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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 성-[0:카미야 나오, 호죠 카렌- 재활(2)](재업/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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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27, 2019 23:41에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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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있던 음식과 담배는 다 떨어졌고, 작업 현장의 수도관과 전기가 곧 복구되는데 정작 세면도구와 업무에 필요한 전기 설비가 없었다. 그래서 거의 일주일 만에 밖으로 나와 그나마 가까운 백화점으로 향하기로 했다. 잠시 후에는 아르바이트생을 맞이해야했기에, 도쿄 시내의 무더위 속에서 힘없이 걸어 다니는 사람들 사이를 미친년마냥 달려 백화점에 다다랐다. 

물건이 가득 담긴 장바구니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의외로 시간이 남았기에 돌아가는 길은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다 보니, 올 때는 뭐가 있는지도 기억이 안 날정도로 쏜살같이 지나갔던 공원에 다시 되돌아왔다. 

지독한 더위 때문인지, 어른들도, 이맘때쯤이면 잠자리채나 축구공을 가지고 뛰어다닐 어린 아이들도 안 보였다. 그런 와중에 오직 한 명의 소녀만이 둥근 모양의 광장 중앙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중간에 허공에 손을 흔들거나 양손을 뻗는 그녀의 동작은 아무래도 아이돌의 그것인 모양이었다. 뒤로 묶은 주황색의 머리카락이, 미숙하지만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춤동작에 이끌려 휘날리고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녀를 관찰하고 있으니, 어느 순간부터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체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인지 동작이 깨지고, 쓰러지듯이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나 같은 게 어떻게 아이돌을 한다는 거야'라고, 신세를 한탄하는 중얼거림이 내 귀에 들려왔다.


'아쉽다'


그것이 소녀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내 감상이었다.

어려운 춤동작과 그 지랄 맞은 더위 속에서도, 얼굴에는 옅게나마 즐거운 미소가 피어나 있었는데.


>>>>>>


<2015년 7월 20일 월요일, 오후 12시 40분>


[공연 시설 청소 및 작업 보조 모집]

[모집인원: 1명

근무 기간:월요일~ 금요일 (주5일)

근무시간: 오후 1시~오후 9시(저녁 식사 제공, 고용인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 협의로 근무 및 식사 시간 조정 가능)

시급: 1250엔(매일 근무 마감 시간에 지급)]


"수상해..."


[담당업무: 현장 청소 및 무대 건설 작업 보조(작업 종류에 따라서 보호구 무상 제공)

자격요건: 중학생 이상~30세 이하, 성별 상관없음

우대조건: 무대 예술이나 연출, 혹은 목공예에 관심이 있는 분. 일상적인 영어 구사가 가능하신 분. 입이 무거우신 분, 무대 의상이 잘 받는 분.

주의: 작업 중에 부득이하게 임금 및 상해문제가 생길 경우 346 프로덕션이 아닌 하단의 대표자에게 문의바랍니다. 고용주는 흡연자입니다.]


"수상하다고..."


[근무지: 도쿄 미나토구 시바 X쵸메-OX-O, 구 346 아이돌 캐슬 시어터 건물

대표자: W. P. 윌리엄스

연락처: [email protected](전화 등을 통한 음성 문의는 받지 않습니다.)]


"..."


수상하다. 

도쿄의 최저시급보다 300엔가량 높은 시급, '입이 무거운 사람 우대', '메일로밖에 할 수 없는 상담' 말고도 이상한 조건이 한가득. 일부러 수상하게 느끼도록 만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노골적이잖아. 거기다가 고용주가 흡연자인 걸 미리 적어준 건 고맙지만 굳이? 

시급 1250엔과 집으로부터의 접근성에 낚여서 원래 하던 일도 그만두고 덥석 물은 일감이다. 하지만 정작 외관부터 처참한 현장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 구직광고의 수상함이 신경 쓰인다.

346 프로덕션. 일본 전국을 넘어 해외까지 뻗어 나가는 거대 엔터테인먼트 그룹. 그 이름이 무색하게도 이곳, '346 아이돌 캐슬 시어터'는 적어도 몇 년 이상은 방치된 것 같다. 

꽃가루와 먼지 등의 이물질들이 엉겨 붙은 유리창, 몇 년째 걸려있었는지 모를 너덜너덜한 현수막들, 위에서 현수막을 비추는 조명 중 일부는 나무뿌리처럼 튀어나온 전선 다발만을 남기고 없다. 통유리로 된 정문 앞에는 니퍼 따위로 잘라낸 듯한 쇠사슬과 자물쇠가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문득 예전에 봤다가 충격을 받았던 범죄영화가 떠오른다. 

범죄조직이 선량한 사람들을 속여서 이런 낡은 건물로 데려와 고문하는 장면이 있었지. 어쩌면 그 영화에서 나온 것과 비슷한 위험한 함정이 카미야 나오의 17년 인생에 닥친 게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고용주라는 사람의 메일을 차단하고 그대로 집에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래, 오늘은 그냥 시간 좀 낭비한 셈 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을 것같다.

비록 카에데 언니는 없지만,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였던 카렌을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감자튀김과 파스타 요리를 직접 만들어서 대접하자. 그리고 오늘 겪은 이 이상한 일에 관해 얘기해야지! 그깟 돈이 얼마라고 이런 소중한 일상을 걸 수 있[시급 1,250엔 X 8시간=10,000엔, 1개월 근무 최소 200,000엔 이상]


"실례합니다! 아르바이트 신청한 카미야 나오라고 합니다만!"


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극장의 로비로 들어와 호기로운 척 소리쳐보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로비는 먼지가 쌓인 채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가구와 떨어진 샹들리에의 파편으로 어지럽혀 있어 발을 딛기도 힘들다.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이 장소에 그나마 내 맞은편, 로비의 끝자락의 커다란 문틈 사이로 차갑고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아무도 안 계신가요?"


당장에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게 무서워서, 나는 장애물들을 치우거나 넘어가며 빛이 새어 나오는 문 쪽으로 조심스레 발을 내디딘다.


문손잡이를 돌리고 천천히 문을 연다. 

문이 열릴 때 쇠 긁히는 소리나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날까 봐 긴장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기름칠을 새로 한 듯 조용하다. 문을 열자 눈에 들어온 거대한 공연장은 다행히도 로비와는 달리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하고, 벽면에 설치한 차가운 색의 간이 조명들이 부분적으로나마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무대의 중앙에 소품처럼 올려져 있는 책상 두 개 위에는 각각 전기 램프가 놓여있어, 책상 위에 무언가가 잔뜩 쌓여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대의 뒤편에 있는 것은... 로켓?

설치된 간이조명의 빛과 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내 눈으로는, 천장까지 닿을 것처럼 우뚝 서 있는 기다란 삼각형 모양의 저게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다.  그래서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관객석의 통로를 따라 무대로 다가간다. 누군가가 놓은 나무계단 덕분에 관중석 밑에서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것은 제법 쉽다.

조화(造花)로 장식된 정칠각형의 토대, 아치모양의 유리창들과 문, 층마다 세워져 있는 말 모양 조각상. 가까이에서 본 그것은 어떻게 보면 성(城)같이, 또 어떻게 보면 탑같이 보이는 게 참 애매한 구조물이다.


"이런 무대에서 아이돌이 공연을 하는 거구나..."


성내지 탑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무대로부터 부채꼴 모양으로 올라가는  관중석쪽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어둡고 조용하지만, 예전에는 많은 관객들이 모여서, 내가 서 있는 이 무대를 향해 열심히 응원을 보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아침에 카에데 언니로부터 받았던 아이돌 오디션 신청서가 떠오른다.  언니가 출근한 후, 카렌은 마지못해 받은 그 종이를 자기 마음대로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었다.

두 명분의 신청서를 전부 다.


'나오는 귀여우니까 분명 사람들이 좋아해 줄 거야. 카에데 씨가 괜히 나오의 몫까지 준비했겠어? 그러니까 한번 도전해봐.'


내가 아이돌이라... 마침 이 큰 무대에 아무도 없는데 한번 흉내라도 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저기요~?"


주위를 둘러보며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불러본다.


"아무도 안 계시죠~?"


좋아, 대답 없음. 마침 무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스패너를 마이크인 셈 치고, 관중석 정면을 보고, 심호흡...


"안녕하세요! 카미야 나오라고 합니다! 오늘 제 공연을 보러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 니다."


흔히 TV에서 나오는 아이돌들의 멘트 중 무난한 것을 흉내 내보지만 점점 소리가 작아지고 만다. 뭔가가 부족하다. 컨셉을 바꿔보자.


"모두들 안녕~! 나오를 만나러 와줘서 정말로 고마워! 다들 즐길 준비는 됐↗을?!"


이번에는 삑사리다. 삑사리도 문제지만 즐길 준비가 됐냐고 묻는 사람이 정작 즐길 준비가 안 된다.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도 여전하다. 대체 뭐가 부족한 걸까.


'내 몫은 뭐가 잘못됐을 때 여분으로 써도 되니까.'


...


이번엔 다른 쪽으로 시도해보자. 중앙에서 약간 왼쪽으로 움직인다. 한 사람의 자리가 남게끔.


"크흠."


목을 가다듬는다. 이미 충분히 부끄러운 모습을 내보였지만 이건 진짜 카렌이 봤다면 평생을 놀리겠지. 무대 위에서 카렌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1인 2역을 하다니.


"안녕하세요! 카미야 나오와... 호, 호죠 카렌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하면 나오카렌!! 오늘 이렇게 멋진 무대에서 공연하게 돼서 정말 기뻐요! 다들 즐길 준비는 되셨나요?"

"Maybe."

"?!"


정말 돌아올 거라 생각 못했던 대답에 깜짝 놀라 마이크삼아 들고 있던 스패너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우왕좌왕하며 목소리가 들린 곳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느 한 곳, 아까 보았던 탑의 문 앞에 시선이 멈추었다. 문 앞에 서있는 사람의 키는 나보다 약간 큰 정도. 검은 흑발의 보브컷을 보면 여자 같기도 하지만 고글이 붙어있는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전신은  긴 소매의 셔츠와 톱밥이 잔뜩 묻은 앞치마, 소매가 길고 넓은 보호 장갑으로 가리고 있다. 

그, 혹은 그녀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데, 순간 그 왼손에 있는 무언가가 간이조명의 빛에 반사되어 새파랗게 빛났다.

톱의 날 모양과 그것에 묻은 검붉은 액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안 된다. 안 돼. 안 돼, 뒷걸음쳤다. 저쪽의 발걸음이 서서히 빨라진다. 숨이 거칠어진다. 시야가 좁아지고 다가오는 괴한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뒷걸음치다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진다. 뒤로 쓰러진 채로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 친다. 괴한이 톱을 어디론가 던지고 뛰어온다. 달아나기 위해 몸을 앞으로 돌려 일어난다. 눈앞이 말 그대로 깜깜하다. 한쪽 어깨가 붙잡힌다. 왔던방향으로내동댕이쳐진다. 양어깨가붙잡힌다걷어찬다꿈쩍도안한다"C■i■l ■ow, ■i■s!"주먹을휘두른다막혀버린다"Pu■l ■ou■s■l■ ■og■th■r!"안된다무섭다살려줘카렌엄마미안미안해요

EVERYTHINGISOKAYEVERYTHINGISOKAYEVERYTHINGISOKAY

"CALM THE HELL DOWN!!(제기랄 제발 좀 진정해!)"

"뭐...?"


거의 절규에 가까운 낯선 언어의 고함. 양어깨에 느껴지는 온기.

갑자기 느껴지는 이 낯선 감각들에 이성과 시야가 서서히 돌아온다. 

쓰러져있는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것은 여전히 바로 전에 내게 톱을 들고 다가왔던 괴한이다. 처음에 톱을 들고 있었다가 언제부터인가 장갑을 벗은 그녀의 양손은 내 어깨 위에서 부들부들 떨린다. 지금의 나와 마찬가지의 거친 숨소리가 마스크에서 새어나온다.


"Christ!"


이내 답답해 죽겠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얼굴의 마스크를 벗어 던진다. 창백하고 희미한 조명의 빛에도 건강해 보이는 구릿빛 피부의 얼굴이 마스크 너머에서 드러난다. 어림잡아서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 정도로 보이는 얼굴, 오버 좀 하면 나와 동갑이거나 한 두 살정도 차이가 난다고 해도 믿을법하다. 

현재 상황을 본다면 그녀가 가해자, 나는 피해자 같은 모습인데, 정작 가해자 쪽의 고운 얼굴과 안경에 비쳐 보이는 회색의 눈동자가 당장에라도 울 것처럼 공포에 질려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입을 열지만,


"Miss. I have no idea why you're so freaked out right now. But somehow, if I scared the shit out of you, then you have my apology. Everything's gonna be okay...(아가씨. 아가씨가 대체 왜 이렇게 기겁한 건진 모르겠어. 하지만 어떻게 해서 내가 존나 놀라게 한거면, 사과할게. 모든게 다 괜찮을테니까...) "


들어본 적도 없는 발음으로 속사포처럼 나오는 네이티브 스피킹을 일본의 고등학교 2학년생이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눈치로나마 이 사람이 나를 걱정한다는 것만큼은 전해져온다. 나는 괜찮다고, 당신이야말로 괜찮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당장 말할 수 있는 건,


"아임 파인, 생큐. 앤드 유?"

"Wut?"


이 정도가 고작이다. 역시 잘못 말한 것까, 그녀는 기묘한 걸 본 표정으로 정지화면처럼 가만히 몇초 동안 나를 바라본다. 잠시 후 얼굴의 긴장이 풀어지고 엉덩방아를 찍으며 주저앉는다.


"아, 아유 오케이?!"

"네... 괜찮냐는 소리를 들을 입장은 아니지만, 그쪽이 무사하다면야 저도 괜찮습니다."

"헿?"


그러고는 매우 유창한 일본어로, 한숨을 내쉬듯이 대답하는 것이다. 

조금 전에 내가 했던 영어가 생각나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일본어 할 줄 알아?"

"네. 아까도 말했지만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런 식으로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놀란 정도가 아니야!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 마스크를 쓴 사람이 피 묻은 톱을 들고 다가오니까!"

"그대로 뒷걸음치는 걸 가만히 뒀다간 5미터 아래의 관중석으로 떨어지셨을 테죠. 그런데... 톱에 피가 묻어있었다고요?"


그녀는 이해가 안 되는 듯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혹시 톱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셨나요?"


그렇게 나의 새 아르바이트는 어디론가 사라진 톱을 찾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톱은 10여분 만에 관중석의 구석진 곳에서 찾아냈다. 톱에 묻어있던 검붉은 액체는 만져보니 기름이었다. 윤활유를 오랫동안 교체하지 않고 두면 점점 색이 붉어진다고, 그녀가 설명해주었다.

톱을 찾은 뒤에는 둘이서 같이, 로비에 있던 가구 중 그나마 멀쩡한 의자 한 쌍과 작은 탁자 하나를 무대 위로 가지고 왔다. 앞으로 같이 식사할 공간이 필요한 것도 있지만 지금 당장은 차도 마실 겸 간단한 '면접'을 보고 싶다는 이유였다.


나를 의자에 앉힌 뒤 그녀는 마실 것을 가져오겠다며 무대 뒤편의 커튼 너머로 사라진다. 

얼마 지나지않아, 손에 포장된 각설탕 몇 개, 컵과 주전자, 그리고 초콜릿이 담긴 쟁반을 들고온다. 내 맞은편에 앉자마자 쟁반을 탁자에 놓고, 각설탕 몇 개를 내쪽으로 밀고, 찻잔에 커피를 따르는 등 손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진한 커피의 향이 서서히 풍겨 올라온다. 

아까 전의 앞치마를 벗어놓고 와서 탱크톱만 입은 상반신, 그리고 핫팬츠 밑의 신발도 안 신은 구릿빛 맨다리가 드러난다. 눈을 둘 곳이 없었지만,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녀의 테이블 세팅이 끝날 때 까지 기다린 후, 나는 맨 처음에 해야 했을 질문을 꺼낸다.


"윌리엄스 씨 맞지? 구직 광고에 대표자로 나와 있던 사람."

"네. 풀네임은 그웬돌린 파블로프나 윌리엄스입니다. 346 프로덕션에서 일하고 있죠."

"그웬돌린? 하지만 광고의 이니셜은 W로 되어있던데."

"아아, 그거요?"


윌리엄스 씨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앉은 채로 의자를 기울여 등 뒤에 있는 작업대에 손을 뻗는다. 

넘어질 듯 말듯 휘청거리다가 작업대 위에 있던 무언가를 집어 내게 건넨다. 346 프로덕션의 로고가 그려져 있는 명함이다.


[346 프로덕션 무대 연출 컨설턴트 Wendy Pavlovna Williams]


"웬디라고 부르면 돼요. 부르기는 풀네임보다 이쪽이 편하니까요."

"그럼 웬디 씨라고 부를게. 웬디 씨, 내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알려줄 수 있을까? 우대 조건 중에서 '입이 무거우신 분, 무대 의상이 잘 맞으시는 분'같이 이상ㅎ...이해가 안 되는 게 좀 있어서 내가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건가 궁금했거든."

"일단 제가 하는 일부터 설명해 드릴게요. 여기 명함에 '무대 연출 컨설턴트'라고 보이시죠? 원래는 영화 세트장이나 아이돌 라이브 무대에 대해서 회사에 자문하는 일입니다만, 저는 말이 컨설턴트지 346 프로덕션의 온갖 부서의 요구대로 무대를 설계하고 직접 현장에서 건설과정을 감독해야 하는 입장이에요."


지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리 옆에 있는 커다란 탑을 손으로 가리키는 웬디 씨.


"이번에 제가 할 일은 저 염병할 물건의 구조를 부품 하나하나 다 파악하고 복원하는 일입니다. 2년 전에 전임자라는 새끼가 이걸 만들다가 인수인계나 설계도도 하나 안 남기고 튀어버렸거든요."


그 뒤로 웬디 씨가 설명한 내 일은 의외로 간단했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무대 위의 청소를 돕기, 필요한 경우 밖에서 장 봐오기, 웬디 씨에게 필요한 공구를 가져다주고, 필요 없는 공구는 원래의 자리대로 공구박스에 돌려놓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진 않았지만- 간혹 있을 수 있는 '무대 점검'을 도와주기 정도였다.  참고로 우대사항에 있었던 '입이 무거우신 분'은 이 작업이 사외비이기 때문에, '무대 의상이 잘 맞으시는 분'은 '무대 점검'과 관련된 항목이었다고 한다.

일단 오늘은 작업에 사용되는 공구들의 이름을 외우는 게 내 주요 업무였다. 책상만 한 크기의 공구 박스에 온갖 종류의 공구들이 한가득했지만 종류와 크기별로 정리되어있었고, 웬디 씨가 서랍과 공구 하나하나에 유성펜으로 표시를 해놨기 때문에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아까 사고는 정말 괜찮으신가요? 정말 아무 문제 없으신 거 맞죠?"

"아까도 말했지만 외우는 것도 잘 되고 있고 괜찮다니까. 지금 웬디 씨 발밑에 굴러다니는 그거, 토크 렌치 맞지?"

"제 발밑에? 아, 맞네요..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웬디 씨가 계속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내 눈치를 보는게 부담스럽다. 내가 저녁까지의 두뇌 노동으로 점점 피로가 쌓이는 와중에도 그녀는 지친 기색도 없이 미안한 표정으로 내게 간식과 커피를 계속 가져다주었다. 

그 어린 외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딸을 위해 이것저것 해주고 싶어 하는 엄마 같은 느낌이다.


"No joke, That kiddo was trying her best in this friggin' weather like a maniac. Aaaand what the hell those sons of bitches are doing? Fucking up our kid's dreams and making a goddamn motherfucking deficit, of course!(그 애는 이 좆같은 날씨에 미친것마냥 혼신을 다하고 있었다고. 그리이이이고 그 개새끼들은 뭘 하고 있지? 우리 아이들의 꿈을 냅다 조져버리고 니미시팔 염병할 적자나 내고있군 그래!)"


그러다가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엄마는 커녕 오히려 미국 영화에서 흔히 악역으로 나오는 갱스터 같다. 영어를 잘 모르는 내가 들어도 입이 험한 것과 비꼬는 느낌이 느껴질 정도다. 내 옆에서 작업을 하다 말고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아예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수다를 떠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갱스터다.

생각해보니 구인광고 주의사항에 '고용주는 흡연자입니다'라고 적혀있었지. 혹시 내가 없을 때는 담배를, 아니, 어쩌면 옛날 영화에서 본 -이름은 모르지만- 그 크고 굵은 담배를 피울지도 모르겠다. 저 들어본 적 없는 특이한 발음도 갱스터 특유의 그것일 수도 있고.


"혹시 커피 더 드릴까요?"


어느새 통화를 끝내고 나와 눈이 마주친 웬디 씨는 좀 전의 욕을 난무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다시 친절하고 존댓말을 쓰는 사람으로 되돌아왔다. 일본어 실력이 약간 부족한 걸까, 아니면 일부러 저러는걸까.

그 의문은 일단 접어두고, 나는 됐다고 고개를 저으며 다른 질문을 꺼낸다.


"무슨 얘기였어?"

"별거 아닌 잡담이에요. 저쪽에서 안부 물어본다고 전화했는데, 서로 직장 불평하는 거 말고는 할 얘기가 없어서 오늘 공원에서 본 이상한 광경에 대해서 얘기해줬죠 뭐."

"이상한 광경?"


웬디 씨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안그래도 더운데, 어떤 분이 공원에서 춤을 추고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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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https://www.idolmaster.co.kr/bbs/board.php?bo_table=create&wr_id=130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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