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새벽의 밀크티

댓글: 10 / 조회: 976 / 추천: 4



본문 - 06-23, 2019 21:48에 작성됨.

밤이다. 


보통은 어두운 땅 하늘 위에 별과 달이 아롱아롱거리는 것을 떠올리지만, 그럴 리 없는 도시이기에 그는 어둡게 조명을 깔았다.


줄을 한 번 잡아당기자,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희뿌연 빛이 안개처럼 깔렸다. 


자리에 앉았다. 


책상에는 구겨진 종이뭉치들과 라디오가 하나있었다. 인터넷으로도 라디오가 충분히 되는 시대에 이 남자가 고집스럽게 이 투박한 플라스틱 라디오를 만지고 있었다. 금속제 안테나를 위로 당기고 버튼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여러 가지의 목소리가 버튼을 돌리는 속도를 따라 빠르게 지나갔다. 미간을 좁힌 채, 자신의 얼굴보다 좀 더 큰 박스를 꽤 오래간 붙잡고 있었다. 라디오는 버튼과 안테나의 움직임에 따라 여러 가지 목소리와 잡음을 빠르게 뱉어냈는데, 마치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여러 동물들의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몇 몇 채널에서는 몇 분간 멈춰있었지만, 2분여를 넘진 못했다. 이윽고 포기한 듯, 라디오에서 몸을 떼고 허리를 의자 등에 맡겼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알수 없는 라디오를 내버려 두고 양 손을 옆머리서부터 코끝으로 쓸어 모았다.


짙은 한숨을 길게 흘리고서, 라디오를 껐다. 라디오를 밀어놓고, 폰을 꺼냈다. 잠깐 동영상 사이트에서 구독 중인 계정을 확인했다. 딱히 온 알림은 없었지만, 버릇 같은 거였다.


편하게 다리를 책상 위에 걸쳐, 의자의 앞 다리를 들었다. 


경제, 사회를 지나서 연예기사를 몇 개 보았다. 맨 위는 신경도 쓰지않고 아래로, 아래로, 내린다. 이쯤내리면 더 볼 것도 없을 거 같은데. 


실제로 그러했고, 그래서 기사창도 닫아버렸다. 톡을 열어보았다. 한 명이랑 대화한 기록이 있었다. 안부를 물으면, 적당한 피로감을 섞어 별일 없다고 답을 하는 관계. 위로 올리면 좀 더 다른 말이 있었지만, 최근으로 내릴수록 그런 말만 남았다.


혹시 별 일이 있길 바라면서, 대화하다보니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어진다.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혹시 뭔가 일정이라도 들어왔을까. 턱턱 막히는 마음에 가슴을 몇 번 두드렸다. 홍차 생각이 났다. 차를 마시면, 마음에 좋다고 알려줬었지.


고급진 홍차는 먹어본 적도 없고, 편의점 홍차는 별로 좋은 소리를 듣진 못했다. 뭐 딱히 맛있진 않지.


우유를 반 컵 전자레인지에 넣고 타이머를 맞추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종이뭉치는 많았지만, 할 생각이 나지 않았다. 멍하니 턱을 괴고 있으려니 옛날 생각이 났다. 종이컵에 티백 하나와 작은 우유 한 팩으로 밀크티 두 잔을 만들어 마신 날이 있었다. 사실 밀크티가 맞는지 확인은 해본 적도 없지만 맛있다. 그래서 그것을 쥐고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떠올려보면, 그냥 별 이야기도 아닌 것을 참 많이도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아니면 아예 말을 하지않았던 날도 있다. 플라스틱 라디오를 마냥 켜두고, 끝나지않을 것처럼 줄줄이 이어지는 말과 말을 듣기만 하던 날도 있었으니까.


보통은 밤이 넘어 새벽이 아슬아슬한 시간에 마시곤했는데, 처음엔 밤을 새려고 먹었던 거 같긴 하다. 별 효용은 없고, 그냥 밤 되니까 버릇처럼 먹은 거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티타임을 빙자해서 해야 할 일을 하지않기도 했고. 지금도 새하얀 종이들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가.


어쨌거나, 둘이서 늦게 남아 나누어먹는 새벽의 밀크티는 그 나름대로의 소담한 특별함 정도는 되었다. 어릴 적에 남한테 함부로 보여주기 싫어서 감춰두지만 한 두 명에게는 꼭 보여주고야 마는 예쁜 유리구슬 같은 느낌이랄까.


팅- 


새벽이라 잡스런 감성이 잘 치솟는다며, 우유나 먹으라고 전자레인지가 귓가를 두드렸다. 우유에 티백을 넣고 물을 부었다. 설탕은 생각보다는 좀 많이 넣었다. 왠지 생각보다 많이 넣지않으면 맹맹하더라. 우유에 홍차를 넣는가, 홍차에 우유를 넣는가. 이 둘이 다르다는 건 많이 들었는데 결국 결론은 늘 기억이 안 난다. 


아무렇게나 넣었다.


버릇이 남아서, 지금도 새벽간에는 밀크티를 한 잔 입에 걸치곤하지만, 언제먹어도 그때 맛이 돌아오진 않는 거 같다. 

누군가 앉아있으면 좋을 거 같은 빈 공간을 보면서, 왜 돌아오질 않는지 알아버리고만다.


“후....”


단 둘의 시간이라는 것이 너무 오래되서일까.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것은 늘 가까이 하고싶어지니까. 생소하기 그지없던 밀크티조차도, 그 새벽에는 반갑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가까워질 수 없었다.


“나, Idol 권유를 받았슴뉘다.”


이 한 마디에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이돌이 되기 위해 떠나가버렸고, 남은 작업실은 혼자 쓰기에 너무 컸다. 

제대로 걷어차이지도 못하고 거절당한 마음은 이제 팬심이 되어있었다.

옛 친구니까 간간히 연락은 했지만은, 그것도 점점 드물어지고 있었다. 연락이 드물어지는 만큼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으면 좋았을텐데.

그냥 줄어들기만 하고 있었다. 그저, 형식적인 안부인사만이 오가고 있다.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볼 수가 없다. 아이돌로서 입에 오르내리지 못하고 하루, 하루 또 하루를 보내는 것이 괜찮을까.

이런 걱정을 내가 묻는다해도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는 것을. 

아픈 구석을 찔러 들추는 것도, 그리고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해야한다는 것도 답답하고 괴로운 일이었다. 

어쩌면, 그냥 그녀의 괜찮지 않음을 내가 감당할 수 없어서 덮어만 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들어서있는 그 높다란 빌딩을 본 적이 있다. 끝을 세보기도 무서워지는 그것 앞에서 나는 문득 무서워졌다. 등을 돌려 도망치고서 다신 발을 두지않았다.


그 안에서 너는 얼마나 무슨 일을 겪는가 내래 그것을 상상하는 것도 참 무서웠다. 많고도 많은, 멋진 노래들은 세상에 불이라도 질러버리는 게 당연한 일인양 어깨를 으쓱대지만, 나한테는 손가락 하나 바늘로 따는 것도 아프다.


딱 이뿐이던가. 이렇게 엄살부리는 것이었던걸까.


왈칵.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기로 했을까. 

취중에 흘려버릴 무용담조차 없다. 시나브로, 작업실의 새벽이 기다려졌다. 단지 그 뿐이었다. 밀크티를 나누어마시던 새벽이 기다려졌고, 그리웠다.


손에 쥔 반 컵짜리 온기가, 낡아빠진 틈을 비집고 들이치려는 바람을 틀어막는다. 차갑게 식은 내 새벽을 일으켜 세웠다. 이 심장을 쥐어짜면 피가 나오진 않아도 홍차 한 방울은 떨어지지 않을까. 

나는 이 작은 한 줌 없이는 이 긴 새벽을 이겨내지도 못한다. 그냥 차갑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어버린 시체가 되기 위하여 새벽에 눌려있겠지.


내 마음이란, 딱 그 한 잔에 불과할지도 몰라.


되돌려받을 일 없고, 다시 채워주는 일도 없을.

제대로 곁에 있어주지못할.


딱 그만큼으로 사랑할 것이라면, 딱 그만큼으로 채워질 것이라면... 새벽의 밀크티 한 잔만큼만.

 

그녀가 내게 준 밀크티처럼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로하였다.

돌려받을 일이 없어서, 어떤 답장을 받아도 다시 채워주지 못 할. 

누구에게도 팔리지않는 비루한 작사가의 값없는 글을. 


이미 다 마셔버린 한 잔의 새벽이 넘어가고 있었다.

잠들지 못한 심장의 소리가 사납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종이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아, 오늘의 차가 달다. 


드높은 빌딩에 전혀 어울리지않는 남자가 뜬끔없는 시간에 카운터에 구겨진 봉투를 들고 묻는다. 메인 목과 바작바작 마른 입술은 단지 급하다고 볼 수 있을지 몰라도, 파들거리는 몸끝들은 그것과 다른 감정을 실토하고있었다.


“케이트라는 아이돌이 여기 있나요?”


불확실한, 무관심한 대답.


“있어요!”


뭔가 욱-하고 목 천장을 후려치는 것이 있어서, 소리쳐버렸다.


“....죄송합니다, 아무튼. 혹시 오면 이것 좀 전해주세요.”


누구냐는 질문에서 도망쳤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게. 다시는 여기 오지않겠다는 듯.


그 날, 새벽에 핸드폰의 알림창이 울렸다.


그녀가 답장을 했다.



=

3분46초짜리 곡이군요?

케이트와 화자 그리고 그 사이의 것들에 대해 케이트가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깁니다. 

이 시대의 핸드폰이란 참 많은 알림을 보냅니다. 그래서 뭐가 뭔지 소리만 듣고 가늠하는게 쉽지않을때가 있지요.

꽤 난해한 거 같은데 의식의 흐름기법이라고 구라치면...어떻게 안 되나..?

4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