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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타루라는 이름의 그릇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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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17, 2019 18:59에 작성됨.


"그래서 그렇게 된 거에요. 전 속죄해야할지, 복수해야할지 잘 모르겠어요. 의식은 예정대로 진행하겠지만 제가 속죄를 택하면 이 세상의 모든 불행과 악한 기운을 안고 봉인되겠죠. 반대로 복수를 택한다면 저는 이 세상을 파괴하고 공포로 물들이겠죠."

호타루는 모든 걸 내려놓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가 자살했을 때 지은 그 표정과 같았다. 나는 호타루를 이대로 떠나보낼 수 없었다. 나는 호타루에게 말했다.

"혹시 의식을 진행하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요?"
"이젠 가만히 내비두어도 악기를 끌어모은다고 해요. 어차피 프로듀서도 없는 마당에 이대로 죽는다고 뭐 달라지겠어요?"

나는 정말 난감했다. 호타루는 이미 내가 죽은 줄 안다. 이 모든 게 몰래카메라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의식이란 게 정확히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진행 중이었다. 카린은 전부 다 안다면서 어째서 호타루에게 내가 죽었다고 말했는지 의아했다. 내가 아직 살아있고 눈 앞에 그토록 그리던 프로듀서가 있다는 진실을 안 호타루가 어떻게 될지 나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내가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요시노가 다가왔다.

"그대~. 드디어 만났구만. 제법 어울리는 한 쌍이 다시 만났으니 결혼식을 해야겠네. 주례는 내가 서고. 내 사령술로 그 아이를 부르노니 그 아이가 축가를 부르는 건 어떻게는가?"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미 죽어서 편히 쉬는 사람을 굳이 다시 끄집어내겠다니, 요시노는 고약한 장난의 신이 틀림없다. 호타루만 없었다면 나는 요시노에게 화를 냈을 것이다. 

호타루는 요시노의 말을 듣더니 얼굴을 잠깐 갸우뚱했다. 위험하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호타루는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호타루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

"프로듀서? 프로듀서 맞죠?"
"응? 으으응? 으응."
"대체 어떻게... 분명 죽었을텐데 왜..."

혼란스러운 호타루를 본 나도 덩달아 혼란스러웠다. 호타루를 찾기 위해 이런 거창한 사기를 친 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요시노는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다.

"프로듀서는 오직 그대를 위해 장례식을 한 걸세. 그대가 말도 없이 어딜 갔든 부고를 들었다면 어떻게든 오지 않았겠는가."

호타루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 안겼다. 호타루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히끅, 프로듀서, 너무 힘들었어요. 이제 과거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요."

그 말을 끝으로 호타루는 쓰러졌다. 호타루를 붙잡으니 호타루가 이상하게 변이하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 같은 게 호타루를 감싸더니 거대한 고치가 되었다.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호타루는 고치로 수육되고 있었다. 요시노가 말했다.

"그대는 악한 기운이 어떻게 생기는지 아는가?

나는 얼 빠져서 요시노를 그저 바라봤다. 요시노는 계속 말했다.

"악한 기운은 감정의 부산물일세.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움, 욕망. 그 외 수많은 감정들. 이런 감정들이 적당하면 유익하지만 지나치게 과도하면 악한 기운을 낳게 하고 자라게 하지."
"그게 뭔 상관인데?"
"악한 기운은 인구수에 비례해 생성되고 소멸돼. 호타루는 악한 기운을 담는 타고난 그릇이고 악기에 의해 호타루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된 거야. 극단적인 감정을 느낄 때마다 악기가 모여든다니, 쯧. 불쌍한 것."
"그래서 호타루가 이렇게 된 게 그것과 무슨 상관인데."
"모르겠나? 짧은 시간 사이에 호타루는 극단적인 감정을 수도 없이 느꼈어. 공연을 기다리는 긴장감,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대의 감전을 보았을 때의 놀라움, 자책감, 그대를 지키고자 모든 걸 포기한 아쉬움, 그대의 부고를 들었을 때의 부정, 분노, 자학, 그리고 그대가 알고보니 살아있다는 것에서 느낀 안도와 기쁨, 이 극단적인 감정들이 호타루를 감싸안았고 거기다 악한 기운을 더욱 잘 빨아들이게 의식을 받았지."

요시노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호타루는 이미 한계까지 악한 기운을 빨아들였네. 괴물이 되어 세상을 파괴할지, 이대로 봉인할지는 모르겠구먼. 호타루를 처단한다면 악한 기운이 소멸되어 세상은 당분간 행복하겠지. 이제 대단원일세."

나는 멍하니 호타루였던 고치를 보았다. 나는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해피엔딩을 꿈꿨기 때문에 호타루를 영입했다. 이런 건 너무나도 부조리했다. 

"그대, 이 검과 방울을 받으시게. 나의 영력이 담긴 거라 조심히 다루게. 호타루는 네가 알던 아이돌이 아니라 이제 세상을 불태우는 재앙이니 마음가짐 단단히 하시게."

요시노는 나에게 검과 방울을 건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받아냈다. 아직 욱신거리는 왼손으로 제법 묵직한 방울을 받으니 살짝 알이 배겨왔다. 나는 요시노에게 호타루를 구할 방법을 물어봤다.

"호타루를 구할 방법이 있어?"

"호타루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다면 봉인을 할 수 있겠지. 할 수만 있다면 말이야."

요시노는 까르르 웃었다. 비웃음이 내 심장에 요도처럼 박혔다. 요시노는 이런 결말을 원했던 걸까. 이게 요시노가 바랬던 해피엔딩이었던 걸까.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희생해야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 지켜지는 건 옳지 못했다. 

호타루였던 고치는 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칼과 방울을 굳게 쥐고 고치를 바라봤다. 나는 마음 속으로 기도를 했다. 호타루를 다시 되돌려 달라고. 호타루가 다시 행복한 삶을 살 게 해달라고. 

고치가 거의 깨지고 호타루가 보이기 시작했다. 호타루는 검은 안개에 휩싸여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시꺼먼 여러 개의 촉수가 등에 달려 있으며 눈빛은 섬뜻한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촉수 두 개가 고치를 찢고 고치 밖으로 삐져나왔다. 호타루였던 괴물은 비명을 질렀고 나는 싸울 준비를 했다. 

옆을 보니 요시노도 전투 준비 태세를 취했다. 나는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어 요시노에게 한가지를 물어봤다. 

"요시노, 사람의 감정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게 뭐야?"
"정말 뜬금없나니, 그런 질문은 의식이 끝나면 답하겠노라."

나는 요시노의 귀찮음을 무시하고 말했다.

"호타루를 구할 열쇠는 감정이야? 악한 기운은 감정에서 비롯되고 자라나니까."
"흐음, 흥미롭나니. 그대는 끝까지 운명에 저항하는 길을 모색하는구려. 

요시노는 정말로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절박했는데 속이 끓어올랐다. 요시노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사랑이오니, 그대가 호타루를 구원할 방법은 진심 뿐인지라."

그와중에 괴물은 고치를 완전히 찢고 빠져나왔다. 괴물은 식탁과 의자를 집어던졌다. 나는 고개를 숙여 숙이기 바빴다. 괴물은 난장판 속에서 장례식장 건물 벽을 부수고 그 사이로 빠져나갔다. 충격을 받은 건물이 무너지려고 하자 나와 요시노는 황급히 빠져나왔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이제 전투가 코 앞인데 나는 요시노의 말이 이해가지 않았다. 사랑이 호타루를 구원한다는 얘기는 싸구려 불쏘시개에서나 나올법한 말이었다. 내가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악당들을 단죄하는 세일러X이라도 된단 말인가? 나는 다만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나는 방울을 들고 흔들었다. '링곤링곤' 소리가 영롱하게 울러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괴물은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괴물의 모습은 악한 기운에 물들인 호타루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나는 큰 목소리로 호타루를 불렀다. 호타루였던 괴물은 그저 끔찍한 소리를 내는데 그쳤다. 내가 다시 호타루를 부르자 희미한 호타루의 목소리가 들렸다. 

"프...로듀...서?"

나는 다시 호타루를 부르려던 찰나에 요시노가 다시 방울소리를 냈다. 괴물은 요시노를 바라봤고 요시노에게 달려들었다. 요시노는 나를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그대! 괴물의 다리를 자르게! 이 괴물은 호타루가 아니니 망설이면 안되네!"

나는 칼을 들고 괴물의 다리를 자르려고 했다. 괴물 오른쪽 옆구리로 파고들어 오른쪽 다리를 노려 칼을 들었다. 내 손은 바들바들 떨렸다. 눈을 꼭 감고 칼을 내리쳤다. 다리가 절반 정도만 잘려졌다. 괴물은 비명을 질렀다.

"끄어어어억!"

하지만 괴물은 개이치 않고 요시노에게 달라붙었다. 요시노는 소매에서 단도를 꺼내 저항했다. 나는 칼을 들고 마저 벨려고 했지만 호타루의 여린 등을 차마 벨 수 없었다. 호타루를 다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망설였다. 

"꺄아악!"

요시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요시노를 덮친 괴물이 요시노의 머리를 촉수로 감싸안아 통채로 뽑은 것이다. 요시노의 머리였던 자리에서는 피가 심장박동 리듬을 타고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광경을 본 나는 머리가 어지럽고 눈 앞이 캄캄했다.

나는 모든 걸 체념하고 무릎을 꿇었다. 요시노가 죽은 이상 호타루는 막을 수 없었다. 신인 요시노조차도 무력하게 죽었고 나는 거대한 조류 앞에 미력한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거기에 나는 타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 거침없는 기세로 적들을 무찌르는 영웅도 아니었다. 나는 나만 아는 이기적인 소시민이었고 칼 한 번 제대로 휘두를 용기도 없는 비겁자였다. 기왕 죽을 거라면 사랑하는 사람 손에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모든 걸 체념하고 무릎을 꿇었다. 요시노가 죽은 이상 호타루는 막을 수 없었다. 신인 요시노조차도 무력하게 죽었고 나는 거대한 조류 앞에 미력한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거기에 나는 타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 거침없는 기세로 적들을 무찌르는 영웅도 아니었다. 나는 나만 아는 이기적인 소시민이었고 칼 한 번 제대로 휘두를 용기도 없는 비겁자였다. 기왕 죽을 거라면 사랑하는 사람 손에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릎 꿇은 채로 호타루를 가만히 쳐다봤다. 괴물도 나를 바라보고 촉수를 꾸물거리며 천천히 걸어왔다. 내가 다리를 노린 탓에 절뚝거렸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나는 죽음이 가까워 오는 걸 느꼈다. 나도 역시 해피엔딩을 이루지 못하는구나. 그렇게 절망한 그때였다. 

= 호타루라는 이름의 그릇 - 5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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