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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맛 죽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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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21, 2019 22:48에 작성됨.

한 가지 분명히 하자면, 아리스가 궁금증을 가진 것은 무엇이 시키언니와 프레데리카 언니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가 아니었다. 그건 이미 너무나 명백했으니까. 그러나 그 누구도 왜 시키 언니와 프레데리카 언니가 죽어야만 했는가?’에 대해선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항상 삶에 있어선 무엇을?’ 이라는 질문보다 ?’ 라는 질문이 답하기 더 어려운 법이라지만, 어째서 소녀들은 삶의 가장 활짝 피어난 시기에 죽음을 선택한 걸까?

 

도시의 기류가 점차 변화하는 시기, 화단에 흐드러져 썩어가는 여름날의 능소화들도 무심히 구름을 따라 흘러가는 계절도 서서히 메말라가는 이파리들도 다들 침묵을 지킨 채로 눈을 감는다. 피고 지는 꽃들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말을 하고 있지만 결국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어째서 꽃이 지는가를.

경시청의 임시 발표 결과에 따르면 수많은 의문들을 남긴 채 떠나버린 소녀들에 대한 수사는 지대한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킨 시작과 대조적으로 지지부진한 진행 끝에 식상한 결론이 내려졌다. 타살의 흔적이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예상대로 사건은 동반자살로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그녀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의 실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수많은 사인들과 추정들도 결국은 하나의 가설들에 불과한 것이다. 애초에 사람은 자신이 언젠가 죽어야만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결코 알지 못한 채 이 별을 떠나버리니까.

소녀들의 죽음은 프로덕션 내부에 깊은 적막과 우울을 드리웠다. 그녀들의 프로듀서와 사무원들은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며 톱스타의 갑작스런 죽음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조사를 받고 있지만 뚜렷한 진전은 보이지 않고 있다. 진실을 알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거짓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사람들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이미 마음속에선 저마다의 가설과 추측들을 세운 채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딱히 죽을 이유가 없었던 시키 언니와 프레데리카 언니였기에 아리스 역시 혼란스러운 심정이다. 무엇보다 가까운 누군가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버렸을 때, 어떤 표정과 말을 지으며 살아가야할지 그녀는 아직 배우지 못했다. 평소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하루하루를 보내려 해보지만 어쩐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무엇보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도 없이 정지되어버린 모든 것들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다 거짓말 같았다. 시키와 프레데리카가 죽은 날, 아리스의 시간은 이미 멈춰져 있다.

 

아리스는 딸기 맛으로 정제된 죽음과 함께 버스를 타고 정처 없이 어딘가로 향한다. 딱히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평소라면 아이들과 함께 다 같이 휴일을 보내거나 프로덕션 내에서 부족한 파트를 연습할 일상이었을 테지만 모두가 떠나버린 지금의 프로덕션은 텅 비어있었다. 기숙사에서 지내던 아이들도 대다수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휴가를 받아 잠시 고향으로 가버렸다.

 

아리스 역시 프로듀서에 의해 효고의 친가로 잠시 돌아갔다 오는 게 어떻겠냐는 설득을 받아 그럴게요.’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가지 않았다. 부모님께는 나는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미리 연락을 드렸다. 두 분 모두 바쁘셔서 아직 메세지를 보지 못하신 건지 이렇다 할 답장은 없다. 아리스는 지금의 기분으로는 효고가 아니라 세상의 어느 곳이라도 마찬가지 일 것 같았다. 흘러가버린 시간처럼 떠나간 이들은 돌아오지 않으니.

 

습관적으로 태블릿 PC를 꺼내 액정을 두드린다. 세상은 아직 톱 아이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다. 여전히 지지부진한 자살 원인에 대한 수사와 시간이 지날수록 꼬리를 무는 숱한 의문들에 지친 호사가들은 희생양을 찾아 서로 죽고 죽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일들이 죽어버린 소녀들을 위하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뒤늦게 부랴부랴 아이돌들의 스트레스 케어에 나선 전형적인 탁상행정의 모습이라고 오늘자 연예 신문은 날카롭게 비판을 가한다.

 

점잔을 빼면서 신문의 사설들은 이치노세 시키가 사실 마약에 취한 중독자였다거나 프레데리카가 애정 결핍에 시달리다 동반 자살을 한 것이라는 등 삼류 연예 가십 쇼 프로그램에나 나올법한 소설들로 도배되어 있다. 비단 신문 기사들만이 아니라 기타 사이트들에는 이미 고인들에 대한 추잡한 이야기들만이 가득했다. 스레드 판에는 이미 둘 사이가 깊은 애정으로 얽혀 함께 몸을 섞었다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갈구하다 결국 꿈같은 사랑의 도피를 하고 말았다는 망상들이 꿈틀댄다. 구역질이 난다.

 

한숨을 쉬면서 꺼버린 태블릿 PC의 액정엔 지친 표정의 어린 아이가 아리스를 마주보고 있다. 엄마 아빠한테는 문제없다고 말했지만...정말 괜찮은 걸까? 아리스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때 시키 언니를...내가 막을 수 있었을까? 내가 막지 않아서 시키 언니가 죽어버린 걸까? 시키 언니는 왜 이런 걸 그때 나에게 준걸까? 아리스는 남모르는 비밀을 꺼내보듯이 가방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딸기 맛 죽음을 만져보았다. 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자그마한 알약이다. 이 알록달록한 캡슐 속에는 대체 무엇이 담겨있는 것일까. 남부러울 것 없이 찬사와 주목을 받아온 두 소녀가 이런 녀석에게 살해당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혹시나 실수는 아닐까. 수상한 실험을 즐겨하는 시키 언니니까 아마 약을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닐까. 아냐, 그러면 프레데리카 언니가 죽은 것이 해명이 되질 않아. 그렇다면 프레데리카 언니가 시키 언니에게 약을 의뢰해서 함께...아냐, 아냐. 그것도 이상해. 무엇보다 딸기 맛으로 죽음을 만들어낸 까닭을 이해할 수 없어. 딸기에 대한 모욕을 넘어선 혐오에 가까운 행동이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복잡해지는 문제에 아리스는 질려버렸다. 이래서야 결국 자신도 역겨운 호사가들과 다를 바 없지 않은 가. 이유 없이 죽은 자들이 자신의 입으로 말을 할 수 있다면, 세상은 불필요한 추축과 낭설들에 낭비되는 시간과 자원을 충분히 절약할 수 있을 텐데...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의 어딘 가에선 지금도 사람들은 이유 없이 죽어버리고, 남은 자들이 그들의 삶을 대신 살다가 죽는다. 낭비되는 젊음을 탓해봤자 죽은 자들은 더 이상 늙지 않는다.

아리스는 둥글둥글한 알약을 손에서 굴려보다가 문득 창밖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키 언니의 커다란 눈빛을 마주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시로 코스메틱’, ‘매혹의 향기’. 이제 어디에도 없는 그녀는 아직 바뀌지 않은 대형 광고판에서 여전히 밝고 환하게 웃고 있는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이 도심의 가장 높은 마천루 위에서 가장 밝은 색채와 따뜻한 웃음을 머금은 채 춤을 추는 죽은 소녀. 그 아래의 회색빛 세상에서 아리스와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마치 시키와 프레데리카가 세상의 모든 색깔들을 가지고 떠나버린 것처럼. 삶이란 뭘까. 아리스는 자기가 떠올리고도 참 바보같은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죽음도 알지 못하는 데...어떻게 삶을 알 수 있을까? 지루하게 버스를 타고 가니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 같아 아리스는 평소에 내리지 않는 아무 정류장에서 내렸다. 어차피 가고 싶은 곳도 없고 딱히 가야할 곳도 없으니까 상관없는 일이다. 부모님은 여전히 메시지에 대한 답장을 하지 않으셨다. 아마 그만큼 바쁘게 살고 계시다는 것이겠지.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니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이럴 때 일수록 왠지 모르게 세상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다. 언젠가 그렇게 되겠지만...아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또 다시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점령하기 전에 아리스는 황급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아리스 자신도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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