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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와라 유키호 「시간이 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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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31, 2019 00:00에 작성됨.

하얀색 크리스마스의 꿈을 꾸었던 때가 있었다.
하얀색 눈 아래에서 성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따스한 포옹을 했던 때가 있었다.
하얀색 새 눈을 밟으며 따스한 목소리를 들었던 때가 있었다.
하얀색 장갑을 사 선물했던 때가 있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이던, 아름다운 때가 있었다.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을까, 창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름도 곧 끝날거라는 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
곧 계절이 바뀌겠구나, 작게 중얼거리며 쳐다본 창문 밖은 날카로운 빗소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니,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맞는걸까.
어쩌면 가득 게워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시선을 돌려 쳐다본 도롯가에는 노란색 불빛이 곧 빨갛게 물들 단풍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그렇지.
누구에게 들은 말인데, 빗소리를 들으며 마시는 차는 꽤 풍미가 있다고 했다.
그래, 그럼 차를 마시도록 하자.
이 정도 일,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으니까 말이야.


마음을 정한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가스레인지 앞으로 다가간다.
어떻게 하더라, 일단 기억하는 것이 맞다면 주전자에 물을 담고 물을 끓이는 것이 먼저였을 것이다.
그 다음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차는 차니까 어떻게 알아서 하면 되겠지.
차 애호가에게는 엄청나게 무지막지할지도 모르는 혼잣말을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며, 너무나도 당연하게 찬장을 열어 어떤 차가 있는지 확인한다.
호지차, 우지차, 말차, 내가 마셨던 기억이 없는 현미차까지.
어느샌가 내가 가지고 있는 차가 이렇게 늘어났던걸까,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차가 들어있는 추억의 뚜껑을 연다.
기분 탓일까, 차의 은은한 향기 말고도 또다른 은은한 향기가 살짝 몸을 맴돌다 천천히 사라진다.
이 향이 사라지려면 시간이 들겠지.
아마도 꽤 긴 시간이 들겠지.


주전자를 찾고 물을 넣는다.
뭐, 그 정도야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기다려 물이 끓기 시작할 때쯤,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받침대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는 살짝 식힌다.
물이 너무 뜨거울 때 차를 넣으면 차 맛이 사라진다고 귓동냥으로 들었으니까, 주전자가 식기를 조금 기다렸다가 찻잔 두 개를 꺼낸다.
그래, 찬장에서 귀엽게 생긴 찻잔 두 개를 꺼낸다.
주전자에 들어있는 물이 식으려면 시간이 들겠지.
정말로 긴 시간이 들겠지.


물이 적당히 식으면 차를 넣고 잠시 기다렸다가 식탁으로 주전자를 가지고 오면 차를 음미할 준비는 끝난 셈이다.
차가 물에 잘 녹도록 조금 기다려야 하지만, 그거야 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는 거리를 쳐다보면 금방 가 버릴 것이다.
손끝으로 주전자를 만져보고, 금방이라도 다시 데워질 것같이 뜨거운 열기를 확인한 나는 살짝 시선을 돌려 바깥을 쳐다본다.
해를 맞이하도록 두지 않겠다는 듯이 거뭇한 하늘과 그 어두운 거리를 조금씩 채워나가는 빗방울들이 보인다.
그 옆에 외롭게 서 있는 신호등은 노란색 단풍에서 붉은색 단풍으로 변했다.
초록색은 이 곳에 존재하지 않는 색이었던걸까, 그런 시덥잖은 생각을 하면서 주전자를 손끝으로 살짝 만져본다.
아직 차를 마시기에는 너무나도 뜨거운 열기로 주전자는 가득 차 있었다.
뜨거운 열기.
금방이라도 식어버릴 것만 같은 의미없는 열기.


축축한 거리에서 내가 사는 방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정말로 꼭 필요한 물건들만이 제자리에 놓여져있는 단촐한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따스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방.
있는 것이라고는 하얀색의 소파와 하얀색의 쿠션 두 개와 하얀색의 손님용 이불 한 채와 하얀색 커버가 씌워진 공책과 만년필 한 자루 뿐.
아무것도 없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나는, 무엇에라도 홀린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다가가 앉는다.
주전자에 타 놓은 차는 이미 다 잊어버렸다는 듯이, 무엇에 홀려버린 불쌍한 손인형같이.
무엇에라도 홀린 것처럼, 털퍼덕하고 하얀색 소파에 아무런 힘없이 앉는다.
소파에 가득 차 있던 무거운 기분들이 한 순간에 빠져나와 나의 몸을 감싸다 흩어진다.
흩어지기를 바란다.


하얀색 커버가 씌워진 공책에는 주인의 이름이 쓰여져 있지 않았다.
꽤 오래 쓴 듯한 만년필에도 그 주인의 이름이 쓰여져 있지 않았다.
만년필을 오래된 연인처럼 잠시 쓰다듬으며 쳐다보다 공책의 커버를 살짝 열어 내용을 접한다.
공책 안에는 옛날의 추억들과, 서로가 다 하지 못했던 사랑의 시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사랑의 시들이, 마치 비처럼 마음 속을 촉촉히 적셨다가 빗물에 조금씩 번진다.
예쁜 글씨로 페이지들을 빼곡하게 채웠던 시들이 빗물이 적셔져 조금씩 사라진다.
번지고, 사라져 가고, 지워져 가고, 시간이 들기 시작한다.
차갑게 식어가는 주전자처럼 시간이 들기 시작한다.
시간이 들기 시작한다.


금방 끝이 나버린 노트.
빗물과 함께 읽어내려가느라 다 번져버린 노트.
방울방울 맺혀버린 노트의 끝을 펼친 나는, 미처 다 펼치지 못한 꿈의 단편을 보아버린다.
아아, 이 얼마나 글러먹은 꿈이란 말인가.
빗물이 세차게 내 심장을 때리며 부서져내린다.
부서졌다가 하얀색 구름이 되어 다시 파란색 비를 내린다.
이 비가 멈추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할까.
얼마나 시간을 들여야 할까.


노트에서 힘겹게 빨갛게 부어오른 듯한 눈을 떼어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세차게 내리던 비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지만, 완전히 멈추려면 조금 더 시간이 들 것 같았다.
시선이 닿는 방울방울, 그 방울들을 세차게 방 안으로 들여보내는 거센 바람.
마치 눈이 닿은 발걸음이 녹아 세찬 해일이 된 것처럼 방으로 들이치는 빗줄기.
아, 그랬지.
주전자에다가 차를 타놓은 것을 거의 까먹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주전자가 적당히 식어있겠지.
들이치는 비는 나중에 닦아내고 일단은 차를 마셔야겠다.


살짝 손 댄 주전자는 생각보다 차갑게 식어있었다.
이 온도라면 차 맛이 그다지 좋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타 놓은 차고 하니 한 잔 마시도록 하자.
아니, 사실은 혼자 마시고 싶지는 않다.
늘 환하게 미소를 지어주던 소녀와 함께 차를 마시고 싶다.
소녀가 타주는 차를 마시고 싶고, 소녀와 함께 담소를 나누며 팍팍한 사막과도 같은 이 곳을 미소로 적시고 싶다.
하지만 이 곳을 적시는 것은 미소가 아닌 빗물.
소나기라고 생각했던 이 비는 언제쯤에야 끝나는걸까.
이 비도 언젠가 끝날거라고 생각하며 시간이 들겠지라고 생각해야만 하는걸까.

그래, 시간이 들겠지.
얼마나 시간이 들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시간이 들겠지.
그래, 시간이 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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