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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맛 죽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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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25, 2019 18:50에 작성됨.

 분명 마주잡은 두 손이었지만, 이렇게나 따뜻한 손길이지만, 오직 아리스 자신의 손만이 실존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사실적인 환영. 살아있는 듯 보이는 그녀들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조금은 알겠어? 아리스쨩.”

 

여전히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어안이 벙벙해있는 아리스를 보며 시키는 재미있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직까진 너에게 머물러있지만, 우린 이제 철 지난 꽃들이자, 시들어버린 잎사귀들, 멈춰 선 시곗바늘이야. 흘러가버린 바람 소리이자 잊혀져가는 기억들이야. 아마 머잖아 너도 우릴 잊게 되겠지.”

 

...저는 프레데리카 언니나 시키 언니를 결코 잊지 않을 거에요!”

 

아냐, 너는 결국 우릴 잊어버릴 거야. 그리고 잊어버려야만하지. 새로운 꽃들을 피우기 위해선 늘 빈자리가 필요한 법이니까. 우린 우리 자신의 자리를 찾아서 떠나간 것일 뿐이야.”

 

...그렇지만 그것이 꼭 언니들일 필요는 없잖아요! 언니들은....언니들은 아직 젊고....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을 테고.........무엇보다 아직 죽기엔 너무....너무 이른 걸요! 아직...아직 자기 앞의 수 많은 생이 남아있잖아요.”

 

그러고 보니...아리스쨩처럼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네.”

 

프레데리카와 시키는 싱긋 미소를 짓더니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젊음이라...그 무한한 가능성과 비어있는 시간들 속에서 정말로 자유롭고, 행복했었냐고 묻는다면, 적어도...마지막 순간만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고 싶었어.”

 

그게...대체 무슨 말이에요?”

  

아리스쨩, 우리들의 젊음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도둑맞아 있었다면 믿을 수 있겠어? 찬란한 봄날을 만끽하기에는 이미 너무나 매서운 겨울이 빨리 다가 와버렸지. 누군가의 아이돌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인내와 포기를 거듭하고, 부쩍 지나가버린 시간들 속에서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이었던 순간이 없었다면 믿을 수 있겠니?”

 

...그치만, 프레데리카 언니, 시키 언니는 조금은...이상하지만, 언젠나 당당하고 또....항상 밝고 상냥했었잖아요.”

 

네가 바라보던 우리의 모습이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커다란 거짓말이자 애써 지어온 억지웃음이었다면 믿을 수 있겠어?”

 

?”

 

사람은 단 하나의 얼굴로 수 천 수 만 가지의 표정을 지으며 살아가지, 그 중에 어느 것이 정말 자기 자신의 모습일까? 아리스쨩은 생각해본 적 있니?”

 

프레데리카와 시키는 말문이 막힌 아리스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카메라에 잡히는 몸짓과 표정, 대중들의 눈동자 속에 사로잡힌 미소와 웃음. 그 어디에도 우린 온전히 우리였던 적이 없어.”

 

그렇다면....”

 

우린 결국 타인이라는 환상에 기대어 현실을 살아가는 나약한 존재들이야. 자기 자신의 눈으로 스스로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기에 자신을 지켜봐줄 누군가가 필요해. 그렇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우리의 삶은 그들의 것이 되어버렸지. 제멋대로 재단하고 단정해버리면서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어.”

 

아무리 그래도 죽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찾는 다는 것은 넌센스에요!”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살다보면 자기 자신을 죽여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순간도 있는 걸?”

 

하지만 결국...죽음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요! 설혹 그것이 언니들을 행복하게 했더라도... 남아있는 사람들은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고요! 남아있는 자들은 대체 무슨 잘못인거죠? 어째서 평생을 슬픔 속에 살게 내버려두고 훌쩍 떠나버리는 거죠?”

 

그렇지 않아, 아리스쨩. 우린 단 한 번도 너의 곁을 떠난 적이 없어. 우린 네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껏 항상 함께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너를 지켜보며 함께 할 거야.”

 

프레데리카는 흥분한 아리스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때 아리스는 식탁 위의 접시에서 빵조각들이 점차 꽃송이들로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린 언니의 꽃가게에서 받았던 국화꽃들을 닮은 꽃봉오리들이 만개함과 동시에 잔 속에 핏빛의 딸기 주스들은 싱싱하고 밝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프레데리카는 품에서 자그마한 봉제 인형을 꺼내들었다. 아리스가 클라리스에게서 받은 버려진 인형. 그녀는 그것을 잠시 쓰다듬더니 아리스의 품으로 건네주었다.

 

아리스가 버려진 이 아이를 발견하여 꼭 안아주었듯이. 죽음이 우릴 상냥하게 품어주었어.”

 

시키는 품 속에서 알약을 꺼내들었다. 아리스에게 주었던 딸기 맛 죽음과 똑같이 생긴 것. 그녀는 그것을 아리스의 앞 접시 위에 놓아두었다.

 

....그건!”

 

이건 버린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냐. 네가 버리더라도 이건 너를 버리지 않아. 삶을 앗아가는 것도 죽음. 삶을 완전하게 하는 것도 죽음. 그런 점에서 인생이라는 거대한 공허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도 죽음이야. 적어도 불사약이 발명되기 전까진.”

 

설마...?”

 

그래. 아리스를 위해 특별히 딸기 맛으로 만든 극약이야. 죽음을 원하는 사람이 먹으면 순식간에 죽음에 이르지만, 삶을 갈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영원히 살 수 있는 성분이 들어있지. 다른 말로 하면...‘젊음일까?”

 

, 그런 수상한 말...믿을 수 없어요.”

 

냐하하~ 아리스는 여전히 고지식하구나. 뭣하면 시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시키는 아리스의 손에 알약을 꼭 쥐어주며 속삭였다.

 

삶을 살아가는 것도 너 자신, 삶을 끝내는 것도 너 자신. 시작은 선택할 수 없었지만 종말은 온전히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것. 어느 방향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시작은 끝이 되고, 끝은 시작이 되리니. 거기엔 선도 악도 없이 우리는 산 채로 죽어있고, 죽은 채로 살아있어. 소녀야. 부디 네가 바라는 대로 너는 살거라. 소녀야 부디 네가 원하는 대로 너는 죽거라.”

 

죽어버린 소녀들의 부드러운 포옹을 받으며 아리스는 눈을 감았다. 그녀들은 죽음이었으나 삶이었고 살아있었으나 죽어있었던 것일까. 두 눈에 차오르는 눈물을 숨기려 태연한 척 해보지만 이미 흐릿해진 두 눈가는 앞을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로 시큰거렸다. 일렁이는 두 소녀들의 잔상을 끝까지 붙잡으려 이리저리 눈알을 굴려보지만 이미 그녀들은 서서히 아침 햇살 속으로 사라져간다.


 화려하게 피어난 국화꽃들도 갈기갈기 찢겨진 채로 스러지고 푹신한 봉제인형도 먼지가 되어 부서져간다. 아리스는 손에 쥐고 있는 작은 알약만큼은 놓지 않으려 애쓰며 그녀들을 좇았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살풍경한 기숙사 방 침대에 덩그러니 있는 자신과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모를 약통 속 알약만이 먼동 속에서 말 없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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