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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맛 죽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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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23, 2019 10:45에 작성됨.

그러고 보면 꽃집에 들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네.’


울적한 기분을 씻어내고자 매번 지나치던 꽃집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짙은 에메랄드빛 차양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엔 색색의 꽃들이 향기롭게 피어있다. 노랗고 하얀 탐스러운 국화들과 바람에 흔들리는 분홍빛 코스모스. 한창의 제철은 지났지만 흐드러지게 피어난 장미와 백합, 그리고 여러 이름을 알지 못하는 꽃들이 저마다의 화분에서 아리스를 마주하고 있다.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여 침울해하던 아리스는 아름다운 색채와 향기들에 잠시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들을 선택하길 기다리는 여러 꽃들을 바라보다가 아리스는 문득 여태껏 누군가를 위해 꽃을 산적이 손에 꼽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학교 졸업을 하던 날 한 아름 받은 꽃다발들이며 팬들로부터 정성스러운 손 편지와 함께 전해온 화환들까지 꽃다발은 많이 받아보았지만 선뜻 다른 사람에게 꽃을 선물한 적은 거의 없다. 축하받으며 살아온 인생이었지만 남을 축하하며 살아온 시간은 정말 적었다. 온전히 자신을 사랑한 삶을 살아온 것처럼, 그만큼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시간은 없었던 걸까.

 

어서오세요. 어떤 꽃을 드릴까....?”

 

와아! 안녕하세요. 아리스쨩! ....아니, 그게, ,미안해요 타....타치나바양!”

 

, 린 언니, 우즈키 언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곳에는 린 언니와 우즈키 언니가 있다. 그러고 보니 린 언니는 친가가 꽃집을 운영한다고 했었지. 말은 들었지만 그곳이 여기일 줄은 미처 몰랐다. 린 언니와 우즈키 언니는 모두 고향이 이곳 도쿄이니까 함께 오프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미오 언니는?

 

미오 언니는...안계신가요?”

 

, 미오라면 치바의 집으로 돌아갔어. 오빠랑 동생과 지금 잘 지내고 있다고 해.”

 

헤에...”

 

우즈키쨩은 오프날 집에서 미호쨩이랑 쿄코쨩에게 전화 통화만 계속하고 있다고 핀잔을 들어서 린쨩에게로 피신 와 있는 신세랍니다.”

 

...혼자서 가게를 보기 적적해서 내가 초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데 타치바나양은 아직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구나.”

. 딱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요. 부모님은 항상 바쁘셔서 어차피 집에 가봤자 혼자고.”

 

, 그래도 부모님께 자주 연락드리는 편이 좋아요! 저는 집이 바로 여기지만 조금이라도 제때 연락을 하지 않으면 정말 걱정을 많이 하시거든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오프는 여기서 지내겠다고 연락을 드렸는데 답장이...아직 없으셔서. 하아...”

 

,...., 그렇군요. 에헤헤...”

 

그랬구나. 근데 여기는 혼자 어쩐 일이야? 필요한 꽃이라도 있니?”

 

아뇨. 딱히 필요한 꽃은 없지만...그냥 꽃들이 너무 예뻐서...잠시 보고 었었어요.”

 

그럼, 혹시 괜찮다면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갈래? 마침 우즈키가 맛있는 슈크림을 너무 많이 사 와버려서 곤란하던 참이라.”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린 언니와 우즈키 언니에게 폐를 끼쳐드릴 순 없어요.”

괜찮아. 사양하지 않아도 돼. 타치바나양이 손님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니까.”

 

안으로 들어와요. 따끈한 홍차도 있답니다! , 커피가 더 나을까요?”

 

린과 우즈키의 손에 이끌려 가게 안으로 초대된 아리스는 수많은 꽃다발들로 가득 찬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잎이 큰 파초와 산세베리아 화분들이 늘어선 옆에는 정갈한 식탁보가 깔린 크림색의 탁자. 제라늄과 팬지, 자양화가 피어난 가운데 잘 우러난 차가 모락모락 김을 피우고 있다. 테이블 맞은 편 작업대에는 린과 우즈키가 방금 전까지 만들고 있었던 꽃다발들과 꽃잎들이 놓여있었다.

 

회색빛 도시의 한 구석에 숨겨진 생기 넘치는 공간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테이블에 앉은 아리스는 비로소 마음이 놓인듯 숨을 크게 들이쉬며 꽃과 차의 향기로 폐를 가득 채웠다. 마치 아직 살아다있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는 듯이, 구석구석 자신을 휘어감은 어두운 기분을 몰아내고 싶다는 듯이, 죽음 따윈 감히 이곳을 침범할 수 없다는 듯이. 그렇지만 소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알록달록한 알약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리저리 달그락 거리며 소용없다는 듯, 비웃음 지으며. 그것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네가 나를 피하더라도, 결국 너는 나를 먹게 될 거야. 아리스. 아냐...내가 너를 잡아먹는 건가?’

 

시키 언니의 목소리로 소름끼치게 웃는 알약의 달그락거림을 들으며 아리스는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숨이 멎을 듯 소스라치게 놀라 소름이 돋는다.

 

저기...타치바나....?”

 

타치바나 양, 괜찮아? 홍차가 입에 안 맞는 것일까? 역시 커피가 나았을까나?”

,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린과 우즈키의 시선을 의식한 아리스는 태연한척 애를 쓰려했지만 시키 언니와 프레데리카 언니의 죽음이 이 곳에서 함께 자신과 차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척할 수 는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입 크게 베어 문 달콤한 슈크림이 아무런 맛도 나지 않을 리가 없다. 화훼 가위로 이리저리 잘려나간 이파리와 꽃잎들 옆에서, 시들어가는 꽃다발의 향기를 맡으며 죽어가는 소녀들은 차를 마셨다. 이미 죽어버린 소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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