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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 성-프로젝트 크로네 [Prologue:나오, 카렌- 재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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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08, 2019 00:33에 작성됨.

>>>>>>


<2015년 7월 24일 오후 8시 55분, 구 346 프로덕션 캐슬 시어터 공연장>


천장까지 닿을 것처럼 우뚝 서 있는 뿔같이 솟은 삼각형 모양의 무언가. 조화(造花)로 장식된 정칠각형의 토대, 아치 모양의 유리창들과 문, 층마다 세워져 있는 말 모양 조각상. 어떻게 보면 성(城)같이, 또 어떻게 보면 탑같이 보여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구조물.

명칭마저 제대로 인수인계 안 됐다는 이유로 웬디 씨는 그것을 대충 '흉물'로 부르곤 했다.

내 눈에 '탑'자체는 나름 잘 만들긴 했지만, 이게 본래 '아이돌의 무대'로써 기획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어느 정도 그녀의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본래 무대 뒤편에 커다란 화면을 한가득 채울 예정이었다고 해도, 무대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탑'은 어떻게 봐도 뜬금없고 어색했다. 마치 원래 탑이 있던 장소에 억지로 공연장 건물을 세워 올린 것 같은 느낌.

346 프로덕션 같은 대기업이 이런 무대를 굳이 복원하는 게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실은 말이죠, 여기는 어떤 사람이 2년 전에 제게 선물하려고 만든 무대였어요. 물론 346에서 연습생은커녕 아직 모델 일을 정리하고 있었던 저를 위해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그 사람은 모처럼 간섭없이 자유롭게 만들 수 있게 된 기회를 저를 위해서 사용하고 싶다고 했었어요.”


이 무대에 대해 웬디 씨는 ‘무슨 일로 기분이 떠서 괜히 멍청하게 설계단계부터 오버한 것 같다’라는 평가를 내게 들려주었었다. 놀이동산에나 들어갈 법한 한 트럭분의 실험적인 기믹을 앞뒤 생각도 안 하고 멋대로 쑤셔 넣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하지만 저희에게 있어서 정말 큰 사고가 닥쳤고, 모든 게 헝클어졌어요. 친구이자 가족과도 같았던 그 사람과는 원치 않은 이별을 했고, 막 아이돌 연습생을 시작했던 저는 꿈을 이룰 의지도, 이끌어 줄 사람도 잃어버린 채로 방황했죠. 총책임자를 잃어버린 이 무대도 미완성인 채로 남아버렸고, 문이 굳게 잠긴 채로 346 프로덕션의 잊혀진 골칫거리가 되었죠."


'직접 만든 사람이 아니면 보수하는 것조차 어려운 구조. 그저 자신의 무언가에 잡아먹혀서 앞으로 자기 대신에 일하게 될 사람을 배려하지 않은 이기적인 설계. 이걸 다 끝내지도 못한 채로 튄 그 녀석은 지금쯤 분명 어떤 이유로든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겠지.'


"카렌 양, 주제넘은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왜 그렇게까지 아이돌에 대해서 고민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나오 양으로부터 들은 건 상관없어요. 지금의 카렌 양이 과거의 저니까. 아이돌에 대한 생각에 카렌 양이 괴롭듯이, 저도 이 무대를 마주하면서 괴로운 기억이 떠오르니까. 하지만 제게 아무리 괴로운 기억이라도, 그때 쏟아부었던 열정은 진짜였어요."


'하지만 나름대로 가치가 있기에, 그 가치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내가 여기에 있는 거다.'

신랄하면서도 탑의 모습에 비해 은근슬쩍 거창한 평가에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었다.


"열정이 있었기에 저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요. 카렌 양이 싫은 기색을 보이면서도 몰래 안무를 연습한 것도, 이렇게 나오와 같이 의상을 입고 제게 온 것도, 한구석에 제가 예전에 보았던 카렌 양의 열정이 남아있기 때문일 거예요. 열정이란 건 참 대단하거든요. 지금 이 무대도 보세요! 오랫동안 누군가의 손길도 닿지 않고 제 기억 속에 뼈대로만 남아있던 무대가, 누군가의 열정으로 이렇게 멋지게 빛나고 있잖아요!


카렌과 내가 묵묵하게 듣고 있는 가운데, 카에데 언니는 지금까지 봤던 것 중 가장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뒤에 펼쳐진 화려한 광경이 곁들여진 그녀의 미소는 넋을 잃고 바라보기 충분했다.


성(珹). 카에데 언니가 등지고 있는 것은 휑했던 무대 뒤편을 전부 가려버릴 만큼 커다란, 백색의 성이었다.

따뜻한 색감의 빛이 새어 나오는 수십 개의 반투명한 창문으로는 정장과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사람들, 우아한 자세로 티 세트를 나르는 하녀, 앉아있는 여인에게 솜씨 좋게 차를 따르는 집사의 모습이 그림자로 나타나 있다.

흰색 대리석의 질감을 재현한 벽과 기둥들 위로 빛나는 금빛의 곡선이 서로 복잡하게 엉켜, 성 전체를 뒤덮는 금색 덩굴 꽃이 되었다.

활짝 열린 정문으로는 은은한 조명 빛과 안개가 새어 나오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거 알고 있었어?"

"...나도 오늘 처음 봐. 이것만큼은 웬디 씨가 나한테 보여주지 않고 오늘까지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으니까."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사람이네."

"들어올 때 로비가 어두컴컴했지? 원래는 샹들리에가 달려있었는데 그 사람이 그저 자기가 구경하고 싶어서 떨어트렸다더라."

"뭐야 그게."


어처구니없는 실화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오는 나와 카렌. 먼저 무대로 올라가는 간이 계단에 발을 올린 나는 뒤따라오는 카렌에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카렌 스스로도 무리 없이 올라올 수 있지만, 그저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카렌과 쌓아온 관계에서 느껴지는 따스함 때문일까.

무대 위로 올라온 우리들을 카에데 언니는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의 화려한 조명 때문인지 약간 울려고 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두 사람 다 잘 어울려요."


잘못 끼운 스커트의 단추와 등 뒤의 지퍼를 제외한다면, 이미 한 번 입어봤던 의상을 다시 입는 것은 내게 아주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내 쪽보다는 카렌이 걱정되었지만, 괜한 걱정일 뿐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프릴이 달린 검붉은 색의 의상을 입은 카렌. 내 것과는 달리 스커트의 반투명한 천을 떼 고운 빛의 다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의상의 사이즈는 내 것과 똑같지만 그녀에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머리카락은 지금의 나처럼 풀어헤친 상태에서 꽃 모양의 머리핀을 올린 게 전부. 탈의실을 적당히 뒤져 찾은 머리핀이었지만 그 붉은 색은 의상에 제법 어울렸다.


"카렌 양. 좋은 표정을 짓고 있네요. 포기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생각이 바뀌었거든요. 아까 연습하면서 보니까 나오를 혼자 보내는 게 너무 걱정되고 안 미더워서요. 반성해, 나오."

"네~네.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학교 후배님. 그 대신,"


나도 온 힘을 다할 테니까, 카렌이 다시 상처 입게 될 때는 카렌이 그렇듯, 나도 카렌 곁에 있을 테니까,


"'호죠'도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흥."


대답 대신 장난기 섞인 웃음을 띠며 카렌은 무대 중앙에 서서 자세를 잡았다.

미리 정해진 것처럼 나와 카에데 언니는 그 양 옆에 똑같이 자세를 잡고, 카렌의 다음 행동을 기다린다.


"전주 없이 바로 보컬로 들어가니까, 내 신호에 맞춰서 재생해 줘. 이번에는 보컬도 넣어볼까 하는데 괜찮아?"

"얼마든지!"

"문제없어요!"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 세 사람은, 비록 아무도 없지만, 압도적인 크기의 관중석에 손을 내밀었다. 언젠가는 이것과 같이 커다란 관중석에서 우리들을 응원하는 함성과 불빛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


<2015년 7월 25일 토요일 자정, 카에데의 오피스텔.>


샤워와 머리카락을 말리는데에 대충 30분 정도 쓴 것 같았는데, 거실에는 아직도 에어컨 냉매에 섞인 술냄새와 전골 육수 냄새가 남아있었다.

탁자 위에 있던 식기는 언젠가 뷔페에서 봤던 퐁듀 분수기계처럼 싱크대에 쌓여있었고,  아무렇게나 탁자와 바닥에 널려있던 포장지, 술병, 음료수병들은 각각 따로 비닐봉지에 분리되어 있었다.

카에데 씨의 침대 옆에는 이른바 '냉방비 절약'을 위해 우리 방에서 들고 왔던 2명 분의 이부자리가 깔려있었고, 마침 나오는 그녀의 어깨에 축 늘어진 채 해롱해롱하는 카에데 씨를 어깨에 매달고 힘겹게 침대로 향하고 있다.


"나도 거들게."

"괜찮으니까 카렌은 잘 준비해."

"나오, 그러다 다친다?"


애써 괜찮은 척하는 나오를 무시하고 나는 아래로 축 늘어져 있는 카에데 씨의 다른 쪽 팔을 내 어깨 위에 올렸다. 명색에 톱 아이돌인데 양어깨를 이웃사촌들에게 맡기고 발을 질질 끄는 상황이, 여름 잠옷 바람에 얼굴을 붉힌 요염한 모습을 덮어씌울 정도로 처량하다.

어떻게든 카에데 씨를 침대에 눕히고, 배꼽까지 올라오도록 얇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편안한 듯, 배시시 웃고는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며 이불을 양손으로 꼭 쥐는 카에데 씨.


"카에데 씨가 오늘 그러더라. 친구하고 같이 먹는 전골은 각자가 좋아하는 재료를  냄비에 섞어 넣어서, 같이 요리해서 먹고 서로 즐겁게 이야기하는 게 보통이라고."

"그런데 정작 언니가 술에 취해서 우리한테 일방적으로 얘기하다가 제일 먼저 누워버렸네."

"그런데 이상하게 오히려 내 쪽이 미안해져. 작년에 전골을 먹었을 땐 정반대로 내가 지리멸렬한 이야기를 카에데 씨에게 했거든. 거기다 나는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일부러 말할 틈을 안 줬으니까."


그래도 술 때문에 모든 뒷정리를 나오가 하게 한 벌은 필요하겠지.


"카에데 씨는 마침 내일 비번이랬으니까, 날이 밝으면 벌칙으로 설거지를 시키자. 나오는 혼자 고생했으니까 내가 이번 주말 안에 시부야에 있는 냉면집에서 쏠게."

"오케이."


카에데 씨 몰래 찰나의 순간에 짓궂은 합의를 본 우리들은 거실의 불을 끄고 각자의 이불에 누웠다.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천장에 야광 스티커 같은 게 붙어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동물 모양 스티커 사이로 은근슬쩍 술병 모양, 맥주잔 모양 야광 스티커가 섞여 있었다.

대체 저런 것들은 어디서 구하는 걸까?

대충 그 정도 무게의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굴리다 보니 시간 감각이 무뎌졌다. 체감상 20분 정도 이불을 끼고 뒤척인 것 같은데, 타이머를 1시간으로 맞춰놨던 에어컨이 전자음을 내며 그 배기구를 천천히 닫았다.

그리고 말 그대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

....

....

10분쯤 지났을까?


"카렌. 자?"

"아직. 나오는?"

"에어컨 소리 때문에 깼어. 그런데 마침 카렌에게 말하려고 했다가 까먹어버린 게 생각나더라."

"어떤 거?"

"카에데 언니한테 받은 오디션 신청서."

"아."


그러고 보니 카에데 씨에게 받아놓고 나한텐 필요 없다고 나오에게 내 몫까지 넘겼었지.

일이 결국 이렇게 됐으니 이제는 돌려받아야 했다.


"웬디 씨한테 오디션 신청서를 도움받은 김에, 카렌의 신청서까지 내가 멋대로 써버렸어."


아니면 카에데 씨에게 부탁해서 새로 받거나.


"왜 이렇게 늦었어요?!"


갑작스러운 카에데 씨의 고함이 속삭임만이 오갔던 방에 쩌렁쩌렁 울렸다.


"기다리다가 다 식어브러흐헤...."


...단순한 잠꼬대였던 모양이다.


서로의 말소리가 카에데 씨를 깨울까 봐 나는 이불과 함께 몸을 굴려 나오에게 바짝 붙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인채 마주친 두 눈만 이불 밖으로 빼꼼 내밀고 있었다.


"카에데 씨한테 부탁해서 새로 받으면 돼."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카렌의 이름으로 오디션 신청서를 썼단 얘기야. 어느 정도 내가 짐작 가는 것 위주로, 카렌이 뭔가 더 쓰고 싶을까 봐 공백도 충분히 남겨놨어."

"혹시나 필체가 다른 거로 트집잡히면 어떻게 하게?"

"...어쩌면 정말 카에데 언니에게 신청서를 새로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네. 미안해, 괜한 짓을 한 것 같아서."

"괜찮아. 나오가 나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이럴 땐 내가 고마워해야지. 그때 무대에서 내 틀린 동작을 재현한 것도 비슷한 이유지?."

"응. 어떻게든 카렌과 같이 시작하고 싶어서."


대체 무슨 논리로 시작해서, 그런 거로 나랑 같이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말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래도 정말 두 번 다시 그런 짓은 하지 마."

"...정말 미안해."

"진짜 괜찮다니까."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정도로 얼굴이 붉게 물든 나오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는 머리까지 이불 속에 파묻었다.

이불 속의 손가락으로 이불 덩어리 나오를 쿡쿡 찔러보았지만 약간 움찔거릴 뿐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반응에 포기한 나는 몸을 기울여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죠. 당신이 만약 저희 961 프로덕션에 들어온다면 어떤 아이돌이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나는 정말 어떤 아이돌이 될까?

오디션 신청서를 쓰려면 우선 오래 묵은 고민부터 해결해야겠지. 그때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다음 사람에게 기회를 넘길 수는 없으니까.

그저 막연하게 춤추고 노래하고 싶어서라고 말할 수는 없고, 내 파란만장했던 과거사를 괜히 언급해서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거나 병약 컨셉을 요구받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컨셉이라면 몰라도, 그것만큼은 정말 싫었다. 그렇다면....


"'욕심이 많아서 평소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의욕도 충만합니다. 이번에 오디션을 보게 된 것도, 어렸을 때부터 춤추고 노래하는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죠. 가벼운 장난을 좋아해서 친구들 사이의 분위기를 띄우곤 합니다.'"


앞길이 안 보여서 정체했던 내 생각을 이어준 것은 이불 속에 숨어있던 나오였다.


"'네일 아트와 옷 꾸며 입기를 좋아해서, 자주 친구들을 꾸며주곤 했어요.'"


나오는 다시 이불 속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서 시선을 내 쪽으로 향했다.


"이런 식으로 네다섯 줄 정도 적었는데, 어때...?"

"...."


훌륭한 자기소개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도저히 싫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오의 이불 사이로 들어가서 그녀의 등을 껴안았다.


"추워?"

"...응."


거짓말을 했다.


"그러길래 내가 뭐랬어. 그렇게 낮은 온도로 에어컨을 틀면 감기 걸린다니까."

"나오도 에어컨 틀어놓고 이불 덮는 거 좋아하잖아."

"그렇긴 하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오는 조용해졌고,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고른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이쯤 되면 아마 괜찮겠지.


"...고마워, 나오. 전부 다."


그제야 나는 덜덜 떨면서, 진작에 나오가 깨어있을 때 해야 했을 말을 입 밖에 냈다.

웃으면서 이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

<2015년 4월 넷째주 방과 후, T 고등학교 운동장>


"안녕, 호죠. 점심때는 미안해! 개인적인 볼일이 있었거든."


귀가를 위해 학교 건물을 나서는 학생들 사이로 언제나처럼 체육복 차림의 카미야 선배가 나타났다.


"그런데 어쩐 일로 체육복은 안 입고 왔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어?"

"때려치우고 싶어서요."

"...갑자기 왜 그래?"

"발목 부상."


나는 화가 나려고 하는 것을 애써 참으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언제부터였나요."

"호죠, 나는,"

"변명은 들을 생각 없습니다. 언제부터 그랬냐고요."

"...저번주 금요일 체육 시간부터."

"오늘이 목요일인 건 알고 계시겠죠."


그렇다면 나흘 동안 다친 채로 바보처럼 나랑 달렸단 얘기잖아.


이 대책 없고 답도 없는 선배의 부상을 알게 된 건 점심시간 때,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같은 반의 여자아이를 통해서였다.

그날 점심만큼은 지겹도록 도시락을 싸 오는 카미야 선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정작 나에 대한 소문으로부터 자유로운 옥상의 입구가 잠겨있었다.


'그 제멋대로인 호죠 카렌하고 엮여서 카미야 선배의 별거 아닌 발목 부상이 괜히 악화하고 있다.'


대충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는 내용 같았다. 끝까지 듣지도 않고 도망치듯이 매점을 떠서 뒤 내용은 모른다.

친근한 척 다가와서는 일부러 험담을 당사자에게 알리는 게 기분 나빠서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선배는 자기 얘기와 나를 운동에 꼬드기려는 말밖에 하지 않고, 요리 실력도 제법 늘고 있는데.


“카미야 선배가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학교에 그런 소문이 돌고 있어요. 제가 고집부려서 선배의 부상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

“처음 체육 시간에 만났을 때 제가 말했죠? 신경 쓰실 필요 없다고. 저는 그저 선배가 귀찮아서 떼어놓으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호죠 카렌과 엮여서 좋아질게 없다.’ 그런 소문이 학기 초부터 돌기 시작했으니까 선배도 모를 리가 없겠죠. 결국엔 어떤 방식으로든 저뿐만 아니라 선배에게까지 해가 된다고요.”

“나는 상관없어.”

“카미야 선배 혹시 바보예요? 선배가 상관있든 없든 결국엔 그렇게 된다니까요.”

“그래도 괜찮아. 호죠 하고 같이 달리는 건.... 그, 살짝 다친 거나 이상한 소문 같은 건 아무래도,”

“사람 좋은 소리 작작 해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카미야 선배를 벽에 밀치고 그녀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저도 사실 선배하고 달리는 게 싫지 않아요! 달리는 것뿐만 아니라 같이 밥을 먹는 것도, 달리기를 끝내고 같이 역까지 걸어가는 것도 즐거워요! 동경해왔던 일상이니까! 병원에만 있다가 다른 아이들과 뒤처진 저는 그저 꿈꿀 수밖에 없었던 일상이었으니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선배가 두려워요! 다른 사람들처럼 질려서 저를 포기할 수도 있겠죠! 제가 죽는 거로 내기를 하던 간호사들처럼, 친절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이야 발목이 아플 뿐이지 나중에 나 때문에 또 어떻게 망가질지 모르잖아!”

“...호죠.”

“애초에 선배는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야! 나의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선배가 아픈 것까지 참고 나랑 어울려줘야 하나고!”

“만화의 주인공처럼.”

“...뭐?”


만화의 주인공? 뜬금없이 돌아온 대답에 나는 이다음에 할 말을 잊어버렸다.

물어볼 것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단호한 눈빛에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옛날부터 만화 주인공 같은 삶을 꿈꿨거든. 멋지고 남들을 도와주는 상냥한 주인공 말이야. 지금도 그런 로망이 어느 정도 남아있어. 물론 만화처럼 빔을 날리거나 날아다닐 수는 없지만, 학교의 아이들을 도와준다던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내 안의 무언가가 차오르는 느낌이었어.”

“...그렇다면 나는 그저 선배의 자기만족을 위한 도구였던 거네.”

“...그럴지도 몰라. 너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까지도 말이야. 웃기네. 이런 생각은 주인공으로서 실격이잖아.”


선배는 쓴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호죠를 계속 도와줬을 것 같아. 처음 멀리서 지켜봤을 때부터 정말 걱정됐고, 너만 괜찮다면 서로 친구가 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네가 그랬듯이, 그...”


말을 하다 말고 우물쭈물했다. 이다음에 할 말이 자신에게 있어서 금기라도 되는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고, 카미야 선배는 소리쳤다.


“나도 카렌과 함께 달리는 게 정말 즐거우니까!”


그제서야 나는 확신했다. 카미야 선배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좋은 사람이라고.

이 사람이라면 여러모로 죽어버린 것과 다름없는 나를 끌어올려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기쁜 마음이 들었다.


어째서인지 눈이 아프다.

선배의 눈동자에 비친 내 표정은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그 눈동자뿐만 아니라 새빨갛게 익은 그녀의 얼굴까지 흐릿해지기 시작하고, 끝내 카미야 선배의 멱살을 붙잡았던 손에서 힘이 빠졌을 때는 형체 없이 흐릿하게 뒤섞인 색밖에 보이지 않았다.


끝으로 내 몸을 감싸 안는 따뜻한 온기에 결국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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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할입니다.(3/3)

아마 다음으로 마무리가 되겠습니다만

...그저 면목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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