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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업)@피스 시리즈-1.키타 히나코-조금 늦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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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31, 2019 19:55에 작성됨.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썩어가고 상처 나기 마련이다.

흔히들 몸과 마음이 깨끗하다는 사람들, 수도사라거나 성인군자조차도 예외일 수 없는 일, 단지 썩은 부분이 적거나 옅을 뿐이지 그들조차 영혼 한 구석이 분명히 썩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나 키타 히나코가 하는 일은 그런 영혼들을 거두어 '키타노히메'라고 이름 붙여진 주머니에 넣어두는 일이다.


거둔 영혼을 어디에 쓰냐고? 어디에 쓴다기보다는 일종의 심판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영혼의 썩은 부분이 깊어지면 육체도 맛이 가기 마련인데, 맛이 간 육체는 뇌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 그러면 몸이 뇌의 말을 듣지 않고 뇌가 몸의 말을 듣게 된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그 사람은 사회의 폐급이 되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일, 영혼들이 더 썩는 걸 막기 위해 영혼들을 꺼내간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묻지 말아줘. 나조차도 왜 되는 건지 알 수 없으니까.



현재 나는 미시로 프로덕션 소속의 아이돌이다.

여기 소속의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영혼의 한구석이 상처 나고 썩어있다. 아이돌이든, 프로듀서든, 사무원이든, 임원이든 누구든 더럽지 않은 사람이 없지.


아, 딱 한 두 명 정도는 있어.

주로 나이가 어린 아이돌들, 특히 코가 코하루라는 이름을 가졌고, 이구아나를 데리고 있는(효군이라고 한다) 이 여자아이는 내가 전에 본 적이 없을 만큼 깨끗한 영혼을 갖고 있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머지않아 다른 사람들처럼 더러워지고 말겠지?

그나마 바라는 게 있다면 저 영혼이 아무쪼록 덜 상하길.



오늘 스케줄을 이행하기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에는 평소의 취미인 망상을 하곤 한다.


"무흐흐...왕자님....히나코의 왕자님...무흐흐~왕자님~언제 오시려나~ 히나코는 항상 기다린답니다~훗날 왕자님을 뵙게 된다면...그 분의 영혼은 티 없이 맑고 빛나겠지~? 그 분이라면 분명히 히나코의 왕자님이 되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을 거야~!"


망상을 막 끝내려는 참에 저만치서 클라리스씨가 걸어오는 걸 보았고 동시에 근처에서 카린씨가 넘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둘이 생각나자 또다시 망상에 빠져들었다.


"무흐흐....종교인들이네~클라리스씨와 카린씨가 맞붙으면...종교전쟁~? 서로 팽팽한 전선에서 두려움에 떠는 히나코를 왕자님이...무흐흐~무흣~무흐흐~"


이런 망상을 하고 있으면 왠지 내 영혼이 매우 깨끗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만약 정말로 그런다면 엄청 망상에서 왕자님(무흐흐~)에게 어울리는 히나코가 되어야지.

무흐흐~무흐흐~왕자님~빨리 와주세요~!



한 시간 반 동안의 위대한 망상을 마치고 스케줄을 하러 이동해서 도착한 곳은 나고야. 이곳에서 내 미니 라이브를 하게 됐다.

나고야 공연장의 크기는 꽤 크다 들었는데 이런 곳에서 솔로 라이브라니, 긴장도 되고, 기대도 되고 암튼 오만가지 감정이 다 들었다.


스테이지에 서기 전에 프로듀서님에게 한 가지 꿀팁을 들었다.


'여기 와 있는 관객들을 관객이라 생각하지 말고 한명 한명이 모두 히나코의 왕자님이라고 생각해봐.'


프로듀서님의 조언을 기억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스테이지에 올라가 고개를 드는 순간 정말로 왕자님 같은 분들이 많이 와 계셨다.

그리고, 상처투성이의 영혼덩어리들, 당장이라도 걷어가지 않으면 바로 맛이 가버릴 것만 같은 육체들.

나는 노래를 하면서도 저 영혼들에 대해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입은 노래를 부르지만 머리는 영혼들을 꺼내갈 생각으로 차있었다.


잠시 후 라이브가 다 끝나고 사무소에 돌아가려는데 휠체어에 탄 젊은, 딱 보기에도 안색이 창백한 청년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 청년이 나에게, 예전부터 팬이었다며 말했다.


"히나코양...오늘 만나뵙게 되어서...너무 기쁩니다...보시다시피...저는 투병중입니다...불치병에 시한부 인생인데....저의 버킷리스트의...1순위가...히나코양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저는...목표를 이루었으니...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죽다니요! 그런 말 하지 말아주세요! 나으실 수 있어요! 그대에게는 희망이 있어요!"

"아닙...니다....이제...저는..."


그 청년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고, 그와 동시에 청년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왔고 키타노히메가 그 영혼을 빨아들였다.

나는 육체뿐인 청년을 보고서는 눈물 흘리며 안아주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부디...편히 쉬세요...살아계실 때 안아드렸어야 했는데...팬서비스를 다하지 못했네요..."


두 번째 스케줄을 가는 동안 그 청년이 생각나 마음이 편치 않았고, 울고 싶었다. 처음으로 썩지도 않은 영혼을 가져간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키타노히메에 들어간 영혼은 예외 없다는 생각으로 그 눈물을 닦아냈다.


'히나코, 죄책감 가지지마. 안타깝긴 하지만 그 사람 또한 썩어버린 구석이 있는 영혼이었고 넌 그런 영혼들을 오랜 시간 꺼내왔어.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두 번째 스케줄은 악수회, 나라의 강당건물에서 진행한 악수회에서 나는 역시나 한껏 썩은 영혼들을 보게 되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순수한 영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영혼들을 모두 거두어가면 키타노히메가 터질 만큼 사람 수도 많았다.


한명, 한명 악수를 해주다가 영혼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각한 상태의 팬 분을 만나게 되었다. 겉보기엔 그냥저냥 평범해 보이는데 영혼이 썩어 문드러진 상태의 여자 분이셨다. 당장 꺼내가지 않으면 내 앞에서 바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정도로.


아니나 다를까 그 사람의 차례가 되자마자 내 손을 딱 붙잡고서는 반쯤 뭔 소린지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냈다.


"오오히나코짱팬이에요진짜만나고싶었어요으헤헤히나코짱의섹시한모습을꼭보고싶어요그런이미지를망상하며동인지그리고있어요나중에꼭그런모습을보여주세요꼭부탁드릴게요으헤헿"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것 같아 도저히 가만있질 못하겠다 싶어서 재빨리 그 사람의 영혼을 꺼내 키타노히메에 쑤셔 넣었다.


쿵.


그 팬이 쓰러졌다. 그러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고 나도 놀랐다. 아니, 놀란 척 했다.

근처 경호원 분들이 쓰러진 팬을 들고서 나갔고 나는 붕 뜬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분."


나중에 알았지만 그 팬은 내 팬 카페에서도 요주의 인물 중 하나였다.

스토킹에, 음란 발언에, 타 팬에 대한 민폐에, 유물 낙서에 등등 알려진 행동들만 해도 내 손가락, 발가락에 프로듀서님 것과 왕자님(무흐흐~) 것을 다 합쳐도 모자랄 정도였다.

알려졌다는 건 일단 그 사람이 공개한 게 있을 텐데 무슨 정신으로 그런 걸 까고 다녔는지 대단하다 못해 존경스럽다, 진짜.


그러고 보니까 예전에 로케 갔을 때도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만약 그 사람이 맞았다면...진작에 영혼 꺼내갈걸! 괜히 늑장부린 바람에 다 보는 데서 이러고 말았잖아!

여하튼 팬 카페에서도 이 일에 대해 애도를 표하기보다는 잘 죽었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사람 목숨이 날아갔는데도 이런 반응이면 그 사람이 팬들 사이에서도 눈엣가시였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마이프린스(가칭, 내 팬덤 이름이다.)들과의 악수회를 끝내고 사무소에 들러 짐을 챙긴 뒤 집으로 가려는데 복도에서 소란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았더니 어떤 남성이 부하직원을 괴롭히고 있었다.


잠깐만, 저 남성, 어디서 봤나 했더니 예전에 치히로씨한테 영수증을 조작하라고 협박한 그 사람이잖아? 그때 유닛 섹시 길티가 혼내줬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저러고 있었단 말이지?

조~오았어, 이번에야말로 매운맛을, 아니 맛 느낄 새도 없이 뻗게 해주마.



때마침 둘이 흩어졌다. 나는 그 남성에게로 다가갔다.


"오오, 히나코. 못 보던 사이 섹시해졌구나. 가슴도 커지고."


뭐라고? 언제 봤다고 성희롱이야?

지금으로서 확실히 알았다. 이 양반은 반성은 커녕 뭘 잘못한지도 모른다는 걸.


나를 껴안으려고까지 하는 그 남성의 행패질에 너무 열이 뻗친 나는 그의 머리에 손을 뻗어 한껏 썩어빠진 영혼을 꺼냈다.

꺼냈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흡수'한 게 맞겠지? 아무튼 흡수한 영혼을 키타노히메에 쳐박아둔 다음에, 남은 육체는...어떻게 할까?

에이, 몰라. 대충 어디다 던져두지 뭐. 조금 더 괜찮은 곳으로 유인해서 영혼을 꺼내갈 걸 그랬어.



그로부터 다음날, 방송국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나는 한껏 들뜬 기분으로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스탠바이를 하던 중 어디선가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들렸기에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약간 나이든 PD와 어린 아이돌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근데 잘 들어보니까 이건 대화보단 PD가 아이돌을 을러매는 듯한 말투인데?


그러고 보니 우리 회사의 러시안 아이돌 아나스타샤씨가 예전에 이런 PD를 만난 적 있었다고 했었지....그게 저 사람 아니야?

맞네! 저 사람이야. 이틀 연속으로 폐급 영혼들을 만났다. 때를 봐서 저 사람의 영혼도 꺼내갈 예정이다.


일단 이 방송이 나가야 하니까 오늘부터 3일 후까지는 놔둬야 하고, 나흘째부터는 타이밍을 봐서 영혼을 빼내....야 하는데 그때 방송국에 또 올지 안 올지 모르잖아. 그러면 조금 곤란해지는데.

분하지만 저 PD의 영혼은 썩은 채 그냥 놔둬야만 하는 건가.


일단 포기하고 돌아서서 촬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는 날에 광고 촬영을 마치고 저녁에 사무소로 돌아가는 시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은 있어서 집에 돌아가지 못할 건 없었지만 워낙 세차게 내려서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흠뻑 젖을 판이야. 게다가 집이 아키타인데 여기서 거기까지 언제 가냐?


하여 기숙사에서 하룻밤 묵기로 결정했다.

빈 방이 있어야 할 텐데. 어느 방이 괜찮을까?

빈 방 있어요~?



기숙사가 있는 5층으로 올라가서 적당한 방을 찾아보다가 507호에서 괜찮은 느낌이 나서 노크를 했다.


"누구세요?"

"저는 키타 히나코에요. 실례지만 오늘 하루 묵고 가도 괜찮을까요?"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방에 있었던 사람은 코가 코하루,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드물게, 아니 거의 없다시피 한 깨끗하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다. 얼마 안 있어 더러워질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오랜 시간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코하루는 나를 놀라게 했다.



창문을 부딪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웠다. 막 눈 감으려고 할 때 코하루가 말했다.


"와주셔서 다행이에요. 오늘은 저 혼자밖에 없어서 무서울 것 같았는데 와주셔서 무섭지 않게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그럼, 좋은 꿈꾸세요, 코하루짱!"



꿈에서, 나는 자주 이상한 꿈을 꾸고는 한다.

꿈 속 세계에 들어오면 내 앞에는, 어떨 땐 거대한 수정 같은 것이 떠 있기도 하고, 어떨 땐 조금 큰 반딧불이가 열 몇 마리 정도 날아다니기도 한다. 또 어떨 땐 둘이 같이 나오기도 하는데, 난 그곳을 걷고 걷다가 꿈에서 깬다.


왜 그런 꿈을 꾸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생각해보건대 내가 거두어간 영혼들이 꿈속에서 수정과 반딧불로 형상화되어서 나오는 건 아닐까 싶다.


딱히 악몽은 아니라서 못 잘 건 없지만 저게 맞다면 그리 달갑게 느껴지는 꿈도 아니다.

뭐랄까, 오묘하면서도 조금씩 소름이 돋는다. 느낌만 두고 말하면 흉몽도, 길몽도 아닌 그저 오묘한 분위기가 전부인 꿈이다.

만약 이 꿈의 세계가 현실이라면 왕자님 모시고 꼭 가고 싶어.



다음 날 숙소에서 나온 뒤(나올 때 코하루에게 감사인사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내로 놀러갔다.

일단 오늘 오전엔 오프라 시간이 널널해. 그러니까 시내에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노래방도 가고, 서점 가서 책도 읽어야지!



시내 거리를 걷다 보면 건물과 으슥한 곳들이 간간히 보인다. 흡연자들이 그곳에서 담배 피우는 것은 일상다반사고 그 자리에 담배꽁초가 수북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길빵하는 사람들은 당장 영혼을 꺼내가고 싶은 수준이다.

게다가 뭐니 뭐니 해도 흡연자들보다도 더어어어욱 꼴불견인건...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예수 천국!!! 불신지옥!!!"

"잠깐 대화 좀 가능할까요? 보니까 얼굴에 복이 많으세요."


​...뭐, 말 안 해도 알겠지. 시끄러운 광신도, 헛소리 작렬하는 '도를 아십니까". 이 두 콤비는 예전부터 영혼을 꺼내가고 싶었어. 특히 도를 아십니까들의 저 영업용 멘트는 판에 박힌 주제에 쓸데없이 말이 길고 많단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그 '도를 아십니까'가 나에게 다가왔다.

(도를 아십니까를 말하는 사람들을 다른 말로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머, 학생. 혹시 시간 좀 되나요?"

"무슨 일이신데요?"

"다름이 아니라, 얼굴에 복이 참 많으세요."


역시나, 이럴 줄 알았다. 저따위 판에 박힌 대사들, 지겨워 진짜.


"혹시 학생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키타 히나코입니다."

"키타상 얼굴에 복이 참 많으세요~"


일단 말하는 것으로 보건대 나를 모르는 사람에는 틀림없다. 그런 사람도 있겠지. 모두가 나를 다 알 수는 없을 테니까.


"지금 어디 가세요?"

"글쎄요, 도서관?"

"그럼 같이 걸어가도 될까요?"

"그렇게 하세요."


이 또한 예상했던 일이다. 이 양반들 단골 패턴 중 하나거든.

아, 어쩌면 가는 길을 유인해서 타이밍 좋은 순간을 포착해 영혼을 거둬낼 수도 있겠네. 좋은데?



해서 나는 길을 가고 있었고 도를 아십니까는 내 옆에서 계속 쏼라쏼라 뭔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이런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단어가 생각났다.

'를 아느냐는 말을 동적으로 쏟아내는 계,' 이하 도자기. 이렇게 불러야겠어.


아무튼 나는 계속 길을 가고 '도자기'는 내 옆에서 계속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구석진 곳이 보이자 난 일부러 그쪽으로 길을 꺾어들었다. 도서관 가는 길은 그 옆쪽이지만 일부러 샛길로 샜다. 근데 '도자기'는 의심 없이 나를 따라 들어오더라고.


그 길 중간쯤에 들어서자 나는 순간적으로 뒤돌아 도자기의 얼굴을 움켜쥐고 반항할 틈도 없이 영혼을 흡수했다.

일단 도자기는 쓰러졌고 난 그 영혼을 키타노히메에 쑤셔넣었다.


조금 놀란 게 있다면 이 녀석 영혼은 푹 썩어서 악취라도 난다든가 해서 조금은 다를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영혼들과 딱히 다르지도 않았고.


그건 그렇고...이 시체를 어떻게 처리한담? 위장을 해도 그럴싸하게 해야 할 텐데 방법이 없을까?


주위를 둘러보다 쓰레기통에 있는 술병이 보였다. 꺼내보니 술이 아직 반 정도 차있었다. 그래, 이거야.

도자기의 입에 약간의 술을 넣은 뒤 흘리게 했으며 오른손에 남은 술이 담긴 술병을 쥐여 주었다. 이러면 술 먹고 과음으로 죽은 사람으로 보일거야. 마침 오늘 새벽은 조금 쌀쌀했다니까 얼어 죽었다고 해도 믿겠지?

아, 난 이렇게 사회의 폐품을 하나 처리했다.



오늘 저녁 뉴스에 그 일이 보도되었다. 사인은 다른 거 없고 '과음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죽은 것 같다.'라고 했어.


'~이다'가 아니라 '~인 것 같다'라고 보도한 이유는 이 죽음이 미스테리해서라고.

죽은 건 확실한데 과음으로 죽었다기에는 간이 너무 멀쩡하고, 그렇지 않다기에는 외상도 없어서 미스테리라고 한다. 그 구석엔 CCTV도 없어서 진상규명이 더욱 어렵다고 한다.

그건 좋네. 범인이 나라는 게 밝혀지지 않을 테니.


그때는 내가 저녁 스케줄을 막 끝내고 온 뒤라 사무소에서는 딱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뉴스를 보던 치히로씨가 말했다.


"정말 신기하네요. 어떻게 저런 미스테리한 죽음이 있을 수 있을까요? 게다가 별로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일이네요. 조금 무서워요."


걱정 말아요, 치히로씨. 당신의 영혼도 만만치 않게 썩었지만 그래도 미시로 사무원이니 힘이 제멋대로 폭주하지 않는 이상 꺼내지 않을 테니까요.



집에 돌아온 나는 전에 해보지 않은 일을 하나 해보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영혼을 꺼내기만 했는데 이번엔 반대로 영혼을 집어넣는 일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방에 있던 인형 하나를 준비한 뒤, 키타노히메에서 영혼을 하나 꺼내 그 인형에 집어넣었다. 내가 꺼낸 이 영혼은 나고야 공연 날에 삶을 끝내고 만 안타까운 청년의 영혼이다. 그런 영혼을 그냥 둘 수는 없지. 새 삶을 줘야 마땅할 거야.


인형과 영혼을 결합하고 1~2분쯤 지나자 인형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라? 여긴 어디죠?"

"저희 집이에요. 저는 키타 히나코라고 해요."

"키타 히나코? 예전에 제가 정말 팬이었어요!"


이때 나는 조금 놀랐다.


"저를 기억하세요?"

"당연하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연예인인데!"

"우와아, 영혼의 모습에서도 저를 기억해주시다니. 감사해요!

그건 그렇고,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으음, 예전 육체의 이름이 뭐였지....기억이 잘 안 나네요. 지금은 없는 걸로."

"그럼, 제가 이름을 지어드려도 될까요?"

"부탁드릴게요."

"육체가 되신 이 인형은."

"아, 제 육체가 인형인가요?"

"네, 인형이셔요. 그 인형은 제가 나고야에서 사왔으니 당신을 '나고야씨'라고 부를게요. 괜찮나요?"

"예, 좋은 이름 같아요. 감사합니다."


이 영혼은 성격이 좋은 것 같다. 지역명 하나 보고 그걸로 이름 지어주면 성의 없다고 뭐라 할만도 한데 좋은 이름이라니, 마음에 드나보네.


하여튼 나고야씨에게 간단한 규칙 같은걸 정해주었다. 이 방을 돌아다녀도 되지만 그 이상으로는 나가지 않기, 어지럽히지 않기 등등.


"그런데 저 혼자는 외롭지 않을까요? 히나코 짱이 일을 가시면 저 혼자 뭘 해야 하나요?"

"그러실 것 같아서 친구를 더 만들어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하고서 가지고 있는 인형과 건담을 가져와 거기에 영혼을 집어넣었다. 얼마 안 있어 인형과 건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쪽이 특이한 건지 이들은 옛날, 그러니까 살아있을 때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냥 그 영혼 그대로였다.


일단 이름부터, 인형에겐 인형 옷에 써 있는 글자를 따라 '아카시씨', 건담에겐 제조사 책임자의 성을 따라 '와타나베씨'라고 지어준 다음 한 가지를 추가한 이 방의 규칙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서로 괴롭히지 않기였다.

모두들 그 말을 이해했고 또 충실히 이행했다.

내 마지막 날까지도.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갔다.

후쿠이에서의 라이브를 끝내고 사무소에 들렀다. 아직 스케줄이 다 끝난 건 아니기에 잠시 사무소 쇼파에 앉아있었다.

오늘따라 몸에 힘이 넘친다. 이대로라면 3일 밤낮을 스케줄 이행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불타오르는 것 같이 보인다.

그래요, 힘내서 오늘 하루도 마저 파이팅해보자구요.


그런데 읭? 어째서인지 조금 졸려지기 시작했다. 방금까진 힘이 넘쳤는데 갑자기 졸리는 건 이 무슨 전개인건지 모르겠다.

그냥 식곤증이라고 생각해야지. 아까 점심식사도 간단하게나마 했으니, 게다가 다음 스케줄 하려면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



꿈속에 빠져든 나는 평소의 그 꿈을 꿨다....만 예의 그 꿈과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내 눈앞에는 반딧불이도, 거대한 수정도 없었고 다만 보이는 것은, 무엇이라 해야 할까? 빛이 뭉친  것 같은 어떤 덩어리였다. 밝다고도, 어둡다고도 할 수 없는 이 빛은 내 앞에서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빛 속에 손을 넣었다가 금방 빼야 했다.

너무 차갑다. 한겨울의 추위도, 얼음물도, 심지어 삼국지에서 말하는 멸천도 이보다 차갑지는 않았다. 차가운 빛이라니, 이런 건 처음이야. 이게 뭘까?


차가움을 참고 다시 손을 넣어보았다. 그러자 그 빛이 스러지더니 작고 작은 빛들로 흩어졌다. 이걸 뭐라 표현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을 만큼 한순간의 일이었다.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깨어나고 나니 느낌이 아까와는 달랐다. 아까는 힘이 넘치더니 지금은 어질어질하다. 잠을 너무 많이 잤나?

시계를 보니 아까로부터 고작 40분 지났다. 그리 오래 잔 것도 아닌데 어질어질하고 정신이 없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영혼이 썩어있음이 처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 손이, 내 몸이 지금 가만히 있는 나를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일어났다.


'아, 이거 불길한데, 나 왜 이러지? 혹시나 내 영혼도...아니겠지. 난 그렇게 썩은 영혼들과는 달라. 왕자님(무흐흐~)을 뵙기에 부족함 없는 영혼이어야 해, 난.'


생각하는 걸 끝내고 보니 내 왼손은 앞을 향하고 있었다.


"키타양? 뭐하세요?"


그리고 내 오른손은 키타노히메를 열고 있었다.

 

"빨리 도망쳐요! 제가 조금 이상해졌어요. 빨리 여기서 몸을 피해주세요!"


라고 말하려 했지만 입은 움직이질 않았고 내 손은 제멋대로 영혼들을 꺼내갈 준비를 마쳐가고 있었다.


안 돼....안 돼...설마....진짜로...나도? 그런 거야? 내 영혼도...썩은 거야?

내 정신은 혼돈에, 충격에 빠져버렸다.


썩었다니...나도, 나도, 나도 썩고 말았다니.


하지만 내 몸은 충격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내 손은 영혼을 한 명씩 끌어당겨 꺼내고 있었다.


"키타상 뭐하ㅅ...."

"에엣? 이게 뭐ㅈ...."

"다들 왜 그러는 거ㅇ...."


미안해요, 다들. 이제 저도 저를 막지 못하겠어요.

내 눈에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꺼내진 영혼들은 계속해서 키타노히메로 들어갔으며 영혼을 빼앗긴 육체들은 차례로 쓰러져 송장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은 비단 내가 있는 사무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무소가 있는 층과 구역에서도, 기숙사에서도, 심지어는 이사실과 전무실에서 조차도 영혼이 빨려 들어왔다.


나는 나를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그러기엔 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내 몸이 머리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스케줄 다 끝내고 왔어요...어라? 다들 왜 바닥에 누워 계세요?"


고개를 돌려보니 코가 코하루, 변함없이 영혼이 깨끗한 아이네. 이 아이까지 희생시킬 수는 없어. 빨리 대피시켜야만 해.


순간 나는 모든 정신을 움켜잡고 전력을 다해 몸을 통제했다. 이 통제가 얼마나 갈 지는 모르겠지만 이 통제가 풀리기 전에 코하루를 이곳에서 나가게 해야 한다.


"코하루짱, 여기는 굉장히 위험한 곳이에요. 여기서 빨리 탈출, 그러니까 나가셔야 해요. 어서요."

"에...?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어요?"

"코하루짱은 공주님이 되고 싶죠?"

"네, 전 공주님이 되고 싶어요."

"그렇다면 빨리 여기서 나가세요."

"에? 하지만 프로듀서님이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럼 코하루짱 죽을지도 몰라요! 빨리 여기서 나가주세요."



결국 난 키타노히메를 꺼내들고 말했다.


"이 안에는 이 사무소 사람들의 영혼이 담겨있어요. 제가 꺼냈으니까요."

"에에~?"

"나쁜 사람은 경찰에 신고해야죠? 빨리 나가서 신고하세요. 여기서 사람들을 죽인 범죄가 일어났다고."

"에...저도 미시로 아이돌인데,,,혼자 살 수는 없어요. 저도, 꺼내가 주세요!"


아, 안 돼요. 이 타이밍에 그런 쓸데없는 단체쉽 발휘하지 말아줘요, 코하루짱~


나는 절박하다 못해 반쯤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안 돼요! 코하루짱과 효군에겐 나 도저히 손댈 수 없어요. 가세요, 제발 가세요. 순수한 영혼, 몇 남지 않은 그런 영혼이 다른 사람들처럼 썩어버리기 전에 여기서 나가주세요."


그때서야 코하루는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이 사무소의 밖으로, 그리고 회사의 밖으로 나갔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통제에서 손을 놓았다. 이제 여한은 없어. 순수한 영혼 하나를 살릴 수 있었으니까. 그 생각을 끝으로 내 시야가 조금 흐릿해졌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 머리에 손을 댔다.


이윽고, 내 시야는 검게 변하고 키타노히메가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아, 이게 내 영혼의 마지막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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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계 소울소울 열매를 모티브로 써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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