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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나이트 9 - 불협화음不協和音 : 니노미야 아스카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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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27, 2019 18:39에 작성됨.

 회사를 나서기 전에 베테랑 트레이너를 만나 얘기를 들었다.

 “네. 제가 분명 그 두 사람의 레슨을 담당했었죠. 냉정하게 말하자면 엉망이었어요. 칸자키도 니노미야도 개인으로서는 잘 하는 애들인데, 듀오로 호흡을 맞추는 건 처음이잖아요. 사적으로만 좀 친할 뿐, 눈앞의 서로를 보지 못 해요. 우선 그 부분부터 깨우쳐주려 했더니 받아들이지 못 하겠는지, 이상한 말장난만 하고. 자기들을 이해 못 한다느니, 어른들은 이래서 안 된다느니. 비판을 수용하는 건 본인 몫이지만 들을 맘이 없어서야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 뒤는 가을P에게 맡겼는데 역시 잘 안 됐는지 이제까지 진도가 안 나가고 있어요. 하필 또 로케 일정 때문에 자리도 비웠고.”

 다음은 점심을 먹고 온 치히로에게 물었다.

 “마지막까지 걱정하고 있었어요. 자기가 챙겨야 하는데 바빠서 그렇지 못 한다고, 당분간은 저에게 상태 체크만 해달라고 했죠. 란코는 프로덕션에도 오고 기숙사에서 지내니까 괜찮은데, 아스카는 요새 만나기도 어려워요. 학교는 잘 나가고 있어서 담임선생님을 통해 한 번 만나러 갔더니 불쾌해하더라고요. 예의가 아니긴 했지만 평소보다 더 예민해 하더라고요. 갑자기 불쑥 찾아오지 말라고. 잠깐 안본 사이에 스타일이 좀 변한 거 같았어요. 안 뿌리던 향수를 뿌리고. 담임선생님 말로는 옥상이나 계단,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있을 때가 많아졌대요. 원체 개성이 강해도 반 아이들이랑 잘 어울렸는데 요새는 아예 말도 잘 안 한다고 그러고. 그래도 밤늦게 몰래 학교에 들어오는 일은 없어졌다고 하는데……. 아, 이건 비밀로 해주세요.”

 마지막으로 선배에게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게 가능했으면 이미 선배가 직접 나서서 일을 해결하고 있었겠지. 대신 치히로에게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요청했더니 선배의 책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라고 물었더니 ‘괜찮아요, 제가 허락할게요.’ 라면서 서랍에서 수첩을 꺼내줬다. 다크 일루미네이트의 기획 일정이 적혀있었다. 아직 활동 시작 전이라 페이지를 많이 쓰진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내용은 하나. 인터뷰. 그런데…….

 책상 위에 빼곡히 정렬된 책들 사이에서 묘하게 눈에 띄는 한권을 발견했다. ‘아이돌 매거진.’ 표지에 타카가키 카에데가 커다랗게 실려 있는 다음 호. 집어 들어 상태를 확인했다. 카에데에게 받은 사인이 없었다. 내가 치히로에게 받은 견본과는 다른 물건인가. 나는  다크 일루미네이트의 인터뷰가 실린 페이지를 펼쳤다.


 *


 현대의 아이돌들에게 있어서 개성은 강한 무기로써 작용한다. 개성이라는 칼을 갈아 무대 위에서 휘두르는 우상들은 마치 신화 속 영웅처럼 추종자들을 부르고, 영혼을 울리는 아리아로 마음을 포박하기 마련.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대는 마치 하나의 연회와도 같다고 주장한다. 이 말을 한 게 누구인지 관심 있는 독자들은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 강한 개성과 독특한 언행으로 주목 받는 두 아이돌들이 결성한 유닛에 대해 소개해 보겠다. 바로 다크 일루미네이트다.


 - 만나서 반갑습니다.

 란코 : 평안하신지요.

 아스카 : 잘 부탁할게.


 - 쿨&고딕 컨셉으로 주목 받는 두 사람. 같은 소속사에서 일하기 때문에 쉽게 연상되는 조합이지만, 지금껏 단 둘이 활동한 적은 없었다. 앞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할 텐데 그 전에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괜찮은가?

 란코 : 아주 쉬운 일이다. 내가 먼저 하겠다.

 아스카 : 희귀한 일이다. 란코가 나를 소개한다니. 기대가 된다.

 란코 : 아스카는 어둠 속에 거주하는 권속 중 하나. 그 말들은 황혼의 때에 들려오는 휘파람처럼 가늘면서 강하고 고고한 선율을 연주하고 있다. 그 옷은 강하고 재빠르며, 거칠게 날뛰는 사자와 같다. 머리카락은 일곱 가지 색으로 빛나고, 메마른 외침을 노래한다. 마치 주아이외즈의 검처럼. 내 말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할 정도다.


 - 란코가 말하는 아스카는 뭐라고 할까, 마치 시적인 존재 같다. 아스카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스카 : 나쁘지 않다. 포에직하다. 내 강함을 정확히 표현해냈다.


 - 그럼 이번에는 아스카가 란코를 보고 소개해줬으면 한다.

 아스카 : 란코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건 어렵다. 고딕 드레스에 몸을 감싸인 환상세계의 프린세스. 퇴폐적인 뉘앙스는 어두운 밤에 핀 한 송이 장미 같다. 자아내는 말은 시적이며, 가끔은 어리석은 자들의 이해를 막아선다.


 - 또 시적인 표현. 약간 난해한데, 조금만 더 알기 쉽게 해줄 수 있는지?

 아스카 :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중2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도 비슷한 병을 앓고 있지만, 나는 아픈 쪽이고 란코는 연기하는 쪽이다. 연극의 등장인물처럼 행동한다. 그 모습은 중2병이라고 부르는 게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 알기 쉬운 설명이다. 굉장히 진한 감성을 가진 두 사람에게 독자들도 흥미를 가질 것이다.

 아스카 : 그렇다면 만족스럽다.


 - 지금껏 따로 활동해 왔는데, 유닛으로 데뷔하게 된 경위를 들려줄 수 있겠는가?

 란코 : 책을 펼쳐보면, 역사서의 페이지는 늘 가벼운 법이다. 우리들이 처음 섰던 곳은 네 번째의 현란한 무대. 그곳에서 모인 별들 중 하나로 태어나게 됐다.

 아스카 : 우리가 어째서 유닛이 되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우리의 모습이 닮아있다는 것이다.


 - 또 시적인 표현. 꽤나 난해한다.

 아스카 : 자세한 경위가 알고 싶다면 우리의 프로듀서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붙잡아서 심문해 보던가……. 아, 이건 조크였다.


 - 그럼 이 부분은 독자들의 해석에 맡기는 게 좋을 거 같다. 그럼 한 바퀴 돌아 만나게 된 두 사람이 드디어 CD 데뷔를 하게 되었는데, 솔직한 감상을 말해줬으면 한다.

 란코 : 수많은 별들 사이에서 태어나, 다시 하나가 되어 하늘로 올라서게 되었다. 모두 심복들의 강한 열망과 힘 덕이다. 그저, 축복과 감사를 표할 뿐이다.

 아스카 : 욕망이라 함은 끝나지 않는 것이란 느낌일 것이다. 혼자서 노래하는 데에 배불러하지 않고, 이렇게 두 사람이 노래하는 미래에까지 손을 뻗게 되었다. 나 스스로가 보기에도 탐욕적이다.


 - 두 사람 다 기쁘다는 뜻으로 알아들어도 되겠는가?

 란코 : 네.

 아스카 : 그렇다.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란코 : 어둠에 삼켜져라.

 아스카 : 앞으로 잘 부탁한다.


 *


 이해를 위해 인터뷰를 10번 정도 읽어봤다.

 치히로의 도움을 받아 한 번, 틈나는 대로 또 한 번씩, 외근 나와서도 몇 번이나 인터넷 사전에 단어 의미를 검색하고 다시 쭉 읽고서야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었다. 거래처를 도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힘들었다. 빗줄기가 꽤 가늘어졌는데도 활자를 읽을수록 습도가 숨을 조여 왔다.

 어쨌든 짧은 시간 안에 한 것치곤 꽤 훌륭하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눈앞의 소녀에게 말을 걸 엄두도 못 냈겠지.

 “주문, 하시죠.”

 “…… 블랙커피.”

 같은 걸로 두 잔을 주문했다. 친절한 점원이 마지막에 우리를 흘끗 쳐다보고 갔다. 인상 험악하고 어두운 남자와 그에게 절대 호의적이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소녀. 강제로 끌고 왔다고 의심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사실 반쯤은 강제로 끌고 온 게 맞기도 하고.

 최대한 빨리 외근 업무를 마치고 나는 거리에서 소녀를 기다렸다. 시키와 술래잡기를 하면서 이 근방의 길을 전부 파악한 덕에 회사 아이돌들이 주로 어디서 뭘 하는지 쯤은 이미 머릿속에 넣어둔 상태였다. 이 소녀, 니노미야 아스카도 마찬가지.

 비 내리는 공원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펑키한 스타일의 소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우산을 내려놓고 손에 빗물을 받고 있었는데, 무슨 뜻이 있는 게 아닌 행위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는 듯 했다. 감기 걸리기 딱 좋은 짓이었다. 단발머리 아래 늘어뜨린 인조모발이 비에 젖어 찰랑거렸다. 학교가 두발 규정이 심해 반항의 의미로 착용했다고 했나. 자기 개성을 잘 파악했다. 센스가 있고 그 덕에 선배 눈에 띄었다. 문제는 향수 냄새가 좀 거슬린다는 것. 그리고 내게 매우 비호의적이라는 것.

 “사람을 갑자기 찾아와 강제로 앉혀놓다니. 납치범의 수법 같군. 인상이 좀 험악해도 겉으로만 판단해선 안 된다 생각했는데, 너도 단지 소문과 다름없는 강압적인 어른에 불과했나.”

 얘기하기 싫어졌다.

  참자. 기분 나쁠 만 하잖아. 갑자기 면식만 있는 사람이 불쑥 찾아와선 ‘칸자키 씨가, 위험합니다.’ 라면서 불러냈는데, 정작 따라와 보니 회사 근처 카페였으니. 속았다는 기분이 들 거야.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란코의 어디가 어떻게 위험하다는 건지 이제 좀 말해주지 않겠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니노미야 씨와, 화해하고 싶다더군요. 해결해 달라고. 사정을 들어보니, 두 분의 현 상황이, 위험해 보였습니다.”

 아스카가 헛웃음을 쳤다.

 “시답잖은 농담은 집어치워줬으면 좋겠어. 예상은 했지만 이런 하찮은 일이라니. 내가 란코를 잘못 봤군. 이런 남자에게 우리의 문제를 의탁할 줄은.”

 “진전될 기미가, 안 보인다고 그래서요. 원래는, 선배가 와야겠지만, 지금 바쁘셔서.”

 “나와 란코, 가을P는 영혼의 파장이 맞는다고 여겨왔어. 동지라고. 그럼에도 이 모양이지. 실망했어. 어리석어. 제3자에게 의존하는 일 따위. 다이얼로그를 거슬러 올라가 봐도 네가 이 일에 끼어들 구석은 없어.”

 “죄송합니다만, 알기 쉽게, 얘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것 봐.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지. 너에겐 나의 세계가 안 보여. 해답을 보일 수 있어? 내가 보기에 넌, 나처럼 ‘아파오는 존재’가 아니야. 균열을 보일 수 없다고.”

 “좀 더 간단히…….”

 “그래. 단조로운 사고에 맞게 해석해주자면, 넌 나를 몰라.”

 짜증이 나는군. 한숨을 푹 쉬었다. 왜 이런 말을 들어주고 있어야 하는 건지.

 “알고 있다면.”

 “뭐?”

 “알고 있다면, 어쩌실 겁니까.”

 점원이 커피를 내왔다. 차가운 분위기를 알아채고 우리 앞에 음료만 내놓은 뒤 잽싸게 빠져나갔다. 제 말대로, 따르시겠습니까. 나는 목을 축였다. 스스로가 탐정이라 주장하는 건가. 아스카가 비웃듯이 말했다.

 “얘기해 봐. 틀리면 이 일에 더는 참견 말고.”

 “좋습니다. 우선, 조언 하나.”

 “훈계부터 하는 건가. 그렇게 찍어 누르지 않으면 안 되는 거겠지.”

 “담배 피지 마십시오.”

 “뭣?”

 아스카의 표정이 굳었다.

 “니노미야 씨는, 패션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셨죠. 그럼에도 딱 하나, 향수는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쓰셨습니다. 비를 맞아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진하게. 예전에는, 쓰지 않았다고 하던데. 냄새를 감추기 위해서, 겠죠.”

 “너의 담당 아이돌처럼 놀라운 후각이라도 지닌 건가? 아니면, 그런 아무나 할 수 있는 궤변으로…….”

 “최근 학교에서, 혼자 있는 일이, 많아 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옥상이나, 계단. 아무도 없는 곳. 제 생각엔 계단 중간, 층계참, 도 있을 거 같네요. 주로 학생들이, 몰래 담배를 피우는 장소죠.”

 “어디서 들은 이야기들만으로 나를 판단하는 건가?”

 “기분 나쁘시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부정은 못 하시네요.”

 “부정할 필요도 없는…….”

 “이 이상 들어가시면, 담배를 구한 경로까지, 파고들 겁니다.”

 “…….”

 아스카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비에 젖은 강아지 꼴보단 나았으나 나에 대한 적개심이 눈에 가득했다. 동시에 두려움 또한 비쳤기에 이걸로 정곡을 찔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시종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설탕, 안 넣으십니까.”

 테이블 한 쪽에 각설탕을 가리켰다. 잔을 미처 들지 못 하고 망설이던 손이 꿈틀거렸다. 역시나. 아스카도 블랙커피를 못 마시는 부류였다. 그런 주제에 허세는.

 동요를 숨기려 했지만 너무 커서 숨기지 못 하고 있었다. 순순히 인정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마 머릿속에서 어떤 선택이 이기는 것인지 죽어라 머리를 굴리고 있을 터. 그런 데에 집착하는 점에서 이미 진 거나 다름없지만 내 나름대로 자존심을 지켜주기로 했다.

 “담배, 몸에 안 좋습니다. 노래에 방해되고, 체력을 떨어뜨려요. 저도 안 핍니다. 말 안 할 거니까, 걱정 말아요. 충고를 할 뿐이에요. 아이돌이시잖습니까.”

 조곤조곤 충고했다. 아스카는 말없이 설탕을 녹이더니 커피를 마셨다. 여전히 노려보는 것과는 반대로 감정이 누그러드는 게 느껴졌다. 설탕 덕이겠지. 대화 내내 이 정도만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약속만, 지켜주십시오. 탐탁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뭘 시키려는 거지?”

 “이야기. 칸자키 씨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세요.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사이가 틀어진 건지. 전부.”

 “얘기할 것도 없어. 우린 착각의 늪에 허우적댄 거야. 서로를 위하기엔 너무 에고이스트였던 거지. 이제 와선 상관없는 일이지만. 나는 염세주의이기도 하거든. 찰나에 지나친 관계를 뿌리치는 건 어렵지 않아.”

 “실속 없는 소리로 자꾸 속내를 감춰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손해를 보는 건 당신입니다.”

 “뭐…… 라고 한 거지?”

 대화를 이어나가기 싫어 한국어로 이야기 했다. 저쪽도 저쪽만의 언어로 얘기하고 있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조금 머리가 아팠다. 쭉 생각해왔듯이 나는 아스카와 상성이 맞지 않는다. 얼른 이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 전에 할 말은 해야겠지.

 “무례와 개성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무례를 범하는 건 남의 영역을 헤집고 있는 쪽이라고 생각되는데.”

 “상황을 헤집고, 소통을 차단하고, 고집만 부리는 것. 그게 무례입니다.”

 “지금 이 일의 원흉이 나로부터 비롯됐다 말하는 건가?”

 “원흉은 따로 있습니다만, 건드린 것은, 니노미야 씨죠.”

 “내가 무슨 잘못을 범했다는 거지?”

 “응석을, 부리셨잖습니까.”

 “하. 똑같은 말을 하는군. 아니지. 듣고 온 건가? 그런 이야기도 했어? 탐정이 아니라 스토커였군. 나는 나, 니노미야 아스카야. 내가 의지하는 건 나 하나뿐이고, 나의 강함은 거기서부터 흘러나와. 나의 세계에서 나는 완전하지. 란코와의 일도 해결한다면 내가 해. 도움은 필요 없어.”

 해결이라. 커피를 한 모금 더 넘겼다. 내가 있던 세계에서 ‘해결’은 절대 쉽게 담아서는 안 될 말이었다. 잘못 건드렸을 때 피를 보는 건 나만이 아니니까.

 “자신 있으십니까? 해결.”

 “또 내 에고를 건드리려는 거라면 사양하겠어.”

 “다 안다는 것 마냥, 말씀하시네요. 칸자키 씨에 대해.”

 “동반한 역사를 들춰볼 필요도 없지. 대답은 Yes야.”

 “궁금하네요. 저는, 그 나이 대를, 제대로 겪질 못 해서.”

 “쉽게 알아듣게 설명해주자면, 란코는 작은 동물이지. 연극의 배우와 같아서 관객을 필요로 해. 생존본능이거든. 나쁜 건 아니야. 생물에겐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 법이고, 란코가 무대 위에서 쓰는 가면은 견고하니까. 단지, 가면 뒤에 숨은 실체는 어쩔 수 없이 연약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야.”

 “흥미롭네요.”

 “알겠어? 지혜를 겸비한 것은 너뿐 만이 아니야.”

 가소로움에 미간이 좁혀졌다. 두통이 진해졌다.

 “그럼 얼른 하시죠. 해결. 유닛 데뷔까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지식이 있다고 해서 진리를 바꿀 수는 없는 일이지. 정해진 운명, 파멸마저도. 차라리 이대로…….”

 “해체하실 겁니까. 데뷔도 못한 채.”

 “…… 금기를 건드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시작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건 무책임입니다. 답이 없네요. ‘지금’의 니노미야 씨는.”

 “뭐야?”

 “다크 일루미네이트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곡, 안무, 이벤트, 인터뷰. 모든 것이, 준비되어있죠. 선배가, 고생고생해가며 마련했습니다. 무른다고요? 누구 맘대로. 그런 짓이, 용납될 것 같습니까.”

 선배의 수첩에 적힌 대로라면 회사에서 이 일에 거는 기대는 꽤 크다. 라이브 무대까진 시간이 남았어도 유닛 결성 인터뷰는 다음 달이면 발간 될 텐데 멈춘다는 건 불가능. 만약 엎어지기라도 한다면, 회사에 큰 손해를 입힌다면 그 팀장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 애는 그걸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해서 뭘 어떡하라고. 말했잖아! 쭉 평행선만 달리고 있는데 또 얘기를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다를 겁니다. 이번엔, 제가 있으니.”

 딱 잘라 대꾸했다. 위압을 느꼈는지 아스카가 조용해졌다. 의도한 건 아니나 말하기엔 이쪽이 편했다.

 “해결을 막는 장애물이, 뭔지 알았습니다. 남은 건, 당사자들 간의 얘기. 그게 싫으시다니, 참견할 수밖에요. 저는, 아나스타샤에게 약속했기 때문에, 이 문제에서, 빠지고 싶어도 못 빠집니다. 끝을 볼 거예요. 그건, 니노미야 씨의 동의가, 필요 없는 일입니다.”

 “끝까지 강압적이야. 역시 어른은……. 14세는 섬세한 나이라는 걸 알아주질 못 하는군.”

 시간을 확인했다. 밖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썼다. 슬슬 돌아가야 해. 같이 가시죠, 태워드리겠습니다. 의기소침해진 아스카는 제안에 응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끝까지 순조롭게는 따라주지 않는 녀석이었다.

 “퇴근 시간. 그 때 맞춰서, 회사로 오십시오.”

 먼저 일어나 음료 값을 계산했다. 카페를 나오자마자 미지근한 공기가 피부를 덮쳤다. 질척거려. 이마로부터 흐른 땀이 코끝에서 툭, 떨어지자 다시 거세진 빗줄기가 내리쳤다.

 번개가 하늘을 가르고 천둥이 고막을 흔들었다. 눈을 감았다 뜨니 온 세상엔 핏물이 배어있었다. 비에 씻겨 내려서는 섬뜩하게 흘러갔다. 길게 이어지던 이명이 잠잠해진다 싶을 때 막히는 도로에서 울린 자동차 경적들이 자리를 채웠다. 색색의 우산을 쓴 시체들이 부산스러운 꼴로 걸음을 재촉했다. 하수구로부터 올라온 썩은 냄새에 속이 역해졌다.

 곤두선 감각은 착란을 선명하게 받아들인다. 걸러내지 못한 정보 조각들이 뇌의 주름 사이로 파고드는 것처럼. 나는 망가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금만 참아. 들이쉰 습도가 불쾌했다. 이가 으득, 갈리는 걸 참고 또 참았다.

 우산을 쓰고 차를 세워놓은 장소로 향했다. 폭우의 무게가 더해져 걸음이 무거웠다. 잘려나간 손이 발목을 잡았다. 몸 안으로부터 톱으로 뼈를 써는 소음이 일었다.

 두통이 심했다.


 *


 요새 가출한 자식 찾아달라는 의뢰가 많아.

 그걸 경찰한테 연락 안 하고 반사회적인 무뢰배 집단에게 오는 걸 보면 제정신이 아닌 거 같다. 인간들, 그렇게 돈 쓸 데가 없나.

 이쪽이랑 한 번 엮이면 경찰 생각 안 나는 사람이 많으니까.

 난 솔직히 의심 간다. 애를 비밀스럽게 찾아야 할 이유가 뭐가 있지? 학대 아니야?

 그런 이유로 찾는 놈이 정말 있다면…… 내가 개인적으로 부숴버리고 싶은데.

 오오. 방금 좀 무서웠다.

 난 쪼그만 애들 건드리는 것들이 혐오스러워.

 고아원 때문에?

 …… 어.

 요새는 또 애들이 무서운 경우가 많던데. 그런 것들 상대할 땐 어떡할 거냐?

 중학생 이상부터는 좀 때려도 돼.

 미친. 무슨 기준이 그래.

 중학생쯤이면 충분히 예절을 갖출 나이잖아. 설마 바른생활도 교육 못 받았을 리는 없고. 타인에게 예의를 갖추라는 건 유치원에서도 가르쳐. 부모 탓이 더 크겠지만, 그 나이부턴 본인 책임도 생겨야지. 난 그렇게 살아왔어.

 너무 그러지는 마라.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들 그 나이에 사고 좀 치고 사는 거지. 예민한 나이니까. 자기가 세상의 중심 같고, 주역이면 싶고, 개똥철학 같아도 자기 딴에는 진지한 고민들을 하는 중이라고. 어쩌다가 엇나갈 수도 있는 거야. 물들기도 쉽고. 또래 애들, 혹은 나이만 많은 놈한테. 나도 중학교 때부터 술이랑 담배랑 패싸움이랑 다 하고 지냈다.

 네 기준으로 애들을 평가하는 건 좀.

 누가 할 소리를. 본 적은 없지만 네 중학교 때보단 백배 나을 걸.

 그래. 그렇겠지. 그래야지…….

 아, 뭘 또 그렇게 어두워지고 그래. 얌마, 너도 순수하던 시절이 있었을 거야. 고아원 들어간 게 언제라고 했더라. 그 전에는 평범했겠지. 엄마 아빠랑 손 붙잡고 놀이공권도 가고, 솜사탕 먹고. 생일 케이크에 촛불 키고.

 기억 안 나.

 어?

 난…… 10살 이전의 기억이 나지 않아. 아무 것도. 생일도 몰라.

 어째서…….

 덮여버린 거겠지. 전부…….


 *


 회사까지 오는 길이 아슬아슬했다. 퇴근할 땐 차를 몰지 말아야겠어. 돌아오자마자 약국에 들려 두통약을 샀다. 물과 함께 적정량을 복용했지만 효과는 미미하거나 거의 없는 수준. 간신히 로비까지 돌아와 소파에 앉아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아스카가 온다는 가정 하에…… 아니지…… 애초에 그런 가정이 가능한가…… 너무 불확실한 약속만 하고 왔어…… 오지 않는다면 잡아와서라도…… 폭력적인 생각은 그만…… 그리고 란코를 부르고…… 단서들을 조합해…… 진상을 파헤쳐야…… 그런데…… 뭘 알아냈지…… 인터뷰와 담배…… 중2병…… 응석을 부리고…… 에고이스트…… 아니…… 머리가 뒤죽박죽이야…….

 속에서부터 무언가 솟구쳐 올라왔다. 모자를 눌러쓰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귀를 막은 채 몸을 웅크렸다. 제발 아무도 나를 발견 않기를. 100부터 숫자를 거꾸로 세며 마음을 편히 먹었다. 그러나 무엇이 편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떠올려. 압박했다. 뭐든 떠올려. 스스로를. 좋은 방법이 있을 거야, 오늘 하루 중에, 편한 순간이 있었잖아. 머리를 모서리에 박아버리고 싶은 걸 참아가며. 그때 뭘 했는지 떠올려, 그리고, 행동에 옮겨. 마침내 떠오른 그것을 나는 실행하기가 두려웠다.

 “…….”

 손안에 폰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분명하다. 그런데도 망설였다. 사적인 대화를 늘려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 바로 어젯밤인데도. 지금 상태로는 실망만 안겨줄 거 같아서.

 “미안해.”

 통화기록을 찾아 눌렀다. 받지 않아도 돼. 일정한 간격으로 발신음이 갔다. 그냥 받지 말아줘. 모자를 눌러 쓰다 못해 아예 얼굴을 덮어버리려는 순간.

 “아냐입니다, 프로듀서!”

 굉장히 기쁜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그를 제외한 모든 것이 나의 감각으로부터 멀어졌다. 백지. 전부 사라졌다. 소음도, 시야를 뭉개는 빛도, 스멀스멀 떠오르는 기억까지도.

 “어.”

 “마침 отдых, 휴식 시간이었어요. 프로듀서도?”

 “응. 잠깐, 시간이 나서.”

 “Хорошо! 정말로 좋아요. 프로듀서가 먼저 전화 걸어준 것. 아, 쉬는 시간에요. 평소엔 일할 때만 연락하니까.”

 “그냥…… 오늘은 그냥…… 해보고 싶어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금 Призрачная история, 괴담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코우메의 이야기에 나오가 깜짝 놀랐답니다.”

 “괴담.”

 “Да(네). 온처에 와 있어서 온천 이야기를 해줬어요. 알고 있나요? 우리가 묵고 있는 온천 거리 어딘가에 사람이 죽는 온천이 있다고 해요. 여관 근처, 움푹 파인 구덩이에서. 해마다 몇 명씩. 실화라고 했어요. 뉴스에도 나왔다고.”

 아나스타샤가 분위기를 잡았다. 자기 딴에는 무서운 톤으로 말한 것 같은데 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재미없었나요?”

 “아니. 그, 내가 원래, 무서운 게 별로, 없다 보니.”

 “음. 그렇네요. 프로듀서가 뭔가를 무서워하는 것, 상상이 잘 안 가요. 코우메에게 다른 이야기를 물어봐야겠어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나 봐.”

 “코우메, 괴담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많이 들려주고, 많이 듣는다고 해요. 방금 얘기도 전에 카에데 씨를 만나서 들었대요.”

 “그러고 보니, 그 사람도, 온천을 좋아한댔지.”

 “카에데 씨의 이야기도 많이 나왔어요. 미즈키는 함께 술을 마신 적도 있다고 해요.”

 “그래……. 왠지 미안.”

 “Что(네)? 어째서?”

 “기껏 전화해선, 반응이 별로라.”

 전화 너머로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보이는 건 아니지만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앞으로도 더 많이, 잔뜩 전화해줘도 좋아요. 아냐, 프로듀서의 전화라면 обязательно, 반드시 받을 거니까.”

 “일 하는 중이면, 어쩌려고.”

 “아냐가 다시 전화할게요. 그때는 프로듀서가 받아줘요. 반드시.”

 “…… 그래.”

 서늘했다. 어째서인지 그저, 그냥, 통화를 할 뿐인데. 퇴근길에 함께 보았던, 도시치고는 밝은 그 별빛을 보던 밤처럼 완벽했다. 순수하게 ‘좋았다.’

 “오늘, 란코가 찾아왔어.”

 “Да.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말했어요. 프로듀서에게 가보라고.”

 “이따가, 아스카까지 함께, 만날 거야. 해결해야지. 얼마 안 남았어.”

 “Спасибо(고마워요), 프로듀서. 란코, 강한 사람입니다. 상대를 상처 입히지 않아요. 하지만 그만큼 스스로가 아파해요.”

 “응. 그런 아이야.”

 “멋대로 부탁해버려서 미안해요. 프로듀서라면 도와줄 거라 생각했어요.”

 “괜찮아. 그게, 내 일이니까.”

 “프로듀서. 만약에…….”

 아나스타샤가 뜸들이더니 곧 힘주어 말했다.

 “만약에, 프로듀서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그땐 아냐에게 말해줘요. 그때는 아냐가 프로듀서를 도와줄게요.”

 “…….”

 속내를 꿰뚫린 기분에 나는 잠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물론 미오도, 시키도.

 “치히로 씨, 가을P. 사무소의 모두가 프로듀서를 도와줄 거에요. обязательно(반드시).”

 “응. 그렇겠지.”

 이제 그만 끊을게. 아나스타샤가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다음에 또, 전화해주세요. 다짐했다. 다음에 꼭. 통화를 종료하고 나는 곧바로 치히로에게 문자를 보냈다. 사무실로 가니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듀서님, 이건?”

 “조금만 도와주십시오.”


 *


 빈 회의실에서 내가 아는 정황을 모두 설명했다. 치히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행히 시간이 없어서 조금 빠른 진행을 요구했음에도 금방 따라와 주었다. 역시 유능한 서포터였다. 원래라면 혼자서 끝을 봤겠지만 그럴 만한 몸 상태가 아니었다. 회의를 마쳤을 땐 슬슬 퇴근 시간. 누군가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란코, 뒤이어 아스카가 들어왔다. 깊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풍긴 채였다. 서로 간에 눈도 못 마주치고 말도 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바였다. 그보다 두 사람은 얘기에 없던 치히로의 존재에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제가, 컨디션이 나쁜지라.”

 “옆에서 설명을 보충해드리기로 했어요. 그쪽이 더 순조롭게 될 거예요.”

 이런 식이었다. 내가 부탁한 대로 치히로는 충실히 이행해주고 있다. 어떤 말을 어느 순서로 말할지 전부 얘기해뒀으니 나는 쏟아내기만 하면 된다. 나중에 밥이라도 살게요. 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럼 이제.

 “시작하죠. 칸자키 씨, 니노미야 씨. 두 분의 문제의 해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두 분은 서로에게, ‘응석’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선배는 프로였다. 이 프로덕션에서 가장 뛰어난 프로듀서. 담당 아이돌들 사이에 발생한 트러블을 놓칠 리 없는 인물이었다.

 “전혀 아니야.”

 “저는…….

 아스카의 즉시 반박했으나 란코는 망설였다.

 “지금 인정하지 않는 건,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과정 끝에, 이해하는 것이니까요. 사건의 발단은, 아주 초기부터. 여기 이 책, 인터뷰에 적혀있더군요.”

 나는 다음 호 아이돌 매거진을 꺼내들었다. 선배의 책상에서 찾은, 사인이 없는 견본이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중2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라고, 칸자키 씨를 표현하셨네요. 니노미야 씨.”

 란코가 어깨를 떨었다.

 “그래. 그렇게 말했었지.”

 “니노미야 씨는 스스로를, 중2병이라 여기십니까?”

 “소위 말하는 것이니까. 부정할 생각은 없어.”

 “그렇게 말하며, 쿨한 척 하는 건, 니노미야 씨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칸자키 씨는, 달라요.”

 란코는 내게 호감을 느꼈다. 자신은 상상 속에서만 음미하는 블랙커피를 마실 줄 알고, 자신의 개성을 존중해주니까.

 존중. 그게 바로 란코가 원하는 것. 자신의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 못 마실지라도 블랙커피를 주문하는 것, 판타지 소설 같은 말투를 읊는 것이 증거였다. 자신만의 세계, 설정을 구축하고 그 세계 안에서 당당해졌다. 때문에 누군가 그것을 ‘중2병’이라고 단정 지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자 폄하였다.

 “두 분은,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 확실히 알고 있다, 항상 보고 있다, 라고 여겼지만, 전혀 아닙니다. 수박 겉핥기 했을 뿐이에요. 베테랑 트레이너 씨가 말했죠.”

 사적으로만 친할 뿐 눈앞의 서로를 못 본다. 그럼 둘이 보고 있던 것은 뭐지?

 “‘착각’입니다.”

 이 사람은 나와 같다는 착각. 이 사람은 나를 이해해줄 거라는 착각. 영원히 나의 편일 거라는 착각이자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착각.

 “선배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줄 거라 여긴, 니노미야 씨에게 칸자키 씨는, 인터뷰에서 배신당했습니다.”

 “지금 모든 게 내 탓이라고…….”

 “탓할 건 아닙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착각을 한 건, 서로 마찬가지니까 굳이 따지자면, 두 분 다 책임이 있습니다. 니노미야 씨가 순수하게 잘못한 것은, 따로 있어요.”

 잠깐 말을 쉬었다. 치히로가 따라오기 벅차했다. 나도 모르게 조금 빨라졌나. 목이 갈라졌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퉁명스러운 태도, 공격적인 어투, 비협조적인 자세. 단순히, 사춘기의 예민함이라고만 보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날이 서 있었습니다. 그 전에, 저는 니노미야 씨를 보고 저와 잘 안 맞을 뿐, 자신만의 개성이 있다고 여겼는데, 많이 달라져 있더군요. 아까도 말했듯, 무례와 개성은 다릅니다. 그걸 저만 느낀 게 아니었고요.”

 치히로가 만나러 갔더니 불쾌해 했다. 잠깐 안 본 사이 더 예민하게. 반 애들이랑 어울리는 일도 줄어들어 이젠 아예 말도 안 한다.

 “도움을, 제3자의 개입 자체를, 차단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 필요 없는 일이니까…….”

 “이건 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인데, 상대가 알아듣지 못 하게, 빙빙 돌려 말하거나, 난해한 어투를 쓰는 사람은, 분명 숨기는 게 있습니다. 니노미야 씨의 경우, 방어기제죠. 무엇을 숨기려는지 알기 위해, 일부러 도발적으로 대해봤습니다. 예를 들면.”

 아스카의 핸드백에 눈길을 줬다. 찔리는 것이 있는 아스카가 핸드백을 뒤로 감췄다. 저 안에 담배가 있겠지. 다행히 지금은 향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래요,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약속을 했으므로 담배에 대한 것만은 치히로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 다음은 제가 도와드려야죠.

 “저는 니노미야 씨가, 자존심과 아집에만 사로잡혀 일을 그르치는, 멍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칙에 대한 사소한 저항을, 인조모발을 통해 스타일로 치환하는 것, 그게 당신이죠. 때문에, 니노미야 씨가 보이는 예상외의 반항에, 변수가 작용했을 거라 여겼습니다. 이미 제3자가 개입했다는, 변수 말이죠.”

 “이봐, 잠깐!”

 “아마 이쪽 일과는, 전혀 관련 없던 사람일 거예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딴 억측!”

 “아스카?

 란코가 먼저 말을 걸었다. 치부가 들춰진 아스카의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굴욕, 죄책감, 수치. 무엇 하나 보이고 싶지 않던 것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아니야, 란코……. 이건 저 남자가…….”

 아스카가 변명조를 냈다. 직접 밝히실 생각이 없으시면, 발언권을 양보해 주십시오. 목을 가다듬었다. 치히로가 조금 힘들어 했고, 나도 빠르게 지쳐가는 중이었다.

 “베테랑 트레이너에게 지적 받고, 믿고 있던 프로듀서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은 나를 이해 못한다.’ 아까 저에게도, 입이 닳도록 말하셨어요. 그런데, 마지막 믿을 구석이었던 칸자키 씨는, 그 믿지 못하겠는 어른들의 말을, 따르려고 하는 군요. 니노미야 씨는 정신적으로 몰리기 시작합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하자, 도망을 쳤어요. 사무실에 오지 않고, 연락도 받지 않고. 그런 니노미야 씨에게, 누군가 접근합니다.”

 “그만해! 더 이상……!”

 “가출 청소년들을 꾀어내, 수상한 짓을 하는 인간들의 프로필을, 저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잇습니다. 의외로 멀쩡하게 생겼고, 언변이 뛰어나며, 자상한 면모가 있지만, 속은 뒤틀려 있거나, 천박하죠. 니노미야 씨보다 연상, 너무 나이 많지 않은, 대학생 정도의 남자. 공감 능력이 있고, 아는 것이 많아 보이는, 지식인. 더 상세히 파고들자면, 이 정도네요.”

 줄곧 어른스러움을 매력으로 삼아온 아스카였다. 이성관계에서 또래는 당연히 눈에 안 차고, 믿을 만한 어른에겐 배신감을 느끼는 상태. 몇 년 전까지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앓았을 대학생 정도가 접근하기 좋다.

 “경험 좀 있는 사람이 보면, 니노미야 씨는 허술한 면이 많습니다. 그 놈도, 그런 점을 보고 접근했을 거예요. 니노미야 씨가 누군지, 처음부터 알고 접근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처음에는 이해하는 척 다가오다, 금방 속내를 드러냈습니다. 이런 짓을 벌인 게, 한두 번이 아닐 거예요.”

 답답하군. 넥타이를 느슨하게 했다. 애초에 미성년자 아이돌에게 담배를 권하는 놈이 멀쩡한 놈일 리 없지. 와이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었다. 그래서 담배를 구한 경로를 파헤치려들자 심하게 반응한 거야.

 “니노미야 씨는 한밤 중, 학교에 몰래 출입하는 일이 많았는데, 요새는 줄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놈에게 끌려 다닌 거겠죠. 아직 심한 일은…… 당하지 않으신 거 같지만, 무슨 짓을 벌이려 했을지, 쉽게 예측이 갑니다. 아이돌이니까, 아이돌이기에, 약점으로 잡혔죠. 그렇기에 니노미야 씨는, 저의 개입도, 해결도, 원치 않으셨습니다.”

 혀가 갈라졌다. 똑바로 움직이고 있는지 느껴지지 않았다.

 아스카. 진상을 알게 된 란코가 파트너를 불렀다.

 “저 말들이 다 사실이야? 지금껏 연락도 받지 않았던 이유들이 그런 것 때문이었어?”

 “…… 알 필요 없는 일이야.”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만하세요.

 “왜? 나는 지금껏 아스카를 걱정해왔는데!”

 “네가 걱정만 한다고 해서 정상으로 돌아갈 리가 없잖아!”

 “그럼 가을P는? 아스카는 가을P를 믿지 못 하는 거야? 나도?”

 “애초에 거기서부터 시작된 일이니까.”

 쾅. 책상을 내리쳤다. 중학생들 싸우는 소리가 귓가에서 왱왱 거렸다. 거슬려. 놀란 두 사람과 치히로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전부 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한국어로 말했다. 해결해 주잖아. 뭉개진 발음이 흘렀다. 계획되지 않은 발언에 치히로가 갈피를 못 잡았다.

 “전부 다 해결해준다는 데 뭐가 그렇게 문제야. 알아먹지도 못 하겠는 말 다 받아주고, 무시해도 되는 일 정성들여 해결해주는데……. 대체…… 왜…….

 뭐가 문제인데.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시야가 흐릿해 어지러웠다.

 “집중해 주세요. 제발…….”

 프로듀서님. 내게 다가오려는 치히로를 제지했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악물고, 다시 시작했다. 니노미야 씨.

 “스스로를 속이고, 자꾸 강한 척 하지 마십시오. 타인에게도 상처입니다. 다른 이유잖아요. 말하지 않은 건. 이 일로 인해, 칸자키 씨에게, 선배에게, 피해가 갈까봐. 나 혼자만 희생하면, 조용히 끝날 것이라 여긴 거죠.”

 아스카는 란코를 작은 동물이라 평했다. 연약한 동물. 그렇게 정의했고, 틀에 박은 뒤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오만입니다. 니노미야 씨. 당신은, 그렇게 강하지 못 해요.”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란코는 강한 사람이라고. 그 말대로, 란코는 배려가 깊은 아이였다. 자신의 세계를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도 내 부탁에 평범한 어투로 대답해 주는 아이. 일의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도움을 구한 아이.

 “니노미야 씨의 방식은, 수동적입니다. 잘못은 아닙니다. 아직 어리시니, 두려울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걸, 해결이라 여기지 말아요. 모두가 힘들어 지니까. 이번 일에서 발 벗고 나선 건, 오히려 칸자키 씨 입니다. 규정하지 말아요. 당신 생각 이상으로, 크고 강한 사람이니. 하지만 칸자키 씨.”

 란코에게 사정을 전해들으면서 느낀 점은 너무 부드럽다는 것. 아스카와 다퉜다고 하면서 다툼의 내용이 상세하지 못 했다. 말을 아낀 거겠지. 친구를 나쁘게 말하기 싫으니까. 하지만 타인에게 도움을 구하면서 할 행동은 아니었다.

 “저에게 도움을 구할 때, 모든 걸 말해야 했습니다. 배려가 당신의 강함이지만, 상대의 눈치만 봐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요. 싫으신 거겠죠. 니노미야 씨와, 이 이상 틀어지는 게. 그랬다면 저에게, 모든 걸 맡기셔야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이야. 눈이 빠질 것처럼 괴로웠다. 이걸로 끝내자고.

 “한 분은, 혼자서만 책임지려 했고, 다른 한 분은, 남에게 너무 의지했습니다. 서로를 잘못 파악했어요. 나랑 닮았으니, 비슷해 보이니, 사적으로 친하니까,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파트너를 보고 생각한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파트너를 맞추신 거죠. 거기에 기대고, 응석을 부렸습니다. 내가 뭘 하든, 이 사람은 받아줄 거라고. 상대를 이해했다고, 착각을 하신 겁니다. 실제로 일해 보면 아닌데. 불협화음입니다. 두 분 다, 속으로 느끼셨겠지만, 애써 부정하셨을 거예요. 그러지 말아요. 다름을 인정해요. 눈앞에 있는, ‘진짜’ 서로를 보세요. 거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칸자키 씨, 하고픈 말들, 쌓인 불만까지 전부 말하세요. 니노미야 씨. 칸자키 씨를 존중하고, 얘기를 들어요. 버러지 같은 놈에게, 굴복하지도 마시고. 도움을 청하신다면, 얼마든지, 회사차원에서 대응해줄 테니. 여기까지입니다.”

 회의실에 적막이 끼었다. 아스카와 란코는 입을 다물었다. 다문 채 서로를 응시했다. 납득을 했든 안 했든 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두 사람이 알아서 대화로 끝을 볼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을 고르던 치히로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퇴근, 하겠습니다.”


 *


 비가 여전히 거셌다.

 터덜터덜 걸어가며 내가 한 짓을 돌아보았다. 왜 그런 거야. 자조와 자괴가 가득 차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잖아.

 애들이었잖아. 좀 시끄러울 수도 있는 거지. 화낼 필요까진 없었어. 심한 말을 해버렸다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아나스타샤에겐 뭐라 말 할 거지. 그 말이 모든 걸 망쳐버렸을지 몰라. 해결하지 못 할 거라면 일을 받아선 안 돼. 해결하지 못 한다면 해결사를 자칭해서도 안 돼.

 결국 또 나는 일을 그르친 걸까.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걸까. 프로듀서를 해선 안 되는 걸까. 물음이 줄을 이었다. 이곳마저 떠나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이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기묘한 감각이 일었다. 오감이 모두 혼란스러운데 직감만이 선연했다. 눈이 고장 난 텔레비전처럼 세상을 받아들였다. 비와 땀으로 젖어 온 몸이 불쾌했다. 흉터로부터 가려움이 올라왔다. 중력이 역전 되는 듯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직 직감만이 반응했다. 모든 게 고장 난 지금 유일하게 정상적 반응한다면…… 사실 직감만 고장 난 걸지도 몰라. 그 정도로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나는 횡단보도 가운데 있었고 전방에서 붉은 신호가 반짝였다.

 라이트가 비에 난반사 되었다. 코앞에서 들리는 경적 소리가 멀었다. 검은색 승용차가 충돌했다. 하늘 위로 붕 뜬 순간 정말로 중력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무감각. 그 뒤에 고통이 엄습하였다.

 땅에 떨어지자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았다. 등이 아스팔트에 닿았다. 칙칙하게 물든 시야 위로 무언가 떨어졌다. 아마도 모자일 것이다.

 어두웠다. 오늘 밤이었다.











최고 분량 갱신.

후기는 내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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