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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맛 죽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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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25, 2019 12:03에 작성됨.

 해도 잠든 칠흑 같은 밤 속에서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형형색색의 불빛들에는 날벌레들이 꼬인다. 어딜 가나 그치지 않고 깜빡이는 네온등 아래엔 타버린 벌레들이 한가득. 전봇대 아래엔 아무렇게나 던져진 쓰레기들과 토사물들이 순백의 달빛을 받으며 널브러진 채 썩어간다. 빈 잔마다 술이 채워지는 오늘도 도시의 러브호텔은 만실, 무료하게 전자 담배를 태우던 사람들은 취한 눈으로 다음 상대를 찾아 정처 없이 아스팔트 위를 방황하고 있다한심할 대로 한심한 모양새로, 그저 그렇게 흥청망청 쓰이다 버려지는 것들은 이런 것들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프로듀서는 아마 이런 광경을 보면 아이들에겐 좋지 않은 것들이라 하겠지만, ‘아이들에겐 좋지 않은 것들이 사실 어른들에게도 좋지 않은 것들이라는 점은 이미 소녀도 잘 알고 있다. 애초에 아이고 어른이고 죄다 무책임하고 철부지라는 건 똑같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쉽게 모든 짐을 내팽겨 치고 훌쩍 떠나버릴 수는 없을 테니까. 정말이지 두 사람은 끝까지 민폐다. 아리스는 떠나간 이들이 괜히 미워지기 시작했다.


어이, 얘기 들었어? 걔들 죽었대.”

 

컵라면을 먹다 말고 남자는 요즘 화젯거리로 운을 띄운다.

 

누구?”

 

그 왜 있잖아, 미시로 프로덕션의 헐벗은 얘들. 걔들 중 두 명 자살했다던데.”

 

아아, 그 둘. 안타깝네, 꽤나 예뻤는데. 근데 왜 죽었대?”

 

곁에 있던 동료는 시큰둥하게 삼각 김밥을 베어 물며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몰라, 무슨 약 먹고 죽은 것 같은데 이유는 모른대.”

 

에휴, 정말이지. 요즘 연예인들 죄다 약쟁이들이야, 약쟁이.”

 

야심한 시각의 편의점에서 대충 끼니를 때우는 두 소년 옆에서 소녀는 말없이 딸기 우유를 마시고 있다. 계산대에서 졸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의 코골이와 간간이 들려오는 편의점의 로고송과 냉장고 모터 소리를 제외하면 점내는 조용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취객들의 고성방가를 제외하면.

 

, 그래도 약쟁이면 어때. 얼굴 이쁘지, 몸매 좋지, 거기다가 머리도 좋지.”

 

뭐야, 너 그런 얘가 타입이었냐. 기분 나쁜 오타쿠 자식. 아무리 그래도 약쟁이가 뭐냐.”

그러는 너도 저번에 걔가 좋다며, 여자 친구라면 매일 침대에서 찐하게 물고 빨고 키스해주고 싶다는 얘.”

 

, 우리 카나데님은 건들지 마라.”

 

아무렇게나 물들인 머리와 껄렁해 보이는 외모에서 묻어나는 가벼워 보이는 인상. 예상대로 시시하다. 한없이 형편없다. 그렇지만 달리 간섭할 일은 아니다. 어차피 변하지 않을 테니. 넓디넓은 세상에는 그런 족속들도 있는 법이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에겐 규율도 속박도 거추장스러울 따름이니. 아리스는 소년들을 곁눈질로 바라보다 씁쓸한 표정으로 소녀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쿄 시내의 어딘가 이곳의 시계는 자정을 너머 새벽을 향해간다.


여태껏 아리스는 이런 늦은 시간까지 이런 곳에 있어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연락이 없는 부모님을 핑계로 아리스는 밤을 샐 요량으로 한참 전부터 이곳에 머물러 있다.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았기에, 생각하면 할수록 질문들만 늘어갔기에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방법은 잘 몰라도, 적어도 마음 속 깊은 곳에 맺힌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려야지만 속이 후련할 것 같다. 그렇지만 대체 어떻게...?   


아무튼 이제 립스는 망했네. 핵심 멤버가 두 명이나 갔으니 유지는 무리겠지.”

 

누가 알아, 또 새로운 멤버 영입해서 이어갈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살한 얘들 대신해서 누가 들어온다고.”

 

어쩌면 이거 다 멤버 교체하려고 회사에서 짜고 치는 쇼 아닌 가 몰라.”

 

어이구 등신, 헛소리 말고, 밥이나 먹어.”

 

그다지 유쾌하진 않지만, 고교생 남짓해 보이는 두 소년의 이야기가 사실 세상이 시키 언니와 프레데리카 언니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얼굴 좀 예쁘고, 몸매 좋던 아이의 죽음', '한때 연인이 되고 싶었던 상대의 죽음' 혹은 '연예인 약쟁이들의 비참한 최후'. 그 어떤 진심어린 애도나 위로 따위는 없다. 사실이든 아니든 단순히 생각나오는 대로 지껄일 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생각한대로만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꽤나 편리하지만 현명하진 않은 모양이다. 그렇기에 이곳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들의 별. 그 누구도 모르게 어느 날 갑자기 여길 훌쩍 떠나고 싶어지는 기분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어쩌면 아직 어려서...나도 시키 언니나 프레데리카 언니처럼 어른이 되면, 그렇게 갑작스레 죽고 싶어질까? 아냐, 그런 게 아냐.’

 

아리스는 시키 언니가 건네 준 알약을 품 속에서 꺼내 보았다. 손바닥 위의 미스터리. 한 사람의 젊음이 시작되기까지 수십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생을 끊는 데는 단 몇 분의 선택만이 필요하다는 역설. 아리스는 여전히 이 알약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에 홀연히 떠나버린다는 선택지는 여태껏 그녀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해본 적도 없고 실행할 마음도 없었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경계처럼, 마치 그녀들과 자신 사이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들에게는 있고, 나에겐 없는 것. 거기엔 나이 차 이상의 그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궁금하면 직접 먹어서 확인해보면 되지 않아?”

 

이미 바닥을 보이는 딸기 우유병을 두드려보며 답답함을 표하던 찰나, 갑작스런 프레데리카 언니의 목소리에 아리스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살풍경한 편의점 안에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는 하는 소년들과 졸고 있는 점원만 있을 뿐,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풍경 속엔 프레데리카 언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어리둥절한 아리스에게 들리는 또 다른 목소리. 이번엔 시키 언니다.

 

여기야, 여기.어딜 보고 있는 거야? 우린 너와 항상 함께 하고 있는 걸.”

 

귀를 기울여보니 손바닥 위의 자그마한 알약이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만 같다.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대엔 온갖 이상야릇한 일들이 일어나는 법이라고 들었지만 설마하니 알약이 자신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아리스는 아직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알약을 노려보았다.

 

“.....”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목소리는 더는 들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리스는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두 소녀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만 같은 기분이다. 너무 지친 나머지 이젠 헛소리들마저 들리는 것일까. 누군가 건드리면 모든 것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 그간 내색하고 있지 않았지만 아리스 자신도 한계에 다다른 것을 느끼고 있다. 그토록 의문의 죽음을 향해 나아갔음에도, 결국 그녀 자신은 결국 떠난 이들과 같아지고 싶지 않음만을 확인할 뿐인 이 이상한 여정. 어쩌면 살아있는 자의 연약함이란 죽은 자들의 만용에 부딪혀 부서지고 마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시키 언니, 프레데리카 언니. 용서해주세요.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전 아직 죽기엔 너무 어려요.’

 

아리스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포기하듯 식탁 위로 알약을 내던졌다. 알약은 점차 힘차게 굴러가면서 속도가 붙더니 갑자스레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운명이 굴러가듯이.


귀를 찢을 것 같은 경적 소리에 섞여 육중한 엔진 소음이 들린다 싶더니 편의점 바깥에 무수히 많은 불빛들이 오간다. 뒤이어 울리는 차임벨과 함께 찢어진 청바지와 가죽 재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서자 순식간에 점내가 가득 찬다.

 

폭주족들.

 

난데없는 대규모 군단의 습격에 자다가 깬 아르바이트생은 허겁지겁 입가의 침을 닦는다. 문신을 새기거나 염색을 한 모습으로 점내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면서도, 호기심에 찬 앳된 표정으로 질서정연하게 과자와 소프트드링크를 고르는 무리들. 난폭해 보이는 인상들에 비해 꽤나 준법정신이 투철한 아이들이라 아리스는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음주 운전은 누구보다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어이, 알겠냐? 일인당 간식은 500엔 까지다! 알코올은 일절 금지! 내 부하가 아스팔트에 갈려 죽긴 싫단 말이다!”

 

알겠습니다요, 대장!”

 

대장! 바나나는 간식에 들어갑니까?”

 

알게 뭐냐, 원숭이 자식. 다이어트라도 하는 거냐!”

 

어디의 소학생들 소풍인가 싶은 유치한 대화를 듣다가 문득 익숙한 목소리에 아리스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타쿠미 언니?”

 

? 뭐야, 아리스? 이런 늦은 시간에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게...”

 

착한 아이는 이제 자러 갈 시간이다. 어서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 아니면...”

 

길을...잃었어요.”

 

?”

 

시키언니와 프레데리카 언니를 찾아 나섰는데, 그만...길을 잃었어요.”

 

어이, 무슨 소리야?”

 

제 잘못이에요. 제가 미리 말렸다면 언니들을 살릴 수 있었어요. 시키 언니가 미리 말해줬단 말이에요. 전 그저 장난인 줄 알았어요. 그냥 지나쳤어요. 타쿠미 언니. 제가 어떻게 그럴 수 가 있었을까요. 시키 언니는 분명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던 거에요. 틀림없어요. 그래서...그래서 찾아 나섰는데...모르겠어요.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죽고 싶지 않아요.”

 

, 아리스 좀 진정해 봐. ? 아니 뭐야, 너 갑자기 왜 울기는 우는 거야?”

 

오오, 대장이 울렸다.”

 

대장, 저희들은 잘 다루시면서 아이 보기엔 소질이 없으시군요.”

 

시끄러워! 니들은 다 닥치고 있어!”

 

갑작스레 샘솟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게 된 아리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꾹 참았다가 터져 나오는 수많은 감정들. 타쿠미는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결심한 듯 아리스를 안아 들었다. 손쉽게 지상에서 솟아 오른 가벼운 몸뚱이. 생명의 무게는 이토록 가벼운가.

 

어디로 가십니까, 대장!”

 

보육원까지 가는 길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대장!”

 

, 혼자 간다! 전원 집합 장소에서 대기하도록!”

 

네온이 빛나는 도시의 밤공기는 서늘하면서도 탁하다. 타쿠미는 아리스를 바이크 뒷자리에 태운 채 곧장 키를 꽂았다. 시동이 걸리면서 진동이 느껴지는 찰나 귀청을 찢을 듯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바람 속을 달려 나간다.

 

어이, 꽉 잡아라. 도중에 멈추는 일은 결코 없으니.”

 

그 말 그대로,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 소녀는 거침없이 밤을 달려, 죽음을 쫓는 소녀를 데리고 사라진다. 갑작스런 일에 어안이 벙벙해진 아르바이트생과 한담을 나누던 소년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만 있을 뿐이다. 폭주족 대장과 함께 사라져버린 울보 소녀의 빈자리엔 다 마신 딸기 맛 우유병만 있을 뿐. 함께 폭주족 무리들은 늘 있는 일인 양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계산대 앞에 선다.


어이, 형씨. 뭘 멍 때리고 있소? 계산이나 하쇼.”

 

바코드를 찍고 나서 계산대에 뜨는 가격이 무미건조하게 깜빡인다.


바나나, 500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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