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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맛 죽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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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25, 2019 18:56에 작성됨.

고개를 돌려보니 핸드폰에는 수백 건에 이르는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들이 멍하니 울고 있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다. 그토록 대답이 없던 엄마와 아빠. 야근 후 곧바로 도쿄로 오고 있다니, 그네들도 퍽이나 걱정이 된 모양이라고 아리스는 생각했다.

 

죽은 사람을 만나는 꿈을 꾸고 난 후,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두 눈 속에 빛나는 아침 햇살을 맞이한다. 소중한 사람들은 왜 가장 필요한 순간에 모두 곁에 없는 것인지. 어째서 아름다운 것들과 이토록 쉽게 작별을 고해야만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매 순간 찾아오는 삶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가야 하는 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결국 사람을 하루하루 살아가게 하는 것은, 사람이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역설을.

 

나도 결국 언젠가 생을 결국 세상에 빼앗기고 말겠지.’

 

그건 아무리 도망치고 발버둥을 쳐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살아 있는 존재에게 내려진 정언명령이자 불변의 진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떠난 이들과 달리 섣불리 절망하지도 포기하지도 말아야할 이유가 있다면 그녀에겐 아직 산 사람으로서의 시간이 있다는 것이었다. 죽은 자는 변치 않지만, 산 자는 변할 수 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지만, 다가올 일은 바뀔 수가 있다. 어쩌면 시키 언니는 아리스가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걷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때 의문스러운 약과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떠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아리스는 생각했다. 빼앗기고 또 빼앗겨도 결코 앗아갈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살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시키와 프레데리카 언니는 죽음으로 그것을 지켰지만, 아리스는 살아감으로 그것을 지켜나가고자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조금은 어른이 된 것 같았고, 그렇게 일생의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졸음을 몰아내고 침대 밖으로 내딛는 발걸음. 삶의 무게가 새겨진 그림자를 끌면서 소녀는 방을 나섰다. 텅 빈 방안에는 시든 국화꽃과 널브러진 인형이 어수선한 잠자리에 놓인 채 숨을 죽이고 있다. 창밖의 가을 하늘은 푸르고, 그 속에선 어디까지나 소녀들이 떠난 계절이 쉼 없이 무심하게 흐르고 있을 따름이다.

  

일련의 사건들이 정리된 것은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세간의 큰 관심과 달리 경찰의 수사는 진척을 보이지 못하다가, 뜨거운 관심이 식을 무렵 은근슬쩍 두 소녀의 죽음을 단순 자살로 종결지어버렸다. 더 이상 관심도 주목도 받지 못하는 사건이 되었을 무렵인지라 이미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떠난 이들은 말이 없다지만, 그들은 변화를 통해 남아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한다. 시키와 프레데리카가 떠난 이후 결국 유닛 립스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남아있는 멤버들은 솔로 활동으로 흩어졌다. 아마 프로덕션 내부에서도 더 이상의 지속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멤버들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노선의 기획과 프로젝트로 배치되었다. 이전보다 아이들에 대한 사전 관리와 감독이 강화되었다거나 개인 면담 시간이 추가되었다거나 하는 것들 역시 이러한 크고 작은 변화들 중 하나였다.

 

. 전 잘 하고 있어요. 제 걱정은 마세요.”

 

레슨룸 창밖의 눈 내리는 도시의 풍경들을 바라보며 아리스는 말을 이었다. 그 사건 이후 이전보다 엄마와 아빠가 관심을 가져주는 건 좋은 일이지만, 가끔은 지나칠 때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이것 역시 그녀들이 떠난 흔적의 하나일까. 죽은 이들과 만났던 그 방을 나오고 난 후, 아리스는 조금씩 시키와 프레데리카가 떠난 나이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 시간의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예전이었으면 초조함과 막막함에 철없이 떼를 쓰거나 막무가내로 어리광을 부렸을 타이밍에도 불안함이나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그저 싱긋 웃기만 하게 되었다. ‘그녀들살아가는 것은 결국 죽음을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준 이후에 생긴 버릇이라면 버릇이랄까. 전에 없던 아리스의 모습에 프로듀서는 다소 당황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그 역시 조금씩 그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무표정하게 통화를 마치고서 유리창에 서린 자신의 입김을 바라보던 아리스는 어디선가 귓가를 울리는 폭주족의 배기음 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꼈다. 또 레슨을 빼먹고 폭주를 나가는 타쿠미 언니일까 싶었지만 이내 잠잠해지는 것을 보니, 그 날의 기억이 달팽이관 속에 희미하게 남아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분명 내던졌을 죽음의 알약을 누가 가져다주었는지는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자신을 데려다 기숙사로 주었던 타쿠미 언니에게 물어도 그런 게 있었냐?’는 물음만 들었을 뿐이다. 그때 떠나간 자들이 남기고 간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은 맛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저마다의 딸기 맛의 알약을 움켜쥐고 고민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영원한 안식을 가져다줄지, 또는 끝없는 고통을 안겨줄지 아무도 모른 채 그저 발이 닿는 대로, 바퀴가 굴러가는 대로 나아 갈뿐. 선택은 있겠지만 그곳에 멈춤이란 있을 수 없다. 삶이 죽음의 일부이듯, 죽음 역시 삶의 일부일 테니까. 더 이상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자자, 휴식 끝! 다들 다음 레슨 시작 할 거니 집합!”

 

소녀가 떠난 자리, 창밖의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회색빛 도시를 새하얗게 덧칠하며 소리 없이 쌓이며, 마치 아무 것도 없었다는 듯이 이 도시 거리마다 새겨진 발자국을 지워만 간다.


다가올 다음 발자국들을 위해<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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