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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레마스 X 엔드게임] 편익의 이중창 :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 #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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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16, 2019 19:49에 작성됨.

Prologue. 꿈



길었던 시간이 끝을 맺었다.


니노미야 아스카는 어둠이 내린 스테이지에 걸터앉아 그런 생각을 하며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불과 몇십 분 전, 346 프로덕션의 아이돌들이 펼친 대제전이 막을 내린 참이었다.


사무소에 들어온 뒤 맞는 두 번째 여름 제전이었으니 이런 감정에도 슬슬 익숙해질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했지만, 여전히 공연 뒤의 성취감이 니노미야 아스카의 가슴 한구석에 차올라있었다. 오히려 얼떨떨한 기분에 다른 감정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던 작년을 생각하면, 지금 차오른 감정은 작년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복잡하다고 할 수 있었다.


처음 데뷔했던 그날 얼마나 많은 걱정, 동시에 조롱을 받았던가. 한 번 미디어에 노출되면 이런저런 말을 듣게 되는 것이 아이돌의 숙명이라고는 하지만, 소위 ‘중2병’이라 불리는 성격을 가졌고 또 그걸 개성으로 해서 데뷔한 아스카의 경우 그 정도가 심했다. 아스카가 강한 자의식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채 한 달도 가지 못해 이 일을 그만뒀으리라.


그리고 고통을 딛고 일어나 거둔 열매는 달콤했다. 1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팬들도 아스카의 모습을 받아들였고, 그 과정에서 쌓아온 모든 것을 오늘의 무대에서 쏟아낼 수 있었다. 솔로곡 하나를 간신히 부를 수 있었던 첫 제전 때의 모습과, 여러 무대에서 당당히 유닛의 일원으로 설 수 있었던 오늘의 모습을 비교하노라면 스스로가 대견하기까지 했다.


“…카!”


무엇보다 아스카를 기쁘게 하는 사실은, 계속 꿈꿔왔던 파트너와의 듀엣곡을 마침내 오늘 팬들 앞에 선보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아스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스카는 상념에서 벗어나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내려다보았다. 회색조의 트윈드릴 머리를 한 소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스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란코.”


“괜찮아? 계속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해서…”


칸자키 란코. 아스카와 같은 중학교 3학년. 동시에 아스카와 같은 중2병 개성을 가진 아이돌이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노선에 조금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지기에는 충분했고, 어느새 둘은 서로를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로 여기고 있었다.


둘이 함께 무대에 서면 좋겠다는 것이 비단 둘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팬들 사이에서 ‘아스란코’라는 가칭으로 불리던 두 사람의 유닛은 이번 제전을 앞두고 ‘다크 일루미네이트’라는 이름으로 현실화되어 무대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노래 제목도 ‘쌍익의 아리아双翼の独奏歌’. 둘이면서 하나라는 형용모순을 멋들어지게 녹여낸 이름이었다.


그 소중한 파트너가, 눈앞에서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아. 잠깐 생각에 잠겨있었을 뿐이야.”


“다행이다… 너무 지쳐서 눈 뜬 채로 기절한 건 아닌가 걱정했어.”


“그런 거 같네. 말투가 평소 같지 않은 걸 보니.”


“앗! 아, 그, 나의 편익片翼이, 심연에 그 의식을… 어어……”


란코가 허둥대며 말을 지어내려 하는 모습을 보며, 아스카는 피식 웃었다. ‘평소 같지 않다’라고 말은 했지만, 오히려 이런 모습이 란코의 본질이고 매력이었다.


“괜찮으니까 란코야말로 괜히 무리하지 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아니까. 한쪽 날개잖아?”


그 말에 란코가 말을 멈추고 헤헤 웃었다. 이보다 더 사랑스러운 파트너가 있을까, 하고 아스카는 생각했다.


“그래서, 어쩐 일로 온 거야?”


“아! 나의 벗이 이르길, 마법의 시간이 가까웠으니 마차를 놓치지 않도록 하라고…”


프로듀서가 말하길, 시간이 늦었으니까 데려다줄 테니 준비하라고 했다. 그런 뜻이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밤 11시 30분이 가까워져 있었다. 스스로 착한 아이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아스카였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침대에 들 시간이 한참 지나있었다. 이 시간이면 노동기준법이 문제가 아니라, 혼자 거리를 돌아다닐 수도 없다.


“이거 참, 시간은 날 기다려주지 않는군.”


아스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테이지 앞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1미터 조금 안 되는 높이였지만 다리에 적잖은 충격이 느껴지며 몸이 휘청였다. 그냥 얌전히 스테이지 옆 계단으로 내려올 걸 그랬나 싶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러게… 즐거운 시간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네.”


다행히 란코는 그 순간 고개를 들어 스테이지 위편을 바라보느라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란코도 여전히 제전의 여운에 젖어있기는 마찬가지로 보였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지?”


자세를 바로잡은 아스카가 물었다. 란코는 말없이 아스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표시였다.


“하지만 시간은 끝없이 흐르지. 그 누구도 기다리지 않고 말이야. 지금 이 순간을 흘려보낼 수밖에 없다면, 다가올 순간을 맞을 준비를 하는 편이 스스로를 위한 선택일 거야.”


아아, 스스로 한 말이지만 참으로 멋졌노라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니 란코, 함께 나아가자. 우리 다크 일루미네이트의, 새로운 미래를 향해.”


그리고 오른손을 내밀며 마무리. 아스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완벽한 한 장면이었다. 필시 란코의 마음도 울렸겠지.


“음! 실로 그 말이 옳도다. 새는 양 날개로 나는 법. 나의 편익이 날아오르겠다면, 나 또한 함께하겠노라!”


정답이었다. 어느새 중2병 말투로 돌아온 란코가 그 손을 잡으며 웃었다. 파트너가 이렇게 합을 맞춰주면, 이 토막극을 이끄는 입장에서도 흥이 오른다. 그러면 이제 이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한 번 마주 웃어보이고서는 손을 잡은 채 출구 쪽으로 몸을 돌리고, 아스카는 자신의 캐치프레이즈를 입에 올렸다.


“자, 갈까.”


그리고, 발을 내딛으며 가볍게 란코의 손을 당긴다. 그러면 란코도 그에 맞추어 발을 내딛―



“어…?”



―었어야할 터였다.


하지만 오른손에 닿았던 온기는 마치 미끄러지듯이, 손에서 사라져갔다.


“란코…?”


생각지 못한 반응에 고개를 돌린 아스카의 눈앞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란코가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가루가 되어서. 스스로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듯, 란코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아스카…?”


“란코…? 란코…!!”


황급히 소리 지르며 조금 전까지 란코가 있던 자리로 손을 뻗었지만, 아스카의 손을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치 방금까지 본 모든 것이 환영이고 들은 모든 것이 환청이었던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았다.


‘이, 이게 대체… 무슨……’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꿈을 꾸고 있나 하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여운에 너무 빠진 나머지 상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게 된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눈앞에서 사람이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지난 몇 년 사이 외계인이 도시를 침공하고 도시가 공중으로 부양하는 사태가 실제로 벌어지고는 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태평양 건너, 혹은 대륙 반대편에서 벌어진 일일 뿐이었다. 적어도 아스카가 아는 한 일본, 아니 동아시아 일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


멍하니 란코가 사라진 자리를 손으로 휘적이던 아스카의 정신을 깨운 것은 휴대폰 벨소리였다. 휴대폰 화면에는 ‘프로듀서’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전화를 받음과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아스카에 귓전에 울렸다.


“여보세요? 아스카? 너 무사해? 란코는? 만났어?”


“프, 프로듀서…”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자신이 겪은 상황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혹시나 정말로 미쳐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생각보다 앞서 말이 먼저 입 밖으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란코가… 란코가… 눈앞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 아직 공연장에 있으면 거기서 움직이지 마. 이게 만약 밖에서도 일어난 일이면 분명 교통사고가 엄청나게 날 거야. 금방 데리러 갈 테니ㄲ…”


마치 전파가 끊기기라도 한 듯이, 프로듀서의 말은 거기서 멈췄다. 아니, 차라리 전파가 끊어진 것이기를 아스카는 진심으로 바랐다. 그렇지만 그런 바람도 헛되이, 전화 너머에서 여러 동료 아이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에 대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포에 찬 비명소리, 혹은 울음소리, 혹은 프로듀서를 부르는 소리. 그 어느 하나 지금 이 상황이 정상적이라고 말해주는 것은 없었다.


“프…로듀서…?”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아스카는 전화 너머에 있어야 할 사람을 불러보았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이제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프로듀서…? 자, 장난치는 거지? 그렇지? 그래, 그렇겠지. 허영에 찬 중2병 아이돌이 공포에 차서 떠는 장면은 좋은 아이템일 테니까. 그래. 나도 동의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아스카 언니?”


마침내 전화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듣고, 아스카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니노미야 아스카가 알고 있는 한, 절대로 이런 장난에 어울리지 않을 사람. 함께 노래했던 아이돌 중 제일 어리지만, 누구보다 어른스러워지려 하는 사람. 누구보다 이런 장난을 싫어하고, 가장 앞장서서 말릴 사람.


“아스카 언니? 들리세요? 아스카 언니…!”


타치바나 아리스의 목소리가, 주저앉은 아스카의 귓가를 맴돌았다.




“…니! 언니! 아스카 언니!!”


“허억!!!”


니노미야 아스카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익숙한 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으세요? 세상에, 식은땀 난 거 봐…”


뒤이어 교복을 입고 푸른 리본을 머리에 맨 동생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졌다. 꿈을 꾼 모양이었다.


“아리스…? 내가 대체 얼마나…”


“한 시간이요. 제가 돌아오면 깨워달라고 하셨다면서요. 어머님께서 그러시던데…”


“그, 그래… 그랬구나……”


아스카는 숨을 고르며 간신히 말을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들기 전과 다름없는 방의 모습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하아… 정말……”


아리스가 한숨을 푹 쉬고서 방문을 나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얼음물이 담긴 유리잔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자요. 쭉 들이키세요.”


벌벌 떨리는 두 손으로 간신히 잔을 잡고서, 아스카는 얼음물을 들이켰다. 이내 송곳으로 머리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지만, 반대로 심장은 점차 제 페이스를 찾아갔다. 통증이 가시자 비로소 사고회로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꿈과 현실이 바로 구분되는 듯했다.


“고마워, 아리스.”


“별말씀을요.”


유리잔을 받아 근처 탁자에 내려놓고서, 아리스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또 그 꿈 꾸신 거예요?”


아스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무리하시지 말라니까… 일부러 들춰낼 필요 없는 일이잖아요.”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났잖아.”


“저는 안 끝났어요. 지금이라도 그만두시는 게…”


“아니, 할 거야. 해야만 해.”


순간, 아리스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해야만 해, 좋아하시네! 계속 말하잖아요! 세상에 그 기억을 들춰서 좋아할 사람이 어딨어요! 온 가족 무사한 언니도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냐고요! 저는 어떻고요! 그런데 그걸 인터뷰를 하겠다고요? 제정신이세요? 혹시 제정신 반쪽도 란코 언니랑 같이…”


“아리스.”


그 이름이 아리스의 입에 담기는 순간, 아스카가 낮은 소리로 아리스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이상 말할 필요는 없었다. 아리스도 말을 멈췄고,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죄송해요. 또 흥분했네요.”


“……괜찮아.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던 중, 아스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학교에서는 별일 없었어?”


“고3이 늘 똑같죠, 뭐. 웃기지 않아요? 세상이 이 지경이 되어도 대학교 가려고 공부한다는 게?”


“나도 2년 전에 같은 생각을 했었지. 그래도 시간은 계속 흐르더라.”


“그러게요…… 이런 생각하는 제가 이상한 건지, 이 세상이 이상한 건지.”


“이 세상이 이상하다는 데 500엔 걸겠어.”


“둘 다 그쪽에 걸어버리면 내기가 안 되잖아요.”


아리스가 멋쩍게 웃었고, 아스카도 그 웃음을 받아 웃어보였다. 이제야 두 사람 모두 평정심을 찾은 듯했다.


이내 아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내려오세요. 어머님께서 뭐라도 먹고 나가라시더라고요.”


“그래, 금방 갈게.”


아리스가 방을 나서고, 아스카도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다 책상 너머로 보이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해가 서편으로 기울어 노랗게 물들어있었다.


“정말로, 시간은 날 기다려주지 않는군.”


햇살을 따라 시선을 옮긴 자리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액자가 있었다. 사진 속 아스카와 란코는 두 번째 제전의 무대의상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날에 머물러있는데.”


한숨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 그 말대로, 시간은 아스카는 물론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은 채 흘러가고 있었다.



생명체의 절반이 사라진 지 5년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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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 없는 크로스오버 전문 하늘나래입니다. 크로스오버라고는 해도, 이번 글의 경우 세계관만 따왔습니다만.


원래는 8월 코믹월드 회지로 내려던 겁니다만, 개인 사정으로 도저히 그때까지 원고를 완성할 수 없게 되어 무기한 연기한 팬픽션의 프롤로그격인 글입니다. 그래서 제목도 #00으로 붙였습니다. 언젠가는 완성을 하고 싶습니다만,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네요… 글 전체의 중심인물 격이 될 아스카의 입장에서 갑작스레 닥친 '그날'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춰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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