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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타루라는 이름의 그릇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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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14, 2019 19:52에 작성됨.

나는 칠흑 속에서 홀로그램을 보았다. 아이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돔구장, 수 만 명의 관객이 숨죽이며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거대한 무대 한가운데에 조명이 비추고, 가냘프고 여린 소녀가 등장했다. 그녀는 음침하고 우울한 반주에 맞춰 담담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노래가 이어짐에 따라 그 아이돌은 환희와 희망을 노래했고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어느새 수 만 명의 관객은 보라색 형광봉을 꺼내 리듬에 맞춰 흔들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이어지는 환호와 박수갈채. 나는 그걸 보면서 전율을 느꼈다. 그 아이돌은 시라기쿠 호타루였다. 나는 호타루의 프로듀서다. 

호타루는 보라색이 잘 어울리는 아이돌로 다년간 노력으로 가꿔진 맑은 피부와 탄탄한 몸매, 가여움을 유발하는 불쌍한 외모, 그리고 강인하고 꿋꿋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특징인 아이돌이다. 환영 속 무대가 끝나고 땀방울을 흘리면서 팬들을 보며 밝게 웃는 모습을 보니 멀리서 지켜보는 나도 행복했다. 비록 이뤄지지 않은 일이고, 앞으로도 없을 일이라고 해도 언젠가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이었다. 그것이 나의 의무였다. 

그런데 나는 왜 어둠 속에서 이 환영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환영 속 아이돌의 정체와 나 자신의 정체도 방금 전에 깨달았다. 그러니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이미 내가 죽은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곳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곰곰히 다른 것을 떠올리려고 하려는 그때, 또다른 환영이 나타났다. 나는 그 환영을 들여다보았다. 

그 날은 호타루에게 있어 평범한 나날이었다. 출근하다가 블록 하나 잘못 밟아서 넘어져 생채기 나고, 아픈 발을 부여잡고 가다가 하늘에서 새똥이 떨어져 맞고, 겨우겨우 사무소로 왔는데 하필이면 단수되어서 씻지도 못했다. 호타루는 개의치 않고 물티슈를 꺼냈다. 물티슈는 하필 뚜껑이 열려있어서 거의 말랐다. 대충 닦다보니 오후 세 시였다. 모바일게임 가챠가 갱신되어 확인했더니 호타루 최애캐가 나오는 바람에 천장까지 가챠를 돌렸다. 최고등급 카드가 단 한 장도 나오지 않는 정도로 소소하게 평범한 날이었다. 그래도 호타루는 꺾이지 않고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레슨에 매진했다. 나는 그 화상을 보면서 기억이 되살아났다. 

호타루는 유달리 운이 나빴다. 방금 전 내가 본 화상에서 알 수 있듯이 호타루는 불운하고 불행했다. 이 세상의 온갖 악운들이 호타루에게 집대성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불쌍했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악한 것이고 만약 선하다면 무능하다고 누가 그랬는데 호타루를 보면 딱 그 말이 옳아보였다. 나한테 오기 전에도 여러 연예기획사에서 아이돌 지망생으로 배우다가 실패하고 이적하기를 반복했고 결국 우리 프로덕션으로 오게 되었다. 칠전팔기라지만 8번째에 쓰러져서 결국 못 일어나는 사람도 많은데, 여러 번의 실패를 겪은 사람은 의기소침하고 마음이 꺾이기 마련이지만 호타루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점이 세일즈 포인트가 되어 팬들에게 인기가 많은 건 아이러니였다. 호타루를 촬영한 비디오 파일은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오류로 망가진다거나, 호타루를 X튜브로 보고 있을라치면 유독 블루스크린이 뜬다거나, 호타루 팬사인회나 공연을 보러가다가 사고 당하는 팬들이 유독 많다거나 이런 저런 악운들이 많아도 팬들은 그걸 기적이라고 여긴다. 담당 프로듀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이돌 호타루를 사랑하는 팬들은 이상한 신앙으로 똘똘 뭉쳐, 호타루에게 믿음의 도약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왜 이런 주저리주저리를 늘어놓을까? 여기가 사후세계 비슷한 저승에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니까 온갖 생각이 많아지는 법이었다. 하아, 드디어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된 건 기억 상으로 얼마 전에 있었던 어느 공연 때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으리라. 

그 날은 유독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이었다. 프로덕션에서 공연장까지 제법 멀기도 했고 짙은 안개 때문에 사고 날까 서행해서 방어운전해도 까딱 잘못하면 사고가 나기 딱 좋은 날씨였다. 나는 호타루를 태우기 위해 기숙사 앞까지 차를 몰고 데려다주었다. 호타루는 갈 길이 먼데도 곧 있으면 화보 찍는 것처럼 단아하게 차려입고 화장을 했다. 호타루는 나를 보더니 미안해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오면서 딱히 무슨 일이 있지는 않았다. 나는 운전하면서 노래 듣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호타루가 타자 노래 메들리를 틀었다. 호타루는 피곤했는지 자고 있었고 나는 신나게 노래를 들으면서 정체된 고속도로를 기어서 갔다.

공연장까지 40km 남았는데 지각하게 생기자 어김없이 휴대폰 벨소리가 차 안을 울려퍼져나갔다.

"이마 콘치키칭~♩ 콘치키칭~♬ 마츠리바야시가 오코시야스~♪"

나는 전화를 받았다. PD는 내가 늦자 잔뜩 화나 있었다. 나는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호타루는 어느새 일어나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통화가 끝나자 호타루는 나에게 말했다.

"그 벨소리, 왠지 듣기 거북하네요."
"내 자랑스러운 과거 담당 아이돌의 노래인데 뭐."
"돌아가셨잖아요. 들으면 왠지 울적해진단 말이에요."
"낸들 안 그러겠냐. 하지만 나는 이런 방식으로 그 아이를 기억한단다. 영업할 때 이 벨소리를 들으면 그 아이가 여전히 나를 응원하는듯 해."
"그렇군요..."

그리고 호타루는 다시 잤다. 이런 날 공연장까지 어찌저찌 갔고 도착하니 공연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뒤늦게 온 나를 본 PD가 나를 나무랐다. 

"호타루와 담당 프로듀서네? 정말 빨리도 오는군. 난 둘이 사이좋게 사랑의 도피를 친 한 줄 알았다니까."
"죄송합니다. 다음엔 늦지 않겠습니다."
"호타루 공연은 다다음이고 환복과 화장, 머리치장에 꽤 많은 시간이 들텐데 리허설도 안하고, 이대로 무대 서면 관객들도 퍽이나 좋아하겠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프로듀서 생활 끝나나, 쯧. 아무튼 지금은 바쁘니까 사복이라도 입고 스탠바이해. 어, 음, 그냥 저대로 입고 들어가도 되겠는데."

그 때 호타루는 하늘색과 흰색이 제법 잘 어울리는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었었다. 허벅지까지 오는 하얀 스타킹에 삐까번쩍한 남색 에나멜 구두도 제법 잘 어우러졌다. 나는 출발 전 호타루에게 갈 길이 머니 편하게 입고 오라고 말했지만 호타루는 사복 입고 무대를 올라갈지도 모른다면서 이 의상을 고집했다. 거기에 정말 불편할텐데도 옷이 흐트러질까봐 잘 때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그 고집의 결과가 옳은 선택일지도 몰랐겠다. 

호타루는 무대 구석에서 목을 풀고, 나는 가방에서 노래 MR이 든 USB를 꺼내 음향감독에게 건냈다. 나는 혹여나 음악 파일이 깨져있을까봐 걱정했지만 음향감독의 OK싸인에 안도했다. 그런데 PD가 버럭 소리지르는 걸 들었다. 

"아니, 무선마이크에 발이 달렸나. 그 멀쩡한 게 어디로 간 거야? 조연출, 일처리 똑바로 안해? 이전 공연자들에게서도 찾아봤어?"
"죄, 죄송합니다! 대기실부터 소품실, 의상실까지 샅샅이 뒤져봤는데 못 찾겠습니다."
"하, 참. 여분 마이크도 없어? 돌아버리겠네. 지금 바로 들어가야 하는데 말이 되냐?"

그때 호타루가 무대 뒤쪽 구석에서 유선 마이크를 찾을 걸 보았다. 호타루는 그 마이크를 바로 앰프에 꽂으려고 하자 나는 바로 뛰쳐나가 호타루를 막았다. 

"호타루, 이건 내가 꽂을게."
"하지만 곧 있으면 공연이고 저 때문에 이렇게 됐어요."
"어허, 자질구레한 건 나에게 맞기고 넌 목하고 몸 좀 더 풀어. 오느라 몸 굳었을텐데."
"출발 전 요시노로부터 마이크를 조심하라고 들었어요. 이런 위험한 건 차라리 제가 부담하는 게 나아요."
"그거 다 미신이야. 직감이든 예언이든 미래는 모르는 거지."
"하지만 걔는 신이에요. 아이돌을 숭배받는 방법의 일종으로 여기는데. 걔가 한 예언들은 꽤 잘 맞는다는 것도 아시잖아요."

나는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그 동안 호타루를 프로듀싱하면서 생긴 악운들이 신에 대한 원망으로 번질려던 찰나에 호타루의 발언은 나를 화나게 했다. 

"그래, 예언. 운명. 다 지랄하지 말라고 해. 예언이란 건 두루뭉실하고 미래의 일은 알 수 없는 거야. 네가 언젠가 내 곁을 떠날 거라고 예언하면 사람은 언젠간 반드시 죽기 때문에 참인 명제야. 마이크를 조심하라니, 노래 부르다가 삑사리 날 수도 있고 무선 마이크 전지가 다 떨어질수도 있고 마이크라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걸 수도 있어. 그게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는데 그런 예언에 집착해?"

호타루는 시무룩해졌다. 나는 괜히 화를 낸 것 같아서 미안했다. 호타루는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건 가혹한 운명의 굴레를 덮어 씌운 신일텐데. 호타루가 말했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그 예언을 듣고 저를 지켜주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시려는 거잖아요."

나는 그 말을 듣고 흠칫했다. 요리타 요시노는 그 예언을 호타루보다 나에게 먼저 말했었기 때문이었다. 첫번째가 안개 때문에 공연 지각, 두번째가 마이크에 의한 감전, 세번째가 장례식이었던가? 나는 예언이나 운명을 불신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타루를 걱정해서 그랬던 것이다. 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당황하는 나를 보고 호타루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말했다. 

"프로듀서 말대로 제가 이걸 꽂으나 프로듀서가 이걸 꽂으나 별 상관 없는 거에요. 이게 뭐라고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그러던 사이에 PD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PD는 우리 손에 들려진 마이크를 보면서 말했다. 

"거 어쩔 수 없이 유선 마이크 써야 하니까 꽂고 마이크 테스트 겸해서 백스테이지에서 마지막 리허설 준비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그 말을 듣고 호타루가 마이크를 앰프에 다시 꽂으려고 했다. 나는 접지 확인을 안했다는 게 떠올랐고 호타루를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호타루는 앰프에 마이크를 꽂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호타루를 밀쳐내 마이크를 뺏었고, 감전되었다. 

불쾌하다 못해 고통스러운 고전압, 고전류 전기가 내 왼손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전기가 내 근육과 신경을 지지면서 온몸에 번졌고 동시다발적으로 온몸의 근육들은 저마다 한군데로 뭉쳐서 수축했고 쥐났을 때보다 더 아픈 고통이 온몸에서 일어났다. 왼손 살갖은 터져서 전기에 자글자글 익혀지고 있고 살 타는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심장은 미친듯이 뛰다가 일순간 멈춰버렸다. 아이처럼 그냥 오줌을 지려버렸다. 이 모든 게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그 뒤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이러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 속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후회와 회상 말고는 없었다. 그래도 호타루가 이런 꼴이 되었으면 난 분명 미쳤을텐데 이대로 삶을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기쁨도 슬픔도 없는 칠흑에서 나는 하릴없이 있었다. 

"프로듀서..."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프로듀서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나를 프로듀서라고 부르고 있었다. 

"프로듀서..."

주위를 둘러보니 볕이 들 리 없는 골짜기가 살짝 보였다. 희미하게 빛나길래 다가가서 보았더니 골짜기 밑에 은방울꽃이 피어있었다. 은방울꽃이 제몸을 흔들면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내려가 은방울꽃을 관찰했다.

"프로듀서... 일어나..."

나는 지쳐서 그 옆에 누웠다. 누워서 본 천정에는 별이 보일 리 없었지만 내 마음 속 별은 빛났다. 저 검은 도화지 위에 어떤 그림을 그릴까 고민하는데 내 귀가 간지러웠다. 

"그대여 일어나시게."

부오오오오~

그리고 군대 기상나팔만큼이나 불쾌한 커다란 호각소리가 들렸다. 어둠에 덮힌 천정은 깨졌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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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이번 건 가벼운 마음으로 썼는데 어느새 50kB 넘게 썼고 퇴고까지 다 해서 완성했습니다. 3분할해서 올리려고 했으나 아이커뮤 사이트에서 15kB 넘는 글은 업로드하다가 짤리는 모양인지라 부득이하게 5분할해서 올립니다. 하루에 한 편 씩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쓸데없이 오글거리는 삼류팬픽이지만 예쁘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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