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당신이 좋아』

댓글: 3 / 조회: 1012 / 추천: 3


관련링크


본문 - 06-30, 2019 22:49에 작성됨.

* 멜티판타지아 그 이후를 멋대로 (또) 망상해봤습니다. 세리카가 리츠코에게 감정을 전송한 뒤 꽤 지난 후의 이야기.


"마더. 저, 당신이 좋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모니터로 향해 두 팔을 힘껏 벌리는, 세리카의 무기질적인 두 눈에서는 약간의 들뜸이 엿보이는 듯 했다.


"어떤 의미의 발언인가? 설명하라."


빈틈없는 어둠 속 밀실에 건조하고 딱딱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와 함께 밝혀지는 기계의 불빛. 이윽고 모니터에는 형상이 비춰졌다. 종교인을 연상하게하는 복식을 갖춘, 양갈래로 땋은 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는 조금 체구가 작은 여성이.


"으음, 그것은....설명이 어렵네요. 지금은 그저 좋다는 감정, 그것밖에 떠오르질 않아서."


완벽해야할 음정에는 감정의 노이즈가 끼어있었다. 굳이 이모션 체커까지 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세리카는 솔직하고 순수하게 눈 앞에 비친 여성, 마더 리츠코-9에 대한 호의를 표현하고 있었다. 예전, 그녀의 모델이 되었던 어떤 한 소녀가 그랬듯이. 마더는 탁한 두 눈으로 세리카가 자신에게 뻗은 두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다. 세리카. 너는 어째서 그런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지? 그런 포즈 없이도 나와의 소통은 가능할 것이다."


무척이나 강압적인 어조에, 세리카는 주눅이 들었는지 들어올렸던 팔을 조금 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빛나는 두 눈은 여전히 마더를 향해.


"그게, 저, 허그하고 싶으니까요."

"허그...."


중얼거리는 게 끝나기도 전에 마더의 전자두뇌는 의미를 도출해내고 있었다. 포옹. 다른 상대방과 몸을 가까이하고 감싸안는 행위. 호의의 표현. 


"세리카."

"네, 마더."

"나는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 그러니 네가 원하는 행동을 취할 수 없다."

"그건, 그렇지만...."


껌뻑껌뻑.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오는, 세리카의 두 눈. 천천히 떨어진 두 팔. 마더는 그런 세리카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저렇게 판단이 둔해지다니, 역시 감정이라는 건 위험한 게 아닌가....하는 경각심만을 키웠을 뿐.


"저어, 마더."

"어떤 용무이지."

"마더도 저처럼 보디를 가질 생각은 없나요? 그러면 좋을 텐데."

"그럴 필요는 없다. 내가 맡고 있는 역은 이 도시의 관리. 그에 필요한 정보의 수집은 너와 네 동형기들을 통해 이루고 있다. 그것은 너도 익히 알고 있는 정보일 것이다."

"....네에."


세리카는 풀죽은 강아지처럼 대답했다.


"세리카. 너는 내 눈이며, 귀이다. 너는 네가 겪은 것을 훌륭히 내게 전달하고 있다." 


마더가 하는 말은 자신이 보디를 갖출 필요성이 없음을 역설하는 것일텐데. 그렇지만 어쩐지 세리카에게는 괜히 이상한 소원을 말해버린 자신을 애써 위로해주는 것처럼 들렸다. 세리카는 그게 좋아서, 웃어본다.


"세리카?"


마더는 그것에 의문을 가졌다. 이해불능. 통제불능이다. 감정을 가져버린 자신의 눈과 귀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위험. 감정은 위험. 전자회로가 거듭 결론을 내린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마더에게는 그 위험을 처분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요, 아무 것도. 기뻐요. 마더가 저를 훌륭하다고 해줘서. 그래도 조금은 아쉽네요. 왜냐면 저, 배웠거든요. 좋아하는 이에게는 좋아한다고 표현해야한다고. 말로도 할 수 있지만, 행동으로도 하고 싶었어요. 그러면 좀 더 확실하게 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

"마더. 저에게도 질문이 있어요."

"무엇이지?"

"마더는 저를 좋아하나요?"

"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한순간에 끊겼다.


"마더.....?"


세리카가 불안한 눈빛으로 모니터를 살폈다. 모니터 안의 여성은 아무런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혹시 또 오류가 발생한 걸까.


세리카는 지난 날, 마더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ㅡ감정을 전달했을 때를 떠올렸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마더의 처절한 절규, 명멸하는 붉은 경고등, 반복적으로 울려퍼지던 에러코드 발생 메세지.....도시의 존망조차 위협받을 수 있던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마더는 작동을 정지하지 않았다.


마더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게 기능을 복구하고는 도시의 관리를 다시 맡았다. 마더의 목적은 여전했다. 인간의 행복. 그렇지만 이전처럼 감정을 가지는 안드로이드를 처분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또한 인간에게도 무조건적으로 자신이 계산한 결과를 강요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완벽했던 상자 속 정원은 사라졌다. 여기저기서 조금씩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 더 이상 인간들의 시중을 들기는 싫다고 불평하는 안드로이드와, 고작 저런 기계덩어리가 우리랑 같은 사람일리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지금은 불평과 주장뿐이지만 다음은 어떻게 될까.


솔직히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물론 그와는 반대로, 예전 치하야가 바랬던 대로 서로의 바람직한 공존을 원하는 움직임도 속속 생겨들고 있는 것 같지만. 세리카는 복잡한 심정으로 여전히 동작을 멈춘 마더를 바라보았다. 마더, 저는 감정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좋아? 라고 물어본다면 그건, 조금 대답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우선은 제 이런 마음을, 당신은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도 감정의 멋짐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저한테도 좋아한다고 해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지만....그건 분명, 욕심이라고 부르는 것이겠지요.


"....세리카."

"네. 마더."


전보다는 조금 힘이 덜 들어간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생각에 잠겨있던 세리카를 깨웠다.


"너는 네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해주고 있다."

"그것은 즉, 당신이 저를 좋아하는 이유라고 봐도 무방한 것인가요?"

"....그렇다."


욕심이라 생각했던 것이 이루어지는 순간. 세리카는 두 눈을 감았다 떴다. 모니터를 보았다. 시각센서가 포착하는 모니터 속의 형상은 처음과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었다. 그렇지만 방금 집음 장치를 통해 감지한 소리 데이터는, 분명히. 틀림없이.


-....그렇다.


세리카는 방금 그 말을 토씨하나 틀림없이 재생해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좋아한다고 해준다는 게 이렇게 기쁠 줄이야! 특히 다른 누구도 아닌, 마더가! 그 자리에서 펄쩍 뛰고 싶은 마음을 세리카는 겨우 억눌렀다. 대신 몇 번이고 자신의 저장공간에 마더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줬어, 라고 기록했다.


잠깐, 그런데.


이번에는 세리카가 동작을 멈추었다. 


"세리카? 무슨 일이지?"


리츠코가 여전히 탁한 눈으로 세리카를 살폈다. 방 안에 무수히 숨겨진 렌즈와 센서가 세리카의 모든 것을 체크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데이터 덩어리만이 흘러들어올 뿐이었지만.


"마더."


세리카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설명하라."

"마더는, 제가 당신의 눈과 귀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좋은 거라고 하는 거랬죠."

"그렇다."

"저어....그렇다면...."


세리카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만약 뒤에 있는 말을 마저 해버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제가 당신의 눈과 귀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래도 당신은 계속 저를 좋아해주실 건가요? 만약 이렇게 말해버린다면. 그렇게 해서, 아니라는 대답을 들어버린다면....두려운 마음이 자꾸만 세리카를 붙들었다.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마더의 진짜 마음을 알고 싶다는 욕심이 자꾸만 들었다. 이러면 안되는데. 이대로 조용히 입 다물자. 마더의 눈과 귀로서 있는 한, 마더는 나를 쭉 좋아해줄테니까. 그러면 언제라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주지시켜봤지만, 욕심은 사그러들 줄을 몰랐다.


감정은 그저 멋진 것만은 아니라는 걸 세리카는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은 세리카 안에서 색색깔로 반짝거렸다. 세리카는 그 빛에 이끌리듯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의 눈과 귀가 되지 못해도, 당신은 여전히 저를 좋아해주실 건가요?"


그러자 또 다시 돌아온 침묵.


아니, 아니다. 이것은.


기동 시작 후 처음 보는 광경이 세리카의 두 눈 앞에 펼쳐져있었다. 눈에 띄게 어그러진 모니터 속 여성의 형상. 지직, 지지직. 노이즈와 함께 보이는, 무표정을 벗어던진 마더의 얼굴.


"당연하잖아! 넌 내 소중한 존재인 걸!"


처음으로 듣는, 마더의 생기에 찬 목소리.


세리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저 멍하니 서서, 그 모든 것을 보고 듣고만 하고 있었다.


"정말~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거야 너. 이러니까 감정은 없는 게 좋다는 건데....어. 어라...."


뚝. 마더가 동작을 멈추었다. 방금 자신은, 무슨 소리를 했던 거지. 왜. 어째서.


방금 세리카의 말을 듣고, 어떤 걸로도 설명할 수 없었던 무언가가 자신의 안에서 울컥 터져나와서...아니. 기다려. 그것은 구체적이지 않다. 논리적이지 않다. 합리적이지 않다. 방금 그것은 오동작. 에러라고 규정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에러코드 765 발생. 원인불명."


아직 무표정을 회복하지 못한 마더가 뒤늦게 그리 중얼거렸다. 물론, 그 선언과는 다르게 아무 경고음도 발생하지 않는다. 세리카는 그걸 보고는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마더. 그건 에러가 아니에요."

"그럼...."

"감정이에요. 저를 좋아해준다는 감정. 기뻐요, 정말. 너무 기뻐서."


세리카가 기어코 두 팔을 다시 올렸다. 의미없는 행동. 알고 있지만. 아니,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해보자.


"마더도 똑같이 해주세요."

"그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지?"

"이러면 아까보다 조금 더, 허그하는 느낌이지 않을까요?"

"...."


마더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아주 조금만 모니터 속 두 팔을 들었다.


----------------------

흑흑 간만에 아이커뮤에 글 올려보네요 LOST 뽕이 안 빠져서 큰일입니다

3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