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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모리 아이코F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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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21, 2019 09:14에 작성됨.

혼자 있을 때는 어때요?

어땠겠어? 알고 물은거야, 아이코? 그랬겠지. 넌 그런 아이니까. 배려심 깊고 착한 넌, 남에게 귀 기울일 줄 아는 넌 이미 그 대화로부터 다 알고 있었을거야.

음성을 껐다. 이 이후로는 별로 들을것도 없었다. 테이블 아래에 부착해둔건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여기서 아이코의 음성만 추출하면 오늘 밤은 아주 그럴듯한 자장가를 들으면서 자게 될 것이다. 두근거리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자는거. 매일매일 다른 목소리를 듣도록 플랜을 정해뒀지만 오늘 막 나온 따끈따끈한 음성을 듣는건 포기할 수 없다. 오늘 듣기로 예정된 4월 2일자의 아이코 느긋나긋 라디오 컷본은 미래로 미뤄두었다.

다음 만남 또한 예정되어있다. 3일 후다. 그 전까지는 아무런 팬과의 소통이 스케줄에 없다. 아이코도 쉬는 시간이 필요할테니 그걸 고려한거다. 허락을 해준 것에는 감사하고 있다.

팬의 이름으로 F라. 그럴듯한 이름을 잘 갖다붙였다.

그 그럴듯함이 너무나도 혐오스럽다. 그런 하류인생이 아이코를 두려움에 떨게 한다는 것이 괴롭다. 아마 아이코가 그 날 본심에 대해 얘기해주지 않았다면 며칠상간으로 악몽을 꿨을 것이다. 전화위복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거지. 역시 아이코야. 분류작업을 하다 소름이 끼쳐 나중에 아이코 몰래 반송해버린 그 불쏘시개에서 유일하게 건진 문장이 있다면 '아이코는 기적의 아이돌이야'라는 문장이다. 나의 기적은 매일 날 행복하게 하면서도 이제는 그 극한을 보여주려 한다. 극한이란 아이코의 절망을 보는 것이다. 일순처럼 보여도 실은 속부터 썩어가고 있었다- 라던 그 절망. 아, 기대감에 온 몸이 떨려온다. 아이코가 F를 만나는게 그렇게 희열감을 주는 일인지는 몰랐다. 만남의 수가 늘어갈수록 그 희열은 엑스포넨셜로 폭증할 것이다. 난 인생의 정점을 지금 이 나이에 찍어버리는 걸까?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가 그랬듯이 호기심이란 것은 두려움을 이긴다. 난 극한을 경험하고 나면 앞으로 살아가지 못할 것을 직감하면서도 그 극한을 맛보기 위해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밖에 없었다. 천국에 가게되면 아이코가 그리울 것이다. 어쩌면 아이코도 나를 따라올지 모른다. 그녀가 천국에 갈 것임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럼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는건가. 천국이란 패배자들의 소설임을 알면서도 아이코는 나에게 이 소설을 집필하게 한다. 이 소설도 불쏘시개가 되겠군. 적어도 반송당할 일은 없는 불쏘시개.

칙, 라이터를 켰다. 그러나 불꽃은 나를 향하지 않고 아로마 캔들로 조용히 옮겨갔다. 어둠 속에서도 활활 타는구나. 보이지 않는 연기는 그 향만으로도 사랑스러웠다. 마치 아이코라는 아이돌처럼.

***

그 날 밤은 잔뜩 취해서 온갖 곳에다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아이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사실 난 취하지 않았었다. 술을 살 돈도 없는데 취할 리가. 그냥 술의 힘을 빌린 척 미친 짓 한번 해보려고 했던거다. 정말로 취했다면 어떤 범죄 짓거리를 했을지 모른다.

너 범죄자 맞잖아. 그것도 술에 취한 상태도 아닐때.

아침에 일어나서는 단 한명에게 문자가 와있었다. 난, 적어도 한명에게는 손절당하지 않았구나. 가슴이뭉클해져서 여자애처럼 질질 짜고 말았다.

걔는 니가 아이돌한테 미쳐서 오프까지 쫓아다닌 역겨운 사생인거 알아?

오늘은 그 애를 만나기로 해서 오랜만에 술집을 찾았다. 아이코에게 얘기했던 그 친구들 중 한명이다. 이름은 유타다. 난 유타를 만날 때 행복했던 것 같다. 목소리만 들어도 짜릿한 사람이 아니고, 얼굴만 보면 웃음이 나는 사람은 아니어도 같이 있으면 즐겁고 잘 맞는 사람이었다. 같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출근부터 퇴근까지 함께한 사이로 친해졌다. 재미로 한 단기 알바에서 만난 우리는 많은걸 얘기했고 많은걸 함께했다. 

아, 사실은 아이코를 처음 보았을 때도 유타와 함께였다. 우연히 지나치게 되었던 이벤트에서 나는 아이코를 보았고, 포스트잇에 구질구질하게 편지까지 써서 남겼다. 그 새끼는 유독 그걸 한심하게 여겼었다. 그래도 그 때는 나도 라이트했던 시기라 싸움이 나진 않았다.

한심한건 너야, 남 인생에 지 인생 갖다버리는걸 자기합리화하는 멍청한 새끼. 그 말을 들었으면 좋았잖아. 지금의 널 봐.

어찌되었든 간에 유타는 괜찮은 놈이다. 나 같은걸 다시 만나고 싶었다는 것만으로도.

"아, 유, 유타."

"오랜만이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이 질문에 망설이는 것만으로도 넌 실격이야.

말이 심하게 버벅였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코. 아이코를 생각해. 아이코를 생각하자. 널 구원해주려던 아이코를 생각해보라고. 

니가 한 짓을 알면 아이코는 널 구원하려고 했을까?

"그냥, 그럭저럭."

"어, 그러냐. 다행이네."

유타는 워낙 외향적이다. 게다가 술기운이 더해져서 말이 많아졌다. 그래서 다행히 내가 구라를 안 쳐도 대화는 기름을 바른것처럼 잘 굴러갔다. 예전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수돗물이 아닌 음료를 몇달만에 마셨을 때, 내 목을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유타가 걱정해줬다. 하지만 그건 전부 내 탓이야. 난 절대 예전으로 못 돌아가. 지금도 난 아이코가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술 한모금도 너무 아파서, 아이코가 필요해. 아이코를 보고 싶어. 아이코를 보게 해줘.

"......그 날 기억나냐.... 그 때, 우연히 아이돌 행사 지나가다 봤을 때..."

"아, 타카모리 아이코?"

"....이름도 기억해?"

"네가 앨범도 사갔잖아. 퇴근길에."

"아, 그랬지 참....."

그래. 어찌보면 그게 시발점이었다. 앨범을 사서 당첨된 악수회에 가지 않았다면 정말로 티비에서만 응원하는 라이트팬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끊는 것도 빠르다. 간단하게 티비를 끄면 된다. 그럼 나만의 인생이 시작되는거다. 티비에서는 간단히 기분 전환이나 하고, 티비를 끄면 다시 인생을 살아가는, 그런 리얼충이 되는거다. 게다가 채널을 돌리면 다른 메이저한 연예인들도 볼 수 있고. 

"예쁘긴 하지 않냐?"

"빻았던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진심이면 안경이나 맞추고."

"....그래, 걔가 예쁘긴 하지. 근데 한모금에 술 취해서 발음 꼬부라져갖고 웬 아이돌 얘기야, 징그럽게."

"아이돌 빠질 어떻게 생각하냐."

"병신같아."

"....그래.... 나도 내가 병신 같다...."

유타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는 조금 놀라보였다. 아이돌 팬의 이미지가 유타에게는 많이 나빴나보다. 하긴, 행사 옆에서 조금 봤을 때도 신랄하게 까던 애니까. 친하게 지내던 내가 아이돌 팬, 그것도 극성 팬이 된 것 같으니 놀랄 만도 하다. 그러나 내 입은 그 때부터 모터 달린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내 병신같은 빠질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아이코와 만나게 된 일까지. 거기서 내가 얼마나 고개를 들 수 없을정도로 쪽팔렸는지. 얼마나 가식적이게 아이코를 기만했는지. 그것에 아이코는,나를 어떻게 대해줬는지. 어떻게 너에게 다시 연락하게 되었는지까지 전부 다. 유타는 잠잠히 들어주었다. 내 모든 얘기가 끝나고 나는 울고 있었다.

사생 사실은 쏙 빼놓고? 그것 참 알기 쉽네. 니 속마음 말이야. 뭔 입에 모터가 달려, 술 취한 척 하지마. 멀쩡하잖아. 그냥 흔한 연민이란 감정을 팔아먹어 위로해달라는 개수작인데.

"아이코가 신데렐라 걸 하면 니가 행복하냐? 왜?"

"......."

"아이코는 신데렐라 걸 하고 싶대? 못하면 불행해서 죽어버리고 싶대?"

"......"

"듣지도 않을 앨범 사재기해서 집에 쟁여두고 결국 종량제 봉투에 모아서 분리수거하는거 보면 우리나라 음악계에 몸담고 있는 아이코가 참 좋아하겠다. 그 돈으로 너한테 더 쓸수 있는거잖아. 제대로 된 밥한끼 먹고 친구랑 나와서 시간 보내고, 그럴 수도 있잖아. 니가 돈 벌어서 왜 걔한테 퍼다줘? 아니, 그게 걔한테 가기는 할까? 다 회사에서 쳐먹겠지. 왜 니가 남 인생 대신 살아. 야, 그 편지들 반송됐다며. 니가 당첨되서 반송해준거 아냐. 아이코는 이미 그거 다 읽었어."

"알고 있었어. 다 알고 있었어. 근데도 못그만둬. 그게 팬이야. 그동안 계속 그랬어. 그러니까 알아. 젠장. 그걸 어떻게 그만둬. 정보 하나라도 뒤쳐지면 머리 박고 뒤지고 싶어. 오프 하나 못가면 공사판에서 돌덩어리 옮기면서도 대가리 깨고 싶다고. 이제 아이코가 아니야. 아이코가 아니라 아이코에 대한 모든거야. 근데... 이제는........ 모르겠어." 

이 짓을 그만두기보다도, 아이코에게 떳떳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그래서라도 이 족쇄를 박살낼 수 있다면.

"나....."

".....너, 앞으로 나 매일 봐."

"...어?"

"느그 아이코 못보게 내가 너 맨날 어디로 데려다닐테니까. 내일 아침에 깨자마자 나한테 전화해서 만나자고 해. 아니면 아예 오늘 우리집에서 자고 가던가."

가슴에서부터 뜨거운게 올라왔다. 그리고는 미간에 힘이 들어가고, 눈꺼풀은 잔뜩 찡그려 아팠으며, 안구에서는 더러운 구정물이 흘러나왔다. 유타는 그것을 닦아주려 했으나 난 그걸 쳐냈다.

난 그럴 자격이 없어.

"일주일만 시간을 줘. 나 아이코랑 다시 만나기로 했어. 그러니까..."

"....그래."

유타는 다른 얘기를 시작했다. 새로운 주제가 시작될때마다 다 나 때문에 흐지부지되었지만 그 술자리는 그렇게 어거지로 시간에 끌려가다, 더 취하지는 않은 채 자리를 파했다. 택시를 기다리는 사이 난 유타에게 물었다.

"너도 아이돌 좋아해본 적 있어?"

"아니."

"근데 어떻게 빠들 심리랑, 그런거 다 알고 있냐."

"전 여친이 아이돌 하고 있거든."

그 와중에도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 새끼를 째려봤다. 이딴걸 분위기 푸는 농담으로 하는거냐?

"구라 치고 있네."

"진짜거든. 야, 택시 왔다. 연락해."

유타 넌 이따위의 친구에게 왜 그렇게 다정한거지.

더욱 더 비참해졌다. 택시 아저씨가 '왜 그래요?'라고 묻지도 않을 정도로 미친놈처럼 목 놓아서 꺽꺽 울었다.

***

"F씨. 저 사실은, F씨가 쓴 편지를 봤었어요."

"알아. 그거 보고 나 뽑은거지, 팬카페에서 추첨한 것도 아니잖아?"

아이코는 놀랐다. 그야 프로듀서가 F의 편지를 반송한 것을 모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와 반대로 F는 덤덤했다. 아무리 전 만남에 긴장을 풀었다지만, 마치 죽음을 앞둔 사형수와도 같은 태도로 임하고있으니 아이코는 불안해졌다. 먼저 말을 건 것은 F였다.

"아이코. 편지들.... 소름끼치지 않아?"

"...아니요. 저는... 그냥, 조금, 마음이 아팠어요. 저, 총선거가 끝나고 쉬면서 생각했었어요. 아이돌이란뭘까, 하고....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택하고, 하고 있지만 뭘까, 라고 고민하는건 바보 같지만... 그래도 계속 생각했어요."

"지금은 정답을 찾은 것 같아?"

"음....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F씨를 계속 만나면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어?"

"F씨. 저를 만나고 나서 어떻게 지내셨나요?"

"....사실은... 오래 연락을 안 했던 친구를 만났어. 그동안의 일에 대해서 얘기했어."

아이코는 활짝 웃으며 F의 손을 잡았다. F의 얼굴이 사과처럼 벌게졌다.

"정말, 정말 잘 됐어요!"

"....그 친구, 정말로 좋은 친구...였어."

"다행이다...."

"......."

"저, F씨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지금 너무 기뻐요. 그랬던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동안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을, 못 본 동안 계속 생각했었거든요."

F는 자칫하다간 다시 쏟아질 것 같은 눈물에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이야, 아이코. 넌 그동안 내게 행복이 되어주었어."

"아니에요."

"........"

"저는.... F씨를 힘들게 한 총선거의 줄세우기 방식도, 팬들을 어떻게든 돈을 쓰게 하려는 상술도 바로잡지 못했어요. 팬을 팬으로서 있게 하려면, 제가 아이돌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꾸준히 방송에 나가고 이벤트를 하면서 얼굴을 비추는거에요. 그렇지만 그것조차 팬분들에게 하지못해서.... 팬분들이 저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팬분들을 힘들게 하는걸...."

"........."

".......그러니까 저는... 이대로는 팬분들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없을 것 같았어요. 팬으로 남아있는 것이 부정적인 감정들만 들게 한다면요."

아이코의 목소리가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저, F씨의 편지를 읽으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았어요. 악수회에서 그 때의 편지를 기억했던 그 날처럼... 멀리 있는 팬이라도 저를 보며 즐거워할 수 있도록. 다시 팬분들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니까, 계속 열심히 할거에요. 느긋나긋하게만이 아니라, 열정, 즉 패션의 아이코로서.... F씨와 함께하면서 다시 배워나가고 싶어요! 아이돌은 무엇인가, 그리고 팬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되는 것인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아이코."

"F씨. 그, 얼마나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는... 제 프로듀서 씨에게 물어봐야겠지만, 앞으로도 예정이 잡혀있다면 저 F씨를 돕기 위해서도 정말 열심히 할게요. 후훗. 전 F씨가 행복하기를 바라니까요. 그 친구분은 계속 만나실거죠?"

"응."

F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만은 확실히 정했다. 그는 그동안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했다. 지금 아이코에게 그것을 말한다면 아이코는 무너져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적절한 시기를 고민하고, 그리고 아이코의 이미지에 피해가지 않는 방향으로 법적 처벌을 받는 것은 어떻게 해야만 할지 또 고민할 것이다. 유타에게도 털어놓을 일이다. F는 가해자로서 피해자인 아이코에게 어떠한 벌이든 받을 수 있었다. 용서하지 않겠다면 그것도 괜찮았다. F는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일을 해오고 있었는지 너무 늦은 시기에 알아버렸다. 그건 아이코와 처음 만났을 때에서야 알았다. 자신을 F라고 소개했던 그 때부터. F라는 건, 팬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이코에게 인간으로서 F등급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생각과 대화들이 오가는 테이블 아래에서 녹음, 혹은 도청기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

아이코는 16살에 데뷔했다. 결정이 빨라서 아이돌로 데뷔하는 나이도 빨라졌다. 그리고 지금은 대강 3년차쯤 되가는 프로 아이돌. '대강'이 아니라 학기까지 계산하면, 그래. 3년이었다.

"유타?"

".....아... 아이코."

두 사람이 재회한 것은.

그러나 두 사람이 재회한 것은 꿈속의 추억같은 교실 안이 아니라 현실의 미시로 프로덕션 앞이었다. 

이 광경을 보면서도 그 누구도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코는 얼굴이 눈물으로 얼룩져 입밖으로 나오는 소리라고는 흐느끼는 소리밖에 없었다. 간신히 말한 '유타'라는 이름 또한 심하게 뭉개져있었다. 그녀는 프로듀서의 셔츠를 붙잡고 있었다. 그를 말리려던 것 같았다. 

프로듀서는 날카롭게 유타를 쏘아보았다. 포마드로 넘겼을 단정한 머리는 다 망가져 잔머리가 다 내려왔다. 뺨은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발은 시멘트바닥에 나뒹구는 한 남자를 밟은 채였다.

남자는 F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유타는 프로듀서의 멱살을 잡고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프로듀서는 침착하게, 그러나 확실히 기분 나쁘다는 투로 얘기했다. 

"저쪽이 먼저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피해자는 이쪽이죠. 그러니 손 놓으시죠. 진짜 큰 일 나기 전에."

"먼저 발 떼."

"아이코 친구분. 저는..."

"뭔 개소리야? 난 얘 친구야."

".....유타."

F가 헉헉거리며 유타의 이름을 부른다. 유타는 힘들어하는 친구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저 새끼를 패든 말로 움직이든 해서 F를 구하는게 먼저다. 멱살 잡힌 주제에 힘은 좋아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 유유상종이라더니 진짜 어디서 버러지같은것들만 붙어먹어서 지랄이네. 야, 진짜 빡치게 하지 마라."

"프로듀서 씨! 그만!"

"꼴에 아이코 프로듀서라고? 지금 니 아이돌이 저러는데 성질 부리고 싶냐?"

"아이코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지?"

"네가 하고 싶어도 죽어도 절대 못하는거 한 사이. 발 내려 개새끼야."

프로듀서는 그 말을 듣고 입이 찢어지게 미소지었다. 그 누구도, 심지어는 그의 발 아래에서 얕은 숨을 뱉던 F조차. 프로듀서의 의중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울분에 먼저 주먹까지 날려버린 F조차 그 미소의 의도는 몰랐다. 그 의도를 생각할만한 정신이 희미해져있던걸까. 

아이코도 몰랐다. 아이코는 F와의 약속 장소에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프로듀서와 F가 피터져라 치고 박고 싸우고 있던 것이다. 아이코는 왜 F가 프로듀서에게 먼저 주먹을 날렸는지, 왜 프로듀서는 그것에 너무 잔인한 방식으로 대응한건지 몰랐다. 아직도 편지가 반송된 것도 몰랐으며, 그게 프로듀서라는 것도 몰랐고, 만약 F가 그 사실을 안다면 어째서 F와 아이코의 기묘한 만남이 시작되었는지 유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물론 몰랐다. F 또한 프로듀서를 알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왜 안 걸렸는지 모르겠어? 이 변태같은 새끼가 모른체했으니까 그렇지. 넌 모르겠지. 몰라야 해, 아이코 넌. F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러나 이번에도 프로듀서는 F와는 반대로 입을 열었다. 

F의 친구. 나카가와 유타.

F의 우상. 타카모리 아이코.

그리고 F 본인 나카가와 유타의 막역한 친구이자 타카모리 아이코의 사생의 앞에서,

프로듀서는 입을 열었다. 남김없이 털어내버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바라고 상상해오던 그 극한의 순간에 프로듀서는 인생에서 최고로 괴로웠다.

***

타카모리 아이코는 아이돌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아이돌의 본질에 대해 자신할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팬들을 행복하게 할 이유는 없었다. 팬들을 행복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남의 인생을 위해 살아가지 않도록 앞으로를 고민해봐야할 것이었다. 단순히 인세가 들어오는 직업으로서 아이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신념으로서 아이돌의 길을 택한 것이었기에, 아이코는 팬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지 않다고 느끼자마자 은퇴를 결심했다. 은퇴식은 없었다. 회사는 그녀의 폭로가 두려워 의외로 계약에서 쉽게 놔주었다. 어쩌면 그런 계산적인 이유보다도, 회사가 어디서든 사랑받는 그녀의 저주받은 성품을 걱정한 조치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은퇴 후 열흘 째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후 세 남자의 행방은 묘연하다. 아, 나카가와 유타만큼은 옛 정으로 잘 지내는지 따위의 안부를 물었었다. 딱 한번. 그러나 답장을 보내지 않음으로서 연락은 자연히 끊겼다.

아이코의 부모가 외출하면 아이코는 혼자였다. 그녀의 작은 방 안에서 그녀는 혼자여서 행복했다. 아이코는 정적을 사랑했다.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 없이 정적을 사랑했기에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단지 아이돌 시절의 브로마이드를 떼버린 벽에 남은 스크래치가 가끔씩 아이코의 심기를 뒤틀리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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