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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 성-프로젝트 크로네 [Prologue:나오, 카렌- 재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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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12, 2019 03:38에 작성됨.

<2015년 7월 24일 오후 7시, 카렌과 나오의 오피스텔>


그것은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시작되었다.


"우메보시 브로드캐스팅 시스템, UBS에서 오후 7시를 알려드립니다. 삑, 삑, 삑, 뽀오옹!

청자 여러분의 하루를 기분좋게 마무리하는 <타카가키 카에데의 이브닝캡>!

비록 반년 전에 종영되었지만 특별히 이 소박하고도 편안한 자리에서 보내드립니다!

현재 시각은 오후 7시, 기온은 섭씨 31도입니다. 고된 일과 더위로 고생한 자신에게 시원한 음료와 휴식을 선물하는 것도 좋겠죠?

자, 그러면 첫 번째 사연입니다. 카타기리 사나에 씨가 보내주셨네요.

'카에데 씨, 치어스!'

네~! 치어스, 입니다!

'카에데 씨, 예전에 경찰로 복무했던 저는 최근에 옛 동료들로부터 특이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혹시 <시부야의 마술사>라고 들어보셨나요?

시부야의 경찰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소문인데, 시부야에서 마술사처럼 차려입은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이유도 없이 뚫어지라 쳐다본다는 모양이에요.

회색 꽃무늬가 수 놓여있는 검은색 정장, 이상하게 큰 검은색 챙모자 때문에 못 볼 수가 없다고 하는데, 2주 전부터 안 보이기 시작했다나? 그래서인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천생연분을 찾아다니는 신사>, <신종 마케팅>, <행위 예술> 같은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고 있습니다만, 카에데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과연, <시부야의 마술사> 말이죠? 글쎄요... 저도 여러 가지를 상상해보긴 했지만, 역시 이름 그대로 마술사라면 멋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자신의 마음에 든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주려고 하는 건 아닐까요?

만약에 제가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술이나 온천을 부탁하고 싶네요. 후훗."


어떤 음료를 홀짝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 하세요?"


하지만 그 말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어서 다음 사연입니다. 귀여운 라디오 네임, 복슬나오 씨가 보내주셨네요.

'카에데 언니, 치어스~!'

네~! 치어스, 입니다!

'카에데 언니, 저는 최근에 룸메이트 K 양 때문에 걱정이에요. K 양에게는 어떤 꿈이 있는데, 예전에 두 번 그 꿈을 위해 노력했지만 전부 실패해서, 지금은 꿈을 많이 회의적인 상태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연습을 계속하고 있으니까요.'"

"나오가 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거거든요."

"'제 무지막지한 귀여움으로도 역부족인데, 어떻게 격려해줄 방법이 없을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소파에 누워서 저는 신경 안 쓰고 소파 등받이만 쳐다보고 있어요!'"

"'복슬나오'부분부터 녹음해둘 걸 그랬네요. 나중에 나오한테 들려주게."

"흠, 이건 저도 같이 고민해봐야겠네요. 저도 예전에 똑같은 일을 겪었어요. 바로 작년에 있었던 일이었죠.

제가 아직 신인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의 집에서 살기 시작한 게 벌써 4년 전인데, 이웃사촌이 생긴 건 그때가 처음이었죠. 집 열쇠를 잃어버려서 복도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귀여운 여자아이 K 양이 저를 도와주었거든요."

"웅크리고 앉은 것도 아니고 아예 취한 채로 누워 계셨잖아요. 그리고 저는 지나가던 게 아니라, 집 안까지 뭐라고 소리치는 게 들리길래 나와서 확인한 거였어요."

"에헴, 그때부터 복도에서 만나면 인사를 하거나, 서로의 저녁 식사에 초대를 하거나 하면서 점점 더 가까워졌습니다. 서로에 대한 것도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죠. 그런데 알고 보니 세상에나! K 양은 톱 아이돌이라는 커다란 꿈을 가진 대단한 아이였지 뭐예요?"


...그랬었지.


"그래서 저는 K 양의 선배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그녀를 도와주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같이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몇 번은 카페에서 커피를 같이 마시면서 K양의 매력이 뭘까 고민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떨어지고 말았죠. 어느 날 점심 즈음에 K 양으로부터 '떨어졌어요'라는, 짧은 메시지를 받아서 알게 되었어요."


메시지를 보낸 건 2014년 9월 8일 월요일. 하지만 사실 961 프로덕션으로부터 불합격 통보가 온 것은 사흘 전 금요일이었다. 눈이 붓고 얼굴도 엉망이 될 정도로 펑펑 울면서 카에데 씨에게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고민했다. 처음에는 '제 길이 아니었던 거겠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의 진로라던가, 다른 쪽에 신경을 써도 좋지 않을까요?' 따위의 핑계가 떠올랐다. 하지만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고, 실행할 생각도 없었다. 내 길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곧 자신의 시간을 쪼개고 나를 도와준 카에데 씨의 상냥함을 헛된 것 취급하는 것과 다를 게 없으니까. 그녀에게는 어떠한 짐도 주고 싶지 않았다. 책임을 지는 것은 나 혼자로 충분했다.


"남은 스케줄이 레슨뿐이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결국 그날의 일과에 집중할 수 없었죠. 그래서 트레이너 자매분들께 부탁드려서 일찍 퇴근하고, 바로 K 양의 오피스텔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현관문을 열고 나타난 K 양은 웃으며 저를 맞이했어요. 저녁 식사까지 정성스레 준비해놓고,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결국엔 카에데 씨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하고, 고민한 시간이 한심하게 느껴질 만큼 짤막한 결론만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나마 마음을 추스르고 얼굴을 고칠 시간은 그 사흘로 충분했다. 카에데 씨로부터 격려나 질책, 그중에서도 '다음에는 잘 할 수 있을 거다'같은 말만큼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평상시대로 행동하고, 대화의 주제를 최대한 아이돌 오디션에서 멀어지도록 애썼다. 실수는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을 때 요령은 이미 충분히 터득했으니까. 다만 부디 카에데 씨가 내 마음속을 파고들지 않기를, 하지만 그러면서도 부디 그녀가 그런 내 마음에 발을 맞춰주기를 간절하게 빌 뿐이었다.


"그때 저녁 식사가 전골이었죠. 참 이상했어요. 친구하고 먹는 전골은 각자가 좋아하는 재료를  냄비에 섞어 넣어서, 같이 요리해서 먹고 즐겁게 이야기 하는 게 보통이죠? 그런데 그때 저는 그저 카렌 양의 말에 맞장구치면서, 그녀가 만들어주는 전골을 받아먹는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카렌 양은 이미 혼자서 전골 재료를 다 준비해놨고, 제가 무언가를 얘기할 틈도 없이 일상적인 이야기를 계속했으니까요. 전골의 맛은 좋았지만, 전골의 진정한 즐거움은 없었지요."

"……."


어설픈 라디오 놀음은 끝이 보일 기미도 없이 계속 이어지고,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찔러온다.


"카에데 씨, 대체 뭘 말하고 싶으신…. 햐악?!"


가는 비명을 지르며 소파에서 몸을 비틀었다. 참지 못하고 이야기를 끊으려고 했지만, 옷을 파고들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얼음같이 차가운 감촉에 놀라, 말이 끊겼다.


"야~호~!"

"카, 카에데 씨, 그만! 잠깐만요!"


설상가상으로 카에데 씨가 뒤에서부터 나를 껴안아 내 등과 그 차가운 무언가를 짓눌러온다.


"싫어요! 그마아아...아아악?!"


차가운 무언가와 간질거리면서도 답답한 카에데 씨의 팔을 뿌리치려고 발버둥 쳤다가, 결국 뒤로부터 끌어당기는 무게감, 그리고 순간적으로 어지러워지는 눈앞의 풍경과 함께 소파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등줄기를 그 차가운 것이 세게 짓눌렀지만 떨어진 곳이 부드러워 생각만큼은 아프지 않았다. 다만 등 뒤에서 살짝 '헉'하고 앓는 소리가 들려왔을 뿐.

카에데 씨는 요령 좋게도 차가운 그 물건과 함께 내 등 밑에서 빠져나가, 내 머리가 그녀의 무릎에 닿도록 천천히 눕혔다. 머리와 목 주위에는 카에데 씨의 온기가 느껴지고, 에어컨에 식혀진 나무 바닥이 등에 닿아 시원한 감촉이 퍼진다. 어지러웠던 시야가 서서히 돌아오고, 꺼져가는 노을빛에 물든 천장, 그리고 언젠가 셋이서 같이 천장에 붙였던 야광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제 답을 드리자면 말이죠,"


카에데 씨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한 손으로 조금 전에 나를 괴롭혔던, 물방울이 맺히고 얼음이 담긴 페트병을 흔들어 보인다.

보통 카에데 씨가 우리 집에 들어올 때면  일할 때 입었던 옷과 짐을 전부 자기 거실에 던져놓고, 실내에서 입기 좋은 편한 옷을 입곤 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보게 된 그녀의 옷차림은 스타일 좋은 탱크톱과 핫팬츠. 팔찌,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들과 옆으로 메는 스포츠 가방까지 더해져 당장에라도 현관문을 열고 어디론가 나가버릴 듯한 용모다.


"오늘 저녁엔 그 친구랑 같이 전골을 먹는 게 어떨까요? 같이 슈퍼에서 재료를 사는 것부터 시작해서, 같이 요리하고, 같이 먹고, 같이 정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급하게 답을 찾을 필요는 없어요. 그저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서로 솔직하게 얘기해주면 좋다고 생각해요. 답은 거기서부터 같이 조금씩 맞추어 나가면 돼요.”

“만약 제가 싫다고 하면요?”


약간 심술궂게 대꾸하며 나는 조금 부담스러운 카에데 씨의 무릎과 나무 바닥으로부터 상반신을 일으켰다. 카에데 씨에게서 조금 떨어져 소파에 등을 맡겼지만, 그녀는 굳이 내 옆에 다가와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기대어온다.


"카렌 양이 안 먹으면 저도 안 먹을 거예요. 안 그래도 요즘 세이 씨... 마스터 트레이너 씨한테 지도받고 있는데, 속이 빈 상태로 비실비실하면 분명 저는 꾸중을 듣겠죠."

"그건 어디까지나 그걸 선택한 카에데 씨 책임이에요."

"네. 분명히 제 책임이죠. 그런데 카렌 양이 그런 말을 하다니 이상하네요."

"뭐가요."

"작년 여름, 961 프로덕션. 그때는 제 책임을 묻기는커녕 혼자 다 끌어안았잖아요?"

"..."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꼬리를 잡았다는 듯, 카에데 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머리를 내 그것에 기대어왔다. 귓가에 속삭이듯 그녀가 말을 잇는다.


"카렌 양, 그날 이후로 저는 한 번도 제 책임을 저버린 적이 없어요. 애초부터 카렌 양은 멋진 아이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어떻게 무책임하게 카렌 양을 포기할 수 있겠어요?"


 또다시 현기증이 올라온다. 그때, 오디션 서류를 카에데 씨로부터 받았을 때와 똑같았다. 


"카렌 양에게 오디션 용지를 준 것도 그때 미처 다하지 못한 책임을 늦게나마 다하고 싶어서였어요. 카렌 양처럼 꿈이 한 번 무너졌을 때의 기분을 아니까. 저도 직접 겪어봤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후회하고 있다구요? 만약 그때 이후로 지금에 와서까지 기회가 없을 걸 미리 알았다면, 그때만큼은 카렌 양의 페이스에 이끌리지 않았을 텐데.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카렌 양과 이야기를 해서, 조금이라도 짐을 덜어주었어야 했는데.”


현기증과 함께 맨 처음 몰려오는 것은 두려움이다. 다시 한번 찾아올지도 모르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첫 번째 실패를, 작년에 카에데 씨의 도움에 힘입어 다시 도전했다가 두 번째 실패를 맛보았다. 어쩌면 이번에 다시 도전했다가 세 번 째 실패를 겪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실은 말이죠, 오늘은 전골과 이야기하는 것 말고도 카렌 양을 위해 준비한 게 하나 더 있어요. 예전에 신세 졌던 분께 부탁해서 어떤 장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거든요. 약속 시각은 8시고 여기서 그렇게 멀지도 않은 곳이니까, 카렌 양이 나갈 준비만 한다면 바로 갈 수 있겠죠. 저도 직접 가본 건 단 한 번뿐이었지만, 제게 있어서 정말 중요했던 장소랍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드리고 싶었어요.”


거기다 두려움의 원인은 단지 실패에만 있는 게 아니다. 흔히 꿈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겪은 경험들이 미래에 득이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실패와 좌절 속에서 경험은 오히려 독이 되어 내 발목을 잡는다. 꿈을 위해 흘린 땀과 눈물이, 그 누구에게도 이 아픔을 말하지 않고 홀로 울며 묻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심지어 꿈을 향해갈 때 맛보았던 희망과 기대감마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다가온다.

두려움을 벗어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원인에게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미 두 번이나 실패했는데 아이돌을 어떻게 하냐며 자신을 스스로 탓하고. 적당히 현실과 타협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카렌 양. 비록 늦긴 했지만, 제게 책임을 다할 기회를 한번 주시지 않겠어요?”


얼마 전에 내게 오디션 신청서를 내밀었던 그 상냥한 손이, 이제는 나를 이끌어주기 위해 내게 내밀어진다.


'분명 놀리겠지만... 아니, 그냥 놀려도 좋아! 대신 지금만큼은 내가 솔직해지는 만큼 카렌도 솔직해지는 거로!'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열정과 미련은 다시 깊은 곳으로부터 서서히 올라온다. 몇 번이나 희미하게 죽었다 살아나기를 반복했던 불씨는, 카에데 씨, 그리고 나오의 상냥함으로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문득, 사람의 마음이란 건 참 일관성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왜 나는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품는 걸까? 지금, 이 순간에도 다시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데, 왜 카에데 씨가 내민 그 상냥한 손을 붙잡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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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4일 오후 7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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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정말 괜찮다니까. 어차피 걸어서 금방 갈 거리고, 사람들도 많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나는 걱정 말고 얼른 볼일 보러 가."


그제서야 웬디는 그 멋지고도 승차감 끔찍한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

패스트푸드점 앞에 홀로 남은 나오는 걸어서 시어터에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시간도 남은 겸, 느긋하게 걷고 싶었던 게 첫 번째 이유. 직접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웬디의 자동차를 더는 타고 싶지 않았던 게 두 번 째 이유였다.

스마트폰과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고, 편하고 느린 템포로 시어터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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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따라갈게요. 아직 확실히 마음이 있는 건 아니지만, 호의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전골 재료는 오는 길에 사도 되겠죠?"


결국 카렌은 카에데의 손에 이끌려 밤중의 거리로 나오게 되었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택시나 버스로 가기에는 애매한 거리의 장소인 데다, 안내자인 카에데 본인도 마지막으로 찾아간 게 몇 년 전이었다.

카에데의 스마트폰을 지도 삼아 주위를 살피며 밤거리를 걷는다. 카렌은 비교적 조용하지만, 카에데는 눈을 지도와 길 사이로 열심히 굴리면서도 즐겁게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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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휴대전화를 조작해서 셔플 재생 버튼을 누른다. 매번 음악을 들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첫 곡은 아이돌 코세키 레이나가 부른 <유체이탈 풀봇코>의 오프닝 곡이다.

제법 음이 잡혀있는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몇 번을 떠올려도 질리지 않는 오프닝 장면의 일부를 몽상한다.

풀봇코가 악당들을 무찌르기 위해 격렬하고 화려한 공중전을 벌이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지지만, 원작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우선 풀봇코를 연기하는 것은 코세키 레이나가 아닌 나오 자신이었다. 풀봇코 나오의 곁에는 그녀가 아까는 후배이자 룸메이트인 카렌이 파트너로서 나오를 돕는다.

웃음 광대 '카에데와이즈'와 선물 도둑 '웬디 사탄 클로스'를 상대하는 두 사람은 귀엽고 화려한 옷을 입고, 마치 거울과도 같은 한 쌍의 화려하고 기교가 담긴 움직임을 선보인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떠올려 부끄러움에 얼굴이 약간 붉어진다. 그러면서도 입꼬리는 조금이지만 올라가 있다. 앞으로 그녀들에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몸이 살며시 떨리고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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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라도 노린 듯, 카에데는 집을 나온 직후부터 쉴 새 없이 카렌에게 말을 걸었다. 전골 재료라는 주제로 시작했던 일방적인 대화는 어느 순간부터 아이돌 타카가키 카에데의 무용담, 그리고 아직 두 사람의 상상 속에 있을 뿐인 아이돌 호죠 카렌의 활약이 주가 되어있었다.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다느니, 춤을 춘다느니 하는 상상 자체는 이미 카렌에게 놀랍지도 않았다. 그 꿈까지 다가가는 길에서 기다리는 아픔을 아직 모르던 시절에는 그런 상상을 밥 먹듯이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으니까.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도, 카렌은 카에데의 입에서 나오는 비현실적인 몽상에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톱 아이돌 타카가키 카에데와 나란히 무대에 선다니,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참으로 근거도 절차도 없이 낙관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 않아 보이지 않는 쓴웃음을 거두었다. 춤추고 노래하는 상상 속의 카렌의 모습에 그 사람 좋고 귀여운 선배의 모습이 겹쳐진다. 이윽고 겹친 모습은 둘로 나뉘어 거울과도 같이 무대 위를 누비는 듀오가 되었다.

머릿속을 쉴 새 없이 맴도는 그 광경이 자꾸만 신경 쓰여서, 카렌은 카에데에게 나오에 관해서 물어보았다. 하지만 되돌아온 대답은 카렌이 아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오가 지금 어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그녀로부터 카렌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전해 받았다는 것 정도. 나오가 오디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듣지 못한 모양이다.

나오가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했던 게 벌써 4일 전이다. 과연 나오는 결론을 내렸을까 하는 의문이 카렌의 마음속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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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길을 가던 중에 이어폰의 음악을 끊고 벨소리가 들려왔다.

화면을 확인하지도 않고 이어폰의 통화버튼을 누르니 요란스러운 바람 소리와 함께 갈색 피부 예술가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웬디의 용건은 간단했다. 이왕 '시찰'이 오는 거, 아르바이트생이라도 좀 단정하게 차려입으면 보는 사람들에게 어필이 되고, 나오도 사람들 앞에 서는 연습을 하면 좋지 않겠냐는 것. 웬디의 탈의실에 여성용 정장이 한 벌 있으니 시찰 때 입어보라고 조언해온다. 꽤 좋은 아이디어였기에 나오는 흔쾌히 조언을 받아들였다.

나오의 무리하지 말라는 말, 웬디의 힘내라는 말을 끝으로 통화는 끝을 맺는다.

여성용 정장 얘기가 나온 직후부터 이미 나오는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시어터 쪽을 향하고 있었다. 아직 그 여성용 정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니 잘못하면 입는 시간 때문에 예정보다 늦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얼마간을 그렇게 가다가 저 멀리 삼거리가 보였다. 저곳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캐슬 시어터에 도착한다. 괜히 급한 마음에 더욱 빨리 삼거리 쪽으로 가는데, 맞은편 갈림길로부터 중앙으로 다가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저 사이좋은 커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추상화가 극사실주의 그림으로 변화하듯,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특징이 하나둘 뚜렷하게 나오의 망막에 들어왔다. 나오의 눈은 점점 커지고, 얼굴에 놀라움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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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길을 가던 중에 갑자기 카에데의 말과 발걸음이 멈춘다.  카에데는 굳은 표정으로 이 길이 아니라며, 그들의 목적지가 '346 아이돌 캐슬 시어터'라는 곳임을 고백했다. 여태껏 스마트폰이 가리키던 곳은 의도했던 목적지가 아닌 어느 영화관이었다는 것이다.

당황한 카에데는 2~3분 정도 스마트폰을 두드려서 경로를 고친 뒤, 카렌의 손을 잡고 서둘러 왔던 길의 반대 방향으로 종종걸음을 놓았다.

카에데의 손에 이끌려 따라가는 카렌은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가 있냐고, 자신들이 그만큼이나 엉뚱한 길로 온 거냐고 묻는다.

카에데는 이 속도로 계속 가면 충분히 제시간에 도착할 거라고, 생각보다 크게 어긋나지는 않았다고 대답했다.

  어렵게 잡은 일정이니 지각하지 않는 게 좋다고, 카렌과 나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소였다고 덧붙이는 것을 끝으로 카에데는 입을 다문다.

조금 전까지  이어졌던 카에데의 이야기가 거짓말처럼 멎어버리니 카렌은 어딘가 허전함을 느꼈다 그나마 자신을 이끄는 카에데의 얼굴을 보니, 기대감과 즐거움이 담긴 웃음은 여전히 남아있다.

카렌은 문득 거울로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얼마간을 그렇게 가다가 저 멀리 삼거리가 보인다. 저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캐슬 시어터에 도착한다. 괜히 급한 마음에 카에데는 카렌을 이끌고 더욱 빨리 삼거리 쪽으로 가는데, 맞은편 갈림길로부터 중앙으로 다가오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하지만 추상화가 극사실주의 그림으로 변화하듯,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 사람의 특징이 하나둘 뚜렷하게 그들의 망막에 들어왔다. 둘의 눈은 점점 커지고, 얼굴에 놀라움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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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빨간불로 막힌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게 되었다. 놀란 표정으로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그들은 횡단보도의 빨간불이 파란불이 될 때까지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파란불이 들어오기까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오. 퇴근길이야?" "어머, 여긴 어쩐 일이세요?" "두 사람은 늦은 시간에 어디로 가는 거야?"


동시에 세 사람의 입에서 나온 각각의 한마디, 그리고 신호등의 뻐꾸기 소리가 기묘한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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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웬디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무언가 생각난 듯 눈썹을 올렸다.

"[몇 번 탈의실에 있다고 말하는 걸 잊어버렸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가용의 보닛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느 쪽이든 어울리겠지, 뭐.. 어쨌거나….]"

아직 다 타지도 않은 담배를 입에서 떼고,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용 재떨이에 구겨 넣었다.

"[어린애 앞에서까지 담배 연기를 뿜고 다닐 수는 없지. 남는 냄새는 별수 없지만.]"

살짝 밤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머리 위의 야구모자를 벗어 자가용의 열린 트렁크에 던진다.

"[딸기 쇼트케이크라도 사 왔으면 좋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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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하고도 +10일. 중간에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기간이나 양이나 질이나 늘 면목없습니다. 이전에 올렸던 글로부터 2 페이지나 밀렸네요. 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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