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그냥, 그냥 있는 거야. -- 아스카

댓글: 2 / 조회: 708 / 추천: 0


관련링크


본문 - 10-14, 2019 13:06에 작성됨.


 바람이 분다.

허공으로부터 내려와,

산을 걸치고,

바다의 향기를 가지고.

이 건물, 저 건물을 오가며,

한 남자의 한숨과,

어린아이의 웃음 소리와,

미소를 띈 꽃의 마음을 담은.

그런 바람이 분다.


 미쩍지근해진 캔커피가 나의 목을 적신다.

호흡을 내뱉으며 나는 텅빈 하늘을 바라본다.


"이 바람은... 나의 고독도 담게 되겠지."


 이 바람은, 이제 어디로 향해서 누군가에게 닿을까.

누구의 영감이 될까.

참으로 기대되는 한 순간이다.


***


 사무소에서 가까운 건물.

나는 조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돌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나는, 아이돌과는 전혀 관련없는 건물에 익숙한 발걸음을 옮긴다.

서있는 경비원도 반가운 사람을 본듯이 나를 보며 웃는다.

이제는 익숙해지니 웃음부터 나온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자마자 가장 높은 층을 누른 나는 멍하니 층수를 나타내는 숫자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띵. 경쾌한 종소리가 도착을 알린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터벅터벅 걸어서 닫혀있는 문을 열었다.


"여. 프로듀서."


 문이 열리기 무섭게, 바로 옆에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심 놀란 마음을 억누르고 목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체인이 달려있는 옷차림을 한 소녀가 문 옆에 등을 기대며 서있었다.

어찌보면 장난스러우면서도,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였다.


"뭐야. 아스카."


 내가 볼멘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특이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턱짓으로 나보고 자신의 옆으로 오라는 듯한 제스쳐를 보였다.


"잘 찾아왔네. 역시 내 프로듀서야."


"잘 찾아오고 뭐고, 매번 이리로 오잖아."


 너 때문에 이 건물 경비아저씨랑 친구 먹었다, 이 녀석아.

턱 밑까지 차오른 불평을 눌러내고 헛웃음을 지으며 별난 녀석을 바라본다.

다들 있는 자리에서 괜히 멀어져서 이곳에 오는 아스카를 볼 때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프로덕션에는 휴게소도 있고, 달리 쉴 곳도 많아서 굳이 이곳에 올 필요가 없을 텐데, 왜 자꾸 이건물에 오는 걸까.


"지금 왜 여기있는지 궁금해?"


"궁금함 이전에 넌더리가 나서 그런다. 날 운동 시키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내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하니, 아스카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는 재밌다는 듯이 '하핫.' 하고 짧게 숨을 내뱉는다.


"예리한 걸?"


 뭐? 

순간적으로 아스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하니 진지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었다.

정말로 날 운동 시키려고 여기까지 오는 거야? 단지 그것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던 아스카는 눈을 살며시 피하며 입꼬리를 살짝 올린다.


"농담이야."


"......네가 하면 그렇게 농담 같지는 않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뺨을 긁적인다. 아스카는 뭐가 재밌는지, 즐거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파오는 아이라고 스스로 말을 하는 그녀이고, 나도 그녀의 성격은 나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그 얼굴은, 어딘가 멋이 있어보였다.


"저기, 프로듀서."


"듣고 있다."


"무드 없구만. 나름 공범자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내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니 아스카가 '훗'하고 짧게 웃으며 불평을 꺼낸다.

무드 없어서 미안하게 됐다.

나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 같다고, 아스카.

아스카는 한껏 진지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프로듀서가 생각하기엔, 내 인생이 비극과 희극 중에 어느 쪽이라고 생각해?"


"뜬금 없구만."


 나는 짧게 감상을 내뱉었다.

14세 밖에 안되는 녀석이 인생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 웃기긴 하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기로 했다.

니노미야 아스카라는 이 소녀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은 녀석이니까.

그녀의 특별한 사고 과정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질문 중에 하나일테니까.


나는 피식하고 옅은 웃음을 내뱉고 아스카를 쳐다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언제 봤냐. 그 영화."


 너, 봤구나. 조커.

내가 뱉어낸 짧은 두 마디를 듣고, 아스카는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모르겠다.


"개봉하고 바로. 카나데 씨랑 함께."


 그런가. 그 영화 애호가랑 같이 보러간 건가.

납득은 했지만, 과연 그것이 중학생이 봐도 괜찮을 만한 내용인지는 긴가민가했다.

아스카는 내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훗'하고 다시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어떨까? 나라는 존재는 비극과 희극. 어느 쪽일까."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보이는 아스카가 비극과 희극의 인생 중에 어떤 것 같냐고 물어본다.

어쩌다가 그런 질문에 도달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는다.


"그걸 어떻게 논하냐. 너는 지금 '진행중'인 이야기의 주인공인데."


 아스카는 내 대답을 예상이라도 한듯이 가볍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아스카의 잘난 표정이 조금 화를 돋구지만, 잘생겨서 참는다.


"이야기라는 건, 방향성이 존재하잖아. 나의 방향성은 어떤 쪽일까 하는 의문이지."


 아스카는 나에게서 무슨 대답을 원하는 것일까.

희극이라고 말해주길 원하는걸까.

인생은 그렇게 분류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걸까.

이 별난 소녀와 함께 있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녀의 목적을 찾게 된다.

나는 잠깐 생각을 하고 입을 열었다.


"희극, 비극. 둘 중에 하나를 골라보라고?"


"그럼."


 아스카는 기대된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별난 소녀가 나에게 쥐여준 두 가지의 선택지가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하기를 포기했다.

왠지 어느 쪽이건 함정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순순히 따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가지의 선택지를 전부 제외하고 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 법한 대답을 도출해내기로 했다.


"역사...려나."


"흠? 왜 그렇게 생각해?"


 아스카는 다른 대답이 나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녀의 눈빛이 내가 이런 식의 대답을 기다렸다고 말하려는 것만 같다.

나를 무슨 신기한 대답을 생산하는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걸렸지만, 우선은 납득할 만한 설명을 덧붙이기로 했다.


"너는, 너의 존재를 외친다고 하면서, 아이돌이 되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거잖아? 그리고, 너의 외침은 많은 존재에게 닿았고. 그렇다면, 너의 존재는 기록으로 남겠지. 희극도, 비극도 아닌, 역사로 말이야."


"하핫...! 역시 너는 최고로 재밌다니까."


 해맑은 미소를 흩뿌리는 우리 프로덕션의 자랑, 니노미야 아스카다.

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보다.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쁘지는 않다.

그나저나, 아까는 무드 없다면서.


"그래서.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나는 말을 바꿔서 '전혀 상관 없는 빌딩에 무단 침입'을 하는 상습범에게 말을 걸었다.

여태 여러가지 이유를 대왔지만, 이번에는 어떤 이유일까 하며 아스카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스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미소를 흘리며 터벅터벅 난간 쪽으로 걸어가서 팔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만 돌려서 나를 살며시 흘겨보았다.


"사무소에는 없는 고독을 찾으러... 라고 하면 이해해 줄래?"


 아스카는 자신의 손에 들린 커피캔을 난간에 살며시 올려둔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말을 잇는다.


"난, 지금 이러는 순간이 정말 좋거든."


 그녀는 바람에 휘날리는 자신의 붙임머리를 넘기며 따뜻한 미소를 짓는다.

그 표정에는 행복해보이기도, 조금 쓸쓸해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냥.... 그냥 있는 거야."


 아스카의 뺨에 옅은 분홍빛이 맴돈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아스카의 옆으로 간다. 그리고 난간에 손을 올리고 풍경을 둘러보았다.

이런 풍경을 혼자서 돌아보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는 일이겠구나.

그녀의 속내는 아직도 완벽히 모르겠지만, 여기서 보는 경치는 나름 괜찮다고 깨닫게 되었다.

기분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말한 '그냥'은 '특별한 이유가 없음'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


바람이 분다.

바람을 타고 나의 목소리가 옅게 퍼져나간다.

바람을 타고 나의 고독도 날아간다.


즐기던 고독이 사라지는 이 순간.

항상 바쁜 그를 독점하는 이 순간.

나의 존재와 그의 사고가 마주하는 이 순간.

이 순간에는 항상 바람이 분다.


이 바람이, 너에게 닿았을까?

너에게 영감이 되었을까?

터져나오지 못한 말을 혼자 짧게 읊조려본다.




******




1시간 30분 컷.

갑자기 뭐라도 쓰고 싶어져서 씁니다.

계산은 안했는데 7KB는 넘겠지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0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