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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맛 죽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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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23, 2019 10:47에 작성됨.

한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서 아리스는 다시 정처 없이 걸었다. 린 언니와 우즈키 언니에게 따뜻한 환대를 받고서 그냥 돌아가기엔 미안한 나머지 꽃다발을 하나 샀다. 린 언니는 선물로 그냥 주려고 했지만 아리스는 한사코 값을 지불하려 했다. 결국 원래 가격보다 조금 싼 값으로 타협을 보고서 하얀 국화들을 품에 안았다. 수많은 꽃들 가운데 어째서 그것을 골랐는지 린 언니는 딱히 묻지 않았다. 단지 장식으로 검은 리본을 예쁘게 묶어주었을 뿐이다.

 

국화. 향기롭고...아름답네요.”

 

그야, 지금이 제철이니까. 지금 우리 가게에서 이맘때쯤이면 가장 잘 나가는 꽃이기도 하고.”

 

받는 사람이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분명...마음에 들어 해줄 거야. 타치바나양이 주었으니까.”

 

린 언니와 우즈키 언니의 배웅을 받으며 가게를 나설 때까지, 그들은 시키 언니와 프레데리카 언니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아리스는 이미 그녀들에 대한 생각이 다시금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음을 알았다. 애초에 아리스가 린과 우즈키와 만나게 된 것도 그녀들로 인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아리스는 한 손에 든 꽃다발의 묵직한 감각을 느끼며 선물로 받은 수많은 꽃들을 생각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수많은 꽃들을 받았지만 결국 수일 내로 썩어 문드러져 버리는 것은 무척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든 오래 보관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시커멓게 비틀어져 사라져갔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그렇게 아리스의 손가락 사이로 너무나 쉽게 떠나가 버렸다. 지금은 싱싱하게 피어있는 하얀 국화들도 언젠가는 볼품없이 메말라 부서져버릴 운명이라고 생각하니 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별 수 없다는 것을 아리스는 잘 알고 있다.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닐 테니까.


공원에는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꽤나 몰려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일종의 바자회가 막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한때 누군가에게 꼭 필요 했던 물건들이지만 이제는 주인을 잃어버린 것들이 값싸게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행사 주최자들이 종이 박스에서 오래된 옷가지들과 때 묻은 인형과 빛바랜 책들을 꺼내 분주하게 진열하는 가운데 아리스는 어딘가 낯익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클라리스...언니?”

 

어머, 타치바나 양이군요. 반가워요.”

 

이런 곳에서 바자회를 하시는 거에요?”

 

, 저희 교회는 매달 여기에서 후원받은 물품들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바자회를 열고 있답니다. 아이돌이 되고 난 후 참석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지만요.”

 

딱히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아리스는 잠시 돕고 싶다고 말했다. 클라리스는 아리스양의 시간을 뺏을 수 없다고 했지만 아리스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오늘처럼 이상한 하루라면 혼자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있는 편이 더 좋았으니까. 아직 소분되지 않은 상자들을 열어 미처 붙이지 않은 가격표를 붙이고 좌판을 정리하는 것을 도우면서 아리스는 클라리스를 돕고 있는 케이트 언니와 나탈리아 언니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고향이 너무나 멀어서 그대로 일본에 있기로 했단다. 아리스는 물리적으로는 도쿄에서 불과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고향을 두고도 돌아갈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괜히 돌아보았다. 부모님은 여전히 연락이 닿질 않는다.

 

먼지 쌓인 물건들을 깨끗이 닦고 보기 좋게 정리하면서 아리스는 쓸모가 없어진 물건들도 누군가에겐 큰 선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생물들은 참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무런 고통도 감정도 없이 그저 시간 속에 있을 뿐이다. 부서지더라도 교체하거나 새것으로 바꾸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기에 결코 죽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에 반면 생물이란 너무나 연약하고 깨지기 쉬워서 항상 문제와 아픔을 겪고 있으면서도 대체할 무언가가 없는 아주 불편한 존재이다. 더군다나 처음부터 항상 쓸모를 가지고 있는 물건과 달리 생물은 스스로 쓸모를 궁리하고 만들어내야만 한다. 아리스는 문득 시키 언니와 프레데리카 언니의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 더 이상의 쓸모를 만들어내지 못했기에 이른 결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에서 유학을 하면서 촉망받는 천재 과학자이자 모두가 우러러보는 아이돌이 된 소녀. 이국적인 외모에 독특한 미적 감각으로 주목받으며 디자이너를 꿈꾸는 매력적인 아이돌. 세상은 항상 그녀들로부터 숱한 영감과 생기를 얻었으며 그때마다 그녀들은 새로운 무언가를 발산하며 시대를 이끌어왔었다. 그런 그녀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세상이 잠시 주춤하는 까닭 역시 그녀들의 빈자리를 대신할 무언가가 없기 때문은 아닌가 싶었다. 살아갈 이유가 고갈되었기에 스스로 기능을 멈춰버린 그녀들은 너무나 빨리 연소하고 있었던 것일까? 미심쩍은 향수들과 알 수 없는 패션 디자인을 선보이던 두 사람이 딸기 맛 죽음이라는 최후의 발명품을 남기고서 세상과 작별해버린 까닭을 아리스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덕분에 깔끔하게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네요. 정말 고마워요, 타치바나양.”

 

천만에요. 도움이 되어드려서 기뻐요.”

 

너무 많이 시간을 뺏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사례의 의미로 원하는 물건 한 가지를 선물로 주고 싶어요.”

 

괜찮아요. 딱히 보상을 바라고 한 것도 아니고...”

 

후후, 저의 감사하는 마음이라 생각하고 사양 말고 골라주길 바라요.”

 

상냥하게 미소짓는 클라리스의 얼굴과 즐비하게 늘어선 자선품들을 번갈아보다가 아리스는 커다랗고 빛바랜 봉제인형과 눈이 마주쳤다. 철지난 스타일의 구식 인형이지만 여기저기 기워진 자국을 제외하곤 깨끗하다. 전 주인이 누구인진 모르지만 분명 인형을 소중하게 다루었던 것이 틀림없겠지. 무심코 만져 본 솜의 폭신함과 면 소재 특유의 따뜻하고 포근한 촉감이 좋았다. 이렇게 큰 인형을 한 아름 안고 있으면 지금의 알 수 없는 공허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그런 기분이 든다. 클라리스는 그런 아리스를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인형을 건네주었다.

 

연신 도와줘서 감사해하는 클라리스와 손님맞이에 분주한 케이트, 나탈리아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아리스는 공원을 빠져나왔다. 오후에 접어든 시간, 해는 어느덧 서쪽을 향해서 기울며 하늘을 딸기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혹시나 해서 다시 살펴본 핸드폰 액정엔 별다른 답신이 와 있지 않다. 한 손에는 국화꽃을 다른 한 손에는 낡은 인형을 들고서 아리스는 다시 길 앞에 섰다.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 떠나 가버린 지금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는 없지만 아리스는 마냥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왜 평소에 잘 가지도 않던 꽃집에서 굳이 하얀 국화를 샀는지, 이제는 어리광 부릴 나이도 아닌데 아이처럼 봉제인형이 문득 가지고 싶었는지, 어떻게 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이 알 수 없는 기분은 대체 무엇인지, 결국엔 우리 모두가 갈 곳이 정해져 있는데 어째서 지금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인 이 세상 속을 그저 걸었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약통 속 나지막한 달그락거림이 아리스의 구두 굽 소리를 따라 울렸다. 마치 두 소리가 사실은 하나의 소리라는 것처럼, 언제까지고 달그락거림은 멈추지 않는다. 잠들지 않는 도시의 네온사인들 속을 향해갈 수록 그림자는 희미해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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