


CCTV가 찍은, 그 참변이 일어난 시간은 7:30분.
그때로 시간을 돌려보았다.


시간이 돌아가는 동안 치히로 씨가 말했다.
이것은 아마도, 사생팬의 만행일 거라고.


그리고 무언가를 내밀었다.
-편지 같은데, 이게 뭔가요?


치히로 씨가 대답했다.
-범인이 아키의 옆에 두고 간 거예요.


열어보니, 그 안에는 온통 사랑고백 멘트로 가득 차 있었다.
제정신으로 쓴 건 아닌지 필체가 꽤나 정신사납네.


읽어보려는데, 마침 CCTV의 시간대가 7:30분으로 맞춰졌다.
모두가 CCTV 화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윽고 범인이, 아키의 방문을 따는 장면이 포착되었고,
그 소리에 문을 열고 나온 아키에게 칼을 휘두르는 범인의 만행도 포착되었다.


그 장면이 잔인했는지 고개를 돌린 아이돌들도 있었는데,
거기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고개를 돌린 아이돌들은, 뭔가를 보았는지 다시 화면을 쳐다보았고, 그리고 나를 보았다.
다른 아이돌들 역시, 화면을 보고, 나를 보았다.


처음엔, 왜 나를 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묻었나? 왜 나를 보는 거지?


그러다가, 나조차, 화면을 보고, 또 아래를 쳐다보았다.
알았던 것이다. 왜 다들 나를 쳐다보는지.


범인이 입은 옷은 검은 후드에 진청바지.
내가 입은 옷도 그와 같았다.


범인과 나의 인상착의가 소름돋도록 일치하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도 똑같았다.


에이 설마, 인상착의가 좀 똑같은 것 가지고.
입구 CCTV를 확인해보면 좀 다르겠지.


입구 쪽 CCTV를 돌려보았다.
미시로 프로덕션에서 나가는 길은 총 세 갈래인데, 그 중 왼쪽이 우리 집으로 가는 길목이다.


그런데, 그 범인은 소름돋게 왼쪽으로 갔다.
그리고 가면서 손을 만지더니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장갑을 벗는 것이었다.
살인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그런 거겠지.


사건 장소에 칼이 있긴 했었다. 지문 안 남기려고 장갑 끼고 휘둘렀을 것이다.



어쨌거나 문제는, 지금 내가 범인으로 몰렸다는 것이다.
진범의 얼굴도 모르는데, 내가 범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야 이 살인자 새끼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키 열애설 나서 절망할 때 알아봤어!
-정말 최악이다 최악이야!


퍽,
퍽쿵,


왜 내가 범인이 되는 거야?
게다가 치히로 씨가 편지를 다시 펴보더니 말했다.


-게다가 이 필체, 미나미 당신이 사인할 때랑 너무 똑같아요.
일부러 흘려 쓴 거죠? 의심을 피하려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더한 야유와 욕지거리가 쏟아졌다.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대답해봤자 아무도 믿지 않는다.
대답해봤자 변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정작 내가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정말로 나는 범인이 아닌데, 그걸 믿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 후로, 나는 잘리지도 못하고 회사에 강제 잔류해 계속 모욕을 당했다.
대체 왜, 나 같은 ‘살인범’을 그냥 놔두는 거야. 어서 해고해 줘.


그동안 진범이 잡혔는지 어쩐지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잡혔어도 잡힌 게 아닐 거다.


왜냐하면, 저들의 믿음엔 답이 있으니까.
저들의 믿음엔, 내가 진범이니까.


사실관계가 어떻든지, 저들에겐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범인이라는 거다.


진범은 2번의 살인을 저질렀다.
아키의 육체를 죽이고, 나의 영혼을 죽였다.


아키, 너에게 묻고 싶어.
너를 죽인 사람이, 정말 나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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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에 써봤어요. 시간은 좀 많이 걸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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