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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맛 죽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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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21, 2019 22:39에 작성됨.

종종 스스로도 자기 자신을 잘 납득시킬 수 없을 때가 있다. 가령 빛나는 현자들의 말들이 어째서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는 죄다 무채색의 헛소리에 불과하게 변해버리는지, 이토록 타락하고 오염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어쩌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는지 따위의 답이 없는 질문들이 그렇다. 어쩌면 며칠 전만 하더라도 해맑게 웃으며 함께 지내던 사람이 어떻게 지금은 세상 어디에도 없이 홀연히 사라져버릴 수 있는 지 역시 이에 해당할지 모르겠다.

 

어느 가을날, 서늘한 바람이 부는 맑은 하늘 아래, 카페테리아에서 아리스는 시키 언니를 만났었다. 성가신 사람과 만났다는 생각도 잠시 시키는 이내 알 수 없는 말을 그녀에게 하기 시작했다. 원래가 수상한 사람이지만 그날만은 더더욱 이상한 점이 많았던 것 같았다.

 

아리스쨩. 아리스쨩.”

 

타치바나인데요.”

 

딸기 샤베트 맛을 느끼면서 죽을 수 있는 약을 개발했어.”

 

헤에....딸기 샤베트맛이라니 그것 참 굉장....이 아니라 무슨 약이라고요?”

 

딸기 맛 죽음.”

 

세상에, 딸기 맛 죽음이라니....딸기를 그런 끔찍한 것과 엮지 말아주세요.”

 

하지만 아리스쨩을 생각하며 특별히 딸기 맛으로 개발한 건데? 안 돼?”

 

어째서 제가 딸기라면 모든 것을 허용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치만 사람은 결국 다 죽으니까. 기왕이면 딸기 맛 죽음이 좋지 않을까?”

 

시키씨의 발상은 정말 평범한 적이 없네요.”

 

하지만 한 가지 문제라면....정말 딸기 맛이 날지 안 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걸까.”

 

그야....시키 언니 말대로라면...먹으면 죽으니까요. 그런데 애초에 어떻게 딸기 맛이 날지 안 날지 아는 거죠?”

 

...그런 맛을 내는 성분들로 만들었으니까?”

 

“'죽음'도 그 성분에 포함이 되는 건가요?”

 

아무리 그래도 '죽음' 자체는 들어가 있지 않아. 다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들이 있을 뿐이지. 딸기 맛과 함께.”

 

대체 어째서 그런 흉흉한 물건을 만들어 내신건가요?”

 

말했잖아. 아리스쨩을 생각하며 특별히 딸기 맛으로 만든 거라고.”

 

저를 위해서요?”

 

그래. 아리스쨩을 위해서.”

 

저는 아직 딱히 죽고 싶지 않은데 말이죠.”

 

아리스쨩, 죽고 싶어서 죽는 사람은 얼마 없어. 단지 어쩌다 죽음에 이를 뿐이야. 모두들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이 별을 떠나버리지. 아무리 긴 시간을 살더라도 죽음에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으니까.”

 

뭐에요 그럼. 지금 이걸로 예행연습이라도 하라는 건가요?”

 

하지만 죽어버리는 건 단 한번이니까 연습 할 수 도 없지 않을까?”

 

영문을 모르겠는 선물인데요. 아니 애초에 선물도 뭐도 아니잖아요!”

 

그래, 그렇네. 아리스쨩에겐 아직 이른 선물일지도 모르겠네. 하지만...언젠가 '필요할' 때가 있을 테니 간직해두렴.”

 

화창한 가을날, 알 수 없는 대화와 꺼림칙한 알약을 남기고 시키 언니는 며칠 뒤 죽었다. 프레데리카 언니와 동반 자살.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 그러나 일반적인 약물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물질이 검출되었기에 아마 평소에 시키 언니가 만든 이상한 물질이 아닐까 싶다. 표면적인 사인은 그러했지만 언니들이 죽음에 이른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처음 그녀들을 발견한 것은 레슨에 나오지 않는 두 사람을 찾아 온 슈코 언니.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가 서로 끌어안은 채 싸늘하게 죽어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회사 내에선 최대한 조용히 두 사람의 자살을 처리하려 했지만 톱 아이돌 두 명의 갑작스런 죽음은 이미 세간의 뜨거운 화제가 된 뒤였다. TV나 라디오에선 숨진 소녀들에 대한 온갖 추측과 추문들이 새로운 가십거리가 되어 연일 화제가 되었다. 프로덕션 내의 대부분의 일정들은 갑작스레 중단되었고 소녀들의 죽음에 대한 경찰 조사로 연일 관계자들이 사건 현장을 들락날락거리고 조서를 쓰기 위해 서로 소환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타치바나 아리스는 자신을 성가시게 한 두 언니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복잡한 심정이었다. 평소에 툴툴대면서 차갑게 대했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귀여워해준 두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는 슬픔과 상실감 속에서 아리스는 이상한 느낌들을 지울 수 없었다. 처음으로 시신을 목격하고 나서 극심한 충격에 빠진 슈코 언니의 알 수 없는 말, '...그렇지만 둘은 정말 행복한 표정이었어.'. 행복한 죽음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아리스는 시키 언니가 죽기 전 자신에게 준 알 수 없는 알약, '딸기 맛 죽음'이 문득 생각났다. 딸기 샤베트를 먹는 느낌으로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거짓말 같은 약. 그녀들은 분명 이것을 먹은 것이 틀림없다. 그 약은 지금 아리스의 비밀 서랍장 속에 숨겨져 있다. 분명 그때 받고 나서 버렸어야 했는데, 아리스는 어째서인지 그것을 버리지 못했다. 혹시 시키 언니는 원래는 나와함께 죽고 싶었던 걸까? 그녀는 분명 '아리스를 위해서 특별히 딸기 맛으로 만들었어'. 라고 했다. 어쩜 그렇게도 당당하게 함께 죽기를 권하다니 참 이상한 사람이다.

 

아리스는 고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까지도 시키의 의도와 말을 알 수 없었다. 프레데리카 언니는 또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걸까?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애초에 이 별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시키 언니와 프레데리카 언니 모두 장난스럽게 알약을 먹고 사고로 죽은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다. 유서 한 장 없이 죽어버린 그녀들의 죽음이 그토록 어이없는 것이라면 지금의 세간의 떠들썩한 광경들은 모두 촌극에 지나지 않으리라. 하지만 단순한 사고라기엔 미심쩍은 정황들이 너무 많았다. 시키 언니가 기르던 실험동물들 역시 유사한 약물들로 인해 여럿 죽은 채로 발견되었고, 프레데리카 언니는 죽기 며칠 전 가족들에게 알 수 없는 사죄의 말과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었다고 한다. 그녀들은 어쩌면 오래전부터 계획해온 죽음을 맞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리스는 아직 누구에게도 시키 언니와 그녀 사이의 마지막 대화를 말하지 않았다. 애초에 말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고 누구에게 해야할 지도 몰랐지만 마음속을 맴도는 시키 언니의 말 때문에 아리스는 점점 혼란스러워져만 갔다. 사실 시키 언니는 그때 자신을 말려주길 바란 것이 아닐까? 무엇이든 시키 언니에게 독설을 날리는 아리스니까. 시키와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아리스니까, 적어도 시키가 보지 못하는 세상의 다른 일면. 그러니까 죽지 않을 이유를 말해주길 바란 것은 아닐까. 사실 '딸기 맛 죽음'이라는 것 역시 알고 보면 단순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먹어보지 않고는 그것이 딸기 맛인지 아닌지 알 수 없듯이 죽어보지 않고는 죽음의 맛을 모르는 것이다.

 

연일 우울한 분위기가 계속되는 사무소를 견딜 수 없어서 아리스는 언제 끝날지 모를 '오프'를 활용해 잠시 떠나있기로 했다. 사실 이미 많은 아이돌들이 어수선한 사무소를 떠나 각자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이미 피신해있었다. 기숙사를 나서며 아리스는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결국 시키 언니가 준 그 수상한 알약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결코 시키 언니의 뒤를 따라 죽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이 알약에 담긴 비밀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딸기 맛 죽음을 맞이한 까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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