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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나이트 10 - 피그말리온Pygmalion : 타카가키 카에데 上

댓글: 4 / 조회: 67 / 추천: 2



본문 - 10-08, 2019 22:15에 작성됨.

 백야.

 …….

 야. 대답 안 하냐. 이 망할 놈아.

 왔냐. 메서드.

 왔냐고? 그래, 왔다. 바람나서 전 재산 들고 튄 아줌마 잡으려고 사흘 동안 겁나 뺑뺑이 치고 돌아와서 이제 한숨 자려다가 병원까지 튀어왔다. 내가 아직 상황파악이 안 돼서 그러는데, 사실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그러는데, 너 이게 다 어떻게 된 건지 똑바로 설명해.

 동생들이 다쳤어.

 누구 때문에.

 나 때문이야.

 같잖은 대답하지 말고. 내가 똑바로 대답하라고 했지? 네가 애들 발목 부러뜨리고 차로 친 거 아닐 거 아니야. 누가 그랬냐고.

 전부 나 때문에.

 그 년이지?

 …….

 그럴 줄 알았지. 그 년 말고 이런 짓 벌일 놈이 없지. 언젠가부터 눈빛이 수상하다 했어.

 메서드. 좀만 진정하고.

 진정하게 생겼어? 양심이 있으면 그딴 말을 하지 말아야지, 미친 새끼야! 대가리에 총 박혔냐? 이런 상황에서 그 년 편들 생각이 들어?

 편드는 게 아니야.

 그럼 뭔데. 얘기 좀 해봐. 너 왜 여기에 가만히 있냐. 왜 나랑 여기서 시답잖은 말이나 까고 있냐고.

 어떻게 해야 할지…….

 웅얼웅얼 대지 말라고. 내가 아는 백야는 아끼는 동생들이 입원해 있는 데 어떤 호로 잡놈이 한 짓인지 다 알면서도 가만히 앉아 있을 놈이 아니야. 연장 들고 튀어가서 오늘이 어떤 밤인지 겪게 해 줄 놈이지.

 애들 아직 수술 중이야.

 수술 끝나면 갈 거냐? 아님 병문안 갔다가? 안정되면? 퇴원하면? 가긴 갈 거냐? 너 지금 눈에 독기가 쏙 빠졌어. 복수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생각 좀 하게 해줘.

 해결할 자신이 없으면 애초에 일을 벌이지 말았어야지. 내가 말했잖아. 그 년이랑 관계 이제 끊으라고. 더 나아가지 말라고. 항상 오는 미친 의뢰인이랑 그보다 미친 해결사, 거기까지만 가라고 했잖아. 무시한 게 누군데. 일 터지게 만든 게 누군데. 너 때문에 애들이 다쳤으면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이 버러지야!

 …….

 큰형님이 나는 이 일에 끼지 말라 하시더라. 그러기로 했어. 빠져있을 게. 강이 형도 지금 눈 돌아가기 일보 직전인데 조용히 있거든. 대신 지켜볼 거야. 네가 어쩌는지.

 …….

 이미 일이 터졌으니 해결은 네 몫이다. 끝을 봐라. 네가 해결사라면.


 *


 10살 때 고아원에 들어갔다.


 여기가 네 새 집이다. 네 또래 친구들도 많이 있지. 그래. 고아원이지. 너처럼 부모 없는 애들이 오는 곳. 이젠 없어. 죽었잖아. 잘 들어라, 얘야. 이제부터는 내가 널 키울 거다. 이 ‘학수’가. 네가 어떻게 자랄지는 내가 정해. 알아들었느냐?


 처음 보는 물건들이 많지? 신기하니? 곧 익숙해질 거다. 전부 네가 다뤄야 할 도구들이거든. 나이프, 송곳, 톱, 망치.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은 것을 쓰게 될 거다. 왜 그런 걸 배우냐고? 죽이기 위해서지. 사람을. 어디 시범을 보여줄까. 예를 들면, 여기. 하하. 아픈가 보구나.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지. 만약 내가 지금 칼을 썼다면, 너는 죽었을 거란다. 네 부모처럼.


 저런. 여기저기 상처투성이구나. 어쩔 수 없어. 저 애는 이곳에서 5년은 보냈으니. 많이 아프니? 멍들고 찢기고 피까지 났는데 아무도 너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군. 얘야, 기억해두렴. 그게 패배란다. 네가 패배한 건 네가 약해서, 또 네가 악랄하지 못 해서야. 약자는 도태되고, 살아남은 자만이 강해진다. 싸움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래. 필요한 건 힘이다. 이 세상은 결국 강자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물리적으로든 뭐든 간에, 힘을 기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하고 당할 뿐이다. 그러니 얼른 강해져서 올라서려무나. 그렇지 못하면 죽게 될 거다.


 비가 내리는군. 나는 비를 좋아한단다. 빗소리는 마음을 차분케 하고, 피 냄새를 진하게 해서 본능을 깨우지. 또 내가 한 일들을 씻어줘. 이런 날이 일하기 좋은 날이야. 비가 그치기 전에 얼른 작업을 끝내자. 썰어야 할 사체들이 많아. 잘 보고 배워두렴. 아직 어린 너에게 많은 것을 바라진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너 혼자 해내야 할 일들이니.


 기술을 익히는 건 힘든 과정이었어. 나도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진 못 했으니까. 스스로 이뤄야 할 것들이 많았지. 지금은 이 기술들이 내 재산이야. 끝없이 갈고 닦아야 해. 장인정신으로. 사실,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이런 일들을 하지 않아도 평범하게 먹고 살 수 있어. 번거롭게 고아들을 주워 가르치지도, 뒷세계에 팔 필요도 없지. 그럼에도 하는 이유는…… 좋아서. 나는 이 일이 좋아. 순수하게. 자아실현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 이 일을 하지 않는 학수는 상상조차 할 수 없구나. 지금은 이해가 안 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될 거다. 너도 나랑 똑같이 될 테니.


 …… 놀랍군. 네가 강해진 것을 말하는 게 아니야. 너는 이곳에 들어온 뒤로 항상 강해졌어. 정체된 적이 없었지. 그래서 네게 큰 기대를 걸었는데, 예상을 넘었어. 어떻게 뒤를 안 보고 기습을 알아챘느냐? 어떻게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칼이 오는 방향을 알았지? 어떻게 상대의 급소를 확인도 안 하고 정확히 찔렀어? 느껴지고 있나 보군. 보지 않아도, 만지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훌륭해. 정말 훌륭해. 정말로 대단해. 천재구나. 너는 나와 같구나. 너는 나를 이을 사람이구나.


 이제 넌 이 고아원의 누구보다도 강해. 하지만 거기서 만족하면 안 되지. 네 발밑에 쓰러진 아이의 원망을 기억해라. 원망이 분노에서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을 기억해. 원하는 게 있으면 공포를 심어라. 너를 무섭게 느끼도록, 죽음이 무섭게 느껴지도록 만들어. 놈은 영원히 철창 안에 갇혀 설령 문을 열어주더라도 빠져나오지 못 하게 될 거다. 너를 잊지 못 하고 평생을 두려워하겠지.


 영문을 모르겠는 일이군.

 정말로 모르는 거라면 당신은 머리가 나쁜 거야.

 진심을 다해 모르겠다. 네 칼이 내 배에 꽂히다니.

 이젠 알 필요 없어. 다음엔 머리에 꽂을 거니까.

 혼란스러워. 나는 네 감정을 쭉 읽고 있었는데. 넌 나를 존경했어. 스승으로, 은사로. 나의 강함을 따랐고 반항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어. 충실히 가르침을 따라왔지. 이제야 완성됐다고 여겼는데, 어째서.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아직 나에겐 미치지 못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었군. 이미 한참 전에 넘어섰어. 왜, 왜 이제야 반항한 거지?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어.

 처음부터?

 당신이 내 부모를 죽였을 때, 겁에 질린 나를 이곳으로 데려와 키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쭉. 나는 줄곧 오늘만을 생각해 왔어. 당신의 기술 전부를 익히고, 그 기술로 당신을 죽이기로. 존경? 물론 했지. 그 강함만. 그걸 제외하면 당신은 어린애들을 잡아다 미친 짓거리를 일삼으면서 보람을 느끼는 쓰레기에 불과해. 합당한 벌을 줘야만 했지. 인생의 마지막에서 자신이 해온 일이 전부 헛짓거리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을 만큼 더러운 벌. 바로 내가, 당신이 가장 아끼던 흉기가, 당신을 하찮게 만들 정도로 강해져서 죽이는 거야.

 허어. 그런 거였군.

 당신의 모든 걸 없앨 거야. 시체도, 이 고아원도. 이 세상에서 모든 흔적을 지워주겠어. 당신에게 배운 기술로.

 그래. 그런 거였구나. 다행이야.

 뭐?

 거참. 뭐야, 난 또 내가 잘못 가르친 줄 알았구나. 아니었어. 잘못 가르치지 않았어.

 뭐가 좋다고 처 웃는 거야, 이 새끼가.

 네가 어떻게 자랄지는 내가 정해.


 넌 프로듀서 따위를 할 녀석이 아니야.


 *


 눈밭을 헤매고 있었다.

 하늘에서 쉴 새 없이 눈이 내렸다. 구름이 짙어 빛이 들지 않는데도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든 밤이었다. 백야야. 입김을 내보냈다. 나의 밤을 채우는 백야.

 고아원에서 나오면서 그 이름을 사용했다. 그 날도 이렇게 눈이 펑펑 나리는 밤이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내 안에 품고 싶었다. 나의 마음에 항상 눈이 내리기를 바랐다. 눈이 나의 과거를 모두 덮어버리기를. 덮어버리되 지우진 않고 그 아래 묻어두기를. 내가 어떤 놈인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이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고 땅에서 싹이 틀 거야. 따뜻한 바람이 불면 흙으로 돌아간 모든 것들이 생명으로 돌아오겠지. 아름다워지는 거야. 온 세상이.

 그러기를 바랐다. 작은 소망이자 모순이었다. 날이 따뜻해지고 눈이 녹아내리자 나는 망상과 환상에 시달렸다. 온 세상이 붉어졌다.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과 얼어있던 시체들이 죽기 전의 모습을 간직한 채 내게 물었다.

 너는 왜 아직 살아있는 거지?

 생명은 덧없이 사라진다. 날이 춥고 뱃속이 비면 더 허무하게 사라진다. 겨울은 죽음의 계절. 모두가 죽어가는 그 시기에 나는 오히려 살아난다. 반대로 모두가 살아날 때 나는 홀로 죽어간다.

 빌어먹을 체질이었다. 모두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봤다. 이종을 대하는 눈. 다른 것을 보는 눈. 틀린 것을 배척하는 눈.

 살아남기 위해 감각이 깨어났다. 남들의 감정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반대로 나의 감정은 철저히 숨겼다. 나를 대하는 눈들이 바뀌었다. 나를 두려워하는 눈이었다. 나는 공포였다. 그들은 하얀 밤을 보내길 두려워했다.

 고아원을 나온 뒤, 고등학교 3년을 그렇게 보냈다. 졸업하고 일찍 사회에 뛰어들어 최대한 정상인인 척 하고 살아가려 했지만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매일 공장과 막노동 현장을 전전하고 쥐 죽은 듯이 잠에 드는 하루의 반복. 그날 밤이 열대야라면 잠에 들지도 못 한다. 사람 좋은 어른들이 살갑게 말 걸어와도 섞이지 못 했다. 거부했다.

 형님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나처럼 망가진 인간들과 동료가 되었다. 해결사가 되었고 그곳에서 나는 최고였다. 동생들이 생겼다. 메서드도 알게 됐다. 업계에서 백야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뒤틀린 세상이었기에 뒤틀린 인간도 인간일 수 있었다. 한 바퀴 돌아 정상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 거라고 착각했다. ‘그 일’에 부딪혔다. 해결할 수 없는 사건. 동생들이 다쳤다. 나 때문에. 메서드가 화를 냈다. 비난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 못 했다. 나는 업계를 나왔고 카코에게 연락했다. 프로덕션에서 일하게 되었다.

 치히로를 만나고, 선배와 만났다. 아나스타샤를 스카우트 했으며 미오와 시키도 차례로 데려왔다. 맞지 않는 일이었다. 체질에도. 성격에도.

 나는 죽어 간다. 죽어가고 있다. 이 여름에, 열기 속에. 습도의 가운데서 내리는 비에 짓눌린다. 비는 학수의 것. 눈을 녹이고, 녹아내린 눈은 하수구 아래로 흘러간다. 사라진다. 먹구름 아래 까맣던 세상에서 순간 번뜩인 빛이 직감을 건드렸다.

 자동차. 달려온다. 부딪친다. 충돌한다. 쾅, 하고. 상승. 뒤이은 낙하. 아스팔트에 누운 몸 위로 비가 내린다. 정장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날아갔던 모자가 얼굴에 떨어진다. 어지러운 세상을 가려준다.

 몸이 무거워 진다.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 야.”

 눈을 떴다. 정말로 몸이 무거워서. 천장이 하얗고 전등이 밝았다. 뒤척이지도 못하고 고개만 들어 확인했다. 누군가 내 몸을 누르고 있었다. 시키였다. 야. 불러도 깨지 않았다. 내 복부 위에 머리를 대고 자고 있었다.

 천천히 손을 들었다. 통증이 아릿했지만 생각만큼 아프진 않았다. 툭. 머리를 건드렸다. 일어나. 더 세게 머리를 밀어냈다. 비켜.

 우우웅. 시키가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말 더럽게 안 듣는 고양이 같으니. 곤란한 와중에 문이 열렸다. 미오가 들어왔다.

 “겨울P! 일어났구나! 그런데, 시키냥!”

 날 보자마자 환해지더니 시키의 꼬락서니를 보고 얼른 떼어냈다. 덕분에 몸이 가벼워졌다. 상반신을 일으키고 주변을 확인했다. 나는 환자복을 입고 병실 안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심지어 1인실이었다. 침대 옆 서랍 위에 내 옷이 개켜져 있고, 밖에서는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쉴 새 없이 창문을 때렸다.

 시키가 입을 열어 하품을 했다. 흐암. 고양이 같은 몸짓으로 인사했다. 백야, 잘 잤어? 미오가 황당해 했다.

 “잘 잤을 리가. 환자 위에서 누르고 있으면 어떡해.”

 “죽은 듯이 잘 자길래 진짜 죽은 건가 싶어서 심장이 뛰는지 확인하려 했지. 나도 깜빡 잠들어 버렸지만.”

 “불길한 소리하지 마. 그리고 시키냥이 잘 자면 어떡해. 병문안 와서는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걸. 새벽에 폰이 엄청 울리는 바람에 일찍 깨버렸으니까. 먼저 병원 와서 미오 올 때까지 심심했다고.”

 “그건 잘 한 거지만…….”

 “그러니까, 시키냥의 수면부족은 백야가 원인이다!”

 시키가 또 달려들었다. 목덜미 부분에 코를 대고 킁킁대는 걸 미오가 또 떼어냈다. 에이, 이 냄새가 아니야, 다음엔 정장 입어. 만족하지 못 했는지 환장할 소리를 했다. 내가 미안해, 겨울P. 미오도 포기하고 녀석을 붙잡는 데에만 신경 썼다.

 “그런데 겨울P가 정장 말고 다른 옷을 입은 건 처음 보네.”

 “갈아입는다고 한 게 환자복이라니. 백야 취향이 너무 이상해.”

 “시키냥이 할 말 아니잖아. 입고 싶어서 입은 것도 아니고.”

 “하얗다는 점에선 이쪽이 더 옷과 매칭 될지도 모르지만.”

 “음음. 확실히. 다음에는 하얀 정장을 입는 것도 괜찮을지도.”

 미오가 말을 돌리려고 했다. 미안해. 나는 흐트러진 옷을 정리했다. 사이로 드러난 커다란 흉터들을 가렸다. 불쾌한 걸, 보였어.

 “겨울P가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멋대로 보려한 건 아니지만…….”

 미오가 말끝을 흐렸다. 이런 아이였다. 남의 상처를 들춘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아는 아이. 침울해지려는데 시키가 자신의 백의를 내줬다. 이거 입어.

 “어제 실험하다가 좋은 향을 만들어 냈거든. 아직 잔뜩 묻어있을 거야.”

 “고마워.”

 나는 호의를 받아들였다. 대신 시키는 개켜져 있던 내 정장 상의를 집어 들었다. 이건 내가 입을게. 

 “병원에서 세탁하고 건조기로 말려서 뽀송뽀송해.”

 “오오. 역시 환자를 위한 최고의 서비스! 큰 병원은 다르네!”

 미오가 합세해 분위기를 돌리려 했지만, 내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대체.

 “대체, 내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미오와 시키가 입을 다물었다. 둘 다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겨울P, 기억 안 나? 백야 혹시 기억상실증? 극단적인 가능성들을 부정했다. 기억은 나, 퇴근 중에……. 조금 머리가 아팠다. 목에서부터 올라온 통증이었다.

 “퇴근 중에, 사고가 있었어. 비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이고, 옆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자동차랑…….”

 “부딪쳤어. 그때 빨간불이었다고. 겨울P가 갑자기 횡당보도로 걸어 나오는 바람에 지나가던 차랑 충돌한 거야. 운전자가 겨울P 태우고 얼른 병원까지 달려와서 다행이지 큰일 날 뻔 했다니까.”

 “브레이크 밟은 덕에 세게 치이지도 않았어. 의사들도 큰 이상은 없으니 안정만 취하라고 했지. 불행한 건 오히려 운전자일 걸. 퇴근 중에 갑자기 튀어나온 남자에게 쾅! 했잖아. 사람 치었다고 조마조마 했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부상자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건 좀…….”

 “응? 왜? 좋은 소식이잖아. 과실 따지자면 백야 잘못인데 운전자가 괜찮다면서 무사하기만 하면 됐다고 고소도 안 하겠다고 했는걸. 솔직히 따지고 보면 사람 친 입장에서도 트라우마로 남을 기억인데.”

 “그만, 그만해! 내가 다 숨 막혀!”

 잠자코 듣다 얘기에 끼어들었다. 너희는, 어떻게 온 거야? 미오가 폰을 꺼내 대답했다.

 “전화 왔어. 겨울P가 차에 치였는데, 입원하려면 보호자가 필요하니까 얼른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나는 깜짝 놀라서 일어나자마자 전철 타고 여기까지 왔지.”

 “제일 먼저 온 건 치히로 씨. 생각해 보니 우린 미성년자라서 보호자가 될 수 없잖아? 당연한 사실인데 급하게 오느라 깜빡했어.”

 “치히로 씨가 와서 다행이야. 입원비도 내주고. 마침 오늘이 쉬는 날이라 올 수 있었지. 지금은 잠깐 휴게실에서 쉬는 중. 우리가 대신 있겠다고 했는데 시키냥이 환자를 배고 있을 줄은…….”

 “냐하하. 백야 나름 괜찮았어. 다키마쿠라처럼.”

 “누가 부른 건데? 내가, 여기 있다고.”

 “그건…….”

 “아냐.”

 시키의 당돌함에 미오가 뒷목을 잡았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포기했는지 통화목록을 보여주었다. ‘아냐☆’에게서 스무 건의 통화가 와 있었다.

 “응급실도 바쁘고 입원은 시켜야겠는데 보호자도 없고. 폰은 잠금 걸려있어서 어디 연락도 못 하고. 그때 아냐한테서 마침 전화가 걸려왔대. 간호사 언니가 받아서 상황 알려주고, 아냐는 가을P한테 알리고 치히로 씨한테도 알리고. 그래도 계속 불안해서 우리한테도 전화한 거야. 자는 중이라 바로 전화를 못 받았지만. 겨우 일어나서 받았을 땐 아냐의 목소리가…… 너무 초췌했어.”

 미오는 시키가 입은 재킷을 뒤적거렸다. 주머니에서 내 폰을 꺼내 건네주었다. 전화해 봐, 아냐, 한숨도 못 잤을 거야.

 “…….”

 병실에 혼자 누워 나는 한참을 폰만 만지작거렸다.

 마지막 통화는 아나스타샤로부터 발신. 8분 24초. 꽤 길게 통화를 했다. 간호사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려웠을까. 나의 사고 소식에 그만 얼어버렸을까. 어느 쪽이든 8분 24초 동안 아나스타샤는 혼란 속에, 그 뒤로는 고통 속에 있었다. 그 아이가 아픔을 보낸 덕에 나는 건방지게도 이곳에 편히 누워있다.

 모두가 잠든 시간이었다. 선배를 깨우는 것도, 치히로에게 연락하는 것도 모두 오래 걸렸겠지. 닿지 않는 통화음만 길게 이어지고, 시간이 천천히, 느리게 흘렀을 거야. 답답하게, 점점이.

 몇 번이나 전화를 걸다 드디어 치히로가 받은 뒤에도 안심할 수 없어 미오와 시키에게까지 연락했다. 불안을 억누르고 싶어서. 또 몇 번이나 애를 태운 끝에 드디어 연결된 통화에서 처음으로 낸 목소리는 미오에 말에 따르면 초췌했다.

 모든 것이 잠든 시간에, 심지어 나조차도 꿈에 빠져있던 시간에 그 아이만이 깨어서 나를 걱정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나스타샤.”

 전화를 걸자마자 받았다. 끊기듯 작은 숨소리만이 들렸고 나는 이름을 불렀다. 곧장 대답이 들렸다. 프로듀서. 독특한 R 발음이 귀에 똑똑히 닿았다.

 “괜찮은 건가요?”

 “응.”

 “Ты болен…… 아프지는 않아요?”

 “괜찮아. 많이 다친 건, 아니야. 조금만, 조금만 안정을 취하면 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은, 건방이겠지. 때문에 나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천천히 입을 열어 기다리는 아나스타샤에게 전했다.

 “고마워.”

 “Да(네)…….”


 *


 빗소리가 연해졌다.

 혹시 누가 오지 않을까 싶어 문 쪽을 봤지만 낌새는 없었다. 혹시 모르지. 미오와 시키라면 어떻게든 엿들으려고 문에 바짝 붙어있을지 몰라. 그럴 리 없는 가정임에도 일부러 목소리를 줄였다. 비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정말로 몸, 괜찮은 건가요?”

 “괜찮아. 정말로. 당장 일어나서, 뛸 수도 있어.”

 “Нет(안 돼요)! 후유증 있을지 몰라요!”

 농담이었는데. 진심이 담긴 걱정이 돌아와 버렸다. 곤란한 아이야. 전화 너머로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곤란한데 그 점이 또 좋은 아이지.

 “врач. 의사 선생님이 많이 다친 곳은 없다고 말해줬어요. 그래도 아냐, 걱정했어요. 얼른 프로듀서가 일어나서 전화해 주기를 바랐어요.”

 “이젠 정말로, 괜찮아. 빈말이 아니야. 나, 몸은 튼튼하니까.”

 “프로듀서. 아냐, 미안하다는 말도 해야 해요.”

 “미안하다고?”

 짐작 가는 일이 없었다. 혹시 로케에서 사고라도 친 건가. 말해도 돼, 화 안 낼 거야. 머리를 굴려 봐도 아나스타샤가 그럴 거 같지는 않지만, 혹시 모르니 최대한 부드러운 톤을 내려고 애썼다.

 “프로듀서의 몸, 봐버렸어요.”

 “어?”

 “시키가 누워있는 프로듀서의 사진을 보내줬는데, 옷 사이로 조금…….”

 눈을 문 쪽으로 향했다. 이 말 안 듣는 고양이 진짜. 이가 갈리는 걸 참았다. 지금은 안 돼. 나중에. 그보다.

 “별 거 아니야. 그냥.”

 흉터가 따끔거렸다. 거짓말을 하는 걸 내버려두지 않는군. 괜시리 모든 게 미안해졌다. 무엇이 미안한지도 모르고 미안했다. 못 보일 꼴을 보였나. 불쾌하게 만들어 버렸나. 떠오르는 모든 생각이 부끄러웠다. 가능하다면 존재를 지우고 싶었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요. 여름에도 платье, 정장, 벗지 않아서. 프로듀서는 더위에 힘든 체질인데도. 그런데, 그런 이유가 있는 줄은…….”

 “사과할 일 아니야. 별 것, 아니니까. 그러니까.”

 애써 부인했다. 부인할수록 혀가 꼬이고 오히려 무언가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어떻게 끝맺음을 지을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젠장. 가장 위험한 순간에 직감이 반응하지 않았다.

 그 순간 아나스타샤가 정곡을 찔러왔다.

 “프로듀서. 미안해하는 거 같아요.”

 “솔직히, 조금.”

 “프로듀서는 항상 그러네요. 잘못하지 않아도 미안해하는 게 많아요.”

 목소리가 떨렸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심장까지 굳어버려 숨도 쉬지 못 했다.

 “자신에 대한 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요. 저는 프로듀서에게 기대기만 하는데. 혼자서는 무엇도 못 하고, 도움만 받는데.”

 아니야.

 “제가 믿음직하지 못 한 거라 여겼어요. 미숙해서, 어려서. 그렇다면, 이번 일을 잘 해내면, 혼자서도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프로듀서도 아냐를 믿어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목표로 삼았어요.”

 너는 이미 충분히 강한 사람인데.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어요.”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사람인데, 나 따위로 인해 괴로워해선 안 되는 사람인데, 나는 또 너에게 마음의 짐을 지게 만들었어, 이럴 바엔 역시 나 같은 건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자괴가 자괴를 낳아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외로웠던 거죠? 프로듀서는.”

 자상한 음색이 숨결로 변해 뺨에 닿았다. 마법처럼. 녹아내린 정신 아래 파묻혀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미오와 시키에게 들었습니다. 프로듀서, 힘들어했다는 거. 그렇지만, 말해주었다는 거. 덕분에 알게 됐어요. 우리와 프로듀서, 많이 가까워졌구나.”

 목소리가 가까웠다. 마치 바로 내 옆에 아나스타샤가 있는 것처럼. 은하수를 닮은 눈동자와 겨울의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강한 중력으로 끌어당겨 물리적인 거리감이 무한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아냐도 외로웠어요. 러시아와 홋카이도, 학교와 세상. 주변에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늘 마음은 공허하기만 해요.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여도 수억 광년 떨어진 별들처럼. 저는 그저…… 그들의 모습을 몰래 망원경으로 훔쳐볼 뿐이었어요.”

 망상이 어린 아나스타샤를 그렸다. 환상이 그 옆에 어린 나를 데려왔다. 우리는 서로의 장소에서 혼자였다.

 “그 외로움이 가신 건 누군가 말을 걸어줄 때. 혼자서 거리를 방황하던, 남들과 달라 보이는 저에게 한 사람이 말을 걸어줬어요. 놀랍게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를 해줬어요. 별의 이야기.”

 내가 고아원에 들어갔을 때, 아나스타샤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내가 학수를 죽이고 고아원을 나왔을 때, 아나스타샤는 러시아로 갔다. 내가 형님들을 만나 해결사가 되었을 때, 아나스타샤는 일본으로 돌아왔다. 내가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왔을 때, 아나스타샤는 나를 만났다.

 “вселенная(우주). 이 넓은 우주엔 얼마나 많은 은하계와 은하, 태양계와 별들이 있을까요? 얼마나 오랜 시간을 넘어 별빛은 우리에게 닿는 걸까요? 그 무수한 가능성 속에서 만난 우리의 인연은…… фантастический. 환상적인 운명일 거예요.”

 운명. 우리의 만남이. 내가 아나스타샤를 발견한 찰나가, 겨울을 느낀 본능이, 명함을 건넨 순간이. 모두.

 “아이돌이 되면서 저의 인연은 무수히 넓어졌어요. 미오와 시키를 만나고, 미나미, 란코, 미쿠. 가을P, 치히로 씨. 직접 만나진 못 했어도 TV와 라디오, 노래를 통해 이 별의 수많은 팬들까지도 만나봤어요. 그 인연들의 시작에.”

 당신이 있어요. 심장이 뛰었다. 덜컹, 하고. 나의 안 깊숙한 곳으로부터 발끝까지 요동쳤다. 그 시작에 아나스타샤가 있었다.

 프로듀서. 백야. 겨울P. 아나스타샤가 하나씩 ‘나’의 이름을 속삭였다. 당신의 모든 모습이 저의 새로운 모습을 이끌어내요. 그 때마다 심장의 고동이 강해져갔다. 어떨 때는 귀엽게, 어떨 때는 쿨하게, 또 어떨 때는 열정적으로.

 “우리에게 해가 된다는 생각, 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 말아주세요. 우리의 ‘지금’은 당신과…… 프로듀서와 함께 있기에 이룰 수 있는 거니까.”

 고동이 멈추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적응되지 않았다. 진정되지 않았다. 이대로는 미쳐버리거나, 혹은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되어버릴 거 같았다. 그럼에도 싫지만은 않아서 나는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피가 빠르게 흐르고 체온이 상승했다. 뇌가 과부하하자 환상이 가속했다. 지난 며칠간이 뒤섞이고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 안에서 또렷하게 반짝이는 것은.


 사과 받으려는 게 아니야.

 고마운 거야.

 아이돌이 된 지금은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워서 힘들어도 견딜 수 있어.

 언젠가는 홀로 반짝이는 별이 되고 싶어.

 미아가 될지 모르지만.

 겨울P가 이끌어주겠지.

 겨울P도 나를, 우리를 믿어줘.


 단호하게 그인 줄 알았던 경계를 넘나드는 유성.


 백야는 나랑 닮았어.

 난 이해해.

 나랑 아냐랑 미오가 이미 받아들여줬잖아.

 불안해 할 필요 없어.

 너는 우리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아.

 아이돌이 시키인 게 아니라, 시키가 아이돌이야.

 프로듀서가 백야인 게 아니라, 백야가 프로듀서지.


 방랑자의 발걸음을 이끄는 향기.


 만약에, 프로듀서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그땐 아냐에게 말해줘요.

 그때는 아냐가 프로듀서를 도와줄게요.

 치히로 씨, 가을P.

 사무소의 모두가 프로듀서를 도와줄 거예요.

 обязательно(반드시).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나’와 ‘나’를 포근히 감싸 안는 겨울.

 내면이 한층 격해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이대로는 정말 폭발해버릴 것 같아서 조심히 입을 뗐다.

 “정말로, 말해도 될까?”

 “сколько хочешь. 얼마든지요.”

 “무능력한 내가, 너무 싫었어.”

 “프로듀서는 무능력하지 않아요.”

 “남들이 보는 내가, 내가 생각하는 내가. 방해되는 것 같았어. 너희들에게. 너희는 아니라고 해도, 나는, 선배처럼 하지 못해. 말도 서투르고, 얼굴도 험악하고, 어둡고, 이상한데다, 남들이 이해 못할, 그런 녀석이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쏟아낼 말들이 너무 많았다. 좁은 문을 두고 서로 나가겠다고 끼어드는 통에 폐가 감당하지 못 했다. 이대로는 하루가 다 걸려도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겠지. 스스로가 한심했다.

 “프로듀서의 말로 해주어도 좋아요.”

 다시 상냥한 음색이 나를 어루만졌다.

 “제가 못 알아들어도, 프로듀서가 후련해질 수 있다면, 원하는 만큼 해주었으면 해요.”

 해결책을 제시해주진 못 하겠지만. 조금은 속상해 하는 목소리였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직감이 대신 답했다. 괜찮아.

 “나는…….”

 해결책은 이미 내 안에 있으니까.

 “나는 무서웠던 거야. 그래. 무서웠어. 쓸모없는 내가, 해결사가 아닌 내가. 동생들이 다쳤는데 아무것도 해결 못 하는 내가 싫었어. 업계를 떠나 도망쳐서 여기까지 왔지. 프로듀서가 되었고 너희들을 만났지만, 프로듀서인 나는 약해. 약해서 너희들이랑 멀어지려 했어. 나를 이해 못할 거라 여기고, 이해 못하도록 감정을 숨기고 다닌 거야. 표정을 드러내는 건 약점이니까. 나는 너희가 내게 다가오면서 나의 약한 모습들이 드러나는 걸 두려워했어. 무서웠어. 강박적으로 운동도 했지. 결국 전부 나를 위했던 거야. 나는 이기적인 놈이야. 비겁한 새끼. 어설프고 말만 번지르르한 놈. 나는 그런 놈이야. 고아원을 나온 뒤로도 변한 게 아무 것도 없었지. 학수가 심은 공포가 늘 나를 지배했어. 학수가 원하는 대로, 학수의 그림자 아래에서 살아왔으면서 그걸 부정하기 위해 강한 척 하고 있었어. 부모를 잃고 원수의 가르침에 굴복해 고아원 한 구석에 틀어박힌 10살짜리 꼬맹이. 진솔하게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눈 아래에 파묻고 여름이 올 때마다 벌벌 떨어온 내가, 바로.”

 백야였어. 트라우마. 나는 무능력한 겁쟁이야. 나를 가둬온 기억의 정체. 프로듀서를 할 녀석이 아닌. 알면서도 인정하기 싫었어. 학수가 원하는 대로 자란 흉기. 그런데, 막상 마주해보니.

 “별 거 아니네. 나란 놈도.”

 불안이 가셨다. 스스로가 더욱 한심해졌다. 이렇게나 쉬운 일을 10년씩이나 미뤄왔다니. 실컷 잘난 척만 했지 나 자신도 해결 못 하는 놈이었어. 웃음이 다 나와.

 “아나스타샤.”

 “Да(네).”

 “역시 난, 프로듀서를 할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아냐는 방금 프로듀서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해요.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어요. 그런 생각이 든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아요. 설령, 백야가 프로듀서가 아니게 된다 해도, 아냐가 아이돌이 아니게 된다 해도.”

 당신은 아나스타샤의 специальные. 눈꽃 한 송이가 내려앉았다.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변치 않으니까. 나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되찾아갔다. 과장도 축소도 없이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는 자리에서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인생에서 가장 편안한 순간. 나의 계절, 나의 것. 나는 겨울에 있었다.

 그래도. 아나스타샤가 작게 덧붙였다.

 “아직은 좀 더 아이돌, 하고 싶어요.”

 “네가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Спасибо(고마워요). 프로듀서와 함께라면 가능할 거 같아요. 친구도 더 많이 생기고, 일도 더 잔뜩 해보고 싶고. 노래도 춤도 지금보다 더.”

 아직 즐거운 일, 더 잔뜩 하고 싶네요. 웃음소리가 내 안의 스위치를 눌렀다. 이제 가봐야 해요. 아나스타샤가 아쉬운 목소리를 남겼다.

 일, 해야지? 맞아요, 아침도 먹고 준비해야 돼요. 피곤하지 않겠어? 밤 샜을 텐데. 가을P가 조금은 쉬게 해줄 거랬어요. 역시, 선배네. 가을P는 대단합니다, 우리 일도 도우면서 안 보이는 곳에서도 쭉 일하고 있어요. 정말 바쁘구나, 그 사람. 온천 거리 곳곳에 숨은 장소는 없는지 계속 찾을 거래요. …… 있잖아, 아나스타샤.

 “오늘 찾아갈게. 거기로.”

 “Что(네)? 프로듀서, 쉬어야 하지 않나요?”

 “몸은 괜찮아. 오히려, 움직여야 할 거 같아.”

 “무리하지 말아야 하는데.”

 “가고 싶어.”

 “프로듀서 혹시…… 온천에서 쉬고 싶은 건가요?”

 “응. 그러려고. 조금, 촉박한 일정이겠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아냐가 프로듀서에게 온천의 즐거움을 알려주겠습니다.”

 “기대할게.”

 “천천히 와주세요. 아냐, 일해야 하니까.”

 “저녁 즈음, 도착할 거야.”

 전화가 끊겼다. 꽤 오래 폰을 귀에 대고 있었는데도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최고조. 근래 들어 가장 완벽한 컨디션이었다. 빗소리가 마지막 음을 장식하고 있었다. 나는 좋아하는 노래를 되새겼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지친 그리움으로 너를 만나고,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난 너를 찾아 떠나갈 거야.

 “아이돌을 계속할 수 있게.”

 눈을 감았다. 그게 프로듀서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이성과 본능이 교차하더니. 너를 위해서 무엇이든 하겠어. 해결을 시작했다.


 *


 치히로가 말했다.

 무대 위는 아이돌의 영역. 무대 아래는 프로듀서의 영역.

 지금부터 할 일은 프로듀서의 일. 아이돌의 프로듀스. 즐거운 일을 더 잔뜩 할 수 있도록 해야 해. 내가 아는 최고의 프로듀서들. 제작은 학수, 기획은 강이, 매력을 발굴하는 건 선배. 모두 맡은 역할이 다르지. 선배는 마법사야.

 아이돌은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신데렐라. 평범했던 소녀들에게 마법을 걸어 무대로 데려가는 게 마법사의 일. 하지만 선배. 저는 마법사는 될 수 없어요.

 백야 씨는 기사예요. 카코가 말해주었다. 성으로 가는 신데렐라들을 지키는 사람. 그것이 나의 역할. 학수와 강이가 다르듯 나와 선배도 달라야 해. 지금까진 그걸 몰랐지만 이제는 알았어. 선배에게 아이돌이란 숨은 매력을 가진 사람. 나에게 아이돌이란 아름다운 사람.

 다들 힘든 일을 겪었어. 아나스타샤는 외로움, 미오는 괴롭힘, 시키는 버림. 그것을 저마다 극복해냈지. 그것이 아름다움. 나에겐 없던 것. 이미 아름다운 그 아이들에게 내가 걸어줄 마법은 없어. 내가 할 일은 다른 거야.

 지키는 것. 피비린내 나는 어둠을 하얀 눈으로 덮어버리는 하얀 기사. 그게 나, 백야, 나의 역할. 겨울P.

 직감이 물어왔다. 무엇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지 알아? 이성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이돌을 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되는 것들. 직감이 거들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았다면, 단서를 모아야겠지.

 뽑아냈다. 지난 경험들로부터. 방해물들을.


 103호의 남자. 아나스타샤의 방에 침입했어. 방 안은 온통 아나스타샤의 굿즈. 사생팬이었지. 아나스타샤의 방에서 훔쳐온 물건이 우리의 관계를 험악하게 만들었어. 팬으로 인정할 수 없는 족속이야. 해결했고 패거리들의 정보도 알아냈어. 나머지는 카코에게 맡겼었지. 아마 지금쯤 끔찍한 경험을 하고 있으려나.


 폭력은 백야의 영역이야. 직감이 뒤틀린 어조를 냈다. 지금은 다른 영역에서 움직이자고. 이성이 해결에 발을 디뎠다. 해결사의 영역.


 그 다음은 미나미. 화보 촬영 현장에 사쨩을 데려왔지. 사실 스토커였지만. 사생이랑 다를 게 없는 놈. 그게 아니더라도 맘에 안 드는 인간 부류. 모두에게 폐를 끼쳤어. 미나미는 미오가 잘 달래줬을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둘 다 아름다운 사람이야. 하지만 결국 인간이지. 과도한 신격화, 이미지의 강요. 팬으로서 최악이었어.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직감이 거슬리는 사실을 떠올렸다. SNS의 성추행범 말인데, 어쩔 거야? 이성이 가볍게 목을 풀었다. 회사에서 대응하겠지, 우리 일도 아니고, 지금 일에만 신경 써. 할 일이 첩첩산중이었다.


 게임 센터에서 슈코를 만났어. 여우같은 인상에 여우같은 행동. 작년 총선 1위. 그러나 올해는 권외를 해버렸지. 땅에 떨어진 별인 걸까. 회사에선 계륵일 거야. 프로듀서가 떠나버렸고 그로 인해 방황 중이었어. 아이돌의 세계와 현실 사이. 마치 나처럼. 명함을 주긴 했지만, 받아들일까. 소속사와 마찰이 심해질지도. 떠나는 것도 나쁘지 만은 않을 거야. 애초에 너무 비밀을 들춰버린 건 아닌가 싶어.


 슈코의 프로듀서도 좋은 사람이었겠지. 직감이 만난 적 없는 사람의 이미지를 추려냈다. 아이돌을 지키려고 회사에 반항할 정도니까. 이성이 호응했다. 근데 실패였잖아, 이 업계는 소속사의 힘이 너무 세.


 마지막으로 어제. 란코. 아스카. 여중생들이 짜증났어. 중2병은 사람을 지치게 해. 애초에 일로 만난 사이가 아니었다면. 조금 미안해졌다. 사춘기잖아, 자아 찾기 중이라고. 그렇게 화낼 필요는 없었는데, 신경이 날카로웠어. 아스카에겐 사과하고 싶지만, 받아주긴 하려나. 두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진짜 서로를 봐줄까.


 근데 솔직히. 직감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스카 걔랑은 안 맞아. 이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


 눈을 떴다.

 작은 단서 하나하나까지 전부 머릿속에 정리해뒀다.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지경이군. 하지만 이제부터 할 일을 생각하면, 말을 좀 더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폰을 들고 카코에게 문자를 보냈다.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병상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가려했는데 문을 열자마자 치히로와 마주쳤다. 프로듀서님! 과장되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괜찮으세요?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뭘요. 당연한 일을 한 건데. 그보다 놀랄 일 좀 만들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괜찮다고만 하시더니.”

 “이제 이런 일, 다시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저기, 슬슬 일어나 주실래요? 사람들이 쳐다봐요.”

 병원비는 가까운 시일 내에 돌려주기로 했다. 못 갚을 돈도 아니고, 빚을 만드는 건 좋은 게 아니니까. 화장실까지 가는 동안 몸 상태를 다시 체크했다.

 통증이 없잖아 있었지만 점점 연해지고 있었다. 관절도 멀쩡하고 목도 유연하게 돌아가고. 꾸준한 체력 관리의 산물이려나. 내가 생각해도 괴물 같았다. 근데 나중에 후유증이 오는 건 아니겠지.

 “겨울P, 벌써 움직여도 돼?”

 돌아오는 길에 미오와 시키를 만났다. 괜찮아, 그보다. 과자가 잔뜩 들어있는 봉투를 양손 무겁게 지니고 있었다. 설마 그거, 다 먹을 건 아니지? 마땅한 지적을 하자 미오가 움츠러들었다. 흠흠, 이것도 다 병문안 온 김에 살짝…….

 “압수.”

 “아아아! 겨울P 너무해!”

 “의상 입을 때 되면, 고마워 할 걸.”

 “미오 저번에 치킨 많이 먹어서 살 조금 쪘었잖아.”

 시키의 지적에 미오는 몸을 떨었다. 그, 그때처럼 되긴 싫어. 순순히 봉투를 놓고 눈물을 삼켰다. 살짝 불었을 뿐인데 좀 많이 굴리긴 했지. 미안해져서 과자 하나까지만 양보하기로 했다.

 “근데 백야 정말 괜찮아?”

 “쿡쿡 찌르면서 말하지 마라.”

 “멀쩡해 보이긴 하는데 이렇게나 멀쩡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멀쩡하단 말이지. 백야 정말로 인간이야? 실은 진화의 산물이라거나 돌연변이 같은 거 아니야?”

 “엉뚱한 소리 마라.”

 일정이 생겼음을 말해주자 두 사람이 눈을 반짝였다. 온천 가? 왜? 아냐 만나러? 시키냥도 데려가! 달라붙는 걸 떼어내며 병실로 돌아왔다. 이런, 이런, 겨울P. 잠깐 시간을 줬더니 무슨 대화를 한 걸까? 로맨틱하게. 못 들어오게 문을 쾅 닫았다. 하지만 바깥의 소리까지 차단되진 않았다.

 아나스타샤, 네가 없는 지난 며칠간 나는 너무 괴로웠어! 저도 그래요, 프로듀서, 우리 이제 떨어지지 말아요! 삼류 연극 대사들이 심히 거슬렸다. 오지랖 넓은 동네 아줌마들 같으니.

 질릴 때까지 무시하기로 하고 치히로가 남긴 메모를 확인했다. 적혀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뭘 하든 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마치고 가야지.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누구세요? 내가 치인 자동차 차주였다.

 어제 사고를 당했던 사람이라 전하자 바로 알아듣고 내 안부를 물어왔다. 의사한텐 큰 부상은 없다고 들었지만 계속 걱정했다고. 나는 폐를 끼쳐 죄송하고 귀중한 시간과 물질적,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을 하고 싶다고 했다. 100% 내 과실이라고. 그러나 남자는 그런 건 필요 없으니 병원비에나 보태라,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을 남긴 뒤 기분 좋은 웃음 뒤로 전화를 끊었다. 감사합니다. 허리 숙여 인사를 대신했을 땐 병실 밖에 미오와 시키가 사라져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지난 몇 개월을 회상했다. 즐겁지만은 않았으나 괴롭지만도 않았다. 끝이 났다고 생각할 즈음 새로이 시작이 왔고, 내가 거쳐 온 온갖 결과들은 어느새 과정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지금’도 그러려나. 인생이 뒤엎어진 것만 같은 오늘조차 대단찮은 어제 중 하나가 되어버릴까.

 모르겠군. 재킷에 팔을 넣었다. 지금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정장의 착용감이 좋다는 것뿐이야. 구두를 신고 모자를 썼다. 거울 앞에 서서 그 안에 무엇이 보이는지 확인했다. 날카로운 눈빛을 모자챙 아래 가리고 새카만 정장 안에 그득한 흉터를 숨긴, 한국에서 태어나 변변한 스펙도 없이 아주 괜찮은 회사에서 일하는 중인 25살의 남자. 전직 해결사.

 “현직 프로듀서.”

 퇴원수속을 밟았다. 몸 상태가 괜찮았지만 병원에서 검사라도 해보는 건 어떻겠냐, 이대로 나가서 무슨 일 생겨도 책임 못 진다고 하길래 억지로 나오다시피 했다. 최고의 컨디션이었다. 그래야만 해, 할 일이 막중하니. 목표를 확실히 하고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유리문 앞에 서서 오늘을 맞이했다.

 쌓아놓은 습기를 모두 쏟아내어 구름은 땅으로 흘러들어갔다. 비가 그치고 계절의 장막 또한 걷혀있었다. 나가지 않아도 오늘의 바람을 알 수 있었다. 쌀쌀하겠지. 벌써부터 흔들리던 나뭇잎이 천천히 떨어지는 순간 나도 발을 들였다. 당신들의 계절에.

 “실례하겠습니다.”

 가을이었다.


 *


 역에서 카코에게 부탁한 표를 받았다. 굳이 직접 건네주러 왔냐고 하자 “차에 치인 백야 씨를 보고 싶어서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실로 변태적이고 위험했다. 계속 병원에 누워있었다면 분명 무슨 짓을 당했겠지.

 신칸센을 타고 쭉 이동. 어느 역에서 내려 다른 열차로 환승. 또 다른 역에서 내리면 렌트해둔 차를 타고 이리저리. 상세하게 설명해줬지만 내게는 이 정도로 밖에 안 들렸다. 푹신한 좌석에 앉아 달리는 내내 역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중얼거렸더니 옆 자리 승객이 얼른 내리고 싶어 했다. 안타깝게도 승객과 나는 내리는 역이 같았다.

 기차로 옮겨 타서는 중얼거리지 않기로 했다. 중간에 도시락을 먹고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목적지였다. 내리자마자 소개 받은 렌트카 업체로 갔다. 미리 얘기를 들은 사장이 직접 고급스러워 보이는 차 한 대를 골라줬는데 부담스러워서 옆에 평범한 차로 바꿨다.

 출발 전에 폰으로 목적지를 검색했다. 들은 대로 유명세가 조금 있는지 사회 뉴스에서 몇 번 다뤄진 적이 있었다. 갑자기 찾아가면 실례니까 선배에게도 문자를 보낸 뒤 액셀을 밟았다. 큰길가를 쭉 달리다 온천 거리로 가는 갈림길에서 반대쪽으로 빠져나갔다. 도로 위에 차는 나 하나. 그나마도 어느 정도 들어가니 비포장이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래 달려서야 제법 멀쩡하게 생긴 여관이 보였다.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어. 나갈 때쯤엔 해가 질지도 모르겠군. 급히 발을 옮겨 여관으로 들어갔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종업원이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나를 보는 눈빛이 묘했다.

 “한분이신가요?”

 “이곳 손님들 중, 아이돌이, 있지 않습니까?”

 종업원이 살짝 입을 벌렸다. 아아, 프로듀서 분이신가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은 나를 계단까지 안내해주었다. 손님이 오면 혼자만 올려 보내달라고 했다면서 따라오진 않았다. 올라가셔서 중간에 있는 방, 단풍실에 계십니다. 묘한 웃음을 남기고 종업원은 돌아갔다.

 오래된 여관이라 그런지 계단을 오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산속이라 보수를 하기도 어렵겠지. 벌이는 좋아 보이지만. 쭉 올라가서 바로 앞에 있는 방 앞에 섰다. 장지문에 커다랗게 그려진 색색이 단풍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문을 두드렸다. 타카가키 씨.

 “겨울P입니다. 기억하십니까?”











분량이 매우 길어지고 있습니다.

하편이 나오기 전까지 이전 편들을 보고 와주시면 더 재밌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전 편의 링크를 달아놨으니 이용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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