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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간호하는 소설

댓글: 6 / 조회: 1216 / 추천: 3



본문 - 07-22, 2019 23:40에 작성됨.

 창밖에서 해가 어슴푸레 떠올랐다. 조금 열어둔 방문 틈으로 들어온 쓰라린 바람이 유리 조각처럼 살갗에 파고들었다. 나는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에서 끼익 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나는 좀도둑처럼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엔 세상모르고 편히 잠든 카렌이 있었다. 그녀가 몸을 반 바퀴 돌렸지만 평온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베개 위에 얹은 가련하면서 고운 두 손이 먼지가 둥둥 떠다니는 부연 햇살을 따라 꼼지락거렸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던 얼굴엔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발그스레한 양쪽 볼이 눈에 들어왔다.
수납장의 꽃병에 꽂아둔 샛노란 수선화는 아직 생생해 보였다. 지금까지 가져온 꽃만으로 화단 한 곳은 가득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꽃병 옆에는 앙증맞은 미니어처 크리스마스 트리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동료들이 카렌의 쾌유를 기원하며 보낸 선물이었다.


 나는 그녀의 곁에 돌아와 볼을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녀의 숨소리는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가슴팍 부근의 이불은 꾸준히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그녀가 앓아누운 걸 처음 봤을 땐 정말 숨도 안 쉬는 줄 알고 몇 번이나 그녀의 입 위로 귀를 기울였었다.


 얇은 잡지를 펴들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다는 큼지막한 문구 밑으로 새로 나온 겨울철 옷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런 날씨일수록 세련된 옷차림이 이성에게 더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식의 입에 발린 소리가 줄을 이었다. 나는 섬뜩한 가격표를 외면해가며 카렌에게 어울릴 옷을 살펴보았다. 흰 양털 재킷이 마음에 들었지만, 더 두꺼운 옷이 필요했다. 코트나 점퍼는 너무 커 보였지만 그녀가 펑퍼짐한 복장으로 걸어 다니는 모습도 나름 귀여울 것 같았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카렌과 함께 했던 지난날들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그날도 무척이나 추운 크리스마스였다. 나는 크리스마스에 그녀가 온다는 소식에 의아해하면서도 늘 그랬던 것처럼 바깥까지 마중을 나가주었다. 까만 우산이 하얘질 만큼 눈이 쏟아질 무렵 치히로 씨가 총총히 달려와 병원의 연락을 전해주었다.
원래는 일주일 전에 퇴원했어야 했는데 절차가 꼬여 이제 보내줘서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치히로 씨는 기왕 이렇게 된 거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아달라는 담당자의 농담도 빼먹지 않고 알려주었다.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문 앞에 승용차가 멈춰 섰다. 산타처럼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운전사가 똑같은 농담을 해줬을 땐 하마터면 속이 뒤집어질 뻔했었다. 그가 서류를 주고 나서 뒷좌석에서 카렌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맨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얇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엉덩이 밑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이 손목에 연결된 수혈 팩과 함께 흔들렸다. 석양처럼 절절하고 덧없는 머리카락이었다. 그녀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모모카를 따라 참석했던 파티에서 본 상류층 사람들처럼 깨끗하고 고운 얼굴이었다. 활발한 활동은커녕 햇빛 한 번 제대로 쬐어본 적 없을 것 같은 가녀린 소녀. 그게 카렌에 대한 내 첫인상이었다.


 그녀는 뒤늦게 추위를 깨닫고 하얀 입김을 내뿜으면서 몸을 떨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연약한 체구로는 목발을 짚고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벅차 보였다. 나는 치히로 씨에게 그녀의 안내를 맡겨두었다. 그녀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목에 감아놓은 붕대가 눈 속에 푹푹 잠겼다. 상태가 호전된 게 맞냐는 내 질문에 운전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못 미더워 보여서 한 질문은 아니었다. 프로듀서로 일하다 보면 아이돌들의 겉모습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걸 금세 깨달을 수 있다. 사무원의 불평대로 그것들은 장식에 불과했다. 나는 과거에도 카렌보다 몸이 작은 어린 아이돌들이 어린아이가 춤추기에는 한없이 넓은 스테이지를 누비고 다니는 걸 수도 없이 봐왔었다.
하지만 그녀가 거쳐온 삶은 내가 그런 질문을 하게 할 만큼 가혹한 것이었다. 적어도 일상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녀의 담당의가 남겨놓은 듯한 메모가 내 추측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선명한 빨간색 펜으로 일상생활이 부적합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서류를 몇 장이나 넘겨봐도 긍정적인 소견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게 짐을 떠넘긴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카렌은 나와의 면담에서 어쨌든 아이돌을 하게 되었으니 잘 부탁한다며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그동안은 자기 실력을 과시하는 소개만을 들어와서 매우 낯설었다. 나는 서류를 들춰 보면서 그녀의 몸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자기 몸이 결함투성이란 걸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밝은 분위기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짧은 대화 중에도 목을 긁어내는 듯한 잔기침이 터져 나왔었다.


 나는 그녀를 숙소에 데려다주었다. 걷는 것마저 불안해 보여서 계속 어깨를 잡아줘야 했다. 첫날부터 숙소 침대에 드러누운 그녀를 보고 나서 뒤늦게 걱정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자기에게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정말 내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는지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어주기까지 했다. 가냘픈 눈매에 살짝 올라간 입꼬리, 불안한 손동작까지 무엇 하나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지만 신기하게도 그 얼굴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방을 나서면서 그녀의 웃는 얼굴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보는 얼굴은 더 환하고 편한 분위기였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생겼다.




 나는 카렌이 바라던 대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그녀를 지도해주었다. 그녀에게 배정된 숙소가 있기는 했지만, 사내 별관의 휴식실이자, 그녀를 위한 임시 병실에 틀어박혀 있는 날이 훨씬 더 많았다. 어쩌다 몸이 괜찮아져서 숙소를 방문하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돌들도 놀라워했다. 그녀들은 카렌을 차별하거나 특별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엔 우리의 일상적인 호의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것만 봐도 그녀가 받았을 아픔과 상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다른 아이돌들과 똑같이 그녀에게 평범한 인사만을 건네주었다. 난처한 반응과 거의 속삭이듯이 들리던 작은 목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바뀌어 갔다.
     
 그녀를 온실 속의 화초로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나는 담당의의 허락 하에 그녀의 몸에 레슨을 부과하였다. 아직 가벼운 트레이닝 단계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큰 오산이었다.
카렌은 레슨을 끝마치자마자 포대 자루처럼 쓰러졌었다. 무릎을 꿇은 채 피를 토하던 그녀를 보고 모두 얼마나 당황했는지. 내가 허둥대는 동안 그녀는 내게 자주 있는 일이라고 둘러댔다. 설득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업고 한걸음에 병실까지 달려갔다. 등에 맞닿은 그녀의 뺨이 가죽처럼 느껴졌다. 얇은 옷을 넘어 전해지던 그녀의 체온이 감기 환자의 숨결처럼 뜨거웠다.
나는 지금으로선 병약한 몸은 고칠 수 없다는 담당의의 설명을 그녀와 함께 들어야 했다. 체념으로 가득 찬 그녀의 얼굴에 대고 격려의 말들은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그 뒤로도 그녀가 몇 시간씩 활동하고 나면 이틀에서 사흘은 내리 누워 있어야 했다.


 나는 한가할 때마다 그녀의 병문안을 가주었다. 그녀는 내 방문을 부담스러워 했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내가 직접 수혈 팩을 갈아 끼워 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병실은 솔직히 말해서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벽면에 걸린 텔레비전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온종일 창밖을 바라보았다. 휠체어에 태워 바깥 공기를 마시게 해주면 잠깐 밝아지는가 싶다가도 돌아오면 금세 가라앉았다. 나는 시계 소리마저 둔탁하게 느껴지는 침묵 속에서 까닭 모를 허전함을 느꼈다.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걸 떠올리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잠든 사이에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꽃병에 수선화 몇 송이를 꽂아두었다. 고민 끝에 주는 선물치곤 너무 수수한 듯싶었다. 나는 아침 인사를 하고 나서 그녀의 시선이 평소대로 창밖에 고정되리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꽃병이 채워진 걸 알아봐 주었다. 그녀는 꽃병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나서 내가 꽂아둔 게 맞냐고 물어보았다. 어제 오는 길에 사 왔다는 내 대답에 카렌은 정말 예쁘다면서 소리 없이 웃어주었다.


 바로 다음 날부터 제철에 맞는 꽃을 다발로 사서 병실에 들를 때마다 꽃병에 새로운 꽃을 꽂아두었다. 수선화처럼 그녀가 특별히 더 좋아하는 게 있으면 별 효과는 없어도 며칠씩 물을 주면서 내버려 두었다. 시클라멘같이 생소한 꽃을 가져다주면 그녀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나는 인터넷으로 긁어모은 정보들을 그녀에게 알려주며 이전보다 더 보람찬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꽃병에 붉은 장미를 꽂아줄 수 있게 될 무렵부터 그녀가 병실에서 나오는 날이 늘어났다.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내 걱정에 그녀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때쯤이면 그녀의 표정을 읽는 데는 도가 틀어서 그녀의 얼굴만 봐도 상태가 어떤지 바로 알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표정으로는 아픈 걸 숨기지 못했다. 괜찮다는 말을 빼고 그녀가 내게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녀가 얼굴을 찡그린다 싶으면 내가 손을 잡아주는 거로 충분했다. 그녀는 얌전히 병실로 돌아가서 다음 외출을 기약하며 잠들곤 했다. 외출이래 봤자 346 사내가 고작이었지만.


 그녀의 주된 외출 지역은 카페와 별관 근처의 화단이었다. 화단은 원래부터 있었지만, 그녀가 오기 전까진 신경을 거의 안 쓰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원예 책까지 뒤적이며 화단 가꾸기에 열중했다. 내 부족한 미적 감각은 다른 아이돌들이 채워주었다.
카렌은 스프링클러가 부채꼴로 물을 뿜어내면서 생기는 작은 무지개를 감상하는 걸 좋아했다. 내가 요즘 몸 상태는 어떠냐, 심심하진 않냐, 아이돌들은 잘해주냐고 연달아 질문을 던지면 그녀는 괜찮다는 대답만을 해주었다.


 한 번은 그녀가 부슬비가 내리는 날에 화단을 보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아침 레슨 성적이 시원치 않게 나왔을 때였다. 나는 날씨나 레슨 결과보다 수심에 찬 그녀의 얼굴이 더 마음에 걸렸었다. 이전과 같은 질문은 소용없을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녀에게 지금 생활이 만족스럽냐고 물어보았다. 그녀가 원한다면 아이돌 활동에서는 완전히 빼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때부터 그녀의 뜻을 존중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카페에서는 될 수 있으면 그녀가 다른 아이돌들과 어울릴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몸에 좋은 차와 과자를 넉넉히 주문해두고 때마침 들어오는 아이돌이 있으면 널찍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잡담을 나누었다. 테이블의 멤버는 수시로 바뀌었지만 카렌은 모든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주었다.
내 지갑이 얇아지는 대가로 그녀가 얻은 대화들은 이후의 활동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보조 역할만을 맡았지만 지시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동료들과 발맞춰 움직일 줄 알았다. 내 걱정이 무색하게 그녀는 대부분 무사히 돌아와 주었다. 하지만 병실에서 기진맥진해버리는 것만은 여전했다.




 아이돌 활동에서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녀는 여린 달빛을 머금은 어둠 속... 화보 촬영 현장을 능숙하게 누비고 다녔다. 단지 그놈의 후유증이 골칫거리였다. 같이 촬영한 아이돌들이 바로 돌아간 데 반해 카렌은 새벽까지 촬영 현장에 남아 몸 구석구석을 검진 받으며 촬영을 진행해야 했다. 결국, 새벽녁에야 모든 촬영이 끝났다. 나는 카렌을 먼저 돌려보내고 나서 녹초가 된 스탭들과 함께 널브러졌다. 그녀가 나간 뒤에 스탭 한 명이 아이돌에게 있어 이건 너무 비효율적이라며 투덜거렸다. 그는 카렌의 아이돌 활동을 중단하고 다른 분야... 이를테면 차라리 가수 쪽이나...로 써먹는 게 어떻겠냐고 내게 제안했다. 비가 내리는 화단 앞에서 내가 했던 생각과 똑같았다. 그에게 나쁜 뜻은 없었다. 그가 정말로 카렌을 싫어했다면 그냥 은퇴시키자고 말했을 것이다.
     
 나는 아이돌로서 있는 것만이 가질 수 있는 카렌의 가치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녀에게 아이돌을 계속할 의지가 있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그런 내 속내를 밝히고 조금만 더 힘내달라고 부탁했다. 매일 해야 하는 몇 가지 일은 내가 맡겠다는 약속도 덧붙였다. 그는 못 이기는 척 내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가 카렌에게 미운 정이라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스탭들에게 먹거리라도 챙겨줄 생각으로 밖에 나갔다. 그런데 아주 살짝 열려 있던 문이 바깥에서 닫혀버렸다. 다시 문을 열었을 때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모퉁이 저편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린 시절의 일기를 누가 훔쳐보기라도 한 듯 낯간지러운 부끄러움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그날 아침에 병문안을 갔을 때 새벽에 있던 일은 어느 쪽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꽂아둔 연보랏빛 코스모스를 보고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때까지 조금씩이나마 남아 있던 어색한 기운은 하나도 없는 밝은 미소였다. 나는 앞으로 하게 될 고생이 무엇이건 간에 그만한 보상이면 기꺼이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녀가 자는 동안 주사를 놔주는 일은 내 몫이 되었다. 처음 방법을 익힐 땐 말 그대로 진땀을 빼면서 해야 했다. 중간에 그녀가 몸을 뒤척이면 어쩌나 싶어서 가슴을 졸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 서툰 솜씨를 감지해내면 입을 우물거리면서 예민하게 반응해주었다. 겨우 익숙해진 뒤부터는 그녀가 편안하게 자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정신없이 바쁜 월말에도 그 일만은 빼먹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도리어 카렌이 나를 걱정해주기도 했다. 나는 그녀가 했던 것처럼 괜찮다고 말해줄 뿐이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날이 줄어들수록 우리는 짧은 대화로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흘 전에 그녀에게 선물해줬던 꽃은 포인세티아였다. 바로 꺾어온 것처럼 물기를 머금은 아주 싱싱한 물건이었다. 병실에 크리스마스트리까진 못 두더라도 장식만은 해주고 싶었다. 단아한 잎사귀들이 추위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돌기 모양의 꽃잎들을 감싸주고 있었다. 카렌은 활짝 핀 붉은 포엽을 신기하단 듯이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꽃말을 알려주었다. 축복과 행복이었다. 내게도 행복을 빌어주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또 다른 꽃말처럼 내 마음도 달아올랐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나는 알아서들 야단법석인 아이돌들에게 파티 준비를 맡겨두고 교외의 산을 찾아갔다. 카렌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다른 아이돌들에게 줄 선물은 이미 사둔 뒤였다.
군데군데 눈이 녹아 헐벗은 땅은 매서운 서리 기운을 품고 있었다. 나는 제각각으로 쌓인 눈더미 사이에 뻗어 있는 자갈길을 걸으면서 이름 모를 꽃들을 꺾어갔다. 꽃잎은 거칠었지만, 꽃가루가 가득한 노란 꽃술이 햇빛에 반짝였다. 여름에 피는 것들은 꽃잎은 더 화려할지 몰라도 꽃술의 아름다움은 품고 있지 않았다. 겨울의 찬바람이 벌들로부터 그 탐스러운 꽃들을 지켜주고 있었다. 나는 핏빛 태양이 저물 때까지 꽃을 한 아름 챙겨 들고 산에서 내려갔다.


 그렇게 내가 직접 한두 송이씩 모아서 만들어둔 꽃다발이 지금 의자 옆에 놓여 있었다. 꽃가루의 진한 향기가 방향제처럼 병실 구석구석에까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카렌이 한쪽 눈을 비비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수선화가 꽂혀 있는 꽃병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여기서 나는 거야?"


 그녀가 코를 벌름거리면서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수줍게 꽃다발을 받아 들고 포근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 미소는 이제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활력소였다.


"마음에 들어?"


내가 물었다.


"응, 향기가 정말 진하네. 이렇게 많이 사 와도 괜찮아?"


"내가 꺾어온 거니까 지갑 걱정은 안 해도 돼."

 
"프로듀서가?"


"응. 그동안 눈여겨 봐둔 곳이 있었거든. 전부 거기서 가져온 거야. 거기엔 나도 이름을 모르는 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봄철에는 동물들이 뛰노는 것도 자주 볼 수 있어."


"듣기만 해도 근사한 곳이네. 언젠가 나도 한 번 가봤으면 좋겠어."


"날이 풀리면 데려다줄게. 그보다 선물이 하나 더 있는데 말이야..."


 나는 아직까지 주머니에 넣어둔 손을 꺼냈다. 카렌은 내 손에 들린 작은 상자를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마냥 순수해 보이던 그녀도 내가 무엇을 준비해 왔는지 알아챈 듯했다.


"잠깐만, 프로듀서."


 상자를 열기 직전에 그녀가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목소리처럼 그녀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걸까? 나까지 바짝 긴장한 채로 그녀와 마주 보았다.


"정말 괜찮은 거야? 난 지금도 프로듀서에게 폐만 끼치고 있는데..."


"폐라니. 네가 웃어주는 것만 봐도 피로를 전부 떨쳐낼 수 있는걸. 물론 귀찮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이제는 너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즐겁게 느껴지고 있어."


"정말로...?"


"그렇다니까.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아, 아니야! 그냥... 이런 일이 믿기지가 않아서. 나 같은 아이돌, 별 쓸모도 없었을 텐데..."


 그녀의 두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줄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이곳에 오기 전에 받았을 설움들을 이제서야 털어냈다.


"쓸모없지 않아."


이번엔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넌 우리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야. 네가 쓸모없게 느껴졌다면 그건 전부 널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 책임이야."


"난...! 처음부터 엉망으로 만들어졌다고..."


"그래도 난 널 유용하게 써주고 있잖아. 앞으로는 네가 널 위해서, 그리고 날 위해서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다시 한 번 상자에 손을 올렸다. 카렌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상자 속에 있던 반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그녀는 눈물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내 기쁨을 그녀와 나눠 가졌다.


"내가 프로듀서에게 더 큰 짐이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그녀가 물었다.


"글쎄, 난 네가 지금보다 잘할 거라고 보는데. 네가 날 보살펴주기도 하고 말이야."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내가 의지할 사람은 이제 프로듀서밖에 없단 말이야."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아직은 너무 이른 듯했다. 나는 오늘부터 그녀와 함께할 일들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그녀의 얼굴처럼 눈이 부시게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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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뒤죽박죽인 와중에도 겨울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지난 몇 년간 우리만이 거쳐 갔던 산길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뽑혀 나간 나무 팻말과 밧줄들은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래였다. 혹한이 깃든 그윽한 풀냄새가 바람에 짙게 실려 왔다. 오직 겨울에만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다른 계절들도 저마다 고유의 냄새를 갖고 있지만, 나에게만은 이 냄새가 더 특별했다.


 나는 사각사각 눈을 밟으면서 휠체어를 밀었다. 휠체어가 지나가는 곳마다 바스러진 나뭇잎들의 아련한 비명이 산길 밖으로 퍼져 나갔다. 바람이 들이닥치면서 나뭇가지에 쌓여 있던 눈이 나무 밑으로 쏟아졌다. 모래알처럼 건조하던 지난밤의 눈발이 떠올랐다. 뉴스에서 아무리 꾸며낸 소식을 떠들어도 사람들이 체감하는 날씨는 항상 정직했다. 겨울은 옛날보다 더 빨리 우리 곁으로 돌아왔고 그만큼 더 혹독해졌다.
나무 주변에는 흙먼지로 둘러싸인 도토리들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휠체어를 세워두고 지난겨울에 꽃이 피었던 곳을 둘러보았다. 꽃은 다람쥐들이 떠나간 곳을 쓸쓸하게 지키고 있었다. 겨울 야생화의 거친 꽃잎과 터질 것처럼 봉긋 솟아오른 꽃술만은 그대로였다. 그동안 숱하게 봐온 꽃이었건만 왠지 모르게 이번에 피는 게 마지막일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불길한 예감을 떨쳐냈다. 다시 산을 오르는 동안 정겹던 새소리는 듣지 못했다.


 나는 산길 한가운데에 있는 갈림길에서 고민에 빠졌다. 왼쪽으로 난 길은 축축한 땅이 곧게 뻗어 있었다. 오른쪽은 쓰러진 나무와 울퉁불퉁한 자갈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나무 사이로는 휠체어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상까지 올라가려면 오른쪽 길로 가야만 했다.
정상이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 가더라도 똑같은 꽃과 풀만이 우리를 반겨줄 게 뻔했다. 하지만 정상에는 우리의 추억이 남아 있었다. 그곳에선 화창한 봄과 가을날에 돗자리를 펴놓고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시절들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다음을 기약하고 싶지 않았다.
휠체어에서 요란한 기침 소리가 났다. 나는 우리에게 여유가 남아 있기를 빌면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솔길 옆의 개천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빙판에 작게 파여 있는 구멍 밑에서 시냇물이 졸졸 흘렀다. 그곳의 흙은 묵은 밀가루처럼 탁했다. 부러진 소나무에서 나는 솔 냄새가 진동했다. 톱밥처럼 잘게 부서진 밑동을 타고 손가락만 한 유충들이 꿈틀거렸다. 떨어져 나간 가지 위에 앉아 있던 뱁새 한 마리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낯선 이방인 간에 흐르는 적막감이 웃돌았다. 뱁새는 내가 인사하려고 손을 들자마자 날아가 버렸다. 나는 손으로 차양을 만들고 뱁새가 나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구름이 서서히 걷히면서 하늘 높이 뜬 태양이 드러났다. 그러나 날씨는 더 쌀쌀해져 갔다. 휠체어의 기침 소리가 아까보다 더 커졌다.













"카렌, 그만 돌아가자."


그가 말했다. 나는 휠체어를 힘껏 밀었다.


 나는 그를 흔들의자에 앉혀 놓고 난방기를 틀었다. 그는 주름이 생긴 손으로 책상 위를 더듬거렸다. 책상 한쪽에는 어제 도착한 몇 안 되는 편지와 엽서가 올려져 있었다.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맘때가 되면 그것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는 내가 건네주는 담뱃대를 받아 들고 조용히 숨을 골랐다. 담뱃잎을 꾹꾹 눌러 담는 그의 손이 평소와 달리 떨리지 않았다. 그는 서리가 잔뜩 낀 창문 밖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연기를 뿜어냈다. 연기가 올라가는 곳에는 우리의 빛나는 공적이 담긴 트로피들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가장자리의 큰 못에는 이젠 쓰지 않는 내 의상들이 걸려 있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내가 물었다.


"괜찮아, 어제보다 가뿐해."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혼자 산책도 할 수 있겠어."


"이미 다녀오셨잖아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그는 대답 대신에 담뱃대를 가볍게 흔들었다. 적당히 차려달라는 의미였다. 내가 식사와 진한 커피를 들고 나왔을 때 그는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코를 골고 있었다. 불씨가 남아 있는 담뱃대에서 여전히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못된 버릇만은 몇 번을 지적해줘도 고칠 수가 없었다. 나는 일부러 소리 내서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눈을 번쩍 뜨고 뒤늦게 담뱃대를 털었다.


 나는 저녁이라고 부르고 그는 만찬이라고 부르는 식사가 끝났을 때 그가 끙끙거리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일주일 전부터 저리기 시작한 그의 왼쪽 볼이 움찔거렸다. 그는 덩달아 일어서려던 내게 한 손을 뻗었다.


"컨디션 좋다니까. 잠깐만 지켜보고 있어."


 그는 의자의 팔걸이에 양손을 짚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섰다. 그러곤 걸음마를 이제 막 깨우친 아이처럼 아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가 내게 건강한 몸을 주었을 때 나도 그런 식으로 첫걸음을 내디뎠었다. 바짓단이 나풀거릴 만큼 앙상한 두 다리가 주인의 몸뚱이를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한참을 꺽꺽거렸다. 나는 싱크대에 접시들을 가져다 두고 나서 그를 지켜보았다. 바로 건너편에 있는 침실까지 가는데 이십 분은 넘게 걸렸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땀으로 범벅이 된 이마를 쓸어내렸다. 나는 물에 적신 행주를 들고 왔다. 그의 이마와 팔을 닦아주는 동안 그가 뿌듯하게 웃었다. 꽃병의 수선화는 그의 몸 상태를 대변해주듯 축 처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여섯 시였다.


"이것 봐, 할 수 있잖아."


"네, 정말 잘하셨어요. 지금 주무실 거에요?"


"조금만 있다가. 이 기쁨을 오래 누리고 싶거든."


"그럼 전 화단에 물 좀 주고 올게요. 제가 없을 때 혼자 움직이시면 안 돼요. 절대로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화분마다 소복이 쌓인 눈 덕분에 굳이 물을 줄 필요는 없었다. 산에서 피는 것과는 다르게 여기에 심는 것들은 다음 계절에 다시 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걱정이 드는 건 혼자서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진단을 받기 전부터 각오는 해뒀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언제라도 내 곁을 떠나갈 수 있었다. 그가 오래전에 내게 고백했던 것만큼이나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생각만 해도 목구멍 밑이 폭삭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가 내게 베푼 은혜와 사랑을 갚기에 지난 세월은 너무나 짧은 나날이었다.


 침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잠들어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그의 잠자리를 지켜주었다. 우리가 지난 십 년간 서로에게 해준 일이었다. 나는 그의 입에 귀를 가까이 대보고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카락들을 조심스럽게 쓸어넘겼다. 내 머리카락보다 훨씬 더 가늘고 희끗했다.


 나는 수납장과 연결된 책꽂이에서 앨범을 꺼냈다. 검은 가죽으로 양장 된 것이었다. 사진은 찍을 때의 빛깔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첫 페이지의 나는 반지를 끼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지금 거울을 보면 사진과 다르지 않은 나를 찾아볼 수 있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더 많은 빛과 사람, 아이돌들이 내 주위에 들어찼다.
앉아 있기만 하던 나는 조심스레 걷고 달리면서 환호했다. 계절별로 모양이 바뀌는 산과 들의 풍경들이 나를 장식해 주었다. 내 팔에 꽂혀 있던 수혈 팩이 없어진 뒤부터 그의 이마에는 주름살이 생겼다. 주름살이 깊어지면서 그가 앉아 있는 사진들이 늘어갔다. 마지막 장의 그는 지금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때도 나를 향해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세월은 저녁노을처럼 멋들어지게 물들었고 이제 저무는 일만 남았다.


 나는 앨범을 덮고 그의 오른손을 잡았다. 얼마 남지 않은 온기만이 내게 전해졌다. 나는 그가 바라던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다시 마음을 바로잡았다. 창밖에서 밤이 찾아왔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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