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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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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21, 2019 18:00에 작성됨.

나는 시키P다.
시키P라고는 해도 특별히 똑똑하진 않다.
뭐, 시키P라면 다 똑똑하고 천재여야 하겠냐마는, 나는 너무나 무식하고 무능하다.
담당돌이랑은 수준부터가 너무 다르고 한참 동떨어져있다.
난 천재가 아니다. 난 바보 멍청이 무능력자다.
그래서 나는 시키를 동경한다.



어느 날, 내가 무능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많은 날들, 그 중에 하루, 그날도 나는 데X스테를 플레이하고 있었다.
분명히 몇만 쥬얼을 퍼부어 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시키의 쓰알은 어느 것 하나 나오질 않았다.


“젠장! 이런 것까지 날 도와주지 않는구만...”


시키P라는 인간이 담당의 쓰알 하나 없으니 왠지 더 초라해지잖아. 너 임마 반남사이게야, 나를 이딴 식으로 만들지 말아줘.


게다가 시키 쓰알이 없어서 립스 덱이 완성되질 않아. 다른 애들 쓰알은 운 좋게 다 있는데 시키 쓰알만 없다고. 그래서 지금 넥스트 프론티어랑 신데렐라 드림만 입히고 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롬곡옾눞을 흘리게 만들어.



결국 던져버리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현재 나는 자취중이고 따라서 집에 나 혼자 있다. 잠든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눈은 감았지만 잠이 오진 않는다. 아직 정신은 말똥말똥하다.


“잠도 내 맘대로 못 자니까 더 짜증나네!!”


말하며 벽을 탕 쳤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게 없단 사실이 떠올라 나로 하여금 가슴 찢어지게 만든다.


“알고 있어. 난 이 세상에서 제일로 못난 놈이라고...시키랑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만약 시키라면 어려울 때 어떻게 이겨낼까? 분명 천재니까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풀어나가겠지?


시키야, 네가 진짜로, 레알루다가 너무 부럽잖아. 너의 그 천하태평하면서도 천재적인 지능, 나도 갖고 싶어...



그렇게 나 혼자서 거의 울고불고 하다시피 푸념을 늘어놓다가 기운이 다 빠져버렸다.
이렇게 울고 있다고 바뀌는 건 없다. 없어, 없다고. 나도 알아, 안 바뀌어.
하지만 왠지 울지 않고서는 할 말도, 표현할 방법도 없어.
게다가 울면 잠이 잘 오거든. 그냥 다 잊고 한순간만이라도 잠들고 싶을 뿐이야.


그렇게, 기운이 빠진 나는 잠들었다.



꿈속에서, 어둠 속을 걷다가, 갑자기 눈앞이 어질어질해졌다. 뭐랄까, 마치 다른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설마하니, 나 지금 이세계 전생하는 거 아니지?! 그렇다면 대환영이야!
어서 날 이세계의 용사로 전직시켜줘! 아니, 마법사도 좋고 마왕도 좋아!
뭐로든 날 전직시켜줘!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눈을 떠보니 나는 웬 방에 도착해 있었다.


“여긴 어디지...?”


주위를 둘러보니, 적어도 아무도 없진 않은 것 같다. 밖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고 있어.


아니, 그래서 여기가 어딘데.

보아하니 딱히 이세계는 아닌 것 같고...용사가 되는 건 아니었나봐.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기에 나는 부리나케 근처의 책상 밑으로 숨었다.


“누구지?”


살짝 고개를 내밀어 확인해보니, 파란 머리의 누군가가 있었다. 뒷모습만 보여서 아직은 누구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나저나 자칫하면 들키겠네.


파란 머리가 뭐라뭐라 말을 하자 그 앞에서 누군가가 일어섰다. 저거가 침대였구나.
그런데, 엥? 일어난 저 사람 실루엣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지?


파란 머리가 일어난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고서는 나가버렸다. 그때 일어나는 사람이 누구인지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음...? 잠깐만. 저 사람은...!


“이치노세 시키잖아!!!”


아, 이런.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큰 소리를 질러버렸어! 들켰는지도 모르겠, 아니, 이미 들켰어. 확실해.



...어레? 그렇게 큰 소리로 외쳤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심지어 아무도 들어오지도 않고. 어떻게 된 걸까?

혹시 몰라서 3분 정도 더 책상 밑에 숨어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나오는 순간 왼쪽에서 시키가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순간 식은땀이 확 나더라.


‘ㄷ...들킨 걸까...?’


뭐라고 변명하지? 어떻게 도망치지? 짧은 순간에 극도로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어레? 시키는 나를 보지 못한 듯 그냥 지나쳐 내 오른쪽에 있는 거울로 향했다. 정확히는 나를 ‘통과해서’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내가 안 또 다른 한 가지는, 어디에서도 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거울에도, 시키의 눈에도 내가 비치지 않았다.


‘뭐지? 나 영혼인 건가? 아니면 투명인간?!’


시키의 주변을 돌아다녀도 보고 말도 걸어보고 심지어 시키의 머리에 손을 올리기도 했지만 전혀 날 인식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른 사람도 날 인식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 이 세계에 있어서 아웃사이더가 됐다.

뭐, 생각해보면 이쪽이 차라리 좋은 것 같네. 모습이 보였다가 괴한으로 오해받고 사나에씨한테 잡혀가는 것보단 나을 테니.



대충 정리해 보자면, 내가 있는 여기는 시키의 방이고, 아까 들어왔던 파란 머리는 추측상 카나데일 것이며, 아마도 시키는 곧 립스 스케줄을 가야 하는 거겠지.


근데, 좀 이상해. 분명 방금 전까지도 난 내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정신 차려 보니 어느 순간 여기 와 있었다. 그것도 보이지 않는 모습인 상태로.


더욱이 이건 꿈이 아니다. 처음엔 꿈인 줄 알고 내 뺨을 5번 후려갈겨봤는데 아팠으니 현실이다.
그 말인즉슨, 내 몸은 현실세계에 시체처럼 누워있거나, 아니면 나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온 거란 건데.


또 모르겠는 건, ‘내가 왜 여기 있는가’다.
사실, 대충 짐작이랄까 추측이 되는 게 있긴 해.
나는 현실 세계에서 시키를 너무나 동경했고, 또 시키처럼 되기를 원했었지.
어쩌면 신께서는, 그런 나를 불쌍하게 여기셔서 이 세계로 인도하신 걸지도 모르겠어.



그렇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 머릿속에서는, 음흉하달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몇 번이나 말했었지만 나는 시키를 동경했고, 또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
그 결과 이 미시로 세상에, 그것도 영혼의 상태로 오게 되었다.(영혼의 상태인 건 내 추측이지만 일단 그렇다고 하겠다.)
그리고 내 근처에는 시키가 있다. 곧 나가겠지만.
이건 나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나중이 언제일지 알 수 없다.


그래, 지금 내가 할 일은,


‘시키처럼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시키 그 자체가 되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곧바로 시키의 머리로 돌진했다.


왜 하필 머리냐고? 옛날 중세인들은, 가슴과 머리가 느낌과 생각을 의미한다고 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지금은 그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나는 그때의 사상을 조금 동의하는 바가 있다.


하여튼 머리로 들어가면 시키의 정신을 손쉽게 지배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완전히 시키의 몸에 들어왔다. 이제 남은 건 시키의 영혼을 완전히 흡수하는 것뿐.
물론 시키도 그냥 내줄 생각은 없는지 마구 발악을 했다. 발악하는 건 예상한 일이지만 변수가 있다면 밖에서 립스 멤버들이 오는 소리가 들린 거랄까?


“시키쨩? 괜찮은 거야~?”


목소리를 들어보니, 의심할 것 없이 프레데리카네.


“괜찮아, 프레쨩. 곧 나갈게.”


시키의 입을 빌어 겨우 변명에 성공했다. 하지만 100% 지배하기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듯 한데.

보통 만화 같은 걸 보면 빙의는 한 순간에, 굉장히 쉽게 이뤄지던데 그거 다 거짓말 같아. 내가 시키의 몸과 정신, 그리고 모든 걸 지배하려는 데에 얼마나 시간을 썼다고 생각해? 들어간지 5분 째인데 아직도 완벽하지 않아.



결국 100% 지배에 성공했을 때는 아까로부터 3분 후, 립스 멤버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였다. 사실 뭐, 그때도 100% 성공했다고 하긴 뭐하지만.


“시키, 괜찮아? 아까 비명 지르던데, 뭔 일 있었어?”


미카의 질문이다. 그리고 시키가, 아니 이제는 내가 대답했다.


“책상에 발가락 찧었어. 서두르다가 그만~”


그렇게 말하니까 다들 표정이 썩네. 그 느낌 아니깐.


“으으...어쨌든 준비 다 한 거지? 가자, 립스끼리 동물원 가기로 했잖아.”


시키의 기억을 뒤져본 결과 그러기로 했다는 게 생각났다. 그럼 아까 카나데가 말했던 게 그거였나 보네.


“동물원~좋지! 출발하자!”



프로듀서의 차를 타고 가면서 한 가지 고민처럼 느껴지는 일이 있었다.
시키는 보통 4차원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게 일상다반사인데 나로서는 그런 게 익숙하지 않으므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은, 의식의 흐름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다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



우리가 도착한 곳은 도쿄의 한 동물원이다.
동물원인데, 이 곳에 온 것은 말이 놀러온 거지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로케나 다름없다. 그래서 그런지 실종 욕구가 샘솟는걸.
나중에 혼자가 되면 그 때 시키의 몸으로 삶을 즐겨봐야겠어~!


펭귄, 기린, 사자, 호랑이, 낙타, 기타 등등 동물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배가 좀 아프기 시작했다.


“나 화장실 좀 갔다올게~”
“어, 그래. 갔다와!”
“우리 저기 원숭이관에 있을게!”


꾸륵거리는 배를 붙잡고 화장실로 엉거주춤 달려갔다.

화장실에 들어가 ㄸ을 마구 분출해내고 한숨 돌릴 때쯤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봐.”


처음엔 밖에서 누가 통화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봐.”
“응?”
“이쪽이야. 고개를 들어.”


고개를 들었더니 기절초풍할...정도는 아니지만 꽤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 눈앞에 있는 건, 이치노세 시키.
정확히 말하면,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진짜 이치노세 시키가 영혼만 남은 채 내 앞에 서있었다.


“에...에에에에?!”
“남의 몸을 멋대로 빼앗다니, 너무한 거 아냐? 프로듀서라면서 담당 아이돌한테 빙의하고 말이야.”
“에...? 나를 알아? 내가 네 P인건 어떻게 아는 거야?”
“뭐, 느낌이 나던걸. 네가 여기 사람이 아니라는 게 냄새가 났어. 이 세계에서는 한 번도 못 맡아본 색다른 냄새야.”
“그러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야? 한창 급ㄸ 싸고 있는데 건드리면 기분 찝찝해진단 말이야.”
“거참 미안하게 됐네. 하지만 꼭 해야 할 이야기라서 말이야.”
“뭔데?”
“나는 내가 누구든지 상관 없어. 내가 누구든 나는 나니까.
하지만 너는 나의 모습으로 살면서 고충이 많을 거야. ‘아이돌’ 이치노세 시키는 인기도 많고 천재라서 주변의 기대와 질시가 끊임없이 도사리고 있어.”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네 몸을 빼앗은 거라고.


“그리고 내 대드와 마마는 서로 사이가 안좋아. 가정사에 문제가 많다 이거지.”


그것도 알고 있다. 원래의 나의 부모님은 안 그럴 것 같냐?


“그런 악조건들이 있는 걸 알면서도 내 몸 안에서 살고 싶은 거야?”
“물론.”
“냐하~대단하네~흥미로워~.
그럼 좀 묻고 싶네. 너를 내게로 끌어당긴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뭐야?”
“간단하게 말할게. 너의 천재성과, 태평한 자유로움, 그리고 특유의 시리어스함이 나를 끌어당겼어.”
“다른 건 몰라도 시리어스함이 너를 매혹하다니, 의외네.”
“시리어스함이야말로 가장 큰 페로몬이야.”
“알겠어, 그럼 내 몸 가지고 잘 살아봐. 절대로 돌려받으러 오지 않을 테니까. 나는 내가 쓰다 남은 게 되긴 싫거든.”


말한 뒤 시키는 떠나갔고 난 엉덩이 닦은 뒤 변기물을 내렸다. 꽤나 오랜 시간 앉아있어서 욕창 생기기 5분 전이었다고.



화장실에서 나와 미카가 말한 원숭이관으로 걸어갔다.
도착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알렌원숭이부터 시작해 고릴라까지 웬만한 원숭이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관광객도 보이고 만물의 영장류도 보이는데 립스는 안 보이네. 아직 도착 안 했을 리가 없는데. 다 구경하고 다른 곳으로 갔나?



립스들을 발견한 건 원숭이관으로부터 50m 떨어진 사파리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원숭이관에 있겠다며?”
“그러려고 했는데, 중간에 브리첸 쇼가 보이길래 구경하고 왔지.”
“그래서 아직 원숭이들 못 봤써.”
“이제 보러 가자구.”


...나 원숭이들 다 보고 왔는데.



원숭이 구경까지 끝내고 난 뒤 카나데가 물었다.


“우리는 동물원에 왔어. 미카, 동물원의 꽃은?”
“사파리지!”


카나데와 미카의 묻고 답하기. 그 말대로 동물원의 꽃은 사파리지.


고로 사파리에 입장했다.
확실히 동물원의 꽃이니만큼 대기줄이 엄~청 길었다. 어렸을 때도 줄이 엄청 길었던 때가 있었는데.


“냐하아아암~ 지루해~”
“대기줄이 기네. 카나데, 우리 입장한지 얼마나 됐지?”
“지금이...3시 40분. 입장한지 25분 쯤 됐지, 아마?”
“25분?! 엄청나넹~”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지?”


미카가 고개를 내밀어 앞줄을 바라보며 시간을 예측했다. 그리고서 하는 말,


“최소한 지금까지 기다렸던 만큼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에에~? 그 정도인거야? 프레, 지루해져버려~”


나도 마찬가지야. 미카의 말대로라면 최소 25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건데.
아마 원래의 시키라면 이미 지루해져서 실종되고도 남았겠지.



한참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거북이 전진하듯 앞으로 가다보니 어느새 포토존에 도착했다.
포토존에 도착했다는 것은 사파리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버스에 타기까지 10분도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시키, 지루하다고 실종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버텼네.”

“냐하하~사파리버스를 꼭 타고 싶었으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다. 진짜 그랬으니까.
다만 원래의 시키라면 좀 다르긴 했겠지만.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기로 했다.
포즈를 취하라는 직원의 말에 우리는 립스 특유의 포즈를 취했다.
립스 특유의 포즈가 뭐냐고? 그거 있잖아, 립스 마크 포즈, 니네들이 데레X테에서 립스복 살 때 이미지에서 뜨는 그거! 이렇게 말하면 알겠지?


그 포즈를 취했고 사진은 그런대로 잘 나왔다.

직원 말하길,


“사진은 버스투어 끝나고 기념품 샵에서 찾아가시면 돼요.”



그리고, 10분이 약간 안 되는 시간이 흘러, 대망의 버스 투어의 시간이 되었다! 냐하하~


다같이 탑승해 자리를 잡았다. 관람할 때는 닥치고 창문 쪽이다. 통로 쪽에 앉으면 질 좋은 사진 건지기는 틀렸다고 보면 된다. 뭐, 다들 알고 있겠지.


모두 자리에 앉자 버스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보게 된 동물은 곰이었다. 보통 다 그러더라. 10에 9할은 곰이 시작을 맡아주는 게 모든 사파리의 법칙인건가?


우릴 맞아준 곰의 이름은...뭐였더라? 굳건이? 쿠마키?
아무튼, 그런 이름을 가진 수컷 반달가슴곰이었다.
기사 아저씨가 던져주는 건빵을 엄청나게 잘 받아먹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그리고, 직접 오지는 않았지만 근처 바위에 앉아있는 암컷 곰의 이름은 ‘쿠마코’라고 한다더라.


개인적인 생각인데, 여기에 피냐코라타를 집어넣어도 서로 같은 곰인 줄 알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기사아저씨가 던져주는 건빵을 엄청 잘 받아먹는 걸 보고 든 생각이 있는데, 먹이도 건빵으로 주는 건가? 곰은 곰의 먹이가 따로 있을 텐데, 예를 들어 고기라던가 말이지.
혹시 고기에 건빵 같은 걸 끼얹나?


곰들을 지나서 보인 다음 동물은 호랑이였다. ‘토라키’, ‘토라코’.
곰도 그렇고 이름을 참 대충 지었다 싶다. 나 같았으면 ‘우라니’, ‘폴로니’하고 지었을 텐데. 그러면 좀 있어 보이잖아, 엄청 세보이고.


사자들도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시시키’, ‘시시코’.
...어떤 게으른 놈이 이름 지은 거냐? 안즈가 지어도 저것보단 성의있게 짓겠다.

결국 사파리 투어를 모두 마쳤을 때 내 기억을 들춰보았지만 남은 건 사진들과 동물들 이름밖에 없었어.



사파리 투어를 모두 마치고 기념품 샵에 들러서 카나데와 미카가 사진을 찾을 동안 나와 프레쨩은 기념품을 골랐다.
나는 레서판다 인형을, 프레쨩은 고양이 키홀더를 샀다.
와중에 슈코는 딱히 뭘 사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게 없나보네.


아까부터 느끼는 거지만 내 정신이 점점 시키와 동화되는 느낌이야.
물론 싫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좋아, 시키처럼 되고 싶었던 내 소원이 이루어지니까 싫을 게 없지.
이제 완벽하게 시키가 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그 뒤로도 시간이 가도록 여러 동물들을 구경했다.
새, 물고기, 파충류, 사람(?).
모두 구경하니 어느새 7시가 가까웠다. 이제 슬슬 돌아갈 시간이네~.


“오늘, 정말 재미있었어~”
“시키쨩도? 프레도 그래~!”



집에 돌아와 씻고 옷을 대충 걸쳐 입은 채 저녁을 해결하려 냉장고를 열었더니 그 안에는 다 떨어져가는 반찬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국물반찬이 없기를 다행이네.
한편으로는 참 시키다운 냉장고라고 생각이 들고, 너무 시키다워서 딱히 할 말이 없다. 정돈되어 있었으면 시키의 냉장고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놀랄 뻔했어.


밥을 먹다가 생각이 들었다.


‘시키의 생활 패턴이 어떻게 되더라?’


내가 옛날에 시키를 본 건 데X스테 이외에는 딱히 없었다. 그리고 분명 거기 나온 게 다는 아닐 테지.
이럴 줄 알았으면 며칠 지켜보고 시키의 생활 패턴을 기억한 다음에 몸을 빼앗을 걸 그랬어.


마음 같아서는 시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지만 이제 시키는 없다. 이젠 내가 시키이기도 하거니와 원래의 시키도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고 스스로 그렇게 말했으니까.
결국 시키의 생활 패턴은 내가 직접 만들어야 할 것이다. 


혹시 몰라 시키의 인격에서 생활패턴에 대한 기억을 찾아보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왜 없는지 당황했는데, 금방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시키는 원래 그런 애다. 규칙 같은 건 포르말린에 쑤셔박아 바짝 말려버린 애가 시키다.
그러니 생활패턴 따위 있을 리가 없지.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냥 욕망과 의식의 흐름대로 살면 그게 시키인 거다.



밥을 다 먹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대담하게도 ‘실종’이었다.
대담하게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사실 딱히 걱정이랄까 두렵지도 않았던 게, 지금껏 시키는 며칠씩이나 실종을 하고도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그러니까 나 또한 평범하게 돌아올 수 있겠지.


무엇보다 난 이제 시키의 정신에 모든 걸 맡기기로 했다.
내 인격으로는 절대 실종할 용기나 배짱이 나오질 않는다. 하지만 천하태평 4차원 안드로메다 멘탈갑 시키의 인격이라면 실종도 근처 마트 쇼핑하듯 할 수 있겠지.



걷는다, 걷는다, 걷는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걷고, 걷고, 걷는다.
지금 몇 시든 상관 없어. 어디 있든 신경 안써.
그저 중요한 건, 아니 중요한 것도 없어.
의식아, 내 발을 이끌어라. 내 발아, 의식에 이끌려라.
정신아, 생각아, 잠시 잠들어라.

내가 가는 곳이 어디든, 지루하지 않게 나를 움직여라.



실종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는 시작일로부터 나흘 하고도 7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그동안 나는 자연경관도 보고, 목장도 지나다니고, 교토 거리도 돌아다니고, 난생 처음으로(시키는 처음이 아니겠지만) 히치하이킹도 해봤다.


실종이란 거, 너무 재미있잖아! 시키가 실종을 취미라고 적은 게 너무 이해가 돼. 시키의 인격에 모든 걸 맡기니 이렇게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보니, 시키는 일 중에 실종되어서 프로듀서가 쫓아가 데려오는 일도 많았었지.
추격전이라~흥미로운데? 나중에 꼭 해봐야지~쫓고 쫓기는, 숨막히는 추격전이라니, 엄청 짜릿할 것 같지 않아?


하여튼 나흘만의 컴백이었으니 뭔가 소식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켜보니!


아무 일도...없었다! 문자도, 전화도, 데레포도, 전혀 온 게 없었어. 실종기간 나흘 중에도 그랬는데 마지막까지도 연락이 없네.
냐하하~뻘쭘한데? 나흘동안 스케줄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네~무심해! 이럴 줄 알았으면 하루만 더 실종할 걸 그랬어~!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누웠다. 실종하느라 피곤하단 말이야~.
해서 눈 감자마자 바로 잠들어버렸다.


Zzz...드르렁...쿨...음냐...에헤헤...



잠에서 깼을 땐 나흘 전 실종을 시작했을 때의 그 시간이 되어 있었다.
저녁을 먹어야겠는데 이제 반찬이 없다. 지난번에 다 먹었어.
고민하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디어가 뭐냐고? 그건 바로~

광고 후에 공개됩니다~냐하하~



프로덕션 식당에 도착했다.
보아하니 아직 요리가 만들어지고 있는 듯 한 게, 줄을 선 아이돌들에게 주방 아줌마들이 계속 배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이밍, 나쁘지 않은데?


식권을 카운터에 제출한 다음 식판에 음식을 받아들고 자리에 가서 식사를 시작했다.
현실에서도 그렇고, 시키로 살기 시작한 이래로도 이렇게 따뜻한 밥은 정말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거짓말은 아니야. 확실히 자취한 지도 몇 년 됐었고, 그동안 여럿이 먹는 밥은 먹질 못했으니까.
지금은 아이돌들이랑 같은 곳, 같은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있다. 그래서 밥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밥만 먹고 다시 집에 돌아왔다. 좀 매정(?)하지만 애초 내 목적은 밥을 먹는 거였으니, 계획대로. 냐하하~


근데 그러고 보니 아직 한 번도 향수를 만들지 않았네. 내가 시키를 동경한 큰 이유 중 하나가 그 천재성인데 정작 그걸 활용해보지 못했어.


해서 집에 가자마자 인격을 바꾸고(실종하는 동안 인격 바꾸기를 연습했었다. 지금은 매우 능숙하다.) 실험 도구를 잡았다.


내가 가장 먼저 만들고자 했던 향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2가지의 냄새가 있었다.
하나는 따뜻한 우유 냄새고, 또 하나는 병원 냄새였다.
이 두 가지를 섞은 냄새가 궁금해진다. 어떤 느낌일까?


물론 ‘좋은 거+좋은 거=더 좋은 거’의 공식은 성립하지 않겠지. 어쩌면 최악중의 악 중의 악이 될지도 몰라. 하지만 그 조합을 만드는 건 결과가 어떻든지 날 지루하지 않게 할 거야.
와라, 시키의 인격과 지식아. 나를 즐겁게 해줘!



시키의 지식을 빌려 성분들을 추출해내고 조합해서 나온 결과물의 향을 맡아 보았다.
글쎄, 그닥 끌리는 향은 아니네. 아니, 정확히는 뭔가가 부족해.
뭐랄까, 내 코를 크게 자극 시키지는 않아.
뭐랄까, 5% 부족해.
뭐랄까, 결정적인 뭔가가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무엇인지 감이 안 잡히네.



부족함을 찾고 있을 동안, 시간은 흘렀고 어느새 깊은 밤이 되었다.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도시 치고는 다소 밝은 달빛이 들어왔다. 이런 달빛은 시골에 갔을 때 본 적이 있어. 최근에 실종을 했을 때 보았던 기온마츠리의 불빛도 이렇게 밝지는 않았던 것 같아.


창문을 열고 휘영청 밝은 저 달을 바라보았다.
보고 있자니, 어딘가에서 냄새가 흩날려 내게 왔다.


“뭘까? 이 냄새는.”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하지만 몹시도 기분 좋은 향이 나를 감쌌다.


“좋다...정말 좋다...”


생각했다. 아아, 이게 바로 밤의 냄새구나.
통을 가져와서 담아가야지.
그러나 내 몸은 밤의 냄새에 취해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내가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저 태양의 빛이 하늘에 보이기 시작할 때였다.
그래, 새벽의 향에도 나는 취해있었구나.


아무도 만들어내지 못할 자연의 위대한 향기에 취했다가 깨어난 나는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내가 깨어난 건 어떤 흔들림에 의해서였다.
바닥에 쓰러져 잠든 나를 깨운 건 분홍머리 미카였다.


“냐아아아~무슨 일이야, 미카?”


“무슨 일이냐니! 스케줄 잡혀 있단 얘기 못 들었어? 어서 일어나!”


어레? 스케줄? 무슨 스케줄? 연락 온 것도 없는데.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미카는 내 핸드폰을 켜서 내게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정말로 오늘의 스케줄이 잡혀있었어. (나중에 알았지만 일주일 전부터 잡혀있던 스케줄이었다.)


헐레벌떡 일어나...진 않고 천천히 일어나서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서두르는 건 시키답지 않잖아.



오늘 스케줄은 나와 미카 둘이서 출연하는 음악 프로그램이었다.
히든싱어 비슷하게 3명의 모창 가수들 중 진짜 가수를 찾는 프로그램이라고나 할까.
내가 가수로 출연하고, 그 다음 차례에 미카가 출연한다.
립스의 코어 팬이라면 아마도 구분하기가 ㅆㄱㄴ이겠지? 내가 다 긴장되네~.


1라운드 곡은, 내 두 번째 솔로곡 ‘PROUST EFFECT'다.
이 곡은 발매 당시 세간의 평가가 좋았는데, 오죽하면 ‘이치노세 시키가 이런 노래도 부를 줄 알았어?“라는 유튜브의 댓글이 베댓이 됐을 정도였다.


...랄까 ‘내 솔로곡’이라니, 나도 이제 시키 다 됐네. 냐하하~



방송이 시작되었고, 나는 내가 있을 박스에 들어가서 대기하고 있었다.
랄까 갑자기 실종하고 싶어~냐아아아~지루해~!


넋놓고 있다가 갑자기 흘러나온 멜로디에 정신 차리고 마이크를 들어 첫 소절을 불렀다.


“대상을 관찰, 철저히 구석구석까지 놓치지 않아. 있잖아? 내 존재를 너에게 투여할게, 느껴줘.”


곧이어 들려온 다음 칸 참가자의 노래,


“GPCR에 흔적을 내. 깊숙하게, 네게 기억을 새겨.”


그 다음으로 부르는 참가자의 노래,


“언제까지나, 어디까지나. 좀 더, 좀 더 강하게.”


그리고 이어진 우리 셋의 합창,


“향수의 잔향은 사라지지 않은 채로 나에 대해 계속 계속 생각해줘. 톱 노트는 씁쓸하고도 달콤해. 좋아하지?”


1절이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셋 중 누가 진짜 이치노세 시키인가’를 맞히면 되는 것이다.
자! 어디 한번 맞혀보시지~!


패널들은 굉장히 고민하는 듯 했다.
연예인 판정단들 중 한명인 ‘나카시마 유키’는 너무 어렵다고 볼멘소리를 하는가 하면 ‘치스가 하루카’는 다들 목소리가 똑같아서 구분이 어렵다고 말했다.
그거 동감이야. 심지어 나는 시키가 다시 돌아온 건 아닌가 싶었다고.


“자, 이제 최종 선택의 시간입니다. 진짜 이치노세 시키를 맞혀주세요!”


사회자가 외쳤다. 그러자 패널들과 판정단들은 어려워하면서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결과 발표의 시간,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쪽은 3번이었다.


“자, 3번 참가자는 정체를 공개해주세요!”


곧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 3번 참가자는 정체를 드러냈다.
내가 아니다. 3번 참가자의 정체는 나고야 출신의 고등학생.
틀렸대요~. 틀렸대요~.

근데 확실히 3번 참가자의 목소리도 다른 사람 못지않게 나랑 꽤나 비슷했어. 나였어도 아마 헷갈렸을 걸.



2라운드, 사실상 결승전.
이번 대결곡은 내 첫 번째 솔로곡 ‘비밀의 투왈렛’.
발매 당시부터 센세이션이 장난아니게 몰아쳤었지!
자, 그럼, 어디 한 번 불러볼까?


“My secret eau de toilette~"


전주를 시작으로 한 소절씩 주고받기를 1분 24초. 그러다보니 금방 1절이 끝나고 또 다시 선택의 시간이 왔다.
밖의 반응들을 들어보니 아까보다도 더 어렵다는 반응,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진짜 같은 목소리들이 더욱 진짜 같아졌으니 헷갈릴만도 할거야.
자, 어디 한번 맞춰봐~! 냐하하~어려울걸!


괴로운 선택의 소리가 이어져 괜히 내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내 옆의 누군가도 그런 마음일까?



마침내 결과 발표의 시간이 되었다. 선택받은 쪽은 1번,


“자, 1번 참가자는 정체를 공개해주세요!”


문이 열리고, 1번 참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1번 참가자의 정체, 그는 내가 아니었다.
그는 현직 성우고 이름은 ‘아이하라 코토미’라고 했다. 듣기로는 판정단의 나카시마 유키, 치스가 하루카와 아는 사이라던데. 그 둘도 못 알아챌 만큼 우리 목소리가 똑같았다. 심지어는 나도 헷갈렸는걸.


잠시 후 내가 나왔고, 우승 상품으로 현금 35만엔을 증정받게 되었다.
냐하~기분이 엄청 좋네~My secret eau de toilette~♪



대기실로 돌아가는 중에 미카가 스탠바이를 하고 있는 걸 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 다음 차례가 미카였었지.


“잘 하고 와, 미카쨩~”
“아, 땡큐, 시키.”


대기실에 들어가서 쇼파에 앉아있으니 급 지루해졌다.
그러다 든 묘안은,


“실종하자!”


해서 바로 실종해버렸다. 지루한 건 싫으니까~!



내가 프로듀서에 의해 잡혀 들어왔을 땐 미카의 차례까지 모두 끝났을 때였다.
참 빨리도 잡혔네!! 냐앙~냐아아아앙!!!



집에 돌아와 옷을 대충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눈을 붙였다.


“냐아아아~피곤해.”


밤향과 새벽 향에 취해 밤을 새다 기껏 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너무 졸리다.
낮잠 좀 자고 저녁 먹어야겠다~냐아아아아...
어째 시키가 된 이후로는 먹고 자고 실종하는 것 밖에 없는 것 같지만, 아무렴 어때.
그게 시키인걸.



꿈 속에서 도너츠를 먹는 꿈을 꿨다.
그냥 먹은 게 아니라 ‘먹어치운’ 수준이었다고 하는 게 더 무방하려나? 그만큼 많이 먹었어. 엄청 맛있었는데.
깨어나면 아마 도너츠 먹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어.



생각보다 일찍 깨고 말았다. 잠든 지 3시간 만에 다시 눈을 떴다.
뭐, 딱히 상관은 없어. 그것만으로도 이미 저녁시간에 가까워졌으니까.
오늘도 프로덕션에 밥 먹으러 갈까-.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묻겠지. 이와테는 프로덕션과 엄청나게 떨어진 곳인데 어떻게 왔다갔다가 쉽냐고.
내 출신지가 이와테인 거지 지금 이와테에 사는 건 아냐. 당연하잖아?! 이와테서 프로덕션까지 언제 가는데?!


그럼 어디 사냐고? 프로덕션 근처에 중간 정도의 원룸을 하나 구했는데 거기 살고 있지. 아이돌 인세로 월세를 내고 있어.


이상은 전부 시키의 기억을 통한 설명이니까 정확할 거야.



하여튼 프로덕션에 가서 저녁식사를 한 다음 집으로 가...려다가 문득 다시 솟구친 욕망,


‘실종하자~’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의식이 이끄는 대로, 발이 가는대로 움직였다.
누가 뭐라든지, 아무도 신경 쓰지 말고.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욕망을 따라 움직여라. 욕망이 나를 흥분케 한다.
의식아, 나를 이끌어라. 생각아, 정신아, 잠들어라.
걸어라, 걸어가라. 정처없이 걸어가라.
나아가고, 나아가라, 앞에 무엇이 있든지.


나는 이치노세 시키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실종했다.



내가 돌아온 건 그때로부터 일주일 하고 4일이 지난 뒤였다.
이번 실종은 센다이까지 다녀왔다. 믿든 말든 사실이야.


그동안 많은 걸 느꼈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 걸 꼽으라면, 시키와 나는 어느새 하나가 외었었다. 영혼만 나일뿐, 나와 시키의 인격, 그리고 기억은 어느새 하나가 되어있었어.


전에 시키가 나에게 물었었지. 자신의 모든 악조건을 알면서도 이치노세 시키로 살고 싶냐고. 그리고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했었고.


시키가 다시 몸을 돌려받으러 오지 않겠다고 말했을 땐, 사실 조금 두려웠어. 시키의 육체가, 내 생각과 너무 다른 방향으로 엇나가서 내가 후회하면 어떡하나 싶었지.


그리고 또 한 가지, 시키의 질문들에 물론이라고 대답했을 땐, 사실 다른 대답은 없었어. 아니라고 말했다면 영혼은 이 몸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겠지. 그런다면 내 영혼은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영원히 이 세계를 떠돌아야 했을지도 몰라.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물론이라고 대답하는 편이 더 나았을 거야.


하여튼, 지금은 어떠냐고?
후회하지 않아. 시키의 악조건은 나와 몹시도 같았으니까.
어쩌면 내가 가장 바랐던 건, 아마 천재성보다도 여유로움이 아니었나 싶어. 세상 태평하게 실종하고도 마음이 전혀 불안하지 않았으니까.



이제는 정말로 만족해.
'이치노세 시키’로서 사는 게 아니라, ‘나’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게 이젠 느껴지니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와 ‘이치노세 시키’는 계속 이분법적인 것처럼, 하나가 되어도 서로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었어.
하지만 오랜 뒤에(별로 오래 걸린 것도 아니지만!) 나는 어느새 시키가 되었었고, 시키는 어느새 내가 되어있었다는 게 느껴지더라고.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진짜 내가 된 이 기분을.
'나는 이치노세 시키다’라는 말은 뭔가 어색해.
'나는 나다.' 라는 말은 맞긴 하지만 어울리지 않아.


아무튼, 나는 나야, 나는 이치노세 시키야, 나는 천재야, 나는 모두가 사랑하는 존재야, 나는 아이돌이야.
나는, 이제 새로운 이치노세 시키고, 그게 나야.


이런 말이면 되나? 별로인가?
냐하하~모르겠다~! 이 이상 더 좋은 말은 모르겠네~.


이치노세 시키, 그게 나야.

나는 나니까, 이런 삶 절대 후회하지 않아.


그러면, 프로듀서. 앞으로도 ‘뉴 버전’ 시키냥, 잘 부탁해? 냐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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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 내는 게 어려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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