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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나이트 11 - 후일담後日談

댓글: 3 / 조회: 1288 / 추천: 1



본문 - 10-31, 2019 22:05에 작성됨.

 야.

 메서드냐.

 너 뭐야.

 안 와도 된다. 들어가라.

 너 지금 뭐하는 거냐고.

 이게 내 해결이야. 유일한 선택이자, 최선의 선택이지.

 그만두고 업계 뜨는 게 해결이야? 이래서 뭐가 바뀌는데. 뭐가 끝나는데! 뭐가 해결된다는 건데!

 메서드.

 뒤져도 같이 뒤지고 살아도 같이 사는 거 아니었어? 네 혼자 속 편하게 도망치면, 우리가 뭐, 울면서 고마워 할 줄 알았냐? 이 등신아!

 많이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야.

 닥쳐. 큰형님은 몰라도 나랑 강이 형은 너 절대 못 내보내. 당장 들어와. 와서 형님들께 멍청한 짓해서 미안하다고, 동생들한테도 못 볼 꼴 보였다고 해. 얼른.

 내가 나가야 돼.

 그런다고 뭐가 바뀌냐고!

 내가 나가면 그 사람은 더는 여기를 노리지 않을 거야.

 …… 야.

 너도 머리로는 알잖아. 나랑 달리 똑똑하잖아. 벌써 알고 있었으면서. 이게 최고의 해결책이야.

 …… 개자식. 사람 나쁜 놈 만들어놓고.

 미안하다. 미안했다.

 갈 데는 있냐.

 예전 의뢰인들 여기저기 찔러봐야지. 누가 받아 줄지는 모르겠지만.

 카코한테 가. 제일 가능성 높다.

 제일 가기 싫은 곳이지만, 생각은 해볼게.

 기다릴 거야.

 그럴 필요 없어.

 닥쳐. 내 맘이야. 난 쭉 기다릴 거야. 네 빈자리 안 치우고 내가 드러누워서 발 뻗고 지키다가, 너 언젠가 돌아올 때, 정말로 모든 게 온전히 해결돼서 눈치 안 보고 와도 될 때, 그 때. 네 부끄러워하는 낯짝 구경하면서 앉힐 거야.

 …….

 다 과정일 뿐이야.

 …….

 아직 엔딩 안 났어. 내 각본엔 이딴 마무리 없어.

 가본다.

 해피엔딩이야. 내가 정한 건 무조건 해피엔딩이라고.

 잘 있어.


 *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오전 7시. 평소 기상 시간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창밖에서 햇살이 스며드는데 아직 몸은 나른하고 눈꺼풀이 무거웠다. 이대로 잠이 깨기를 기다리려다 오히려 잠이 올 거 같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날에 야근을 하고 오후 11시 30분에 귀가했다. 12시에 자리에 누웠는데 머리대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오랜만에 하는 경험이었다. 어깨가 가볍고 눈의 피로가 금방 풀렸다.

 짧게 자도 푹 자는 게 최고지. 방에 딱 하나 있는 창문으로 밖을 확인했다. 어제는 피자 가게 사람들이 시끄럽지 않았다. 매일 이래주면 좋으련만.

 본래 템포대로 아침 운동을 할까 했지만, 조금 늦은 만큼 빨리 출근 준비에 들어가기로 했다. 여유 있게 움직여도 지각하진 않을 거고, 최근엔 무리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고는 있지만……. 솔직히 말해 귀찮아. 양심에 찔리니 오늘은 애들에게 몸 관리하라고 닦달하지 말아야지. 작은 결심을 쥐고 욕실로 들어갔다.

 땀을 흘리진 않았으나 정신을 맑게 하려고 찬물 샤워. 물 흐르는 감촉에 기분이 좋아졌다. 세탁소에서 찾아온 새 정장을 착용하고 현관 앞에 서는 시각이 오전 7시 30분. 빈속이라 움직이기 편했다. 오늘 따라 구두도 발에 딱 맞았다. 한손에 서류가방을 쥐었지만 쿨패치와 쿨팩은 챙기지 않았다. 그럴 날씨가 아니었다.

 모자를 쓰자 겨울P가 문고리를 돌렸다.

 “실례합니다.”

 가을바람이 부드럽게 맞아주었다.


 회사 앞에 도착할 때 즈음, 언제 코트를 입으면 좋을지 고민했다. 가을은 아직 그런 계절도 아니고, 애초에 내게 코트는 필수품도 아니지만 코트를 입는 정취를 좋아했기 때문에 날씨가 쌀쌀해지면 항상 코트를 입었다.

 야야, 저놈 봐라, 롱코트 입고 똥폼 잡는 거. 하이고, 우리 백야가 감성에 푹 젖었나 보다, 이런 줄 알았으면 형님이 진작 바바리 하나 사주는 긴데, 고걸 몰랐네, 미안타 백야야. 형님들 중엔 이런 식의 짓궂은 농을 던져오는 분들이 꼭 하나 둘씩은 있었다. 솔직히 아주 잘 어울리지도 않았고, 하필 드라마에서 잘생긴 배우들이 입고 나와 여기저기서 롱코트가 유행했을 땐 슈퍼 앞에만 나가도 똑같은 옷 입은 놈들이 넘쳐나서 서로가 서로에게 민망한 적도 있긴 했다.

 1년에 몇 없는 즐거움인데 이런 취급 받아야 할까요, 저도 제 스타일이라는 게 있는 건데 말이에요. 겹치는 게 싫으면서도 도저히 포기는 못 하겠던 시절. 답지 않은 목소리로 털어놓으면 강이는 늘 똑같이 대꾸했다. 저놈 봐라, 저놈, 좀 놀렸다고 삐쳐가지고, 덩치는 불곰만한 놈이 주제에 가을 타냐. 동네방네 소문이 나면 어디서 형님들이 몰려와선 단체로 놀려댔다. 알면서도 물어본 내가 제일 멍청한 놈이었다.

 그렇지만 여긴 한국도 아니고, 옛날 사무실도 아니고, 형님들도 동료들도 동생들도 없는데, 정장에 모자까지 갖췄는데 당당하게 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속에서 욕망이 차올랐다. 그래, 해보자고, 누가 날 감히 반대하겠어. 업무 중에 틈틈이 디자인 괜찮은 코트부터 찾아보자. 신입의 패기를 보여주지. 퇴근하면 당장 백화점으로 달려가서…….

 “겨울P! 안녕하세요!”

 머릿속에 망상이 꽉 차 있을 때 파도가 밀려와 잡생각을 쓸어버렸다. 맑은 정신으로 미나미에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닛타 씨. 일찍 오셨군요.”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아침부터 레슨이 있어서요.”

 “전에 찍은 화보 견본, 회사에 도착했습니다. 사무실로 와서, 확인해 보십시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예쁘게 잘 나왔나요?”

 “아름다우셨습니다.”

 로비로 들어가 대화를 이어나갔다. 미나미는 나와는 다른 방향으로 경험이 풍부하여 얘기를 나누는 재미가 있었다.

 전에 갔던 레저 시설에 이번엔 촬영 때문에 또 갔었어요. 들었습니다, 선배가, 지쳐서 아주, 쓰러졌다고. 체력이 부족하죠, 가을P는. 바쁘니까요, 헬스장 끊어놓고, 한 번도 못 갔다고, 툴툴댔습니다. 그 시설에 없는 게 없더라고요, 실내 수영장, 테니스장, 골프장, 레이싱에 승마까지, 뭐든지 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뭐든지 할 수 있는 건, 닛타 씨도, 마찬가지네요. 가을P도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저한테 못 맞춰주시는 게 맘에 걸렸는지 다음엔 운동 잘 하는 사람 찾아서 같이 보내주겠대요. 놀면서도 기획을 하는 것처럼.”

 “타고난 프로듀서예요. 그 사람은.”

 “겨울P는 잘 하시는 운동 있나요? 취미라던가.”

 “취미는 없습니다. 체력 유지를 위해, 새벽마다 트레이닝을 했습니다만.”

 “다만?”

 “일이 바빠서, 운동량을 줄였습니다. 오늘도 빼먹었고.”

 “저런. 혹시 해보고 싶은 운동은 없으세요?”

 “딱히요. 죄다 시시해서.”

 “시시해요?”

 “쉽잖아요, 전부.”

 순간 물결이 거칠어짐을 느꼈다. 아뿔싸. 미나미가 눈을 불태우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해일이 하늘을 가리고 날 집어삼킬 기세로 덮쳐드는 기분이었다. 내 의사가 고려되지 않은 위대한 자연법칙의 움직임이었다.

 골프 해보실래요? 닛타 씨, 잠깐만요.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다. 스케줄 비는 날 말씀해주시면 안내해드릴게요! 저기, 그, 제 말을, 들어주셨으면…….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와서 공세가 멈추지 않았다. 가을P한테 말해서 다음엔 아예 같이 가보는 거 어때요? 그러니까, 그게…….

 “그럼 나중에 자세하게 얘기하도록 하고, 오늘 일 열심히 하세요!”

 레슨룸이 있는 층에 도착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승부욕 있는 사람은 이래서 귀찮다니까. 한숨을 쉬는데 엘리베이터 안에 시선이 내게 쏠렸다. 왜 나를 보는 겁니까, 대체. 얼른 사무실로 도망치고 싶었다.


 “제대로 물렸네. 그러게 왜 쓸데없는 말을 했냐.”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설마, 그렇게 달려들 줄은…….”

 “마침 잘 됐네. 이렇게 된 거 앞으로 너를 미나미 전담 요원으로 붙여주마.”

 “선배. 제발요.”

 “왜. 너 미나미 좋아하잖아. 이렇게 프로듀스 해보고 싶네, 저렇게 해야 되네. 평소에 나한테 말 많았으면서.”

 “그게, 이런 식으로 하고 싶다는 건…….”

 “어허. 선배 명령이다. 그리고 내가 또 아무한테나 맡기지 않아.”

 꼼짝 없이 당하고 말았다. 왜 이 두 사람이 서로의 담당인지 알겠군. 근심 걱정을 안은 채 커피를 들이켰다. 일 할 때 추진력이 비슷해.

 운동이 싫은 건 아니다. 당연히 미나미가 싫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미나미는 끝을 보기 전까진 승부를 그만두지 않고, 접대플레이 해줘봤자 납득 못 한다는 점에서 매우 귀찮은 타입이었다.

 이래서 남의 담당에게 신경 쓰면 안 되는 건데. 이제 와서 별 수 있나. 뒤늦은 후회를 종이컵과 함께 구겨버리고 탕비실을 나왔다. 잊자. 일하다 보면 잊히겠지. 그러다 약속 날짜 잡힐 때 다시 심란해지면 돼.

 “아, 맞다. 걔 말이야. 이제 진짜 여기서 활동하게 됐어.”

 “누구 말입니까.”

 “네가 데려온 애. 쟤.”

 선배가 문 쪽을 가리켰다. 지금 막 들어온 슈코가 까만 눈동자로 사무실을 둘러봤다. 은빛머리카락에 반사된 불빛이 여우 귀처럼 쫑긋거리더니 우리를 눈치 채고 인사를 건네 왔다. 오, 두 사람 안녕?

 “안녕하십니까. 시오미 씨.”

 “겨울P는 항상 시니컬해 보이네.”

 “시오미 씨도, 마찬가지십니다.”

 “오늘은 안 와도 되는데, 벌써 레슨하고 싶어서 왔어?”

 “에이. 설마. 그냥 집에만 있기 심심해서 회사라도 둘러보러 왔어. 이렇게 한가한 날이 얼마만인지.”

 능글맞게 말하더니 멋대로 소파에 앉았다. 벌써부터 제 집처럼 드나드는군. 이 회사가 맘에 들었다고 듣긴 했지만 너무 자유분방한 거 아닌가 싶었다. “또 개성적인 사람이 늘었어요.” 치히로가 겸연쩍게 웃는 이유가 이거였나.

 이전 소속사와 계약이 끝난 슈코는 곧 바로 기숙사에서 나와 우리 회사로 찾아왔다. 내가 준 명함을 들고 마침 점심시간에 말이다. 노림수가 뻔해서 나는 슈코를 데리고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파스타를 먹으러 갔다. 자기처럼 하얀 크림소스파스타를 시켜놓고 음료수 한 잔 쭉 빨아 마시더니 슬쩍 웃으면서 말했다.

 “나 이제 백수 됐어. 당신 때문에.”

 “처음도, 아니시잖습니까.”

 “응. 그런데 이번 결정은 전이랑 달라서 좀 새롭네.”

 내 의지로 나온 거잖아. 새카만 동공에 과거가 비쳐보였다. 전에는 좀, 떠밀리듯이 나온 건데.

 “달라지지 않은 점도 있어. 처음 만난 사람이 준 명함 한 장 의지해 나왔다는 거랑, 그 사람이 이상하게 나를 꿰뚫고 있다는 거.”

 “주제넘게 끼어들어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꺼림칙한 면이 없잖아 있어. 갑자기 훅 들어왔잖아. 돌아가서 한참을 생각했다고. 누가 내 정보를 흘린 건 아닌가 하고.”

 에피타이저로 나온 빵을 뜯어먹으며 슈코는 계속 얘기했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했지만, 아무렇지 않아 보이려고 하는 행동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당신이 믿을 만 하다고 느껴져서. 그 날, 쭉 같이 다니면서 시키랑 보내는 모습을 보니까 이상하게 믿음이 생기더라.”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첫 입을 먹기 전에 슈코가 덧붙였다. 아, 그것도 똑같네.

 “그때 그 사람도 자기 아이돌이랑 같이 있었어. 엄청 재밌어 보이더라. 난 그런 점이 좋은 걸지도.”


 선배와는 슈코의 사정을 공유했다. 이전 소속사와의 갈등, 앞으로 목표로 할 프로듀스 방향, 우리 회사 방침 등 미리 고려해야 할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회사 내부에서도 말은 많았던 모양이지만 선배가 강력하게 발언한 덕에 슈코는 무사히 소속사를 이전해 올 수 있었다.

 남은 건 본인 몫이겠지. 지난여름에 벌어진 일들 중 내가 마지막으로 참견할 일은 따로 있어. 마침 오늘이 그 날이었다.

 “나는 솔직히 좀 불안한데. 미안하기도 하고.”

 “뭐가, 말입니까.”

 “알잖아. 뭐 말하는지. 이런 건 회사 차원에서 대응하는 게 좋다고 보는데.”

 “제가, 맡은 일입니다. 해결하기로 약속했으니, 끝을 보는 것도, 저여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일 떠넘기는 건 내가 싫단 말이야.”

 “짐을 나눈다, 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흑백의 기사여! 멀리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볼 필요도 없지만, 혹시나 해서 돌아봤더니 역시나 했던 란코가 우리를 향해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다. 옆에는 탐탁지 않은 표정의 아스카가 함께.

 “안녕하십니까. 칸자키 씨, 니노미야 씨.”

 “그대의 혜안 덕에 우리는 안녕하다. 그 후 벌어진 연회에 대해서는 나의 벗에게 이미 들었을 터. 다시 한 번 감사를 전한다!”

 나는 슬쩍 선배를 흘겨봤다. 이걸 어떻게 다 알아듣고 사는 겁니까. 선배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힘들다, 라는 제스처였다. 그 때.

 “전에는 조금 미안했어.”

 아스카가 입을 열었다.

 “니노미야 씨.”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해 폐를 끼쳤다…… 라고 해두지. 그게 하나의 진실이니까.”

 이 말을 하려고 굳이 찾아온 건가. 옆에서 란코가 흐뭇하게 웃었다. 선배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내 차례인가 싶어 입 안에서 입술을 핥았다. 신경 안 씁니다, 저도 그땐 까칠하게 굴어 죄송합니다. 서툴게나마 진심을 전하고 화해. 쿨하게 돌아서면 된다. 그랬을 터였다. 그랬으면 좋았는데.

 “신경 안 씁…….”

 “하지만 여기까지.”

 “네?”

 “프로듀서에게 내 치부를 드러낸 굴욕은 눈감아주지 않겠어.”

 나는 선배를 노려봤다. 눈을 피하고 헛기침. 말했구나, 이 인간. 눈빛이 차게 식어갔다. 담배 핀 거. 약속은 했지만 끊기 어렵기도 하고, 아무리 그래도 보호자는 알아야 할 거 같아 선배에게만 얘기했는데.

 “야, 그걸 그렇게 쏙 얘기해 버리면 어쩌냐!”

 “입이 가벼운 게 문제지. 나와 이 남자의 영혼의 파장이 안 맞는 게 문제고.”

 내가 선배를, 선배가 아스카를, 아스카가 나를 노려보는 구도가 한참을 이어갔다. 란코만 혼자 뭐가 뭔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1보 전진 뒤 1보 후퇴를 거치고, 퇴근 전에 잠시 회사를 나왔다. 떨어진 기온 속에서 계절의 변화를 피부로 체감하다 보면 온 세상이 내 편으로 돌아선 것처럼 느껴졌다. 이 날씨 아래에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야. 자신감을 갖고 회사 근처 카페로 향했다. 들어가기 직전 가져온 물건이 잘 있는지 재킷 속주머니를 확인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건실해 보이는 청년 앞에 앉았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청년은 폰을 만지작거리다 내 얼굴을 보더니 살짝 놀란 듯 했다. 위압감. 이런 외모가 가져다주는 몇 안 되는 장점이었다.

 “당신이 아스카 프로듀서예요?”

 “아닙니다. 니노미야 씨의 프로듀서, 대신 왔습니다. 이번 일은, 제가 맡은 거라.”

 “아. 그럼 문자 보낸 게 당신?”

 “접니다.”

 “네, 뭐. 누가 오던 간에 상관은 없는데.”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길래 거절했다. 금방 갈 겁니다. 청년은 비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게 그렇게 금방 끝날 얘기가 아닌데.

 “아저씨. 제가 아저씨 문자를 받았을 때 얼마나 식겁했는지 몰라요. 누가 보면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줄 알겠어. 그냥 밤중에 혼자 방황하던 애 맛있는 거 사주고, 얘기 좀 들어주고, 그러다 마음이 맞으니까 더 가까워지고 싶고. 사람 대 사람으로 친근함을 갖고 싶던 거죠.”

 “굉장히, 일방적인 친근함, 같습니다.”

 “제가요. 이런 애들 잘 알아요. 자랑은 아니지만 학교 다니면서 꽤 인기도 있거든요, 제가. 아이돌이어도 어린 애가 다 고민 있는 거잖아요. 공감해주고 싶던 거죠. 걔도 처음엔 좋아했어요. 근데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더니 갑자기 돌아서잖아.”

 미간이 꿈틀거렸다.

 “저도 쓴 돈이 있고 시간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나오면 기분이 좋겠어요? 확 나빠지잖아. 그래서 좀 험한 말 좀 하긴 했지만 아스카도 잘못이 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나오라느니, 법적 조치를 취한다느니. 이건 좀 아니지. 이거 일 커지면 저한테만 문제 생기는 거 아니에요. 솔직히 피 보면 누가 더 보겠어.”

 거기까지. 제지했다. 못 들어주겠네.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생긴 건 멀쩡해 가지고 하는 짓이 저질이군. 거친 말투를 뱉으며 백야가 쏘아보았다. 청년이 굳어버리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놈이랑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어디까지나 아스카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 일은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을 필요가 있었다. 놈의 말대로 싸움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이쪽에겐 치명적이니까. 때문에 나는 챙겨온 쪽지를 꺼냈다. 며칠 밤을 새고 치히로에게 검수를 받아가며 쓴 편지를. 이를 한 번 갈고 내용을 쏟아냈다. 야.

 “14살짜리 벗겨먹으려고 천박하게 구는 새끼가 어디서 아가리를 털어. 당장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거 참고 얘기하는 거니까 이제부터 생각 잘 하고 들어라. 너는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알아. XX 대학 2학년 연극영화과 와세다 준. 고등학교 때부터 바람둥이 기질을 보여 나이 어린 애들한테 껄떡대다가 성폭행 미수 전력이 생겼고, 부모가 개고생해서 합의로 무마한 뒤조차 정신 못 차리고 이딴 짓을 해대고 있지. 자취하는 멘션 3층에서 문란하게 놀아대고, 사연 있는 여자들한테 친절한 척 다가가 본색 드러내는 게 네 방식인 것도 알고 있어. 내 예전 동료가 알려준 노하우가 여기저기 보이던데, 연기 잘 하나봐. 어제 만난 여자한테도 써먹더만. 덕분에 학교에선 성적 좋고 모범적인 학생으로 지내는 거 같은데, 그 생활 끝내기 싫으면 그냥 조용히 살아. 그 상판 갈아버리고 다시는 남들 앞에서 얼굴 못 드러내고 살게 만들어 줄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너 하나 때문에 아스카가 겪었을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당장 갈아 마셔도 시원찮지만 이 일에선 그런 방식을 쓰고 싶지 않기 때문에 봐주는 거야. 알아들었으면 당장 꺼져. 앞으로 단 한 번이라도 더 내 눈앞에 띄거나 아스카에게 접근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땐 네 멘션에서 나랑 밤을 보내게 될 거야.”


 청년이 허겁지겁 밖으로 튀어나갔다. 계산도 안 하고 가다니, 끝까지 못난 놈이군. 나는 청년의 커피 값을 대신 내주고 카페를 나왔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종업원이 물어보길래 솔직하게 답했다. 아뇨, 아무 일도.

 정말이었다. 주먹이 오가지도 피가 튀지도 않은 평화로운 해결. 혹시 못 알아들으면 어쩌나 했는데 대학물 먹은 녀석이라 그런지 금방 이해해 주었다. 역시 사람은 대화를 해야 해. 야만적인 지난날들을 반성했다. 돌아가는 길에 바람이 세게 불어와서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이제 곧 겨울이 올 거야.”

 가을은 짧으니까. 옷을 갈아입은 계절이 낙엽으로 변해 툭, 툭, 떨어져갔다.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고 부서져 흙으로 돌아가도 내년이 오면 다시 부드러운 꽃으로 돌아오는 순환. 나 역시 마찬가지겠지. 가을에 되살아나 겨울을 살아가고, 봄이 되면 축 처지다 여름에 죽어가기를 반복하면서.

 해마다 올해와 같을까, 내년이 더 힘들지 않을까. 늘 같은 생각으로 이맘때를 보내왔다. 지나고 보면 다 별 거 아니라더라. 남들 말하는 대로 살아가기엔 나는 남들과 너무 달랐다.

 어쩌다 이리 됐을까. 기억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과거는 늘 10살에서 멈춰 섰다. 이상해. 왜 그 전은 생각나지 않지. 어쩌면 나는 고아원에 들어간 게 아니라 고아원에서 태어났을지도 몰라. 우울감이 망상을 적셨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사람은 네 번의 삶을 산다고. 한 번은 씨를 뿌리는 삶, 두 번은 씨에 물을 주는 삶, 세 번째는 물 준 씨를 수확하는 삶, 마지막은 수확한 것을 쓰는 삶. 상점가에서 흘러나오는 연풍의 리메이크를 들으며 물었다.

 타카가키 씨,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이 노래가 당신의 삶의 수확물인가요. 아이돌로 살면서 씨를 뿌리고, 연인과의 사랑으로 물을 주다, 고통 끝에 수확한 성과가 이것입니까. 이것으로 당신은 해피 엔딩에 도달하셨을지 궁금합니다.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보기에 저는 몇 번째 삶을 살고 있는지.

 “고아원에서 태어나, 해결사로서 물을 주고, 이젠 프로듀서로.”

 나는 무엇을 수확하고 있나. 이 작업에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그것들로 남은 삶을 얼마나 먹고 살 수 있을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살아야지. 죽지 않은 이상.”

 퇴근하는 직원들을 스쳐 사무실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정리만 조금 하고 가자. 야근까지 하기엔 좀 아니야. 뭐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니야.

 문고리를 잡자 손끝이 시렸다. 잠깐 멈춰서 있으니 약품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 시간까지 뭐 하는 거야. 문을 열자 별빛이 확, 안겨왔다.

 “겨울P 왔다!”

 “백야 너무 늦었어.”

 “어서 와요, 프로듀서.”

 여고생들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선 뭐가 좋은지 실실 웃고 있었다. 쟤네는 항상 저랬다. 뭔진 몰라도 늘 웃고 웃다가도 또 웃는다. 특히 저렇게 웃고 있을 땐 마치 우주의 어떤 위대한 법칙처럼 움직인다. 신비로우며 경이롭고 광활하게. 간단히 말해서, 내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행위를 한다는 뜻이다.

 “다들 퇴근하는데, 왜 여기 있어.”

 “백야도 퇴근 안 하고 돌아왔잖아.”

 “서류만 조금, 정리할 거야.”

 “프로듀서, 설마…….”

 “야근 안 해. 가방 챙겨서, 금방 갈 거야.”

 “어이구, 기특해라. 그런 겨울P에겐 상을 줘야겠지.”

 미오가 이때다 싶어 숨겨놨던 무언가를 꺼내려 했다. 아나스타샤가 재빨리 도왔고, 시키는 옆에서 “두구두구두구두구” 하면서 추임새를 넣었다.

 나는 별 기대 없이 가방을 들고 하나씩 서류를 챙겼다. 일련의 작업을 끝냈을 때 미오와 아나스타샤도 조심히 ‘그것’을 꺼내들었다.

 “…… 하.”

 살짝 입이 벌어졌다. 어때? 어떤가요? 아나스타샤와 미오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어왔다. 부끄러워 말고 솔직히 기뻐해도 돼. 시키가 건방진 소리를 해왔다. 기뻐하라니. 대체, 이게 무슨. 이건 그 정도가 아니야.

 “너무 기뻐.”

 나는 검은 코트를 받아들었다. 떼지도 않은 가격표에 적힌 숫자는 그리 큰 액수는 아니었으나, 구겨지지 않게 조심히 집어든 정성과 곳곳에 묻어나는 센스에 감탄했다. 참지 못 하고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자 세 아이들이 쾌재를 불렀다.

 “성공! 그거 말이야, 셋이 같이 돈 모아서 샀거든. 최고지?”

 “전에 백야가 내 가운 입었을 때, 다른 옷 입혀보면 재밌겠다 싶었거든. 근데 아냐가 코트를 추천하더라고.”

 “며칠이나 고민하면서 골랐어요. 프로듀서. Ты счастлив? 기쁜가요?”

 구경만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아 착용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이즈가 꼭 맞았다. 피부처럼 몸에 달라붙었다.

 오오, 멋쟁이! 미오가 능숙한 아부를 날렸다. 백야 폼 잡는 거 처음 보네. 시키가 산통을 깼다. 잘 어울려요, 정말로. 아나스타샤가 순수하게 칭찬해주었다.

 이대로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럴 수만은 없지. 짧아진 해는 벌써 저물었고 오늘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분위기를 쭉 이어나가려면.

 “가자. 밥 먹으러.”

 사무실을 나섰다. 창문으로 스며든 어둠이 복도를 침범했다. 두렵지도 않은지 애들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느니, 이게 다 백야 때문이라느니 하는 소리를 끊임없이 낸다. 기껏 기분을 내도 이 모양이군. 사실 이 모든 게 고도의 술수가 아닐까, 내가 원하는 물건을 어떻게 알았지. 불평을 할 때 쯤 나는 어느새 내 망상이 밝아져 있음을 깨달았다.

 오늘 밤은 가을이 깊어가는 밤. 무르익은 계절 속에서 나는 더 이상 혼란하지 않았다. 단지 나의 별들과 발 맞춰 걸어갈 뿐.











아슬아슬했지만

예정대로 10월이 가기 전에 쓸 수 있었습니다.

당분간은 이렇게 가벼운 글들을 쓰고 싶네요.


후기는 내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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