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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 성[1:하야미 카나데-고독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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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14, 2019 05:22에 작성됨.

(이전화:https://www.idolmaster.co.kr/bbs/board.php?bo_table=create&wr_id=130691&page=3)


<2015년 9월 7일 월요일 오후 3시 32분. 346 프로덕션 신관 3번 댄스 레슨실>


"프로듀서! 샤워하고 옷도 다 갈아입었어."


나와 나오는 온종일 계속된 레슨으로 더럽혀진 몸을 씻어내고 다시 레슨실로 돌아왔다. 루키 트레이너 씨와 그녀의 짐이 사라지고, 레슨용 매트리스가 가지런히 접혀 쌓여있는 것만 빼면 우리가 자리를 비우기 직전과 다를 게 없다.


"네."


영혼 없이 짤막하게 대답하는 것은 수납장 겸 의자에 앉아서 뚫어져라, 태블릿 PC의 화면을 쳐다보고 있는 웬디. 우리의 프로듀서다. 얼굴은 제대로 안 보이지만 이상하게 넓은 검은색 챙 모자만으로 충분히 그녀를 알아볼 수 있다.

나오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아직도 이러고 있네. 프로듀서! 일을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그렇게 있다간 눈 나빠져. 우리가 레슨 시작했을 때부터 이러고 있었잖아."

"네."


나오의 말에도 자동 응답인 건 여전하다.


"카렌?"

"있어 봐. 내가 한번 해볼게."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그녀의 옆으로 조심스레 다가간다.

허리를 숙여 모자 밑의 얼굴을 보니 한쪽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이 꽂혀있다. 그녀가 은색 타원형 안경 너머로 보고 있는 것은 어느 백화점에 광장에서 찍은 듯한 라이브 영상. 무대에는 길고 윤기 있는 남색 머리칼의 여자가 노래하며 춤추는 모습이 보인다.


"철 지나서 라이센스 값도 싼 커버 곡에 의상은 다른 데서 입던 거, 무대도 타케우치 선배가 두 유닛 데뷔 때 써먹은 걸 재활용하고. Nicely done, you fucking idiot(참 잘했다, 이 염병할 멍청아)……."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마르지도 않은 입술을 핥는다. 제법 가까이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그래도 이쪽을 눈치채지 못한다.


"프로듀서?"

"네."

"그웬돌린 팬케이크 윌리엄스 씨?"

"네."

"제 이름은 카미야 나오라고 해요."

"네."

"오늘 아침에 저한테 식습관을 조절하라고 하셨는데, 오늘 저녁은 감자튀김을 먹어도 될까요? 위에 치즈도 뿌리고 싶네요."

"네."

"...."


서로의 이름도 제대로 안 듣고, 트레이너 씨와 함께 내게 했던 권고까지 번복하니, 이쯤 되면 중증이다.

나는 큰 망설임 없이 프로듀서의 모자 양 끝을 쥐고 그대로 벗겨버린다.

모자 아래에 눌려있던 검은색 단발이 드러난다.


"Hey, H, HEY!"


바로 효과가 나타난다. 태블릿 PC마저 떨어트리는 격한 반응을 보이며 양손으로 내가 빼앗아 간 모자를 낚아채 다시 머리에 푹 눌러쓴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실내고, 단순히 모자를 벗길 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다. 언젠가 나오가 했던 말마따나, 만화 주인공이 쓰고 다니는 상징적인 밀짚모자 같은 거라도 되는 걸까.


"어……."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한 모습. 프로듀서는 맨 처음에 내 얼굴, 다음에는 나오의 얼굴, 마지막으로 레슨실에 걸린 LED 시계 쪽으로 차례차례 시선을 돌린다.


"아우……."


그리고는 눈을 찔끔 감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면목없습니다. 루키 트레이너 양이 레슨을 녹화해 뒀으니까 오늘 밤에 기숙사에서 확인할게요."

"뭔가 심각해 보였는데. 괜찮아?"


그녀의 왼쪽에 앉아 어깨에 손을 올린다.

나오는 바닥에 떨어진 태블릿 PC를 주워 화면 안의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2015년 6월, 아이돌 -블루- 라이브 데뷔 기록`?"


고개를 끄덕이며 프로듀서는 나오로부터 태블릿 PC를 건네받아 손으로 화면을 쓱쓱 넘긴다.

증명사진과 표가 띄워져 있는 화면을 띄우고는 나오에게 옆에 앉으라는 듯 자신의 오른쪽 자리를 툭툭 두드린다.

나오와 나는 프로듀서의 옆에 기대어 앉아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화면을 응시한다.


"예명 `블루`, 본명은 하야미 카나데."

"나이 17세? 대학생쯤 될 줄 알았는데 나오랑 별 차이가 없네. 나오, 곧 있으면 생일이잖아.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예를 들면,"

"잘하면 이분이 저희 동료가 될 수도 있어요. 관리는 미시로 상무님이 아니라 제가 하는 쪽으로요."

""에?!""


나오와 내가 동시에 소리친다.


아직 이름과 구체적인 내용을 듣지는 못했지만, 미시로 상무님, 그리고 우리 프로듀서가 담당하는 아이돌들은 어떤 프로젝트에 같이 묶여있다.

현재까지 인원은 6명.

특정 책임자가 없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미시로 상무님이 담당하시는 아이돌 3명. 우리 프로듀서, 웬디 파블로프나가 관리하는 아이돌은 나-호죠 카렌-, 카미야 나오, 그리고 아직 얼굴도 못 본 `그 아이`까지 3명이다.


"그러면 우리한테 데뷔를 먼저 한 선배가 생기는 거잖아! 잘됐네, 카렌!"

"그래. 어쩌면 나오의 귀여움을 공유할 수 있는 동지가 늘어날 수도 있겠어."

"그게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프로듀서랑 같이하려고 해도 프로듀서는 호응은커녕 장난도 함부로 너한테 어떻게 못하는 게 눈에 보인다고. 프로듀서. 혹시 나오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카미야 양의 알바 첫날에는 본의 아니게 그녀를 놀래게 해버렸고, 오늘은 카나데 양을 섭외하는 게 실패했지요.”


대답이 어딘가 힘없는 목소리를 타고 나온다.


"제가 아무리 카나데 양을 데리고 오고 싶어도, 본인이 싫다고 하는데 억지로 할 수는 없으니까요."


화가 나는 걸까, 아니면 답답한 걸까. 만사태평하게 웃거나 평온하게 지내던 평소와는 달리 지금의 모습에는 여유가 없어 보인다.

하야미 카나데라는 사람은 그 이름부터 오늘 처음 듣는다. 그녀가 어떠한 사람인지, 어째서 프로듀서의 제안을 거절했는지 궁금했지만, 섣불리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없으니까요오오...."


한숨 섞인 한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고, 단순히 내 주관적인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어딘가 절박해 보이는 모습에, 이 이상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동료가 될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아직 가능성은 있는 거겠지?"


그래서 중간을 끊고 바로 핵심 질문을 던진다.

그래야죠. 프로듀서는 화면을 바라보는 채로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내일 다시 카나데 양에게 가볼 겁니다. 나름 설득할만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요. 마침 오늘 저녁은 상무님이랑 먹으니까, 그분하고도 상의해봐야죠."

"헤. 그 미시로 상무하고 저녁이라."


촛불이 올려진 식탁에서 스테이크 칼질을 하는 상무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맞은편 자리에서 처량하게 수프만 홀짝이는 프로듀서의 모습도.


`건강상의 문제`라곤 하지만, 남들이 여러 가지 메뉴를 먹으며 떠들고 있을 때, 혼자 수프나 죽만 먹고 있는 모습은 언제나 애처로워 보였다.


"뭐, 상무님하고 같이 먹는다고 해봤자 제가 그분 집까지 찾아가서 직접 요리하는 거지만요. 마침 오늘은 피시 앤 칩스를 만들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아, 아니. 마음만 받을게."


마음이 통했던 걸까, 내 목 끝까지 올라왔던 말을 나오가 대신 말해주었다.


삼시 세끼 죽과 수프만 먹는 사람이 만드는 피시 앤 칩스가 꽤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그러자고 미시로 상무님, 346 프로덕션의 하늘 같은 사람과의 불편한 자리를 버틸 자신이 없다.


"아쉽네요. 두 분한테도 대접하고 싶었는데. 실은 상무님이 요리를 제대로 못 해서, 그분의 저녁 식사는 제가 자주 도와드리거든요."


의외죠? 그렇게 말하면서 재밌는 듯 슬며시 웃어 보이는 프로듀서. 이건 이거대로 함부로 들어선 안 될 이야기 같지만 기분이 좀 풀린 것 같아 보이니 플러스라면 플러스일까.

여전히 눈을 화면 쪽으로 향하는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져 간다.


"올해 27살에다가 혼자 살기까지 하는데, 제가 없는 날이거나 제가 만들어뒀던 게 떨어지면 언제나 가공식품으로 해결한다니까요. 크라제버거의 햄버그스테이크라던가, 좀 비싼 브랜드 위주로 먹긴 하지만 그래도 가공식품인 건 변함없잖아요!"


그래도 이 주제의 이야기는 적당히 멈춰야 하지 않을까. 나중에 큰일이 날 것 같은 느낌인데. 나오는 눈을 반짝이면서 말릴 생각도 없어 보이고. 


철컹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린다. 프로듀서의 위험한 이야기를 듣다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올리는 나오. 헉, 숨을 크게 삼킨다. 그 두꺼운 초승달 모양의 눈썹이 이마 위로 솟구친다.

뭘 본 건가 싶어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

이거 큰일 났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제가 선물로 요리책을 선물로 줬었어요. "하도 어이가 없었던 일이라서 책 제목하고 페이지 수까지 기억해요. `Gordon Ramsay Makes It Easy`! 256페이지짜리! 

"저기, 프로듀서?"

"그해에 나왔던 따끈따끈한 책이었고 유명 셰프가 홈쿠킹을 위해 쓴 책이니까 도움이 되겠다 싶었죠. 오래 써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돈을 좀 더 써서 하드커버본을 줬다니까요!"


들떠있던 프로듀서의 목소리가 점점 울음 섞인 무언가로 바뀐다.


"웬디 씨…!"

"그런데 하루는 무대 만든 걸 보여주러 찾아갔더니, 책이 말라붙은 즉석 맥앤치즈 냄비 밑에 깔려서 표지가 누렇게 그을리고!"


"파블로프나."


"기겁해서 책을 펴보니까 안에는 막, 어?"


한순간에 레슨실의 공기가 얼어붙는다. 온몸을 얼어붙게 하는 성숙한 여성의 목소리.


...

...

...


시간마저 느려진 듯한 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다.


"...설마 지금 제 앞에?"


태블릿이 들려있는 손을 벌벌 떨면서, 프로듀서는 화면으로부터 삐걱거리는 기계처럼 천천히 고개를 든다.


이목구비를 강조하는 짙은 화장의 얼굴과 눈이 마주친다.


"츠허캬힉?!"


다시 태블릿을 떨어트리고, 겁먹은 소녀가 자기 곰인형에게 하듯 옆의 나오를 부둥켜안는다.

나오는 뜻밖에 얌전하다. 아니, 이미 품에서 떨어져 나올 이성마저 날아가 버린 모양이다.


프로듀서가 얘기하던 그 미시로 상무가, 우리 세 사람 앞에 서 있다. 언제나처럼 화려한 액세서리와 풍성한 머리칼을 자랑한다.

프로듀서를 노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목의 명찰, `미시로 하루에`라는 이름 바로 위에 인쇄된 얼굴마저 무서워 보일 지경이다.


"파블로프나. 이게 무슨 짓이지?"

"죄송합니다! 갑자기 상무님 관련해서 옛 서러운 기억이 떠올라서요!"


말투는 살려달라고 비는 것 같지만 정작 그 내용에 가시가 달려있잖아.

그러나 상무님은 고개를 젓는다.


"그걸 탓하는 게 아니야. 실제로 내 요리실력은 자네가 말한 대로다. 스스로도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으니 그렇게 불평하는 것도 이해는 가. 밥을 해주러 오는 것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책도 자네가 구해준 거니까 나름대로 참고하면서 노력하는 중이다."

"그럼 여자 기숙사 열쇠를 잃어버려서 예비 열쇠를 받은 거요?"

"뭐?"


상무님의 입가가 움찔하고 떨린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오를 더 강하게 부둥켜안는 프로듀서. 울음 섞인 나오의 쇳소리가 그녀의 품에서 새어 나온다.


"어제 기숙사 관리인이 노발대발하긴 했지만, 기숙사 안에서 잃어버렸고 어차피 가을쯤에 디지털 도어락으로 싹 다 바꾼다면서요!?"

"그 건에 대해선 저녁때 얘기하도록 하지.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어찌 이리 누추한 곳에 행차하셨나이까……?!"

"미야모토 프레데리카가 자네에게 갔다가 내게 돌아오지 않았어. 분명 미야모토가 자네에게 3시 전까지는 돌아가야 한다고 말 했을 텐데?"

"...예?"


프로듀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뜬다. 나오를 붙들고 있었던 팔이 풀어져 아래로 축 늘어진다.


"미야모토 양은 저한테 오긴커녕 오늘 아침 기숙사에서도 못 봤는데요?"


빈틈과 함께 상무님의 얼굴이 살짝 구겨진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이해가 안 된다는 느낌이다.


아마 미야모토 프레데리카 씨의 얘기일 것이다.

이름 없는 우리 프로젝트의 아이돌 중, 미시로 상무가 관리하는 아이돌 중 한 명. 우리 프로듀서와 마찬가지로 346 프로덕션 여자 기숙사에 살고 있어서, 심부름이나 출근 직전의 합류, 단순히 주말에 프로듀서의 얼굴을 보러 찾아올 때 종종 마주치곤 했다.

프랑스인인 어머니로 물려받았다는 비대칭의 금발과 똘망똘망한 에메랄드빛 눈. 그리고 무엇보다도 엉뚱하고 사차원인 성격이 인상 깊었지.

우리 프로듀서가 그녀를 직접 담당했다면 프로덕션이, 일차적으로 기숙사가 어떻게 돌아갔을지 감도 안 잡힌다.


"앞으로의 무대 설계의 방향성에 대해서 자네가 상담을 하고 싶어한다고, 그래서 오늘 비쥬얼 레슨은 좀 미뤄야 될 것 같다고 그녀가 내게 말했었어. 떠났을 때가 1시쯤이었지."

"죄송합니다만 전 그때 회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설득은 망했습니다만, 하야미 카나데 양에게 가 있었어요. 원래 저녁때 보고드리고 다음 날에 찾아갈 때 쓸만한 조언이라도 얻어볼까 했죠. 죄송해요."

"그럼 오늘은 미야모토를 못 본 거군."

"네. 마지막으로 본 게 어젯밤이었어요. 한참 제 방에서 카나데 양 관련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제 방으로 찾아오더군요. 그냥 구경하러 왔다길래 대충 그냥 냅뒀는데에에...?!"


Oooooh, Christ. 뭔가 정말로 골치 아픈 것을 떠올린 것 같은 정색. 안색도 조금 창백하진 것 같다.


"유독 미야모토 양이 카나데 양의 프로필 종이를 유심히 봤거든요…?"


침을 꿀꺽 삼키는 프로듀서.


"카나데 양의 주소가 이게 맞느냐고, 미야모토 양이 다른 걸 다 제쳐놓고 그걸 유독 여러 번 제게 물어왔었네...요?"


>>>>>>


[프로듀서 씨]


...부디 그 사람의 앞날이 한없이 어둡기를 빈다.


[연락처 삭제.]


다음.


[보육원]


그 작자의 손에 이끌려 보육원을 나올 때, 나를 배웅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동자의 이름은 대충 감이 오지만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나마 나를 위해 응원해 주었던 어린아이들의 얼굴과 이름마저 지금 와서는 흐릿하다. 무엇보다 지금 이런 상태에서 그 아이들 앞에 설 자신이 없고, 나를 그대로 잊어버리는 것이 그들을 위해서 더 좋을 것이다.


[연락처 삭제]


다음.


[사무소]


처음에는 사무소에서 연락이 오는 일이 잦았다. 그 작자 말고도 다른 프로듀서나 사무원이, 어떨 때는 비슷한 나이의 동료들이 내게 전화를 걸어 깜짝 놀라게 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빈도가 점점 줄어들고, 결국엔 모든 전달이 그 작자와의 연락만으로 이루어졌다.

앞으로 여기가 어떻게 되든, 내가 다시 이곳에 전화를 걸 일은 없겠지.


[연락처 삭제]


다음.


[웬디 파블로프나]


...이 사람과는 오늘 처음 만났고, 분명 전화기는 두고 나갔었다. 아까 집 앞에서 담배를 피울 때 멋대로 연락처를 쏘아 올린 걸까.


[주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지독하다.


[연락처 삭제]


다음.


[■■■■]

[■■■]

[■■■■■]

[■■■■]

[■]


그저 앞날을 꿈꾸던 그 모습만으로도 이미 빛나고 있던 아이들. 한 어른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모두 더럽혀진 친구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들은 분명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겠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하지 않은 걸까?


[연락처 삭제]

[USIM 내 연락처 1개, 기기 내 연락처 0개]


화면을 끄고 어차피 오늘 쓸 일도 없을 휴대전화를 매트리스 위에 던진다.

지갑과 메모용 수첩밖에 안 들어있는 핸드백을 챙기고 현관 앞의 거울에 서서 눈앞에 서 있는 자신을 마주 본다.


"...머리에 빵가루가 묻어있네."


가볍게 털어내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머리를 만지작거린다.

최근에 와서는 머리 모양을 내는 것마저 지겨워진다. 하지만 오늘같이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 머리를 풀고 다니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좀 전의 코호쿠 다리에서도 그랬고.


"후…."


머리의 중간과 끝 부분을 묶고 왼쪽 어깨에 걸치기로 한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져있는 샌들을 신고 현관을 나선다.

열쇠는 따로 챙겨나오니 않았기에 문은 잠금이 풀린 상태로 둔다. 어차피 일부를 제외하면, 오늘 아침을 기점으로 집에 남은 귀중품은 휴대전화와 낡은 영화감상용 기기들뿐이다.

현재 내 가방 안에 든 것은 정확히 5만엔. 어제 계좌에 넣었던 돈까지 포함하면 250만엔 정도일까.


"어떻게 처리할지는 천천히 생각해도 되겠지."


우선은 걷기로 하자. 

가깝게는 집 주변, 멀게는 저 멀리 스카이트리 부근까지. 어차피 집의 에어컨은 고장이 났고, 그나마 제구실을 하던 선풍기는 오늘 아침 다른 물건들과 함께 팔아버렸다.

그나마 구름의 틈새로 내려오던 햇빛마저 사라졌지만, 시원한 바람과 움직임이 드문 시간대의 거리는 운치 있고 기분이 좋다. 도로 건너편에 있는 소학교도 지금은 어쩐 일인지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대로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Pardon, mademoiselle?"


그럴 뻔했다.


>>>>>>


<2015년 9월 7일 월요일 오후 1시 56분>


쾌적하게 열려있는 인도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 찰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이국적인 목소리에 카나데의 발이 멈춘다.


뒤를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그저 평온하고 신비로운 미소가 옅게 드러나 있다.

카나데는 그녀를 부르고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쭈뼛 쭈뼛하는 소녀의 모습을 천천히 살펴본다.

그녀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이국풍의 소녀. 비대칭의 짧은 금발, 또랑또랑하고 뜨고 있는 것만으로도 활기가 넘쳐 보이는 한 쌍의 녹색 눈. 새빨갛게 된 채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어찌할 바 모르듯이 두 다리를 동둥 굴리며, 마치 기도를 하듯 휴대전화를 쥔 손을 양손에 모아 꼭 쥐고 있다. 부끄러워하는 모습과 모순적이게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띄워주는 분위기가 그녀에게서 나오고 있다.

카나데는 고개를 살짝 움직이며 그녀의 얼굴을 관찰한다. 왼쪽, 오른쪽, 그리고 정면. 오른손을 왼팔에 걸치고 가만히 시선을 눈앞의 소녀에게 향한다.


"저기, 우리 어디서 만났던가?"


얼마 간의 침묵 끝에 카나데의 입꼬리가 약간 내려가고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진다.

카나데의 물음에 화들짝 놀라며 휴대전화를 떨어트릴 뻔한 소녀. 곡예를 하듯 가까스로 바닥에 곤두박질치기 직전의 휴대전화를 잡은 뒤,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한다.

정확히 세 번. 그리고 소녀는 카나데의 금빛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연다.


"Je m`appelle Fre, nonnonnonnonnon, 제 이름은. 그, 소피! 소피 피아프. 입니다. 프랑스에. 왔어요!"


서툴다. 더듬거리며 어눌한 발음이다.


"사인해줘! 블루 씨의. 팬이에요!"


다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자신을 소피라고 소개한 그녀가 소리친다.

한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카나데의 얼굴이 움찔하고 떨린다. 오른손을 왼팔에 걸치고,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본다. 여전히 옆을 지나다니는 자동차를 제외하면 여전히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다.

숨을 삼키고, 무언가를 참듯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는다.


"괜찮으신가요…?"


소녀에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참아왔던 숨을 다시 내쉰다. 

모래 위의 낙서를 쓸어 삼키는 파도와 같이, 짧은 시간 동안 떠오른 이변을 덮는 평온한 미소가 나타난다. 


"아무것도 아니야. 원래 오프 중일 때는 안 되지만, 멀리서부터 나를 보러 온 거니까 기꺼이 해줘야겠지. 혹시 사인 받고 싶은 종이나 물건 같은 거라도 있어?"


프랑스어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작게 웅얼거리며, 소피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낡은 만년필과 작은 수첩을 꺼낸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스프링 수첩. 표지 귀퉁이에 하얗게 구겨진 자국이 선명하다. 

빼 꼭하게 적혀있는 페이지를 휙휙 넘기다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 맨 뒤의 깨끗한 뒤표지의 반대편을 펜과 함께 카나데에게 내민다.


"좋아, 금방 적어줄게. `바다 너머에서 건너온 당신, 소피 피아프에게`……. 아."


페이지 면적의 절반을 종횡무진이던 펜의 움직임이 멈추고, 카나데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든다. 

펜을 잡은 직후부터 물 흐르듯 끊김 없던 카나데의 동작이 마치 사진 속에서 굳어버린 사람처럼 끊어져 미동도 하지 않는다.

미미하지만 분명하게, 만년필의 펜촉이 닿은 새하얀 종이는 타들어 가는 듯한 검은색으로 조금씩 물들어간다.

카나데가 펜촉을 종이로부터 떼어냈을 때는 이미 새끼손톱만 한 잉크얼룩이 종이에 번져있다. 옆에는 솜씨 좋게 휘갈겨 쓴 한 문장이 적혀있을 뿐, 사인이라고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저기 소피 양?”


다시 평온하고 신비로운 미소. 카나데는 고개를 들어 소녀를 부르고 수첩을 내민다. 소녀는 수첩을 다시 받아들고 대답 대신 왜 그래? 하고 묻듯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인다. 


“혹시 내가 소피 양의 이름을 잘못 적었을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마무리하기 전에 좀 확인해줄래?”

“....”


소녀는 양손에 수첩을 꼭 쥔 채로 대답하지 않는다.


[연락도 없이 불쑥 나타난 당신, 미야모토 프레데리카에게]


[딩동댕동~]


<2015년 9월 7일 월요일 오후 2시 정각>


무언가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소학교로부터 울려온다. 그 뒤를 따라 100여 대의 의자의 마찰음이 쥐죽은듯 조용했던 거리를 덮어나간다.


“설마, 내가 2년 만에 프레 짱을 잊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렇게나 요란하게 날아다녔던 M 중학교 3학년 C반 미야모토 프레데리카인데?"


표정은 그대로인 채로 눈만 가늘게 움츠러들어 눈앞의 소녀를 향한다.

하지만 소녀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순진무구한 강아지처럼, 입을 헤 벌리며 똘망똘망한 눈을 카나데의 바늘과도 같은 시선에 맞추고 있다.


"...?"


카나데가 소녀의 반응을 기다리는 듯 눈썹을 살짝 올리지만 돌아오는 것은 석상과도 같은 침묵. 두 사람 다 꼼짝도 하지 않은 것이, 마치 그들의 옆으로 뻗은 건널목을 배경으로 한 한 장의 사진과도 같다. 


“청소 안 한다!”


어느새 건너편 길에는 활기가 필요 이상으로 넘쳐 보이는 아이들이 건널목의 신호가 바뀌길 기다린다.

남은 시간이 표시되지 않는 낡은 신호등이기에 어떤 아이들은 고개를 들어 차량용 신호등이 노란색으로 바뀌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고 약 20초. 차량용 신호등이 노란색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벌써 혈기 어린 소리를 내지르는 한 아이.


“들켰다아아아!!”


그것이 무슨 신호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녀, 미야모토 프레데리카는 양팔을 벌려 카나데를 덮친다.

마치 갑각류가 먹잇감을 움켜쥐듯 카나데를 부둥켜안고, 그녀의 양 볼에 도장을 찍듯 가볍게 입을 맞춘다.

이윽고 초록색으로 바뀌는 건널목의 신호. 아이들은 요란하게 건널목을 건너오고는 프레데리카와 카나데의 옆을 가로지른다.


“카나데! 카나데~! 저어어어어어어어어엉말 오랜만이야! 길고 고운 머리카락도 그대로고! 어딘가 샤프해 보이는 것도 그대로인데! 어떻게 있던 거 다 갖춘 채로 이렇게 요염하고 성숙한 마드모아젤로 성장한 거니?! 이쯤 되면 내가 동생이라고 해도 되겠네! 하야미 프레데리카로 개명해도 될까요, 카나데 언니?”


투우장의 성난 황소떼처럼 막무가내로 가로지르는 어린아이들, 끝도 없이 재잘거리는 프레데리카의 입, 그리고 머리를 감듯 인정사정없이 카나데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프레데리카의 두 손.


"나보다 두 살이나 더 많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데 거리낌 없네. 프레짱도 바뀐 게 하나도 없어. 모습도, 이렇게 정신 사납게 하는 것도…!"


벽에 엉킨 식물 줄기를 대하듯 프레데리카의 팔을 몸에서 떼어낸다. 여전히 카나데의 시선은 프레데리카를 시험하듯 쿡쿡 찌른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내 기억 상으로 메신저로 얘기할 때 프레짱한테 주소를 가르쳐 준 기억은 없는데. 보육원 쪽에도 마찬가지고. 예전에 내가 A고등학교에 입학했다고 연락했을 땐 다니는 고등학교랑 한참 떨어져 있어서 못 온다고 했지?"


카나데의 얼굴에 약간의 경계심과 적의가 쌓인다.


"누구한테 들은 거야?"

"모자찡한테 물어봤지. 아마 오늘 카나데도 만났을걸?"

"모자하고 안경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사람?"

"그래그래! 모자가 인상적이니까 모자찡! 직접 내 담당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편이 친근감 있고 좋잖아?"


지금이 2시라고 대답하는 것 마냥 거리낌 없는 즉답.


"그런데 프레짱이 그 사람을 알고 있다는 말은,"


그렇게 우물거리며 카나데는 조금 전까지의 얕은 표정이 무색할 정도로 명백하게 놀란 표정을 보인다.


"미야모토 프레데리카! 연습생부터 다시 시작해서 아이돌 재데뷔예정이랍니다!"


프레데리카는 마냥 즐겁게 웃음 짓는다.


"그런데 오늘 모자찡은 내가 여기에 온 것도 모를 거야. 시키데리카 식으로 멋대로 실종놀이를 해봤거든!"


움찔하는 카나데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조금 전에 놓았던 그녀의 한쪽 팔을 살포시 껴안는다. 카나데의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는 핸드백을 고쳐주고, 어딘가 몽유병 환자같은 그녀를 이끌며 쭉 뻗은 인도를 따라 나아간다.


"아, 주로 카메라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카나데는 모르겠구나."


>>>>>>


그것도 모르겠지만 어째서 이 사람이 갑자기 찾아온 건지가 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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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용량이 넘치거나 한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길이가 너무 나와서 분할합니다.


(다음화: https://www.idolmaster.co.kr/bbs/board.php?bo_table=create&wr_id=13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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