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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나이트 9 - 불협화음不協和音 : 니노미야 아스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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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22, 2019 19:14에 작성됨.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게 열 살 때였다. 처음으로 칼을 쥐고, 살을 갈라 뼈를 찍은 것도 열 살이었다. 천재 소리를 들었다.

 학수는 고아원으로 위장한 시설에서 어린 애들에게 가르쳐선 안 될 짓을 가르쳤다. 주먹 쓰는 법, 급소 찌르는 법, 고통을 주는 법. 나와 아이들은 학수로부터 수만 가지 기술을 배웠다. 죽이고, 죽이기 위해 공포를 심고, 죽이기 전에 원하는 것을 얻고, 죽인 것을 치우기까지의 과정이 그것이었다. 나는 학수에게서 특히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그의 맘에 들었기 때문에. 지옥 같은 태양빛이 내리쬐는 고아원의 마당에서 학수는 내게 말했다. 네가 어떻게 자랄지는 내가 정해. 나는 그의 뜻대로 자라왔다.

 학수의 별명은 살수였다. 이는 그가 최고의 살수였기 때문이며 또한 살수를 제작하는 가장 뛰어난 제작자였기 때문이었다. 놈은 음지의 프로듀서였다. 그 짓을 안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굳이 그 짓을 해온 이유는 순전히 본인이 좋아서라고 했다.

 그가 만든 살수들은 뒷골목 어딘가로 비싼 값에 팔려나간다. 나는 그가 만든 최고의 살수이자 최고의 작품이었다. 내가 고아원의 누구보다 강해진 시점에서 학수는 나를 볼 때마다 인생의 결실을 맞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결실은 그에게 절대 이롭지 못한 방향으로 맺어졌다.

 나는 학수를 죽였다. 중학교 졸업식 날, 눈이 펑펑 내리는 밤에.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 일이었다. 처음엔 영문을 모르던 그도 내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기술을 배웠음을 깨닫고선 안심한 얼굴을 보였다. 뭐야, 난 또 내가 잘못 가르친 줄 알았구나. 그게 그의 유언이었다.

 그의 사체를 처리하고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녔고, 따돌림을 당했고, 노력했으나 별반 소용이 없었다. 이대로 대학에 가봐야 소용없겠다 싶어 일찍이 공장이나 공사판에서 아르바이트를 뛰었다. 운이 좋아 형님들을 만났고, 해결사가 되었다. 메서드를 만나고 동생들이 생겼다. 그곳에서 나는 최고였다. 그야 최고일 수밖에.

 내 마음엔 항상 눈이 내렸다. 내 과거를 덮는 하얀 눈이. 메서드는 물었다. 눈에 묻히면 사라지지 않는 거잖아? 나는 내리는 눈을 보며 답했다. 그래서 좋은 거야, 내가 어떤 놈인지 기억할 수 있으니까.

 그 후 좋지 못한 일을 겪었다. 한국을 떠나 일본에 왔다. 최고의 해결사에서 내려와 프로듀서가 된 지금. 나의 마음엔 비가 내린다. 비는 학수의 것이다. 빗소리는 마음을 차분케 하고, 피 냄새를 진하게 해 본능을 깨운다. 얼어붙은 나의 마음을 해동시켜 묻혀있던 과거를 파헤친다. 환상과 망상이 되어 떠오르는 기억들이 맹독처럼 나의 시야에 퍼져나간다. 잘못 가르치지 않았어. 학수가 내게 말한다. 네가 어떻게 자랄지는 내가 정해.

 “넌 프로듀서 따위를 할 녀석이 아니야.”

 머리를 바닥에 찧어 환상을 떨쳐냈다. 악몽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은 내가 밤새 한숨도 잠들지 못한 채였음을 알게 됐다. 아침인데도 구름이 짙어 어두웠다. 하루의 시작. 스며드는 열기. 가득한 습기. 비가 올 날씨였다. 절망이었다. 바닥을 기어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맞았다. 냉기가 깊숙이 들어오지 못 하고 살갗을 흘렀다. 타일 위로 떨어져 배수구로 넘어갔다. 한계를 맞은 오늘이 시작되었다.


 *


 뭘 했더라. 찬찬히 어제를 되짚었다. 정신은 깨어있었으나 현재가 아닌 과거와 가상으로 점철된 밤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몰려오는, 원치 않는 파도처럼. 분명, 시키를 데리고 회사로 돌아갔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았다.

 치히로와 일 얘기를 조금 나누는데 시키가 끼어들었어. 괜찮은 아이디어를 몇 개 던져서 데려오길 잘 했다고 칭찬했고. 퇴근을 하고 시키와 떨어져서 집으로 돌아왔지. 자기 전에 미오에게선 문자가, 아나스타샤에게선 전화가 왔고. 별 거 아닌 내용인데 둘 다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보였어. 그 뒤에 자리에 누웠지만…….

 시간이 생략된 것만 같았다. 비현실적인 감각이군. 트레이닝복을 입고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운동을 해야 해. 동네를 빠져나가 크게 세 바퀴를 돌았다. 최근에 운동을 너무 쉬었어, 그래서 몸이 약해진 거야. 몸을 압박하자 녹슨 부품처럼 관절이 삐걱거렸다. 조깅이 끝난 뒤엔 집으로 돌아와서 팔굽혀펴기 세 세트, 윗몸일으키기 세 세트.

 바닥이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렸다. 실내의 습도가 치솟아 괴로웠다. 그래도 정신은 차렸어. 다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집 밖으로 나섰지만 도저히 회사까지 갈 자신이 없어서 아침부터 택시를 잡아야 했다. 사무실에는 치히로가 먼저 와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프로듀서님?

 인사를 하다 표정이 심각해졌다.

 “괜찮으세요?”

 “네…….”

 목소리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미치겠네.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정정하고 다시 대답하려하자 치히로가 고개를 저었다. 억지로 괜찮은 척 하지 마세요.

 “집에 가면서 무슨 일 있었나요?”

 “아뇨. 아무 일도…… 정말로…….”

 “병원은요? 가봐야 할 거 같은데.”

 “안 돼요. 어제, 어제도 사실상, 종일 쉬었는데, 그건 안 됩니다. 할 일은 해야죠. 그래야…….”

 침을 삼킬 때마다 목이 아팠다. 혀끝이 마비된 것처럼 얼얼한 감각이 감돌았다. 억지로 말을 토했다. 그냥, 제발.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닦아냈다. 애들한테만, 말하지 말아줘요, 혹시라도. 차가운 쿨팩을 애써 들어보였다. 이거면 되니까, 무슨 일 없어요.

 “정말입니다.”

 “…….”

 치히로가 자기를 보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직 회사가 크지 않았을 때, 누구도 의지 않고 독하게 살아남은 인간만이 지을 수 있는 눈이었다. 그 끝이 어찌 될지 알면서도 지금의 마음을 이해하는, 그런 눈.

 “상태가 더 나빠지면 무조건 말하세요. 어떻게든 빼드릴 거니까.”

 “네…….”

 “아이돌들에게 말할 일 없게 해주시고요.”

 치히로가 자기 책상으로 간 뒤에 나도 내 책상에 앉았다. 모자를 벗어 한쪽에 장식해둔 마트료시카에게 씌워줬다.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한심한 놈. 의자에 의지한 채로 자조했다. 아침부터 걱정 끼치고 고집부리고 잘 하는 짓이다. 선배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신입들이 제일 먼저 하는 실수.

 의욕만 넘쳐서 회사에 보탬이 되겠다고 나대는 짓. 능력도 없으면서 헛짓거리 말라고, 성급히 굴지 말라 그랬는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뭔 깡으로 그런 말 했냐. 무너져가는 그 때 폰이 울렸다.

 Доброе утро! 좋은 아침이에요, 프로듀서.

 메시지. 아나스타샤로부터 온. 그럴 리가 없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상태를 알고서 보낸 것만 같은, 그렇게 믿고 싶어지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오늘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왔다. 순간 몸이 서늘해졌다.

 손톱으로 화면을 두드리다 ‘고마워’라고 답장했다. 너무 뜬금없으려나.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 그런데 ‘저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움직임이 멎었다.

 무엇이. 뭐가 그렇게 고마운 걸까. 멀리 떨어진 그곳까지 나는 어떤 것도 해주지 못 하는데. 나는 백야이자 전직 해결사, 살인자, 사기꾼, 살수, 괴물. 너에게 무엇도 도움이 되지 못 하는 정장이란 껍데기를 뒤집어쓴 무언가에 지나지 않는데. 너와 너희들에게 받기만 하고 오히려 해가 될지도 모르는데. 내가 대체 뭐길래.

 “프로듀서님.”

 고개를 돌렸다. 치히로가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오므렸다. 무슨 일이시죠? 으음, 하고 애매한 소리를 냈다.

 “가만히 있으셔서 역시 상태가 안 좋은 건가 했는데요.”

 “그런 건, 아닙니다.”

 “네. 지금 보니까 아닌 거 같아요.”

 치히로가 내 폰을 가리켰다. 뭘 봤길래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거예요? 나는 다시 화면을 응시했다. ‘프로듀서가 있어줘서 좋아요.’ 어느새 문자가 하나 더 와 있었다.

 나는 폰을 끄고 고개를 저었다. 그냥요.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회사 사람이 한 명 들어왔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지만 동료라고 부르기엔 뭣한 종류의 유형이었다. 치히로와 선배를 제외하고 회사 사람들은 전부 나와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이어서 한 명 더 회사 사람이 들어왔다.

 나는 폰을 끄고 치히로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보시는 대로, 조금 괜찮아졌습니다. 아직 미덥지 않다는 듯 뺨을 긁다가 치히로는 자리로 돌아갔다. 사무실에 계속 사람이 들어왔다. 그 중 한 명이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어색하게 눈을 돌렸다. 이렇게 생겨먹었을 뿐 위협하는 거 아니에요. 마트료시카의 모자를 벗겨 다시 썼다. 아까 보다 안정이 되었다.

 컴퓨터를 키고 어제 마무리 못한 파일부터 열어보았다. 머리 싸매고 고민한 흔적 사이사이 시키가 낸 아이디어들이 반짝였다. 다음은 공모용으로 준비 중인 기획 PT를 확인했다. 미오를 위해 만든 연출안이 꽤나 매끄럽게 짜여있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에게 이 아이들은 무엇일까.


 회사의 장점은 야근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득이하게 야근을 하게 되면 그만큼 추가 수당을 준다. 선배나 치히로는 덕분에 꽤 짭짤하게 챙겼다고 하는데, 업무에 따라가기 힘든 나 같은 경우는 달랐다. 그날 해야 될 일을 그날 다 하지 못 해서 야근을 하는 일이 여럿 있었다. 일 자체보다는 그때마다 아나스타샤에게 퇴근했다고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게 힘들었다.

 그래도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훌륭한 직장이었다. 편견 없이 능력에 따라 평가 받는 사회. 흔히 말하는 블랙 기업이 넘치는 이 업계에서 이만한 대우를 해주는 회사는 더 없었다. 팀장 주도하에 전 사원이 지켜야 하는 원칙이었다.

 이 회사는 개성 넘치는 아이돌들이 많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사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단 나부터 그랬고, 선배 또한 그랬으며 ‘팀장’도 그런 부류였다.

 회사가 지금처럼 커지기 전까지 팀장은 얼굴조차 보기 힘든 유령 사원이라고 들었다. 지금은 회사에 개인 사무실을 갖고 있는데, 그 안에서 절대 나오지 않는 철옹성의 인간이었다. 일을 안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일을 잘 한다. 선배 외에는 팀장 보다 일 잘하는 사람은 없다고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원래 팀장은 출근을 하지 않고 자택에서만 일했다고 한다. 메일로 보내주는 업무 파일과 카메라로 찍은 아이돌들의 레슨 영상만을 보면서 말이다. 이런 짓이 가능했던 이유는 팀장이 이 회사를 만든 회사의 주인이면서, 경영 관련된 일은 따로 사람을 고용해서 맡겨놓고 본인은 실무만 맡는, 괴짜였기 때문이다.

 개인 사무실이 생기기 전까지, 그러니까 팀장이 ‘출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회사의 누구도 팀장의 얼굴조차 몰랐다. 팀장이 여자라는 걸 알고 대부분의 직원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치히로가 말해줬다. 자기도 그랬다면서. 나도 지금껏 딱 한 번, 이 회사에 입사할 때만 본 적이 있다.

 팀장은 업무용 단체 채팅방을 통해 매우 무미건조한 말들만 기계적으로 내뱉는 정 없는 인간이었다. 사원들은 물론 아이돌들과도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업무를 위해서만 만나는 공적인 관계라고 딱 잘라 말하는 뉘앙스였다. 나쁜 건 아니고 쓸데없이 귀찮게 굴지 않는다고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정도가 좀 과했다.

 때문에 팀장과 ‘독대’를 한다는 것은 이 프로덕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매우 훌륭한 실적을 냈거나 매우 큰 사고를 쳤거나. 보통 둘 중 하나의 경우라는데 팀장의 사무실 앞에 서서 생각해 보니 솔직히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큰 실적을 낸 적도 없지만 팀장 귀에 들어갈 만한 사고를 친 적도 없었다. 굳이 예상하자면 후자를 고르겠지만. 별 생각 없이 두꺼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 아……. 앉으세요. 거기, 소파. 아하하…….”

 문자로 말할 때와 달리 굉장히 쭈뼛거리는 말투였다. 진한 다크 서클에 척 보기에도 꾸미기엔 관심 없는 얼굴과 상반되는 고급 정장, 내 사나운 눈매와는 관계없이 갈 곳을 잃은 동공, 오랜 시간 안 좋은 자세로 일해서 살짝 기울어진 중심. 테이블 위에 놓인 차는 물을 너무 많이 부어서 색이 연한데다 너무 빨리 탔는지 식어있었다. 사회성과는 거리가 먼 부류. 왜 회사에 출근 안 했는지, 왜 사무실에만 틀어박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히키코모리. 능력은 있지만 부모 잘 만나지 않았으면 지금쯤 세상에서 매장됐을 인간.

 “요새, 그, 회사에 별명이 떠돌더라고요?”

 “네. 겨울P라고, 많이들 부르고 있습니다.”

 “아이돌들이 지어줬다던데. 귀엽네요……. 신기하고. 그런 걸 다 지어주다니. 어어, 그럼 저도…… 그렇게 불러야 할까요……?”

 눈치를 보고 있었다. 분명 내가 부하인데. 왜지. 보고 있으면 짠하고, 부담스러고, 한편으론 참 한심해 보였다. 뭘까, 대체, 이 여자는.

 “아무렇게나, 불러주십시오.”

 “아, 네. 그럼 말이죠, 겨울P. 제가 여기 왜 불렀는지는…… 모르시죠?”

 “모릅니다.”

 “네……. 그렇죠. 모르겠죠. 그냥 그게 그러니까, 요새 많이 힘들어 한다는 말을 들어서요. 어, 회사에서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해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정말요?”

 “네. 정말로요.”

 “와아……. 다행이다.”

 팀장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걱정하는 마음이 반, 귀찮은 일을 덜었다는 마음이 반이었다.

 나는 이 회사에서 카코가 꽂은 낙하산으로 입사했다. 분명 돈을 썼을 것이고, 그 돈은 당연히 회사의 주인인 팀장의 주머니로 들어갔을 터. 팀장은 내가 뭘 하던 인간인지 모른다. 딱히 나를 편애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큰 사고를 쳤다면 잘라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돈줄을 버리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회사에 도움이 되는 한은.

 “그걸, 물어보시려고, 부르신 겁니까?”

 “아. 이거 말고도 있긴 있어요. 음……. 겨울P의 아이돌들, 요새 성적이 좋거든요. 이대로 가면 회사의 간판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말해주려고요.”

 방금 지어낸 느낌이 강했다. 애들이 잘 나가는 건 맞지만 특별히 불러서 칭찬할 정도로 큰 실적은 아니니까. 진짜 이유는 좀 전의 상태체크겠지.

 “겨울P는 크게 될 수 있을 거 같아요. 아직은…… 작지만요.”

 눈을 살짝 깔고 말했다. 이건 진심인가 보군.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상대가 기분 나빠 하는 걸 두려워하면서도 본심을 숨기지 않는다.

 “원래부터 센스가 있었는데, 요새는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이……. 이루고 싶은 목표라도 생겼나요?”

 “……네.”

 눈썰미는 무시할게 못 되는군. 목표가 생겼냐는 건 원래는 목표가 없다고 여겼다는 뜻. 그 말대로 애들을 만나기 전까지 내겐 이곳에서 이루고픈 목표 따윈 없었다.

 “저의 담당 아이돌들이,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아아……. 신기하네요.”

 “뭐가, 말입니까?”

 “음. 그냥 뭐라고 할까. 가을P 같다는 느낌이라. 그 사람은 자주 말하잖아요. 아이돌들은 신데렐라, 자기는 마법사라고. 아이돌들이 잘 될 수 있도록 열심히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신기해요.”

 팀장이 냉소를 머금었다.

 “세상엔 완전무결한 해피엔딩이란 없거든요.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는 이야기 따윈 동화에서나 나오는 건데. 능력이 있고 여유가 되니까 그런 말을 하나 싶기도 하고……. 겨울P는 안나 카레니나 알아요?”

 “압니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행복은 온갖 여건이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그 중 하나만 없어도 불행해질 수 있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보기에 엄청 잘 나가는 사람도 다른 면에서는 삐뚤어지거나 무너져 내렸을 수 있다는 거죠. 근데 그걸 모르고 자꾸 너는 잘 돼서 좋겠다고, 그렇게 멋대로 알고 결론지어 버리면, 진짜 사람 힘들거든요. 항상 그게 문제예요. 타인.”

 말이 빨라졌다. 끊김이 없고 유연했다.

 “사람들은 순위 매기기를 좋아해요. 순위 매기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실은 자기가 높은 순위에 못 드는 걸 싫어하죠. 그래서 자기가 순위권에 들 수 있는 경쟁 구도를 만들어요. 행복해질 수 없다 싶으면 불행에 순위를 매기고, 자기가 더 불행한 걸 인정받고 싶고, 누가 내 앞에서 행복이나 불행을 자랑하면 입 다물라고 해요. 이런 세상인데 어떻게 모두가 잘 될 수 있겠어요. 남이 잘 되면 내가 못 된다는 건데. 경쟁 사회에서. 결국 서로 얼굴 붉히게 돼요. 인간관계, 금방 틀어질 수밖에 없다고요.”

 아. 팀장이 입을 가렸다. 그, 괜한 말, 했죠? 제가. 작게 중얼거리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그, 그런 거예요.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이상하다는 건 아니고, 신기하다고요.

 “너무 오래 붙잡아뒀네요. 바쁠 텐데. 가봐야 되죠?”

 “네. 그런데, 저도 하나,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저한테요? 네…….”

 “팀장님은, 어째서, 프로듀서를 하시는 겁니까?”

 궁금해졌다. 이 사람에 대해. 선배와는 반대인 팀장에 대해. 타인과의 관계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타인의 만족을 우선으로 하는 이 업계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신입 프로듀서로서 호기심이 갔다.

 팀장은 잠깐 갸우뚱 하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었거든요.

 “누구죠, 그게.”

 “타카가키 카에데요. 그 사람이 데뷔했을 때 팬이 됐었죠.”

 “‘됐었다’는 건.”

 “지금은 아니에요. 많이 달라져서.”

 “무엇이 말입니까.”

 “모든 게. 겨울P는 당연히 모르려나요. 이 사람이 데뷔했을 때, 지금도 굉장하지만 옛날엔 더 대단했거든요. 구체적으로, 데뷔 1개월쯤부터 해서 10개월 됐을 때까지. 지금이 소재로서 대단하다면 그 때의 타카가키 카에데는 완성품으로서 대단했어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재료는 그대로인데 요리사가 달라진 거 같다고요. 프로듀스 스타일이. 아마 큰 사건을 겪어가지고 소속사 차원에서 이미지 관리에 들어간 게 아닐까 싶은데.”

 “사건이요?”

 “아. 이것도 모르겠구나. 데뷔해서 1년 쯤 됐을 때 연애 스캔들이 돌았어요. 이 업계에선 한창 잘 나갈 때 치명적으로 다가오죠. 가짜로 판명 났지만 워낙 여파가 커서 한동안 슬럼프였다가 다시 회복하나 싶더니 전성기만 못 하더라고요.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너무 안전만 추구하는 느낌. 참신함이 없어요. 저도 이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떠났고요. 근데 여전히 그대로더라고요. 소문으로는 총선거 1위 기념으로 데뷔곡 리메이크를 시작했다는데 잘 안 된다고도 하고.”

 “마음이 떠나셨다면서, 잘 아시네요.”

 “그야 경쟁사의 간판이잖아요. 시장 분석을 위해서라도 체크하는 게 당연하죠. 어쨌든 타카가키 카에데를 보고 저런 아이돌을 만들고 싶다는 자기만족을 위해 저는 이 회사를 만들고 프로듀서를 시작한 거예요. 더 상세한 이유도 있지만, 그건 제 프라이버시라 말 못하겠네요. 이 정도로도 대답이 됐을까요?”

 “네. 참고가 됐습니다.”

 “혹시 비꼬는 건…… 아니죠?”

 “전혀요.”

 차 잘 마셨습니다. 별로 마시고 싶지 않은 액체를 목구멍으로 넘기고 사무실을 나왔다. 오늘 날씨만큼이나 잘못된 맛이었다. 우중충하고 꿉꿉했다. 창문에 투둑, 툭, 물방울이 닿더니 한바탕 쏟아졌다. 열기가 한번 가시면 좋을 텐데. 안 좋은 예감만이 들었다.

 복도를 걸으며 팀장의 말을 곱씹었다. 사교성, 사회성이 떨어지지만 자신의 관심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날카로운 시선을 겸비한 인간. 세상에 완전무결한 해피엔딩이란 없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무섭도록 현실적이었다. 선배와 정반대 자리에 서 있는 사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회사의 주인이자 선배보다 위에 있는 사람. 동화를 부정하면서 동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

 어째서 날 받아들인 걸까. 원하는 게 돈은 아니다. 그러기엔 이 회사는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파격적인 행보를 밀고 나가는 꿋꿋함이 있다. 타인과의 관계를 극도로 꺼리는 조심성과 자기 뜻을 위해 수단 방법 안 가리는 과격함이 팀장 안에 공존했다. 뭐하는 인간일까. 저건.

 사무실에 돌아오니 점심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뭘 했나 싶을 만큼 일은 진도가 안 나갔는데 시간만 축내고 말았다. 사무실 사람들은 이미 밖에, 창밖을 보니 쏟아지는 비에 입구서부터 발이 묶여 있었다. 뛰어나가지 못 하는 건 아마 오후에 외부 미팅이 있어서겠지. 하나 둘씩 구내 식당을 이용하러 들어가 버렸다.

 책상에 앉았다. 아침부터 공복이지만 아직도 식욕은 없었다. 기운도 없다. 몸이 에너지를 거부하고 있었다.

 남는 시간에 뭘 하겠어. 일이나 해야지. 전원 꺼둔 모니터를 켰다. 벌컥, 문이 열렸다. 단정한 흑색에 프릴이 잔뜩 달린 고스로리 복장을 입은 소녀가 들어왔다.

 “그대가 눈의 요정을 지키는 흑백의 기사인가?”

 고풍스러운 대사 뒤로 번개가 쳤다. 천둥이 대기를 울리자 건물이 진동했다. 소녀가 히익, 겁먹은 소리를 냈다.

 내가 말했다. 네?


 *


 야. 백야.

 왜. 뭔데.

 넌 개인 사생활이라는 게 있냐?

 있지.

 뭐 하는데.

 사무실에 누워서 잠을 자거나 괜찮은 맛집 찾으면 가서 밥 먹고. 날씨 좋으면 산책하고, 밤바람 쐬고. 동생들이랑 농담이나 따먹고.

 일 없는 동안 대체 그것만 하면서 어떻게 사냐. 난 널 보면 좀 이해가 안 가. 티비도 잘 안 보고,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고, 게임도 안 하고. 운동은 죽어라 열심히 하는데 헬스나 몸만들기엔 관심도 없잖아.

 흉터투성이인 몸 만들어서 뭐하냐.

 그럼 땡볕에서도 죽어라 트레이닝은 왜 하는데? 근손실이 두렵냐?

 평소에 관리를 해둬야 만약의 일이 생겨도 대응할 수 있거든.

 너 그거 강박이야, 미친 놈아.

 자꾸 잔소리 말고, 내가 그렇게 짠하면 좋은 거 추천이라도 해주던가.

 연애 해. 내가 좋은 여자 소개시켜 줄게.

 싫어.

 단호한 새끼.

 원래 싫은데, 네가 소개시켜 주면 더 싫어. 네 전 여친 소개시켜줄 거 같아.

 전 여친은 안 되지. 내 지금 애인들이 싫어하거든. 아, 그럼 친구라도 만나.

 없어.

 없어? 하나도?

 응.

 나는? 형님들이랑 동생들 빼고, 나는?

 동료지. 너도 나 친구로 생각 안 하잖아.

 …… 하긴 그렇다. 너는 참,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놈인데, 아무리 봐도 친해졌단 느낌은 안 들어.

 나도 그래. 내 눈앞에 있는 네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메서드인지, 다른 사람의 가면인지.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 사무실 사람들이랑은 어느 정도 이상 친해지지 못 할 거 같아.

 그건 또 왜.

 너무 친해지면, 일 할 때 실망하거든.


 *


 밤늦은 시간에 아나스타샤와 길을 걷다 대화를 나눴다.

 “오늘은 Звезда(별)가 많이 보여요.”

 “그러게. 도시치고는, 많이 보여.”

 “집으로 돌아갈 때 별이 보이면 축복해주는 것 같아요. 수고했다, 내일도 열심히 하자. 응원 받는 기분. 러시아의 하늘. 홋카이도의 하늘. 도쿄의 하늘. 조금씩 다르지만 마음만은 같아서 정말로 좋아요.”

 아나스타샤가 말 하는 동안 나는 그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천천히 마음을 표현하는 어조가 시 같았다. 역시 감성적이 된 나는 예전 동료들을 떠올렸다. 한국의 하늘도, 그러려나. 나지막이 말한 것을 놓치지 않고 아나스타샤가 답해주었다. Да(네). 분명 그럴 거예요.

 완벽한 시간이었다. 하늘도 공기도. 분위기와 어둠, 그 순간마저. 모든 게 별을 밝히고 우리를 조명하기 위해 존재했다. 그대로 쭉 이어갔으면 좋았겠지만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오늘 하루 수고하셨어요, 프로듀서. 어둠에 삼켜지세요.”

 “…….”

 순수한 소녀의 순수한 한 마디가 모든 걸 깨부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아나스타샤는 본인이 한 말이 지금 상황에서 왜 문제가 되는지도 알지 못 했다. 그냥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을 따라했을 뿐. 프로듀서? 고개를 젓는 내게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제발 이상한 것 좀 배워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라고 나는 연신 생각했다.

 프로덕션에는 좋은 사람이 많지만 그들이 모두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는 할 수 없다. 당장 시키만 해도 잠재적 위험성을 지속적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무엇을 갖고 어떻게 사고를 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특히 개성 강한 아이돌들이 아나스타샤에게 미치는 영향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강했다.

 예를 들어, 고양이 컨셉으로 유명세를 얻은 마에카와 미쿠라는 아이돌은 자꾸 고양이 캐릭터를 영업해 왔다. 비슷하게 우사밍 성인이라는 정체불명 외계인 컨셉을 잡은 아베 나나도 메이드라던가, 토끼라던가 과하게 귀여운 캐릭터를 밀어붙여왔다. 수많은 정보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아나스타샤의 순백은 이것들을 전부 노트에 받아 적어 연구를 할 정도였다.

 열정은 훌륭하다. 자신의 단점을 알고 발전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은 아름다우며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상한 것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 좀…… 그랬다. 미오도 몇 번 당했다.

 때문에 나는 아나스타샤가 되도록 컨셉이 과한 사람들에게서 개성이 과한 어투를 배워오지 말기를 바랐다. 고스로리 복장의 소녀, 칸자키 란코도 그 중 하나였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사무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후후, 하고 작게 웃더니 칸자키 란코가 손을 뻗었다.

 “마력이 담긴 검은 생명수를 주면 고맙겠구나!”

 “…….”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그 자세 그대로 서서 고민했다.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싸늘한 적막에 란코는 말을 더듬었다. 브, 블랙커피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커피 캔 두 개를 꺼냈다. 소파에 마주 앉아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

 “오늘 아침, 성가신 태양에 장막이 드리웠을 때 눈의 요정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태양이 성가시다는 것을 제외한 그 어떤 말에도 이해와 공감을 보낼 수 없었다. 원래 무뚝뚝한 내 얼굴이 한층 더 짙은 무감정을 발랐다.

 “우리는 지금 큰 곤경에 빠져있다. 한쪽 날개가 꺾여버려 더는 비상할 수 없게 되었지. 연회가 얼마 안 남았는데 말이다. 곤경을 해결해줄 우리의 벗은 다른 동료들을 도우러 떠나버려 부족한 마력을 보충 받을 수도 없는 상태. 이대로 가다간 기다리는 것은 파멸뿐이다. 그런데, 나의 마음을 읽은 눈의 요정이 바로 그대, 흑백의 기사를 소개해준 것이다. 그대가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저기.”

 “무엇이냐?”

 “한 번 더,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뜻인지 하나도 알아먹을 수 없었다. 의미 이전에 알아듣기도 어려운 일본어 세례에 백기를 들어야 해다. 일본어가 맞는지조차 의심이 갔다. 어째서인지 란코는 나의 반응에 본인이 상처 입은 표정이었다. 뭔데, 대체. 울고 싶은 건 나라고.

 이대로는 이야기에 진전이 없겠어. 머리를 굴렸다. 방금 어록에서 단서를 추려냈다. 곤경. 날개. 연회. 우리의 벗. 동료. 파멸. 눈의 요정. 그대. 흑백의 기사.

 소녀는 곤경에 빠져있다. 날개가 꺾였다고 한다. 한쪽만. 그래서 날 수도 없고 연회도 못 연다. ‘우리’의 벗은 어딘가로 떠났고 그래서 전부 망할 지경에 다다랐다. 그랬더니 눈의 요정이 흑백의 기사를 소개시켜줬는데, 흑백의 기사가 바로 나다. 항상 검은 정장을 입고 다니지만 이름은 백야인 사람. 나를 소개해준 눈의 요정이란…… 아나스타샤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벗을 대신할 조력자다. 곤경을 해결해줘야 한다. ‘나’의 벗이 아닌 ‘우리’의 벗이라는 건 소녀가 겪고 있는 상황에 끼여 있는 인물이 최소 세 명 이상이라는 뜻, 날개는 보통 두 개가 한 쌍이므로 세 명이 적절해 보인다. 날개 하나는 란코 본인, 다른 날개는 란코와 대응하는 인물. 이를 아이돌이라 가정했을 때, 나와 대응하는 벗이란 존재는 프로듀서일 것이다. 란코의 담당은 선배. 즉.

 “칸자키 씨와, 누군가가, 곤란에 빠졌는데, 하필 선배가 없어서, 저를 찾아오셨군요. 아나스타샤에게 소개 받아.”

 맞습니까? 확인을 구했다. 란코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환희로 바뀌었다.

 “그대는 진실을 파헤치는 혜안의 눈을 가졌구나!”

 란코의 눈에 광채가 돌았다. 심하게 기뻐했다. 다른 건 몰라도 기뻐하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내가 자기 말을 들어서.

 중2병. 한창 사춘기 청소년들이 겪는 질풍노도의 시기. 란코의 나이는 14살로 올해 딱 중학교 2학년이었다. 이 시기에 아이들은 보통 자아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든다는데, 란코가 선택한 것은 판타지로 보였다. 셰익스피어 마냥 고풍스럽고 어려운 말투로 포장한 언어들, 중세 시대를 기반으로 드래곤과 마왕이 싸우는 그런 세계관.

 속편한 삶이군. 커피 캔을 땄다. 난 그 나이에 파스타 면으로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우고 있었는데. 이젠 국가를 넘어 아예 다른 시대의 언어를 쓰는 아이와 대화를 해야 했다. 선배는 얘랑 대체 어떻게 말을 나누는 건지.

 씁쓸하게 커피를 넘겼다. 그러자 란코의 눈이 한층 반짝였다. 이젠 대체 뭐에서 터진 건지 예측조차 안 갔다. 시커멓게 차려입은 인간이 시커먼 물을 마시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자기도 커피 캔을 들었다. 비장하게 캔을 따고 마셨다. 동시에 미간이 좁혀지는 모습을 보였다. 액체를 넘기지 못 하고 입 안에 머금고 있었다. 저러다 토할라. 억지로 한 모금을 넘긴 란코는 난적을 쓰러뜨린 표정을 지었다.

 “칸자키 씨.”

 “무, 무엇이냐.”

 “저는, 뜨거운 음식, 매운 음식 싫어합니다. 잘 안 먹어요. 이 나이 되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탕비실에서 컵과 티스푼, 각설탕을 가져왔다.

 “차라리 쓴 게 낫지, 질색입니다. 반대로, 달콤한 거, 정말 좋아합니다. 바닐라 좋아해요. 취향이에요.”

 가져온 물건들을 란코의 앞에 내려놓았다.

 “입에, 맞는 걸 먹는 게, 가장 좋습니다.”

 “……후후. 눈의 요정의 말대로구나. 흑백의 기사여, 그대의 지혜를 받아들이겠다.”

 란코는 커피를 컵에 따르고 각설탕을 담았다. 꽤 많았다. 티스푼으로 컵을 젓는 행위에 스스로 심취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커피를 마실 때마다 유심히 지켜봤다. 동경심이 느껴졌다. 나는 중학교 2학년 소녀에게 원치 않는 호감을 얻고 말았다. 차라리 잘 된 일이려나.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담판을 지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칸자키 씨.”

 “무엇이냐, 흑백의 기사여.”

 “저는, 칸자키 씨의 개성을, 존중합니다. 많은 이들이, 팬들이, 칸자키 씨를 좋아하죠. 하지만, 제겐 너무 어렵습니다.”

 “아…….”

 “공부 중이지만, 아직, 이 나라의 언어는, 익숙지가 않습니다. 지금의 저는, 칸자키 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그러니, 괜찮으시다면…….”

 “정말로…… 해결해 줄 수 있나요?”

 란코의 목소리가 떨렸다. 긴 대화 중에서 가장 진심이 담겨있었다.

 “쭉 고민하다가 아냐에게 털어놨어요. 그랬더니 아냐가 겨울P를 찾아가 보라고 했고요. 저는 아냐를 믿어요. 믿지만…….”

 순간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내 앞에 있는 이 문을 열고 이 아이의 영역으로 발 딛어도 될지를. 관자놀이에서부터 고통이 지긋이 퍼졌다. 불로 지지는 것처럼, 깊숙하고 섬뜩하게. 아팠다. 직감이 경고했다. 한 번 들어가면, 발 뺄 수 없어.

 해결을 해야 만이 해결사야. 실패하면 비웃음을 당하지. 애초에 이 애가 선배의 담당이라면 이 문제는 온전히 선배의 일이야. 네가 관여할 필요는 없어. 할 일이 많지? 컨디션도 나쁘잖아? 변명 거리는 많아. 지금은 여름이니까. 그럼에도 꼭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아나스타샤의, 부탁이라면.”

 이유는 충분했다.

 “해결, 해드리겠습니다.”

 란코가 입술을 물었다. 한 번 더 마음속으로 결심하고 사정을 털어놓았다.

 “상담 드리고 싶은 건 아스카와의 일이에요.”

 아스카. 아는 이름이었다. 니노미야 아스카. 선배의 담당 아이돌, 14살, 란코와 같이 유닛 ‘다크 일루미네이트’를 결성했으며 둘의 성향은 비슷했다. 그리 대화를 많이 나눠본 건 아니지만 나와는…… 상성이 나쁜 축에 속했다.

 “우리의 유닛, 다크 일루미네이트는 이제 곧 신곡을 받아 데뷔 무대를 갖게 돼요. 멋진 무대를 갖기 위해 레슨하고, 노력하는 중이었지만, 언젠가부터 호흡이 전혀 맞지 않게 돼서…….”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트레이너는…… 눈앞의 서로를 보지 못 한다고 했어요. 프로듀서도…… 응석부리지 말라고…….”

 응석. 묘하게 구체적인 단어였다.

 “그 뒤로…… 아스카는 화가 났는지 밖으로 나가버렸어요. 프로듀서가 자신을 이해 못 한다면서 저하고만 얘기하려 했지만, 저하고도 싸운 뒤로 프로덕션에는 오지 않고 있고요. 전화도 메시지도 안 받고…… 프로듀서도 로케를 가면서 아스카와는 전혀 연락이…….”

 “니노미야 씨와 싸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란코의 입이 멈췄다. 잠깐 침묵을 삼킨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트레이너와 프로듀서의 조언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사적으로는 친했지만 제대로 유닛을 짜서 활동하는 건 처음이라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 하는 거라고. 제3자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고. 그런데 아스카는 그마저도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저었고요.”

 “그 뒤로, 만난 적은?”

 “없어요.”

 “해주실 이야기는, 거기까지 입니까.”

 “…….”

 란코가 괴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내 눈을 피하더니 설탕을 듬뿍 녹인 커피를 홀짝였다. 나도 따라서 커피를 마셨다.

 두 사람의 문제라면 양쪽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교차검증.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알아봐야 해.

 “니노미야 씨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네요.”

 “아스카는 저랑은 전혀 만나주지 않아요.”

 “만나게 해야죠.”

 “어떻게?”

 “방법이야, 많습니다.”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점심시간이 끝나가지만 여전히 식욕은 없었다.

 “나가봐야겠습니다. 점심 드세요.”











아스카 에피소드인데 상편 내내 아스카 안 나오는 거 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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