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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나이트 8 - 방랑자放浪者 : 시오미 슈코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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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02, 2019 19:43에 작성됨.

 바늘이 살갗을 쑤셨다. 가볍게 가죽을 뚫어 날카롭고 섬뜩하게 혈관으로 파고들었다. 몸 안에 금속이 파고드는 모양을 보고 있으면, 설령 내가 겪는 게 아니더라도 익숙한 감각이 떠오른다. 칼에 베일 때의, 고통과는 다른 예리한 이물감을. 몸속으로부터 피가 빠져나가 더는 나의 일부가 아니게 되는 느낌을. 나와 달리 시키는 그것을 즐기는 듯 했다. 선혈이 호스를 타고 비닐로 된 팩 안에 담기는 광경에 동공을 반짝였다.

 누워 있어. 상체를 눕혀주자 고개를 까딱였다. 백야는 내가 피를 흘려야 자상해지는 구나, 더 흘려볼까. 위험한 어조에 차가운 눈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짓궂음을 인정하고 시키가 사과했다. 미안, 미안. 안 그럴게.

 “어때? 꽉 묵혀 있던 체증이 쑥 내려가는 거 같지 않아?”

 옆 침대에서 우리를 유심히 관찰하던 슈코가 물었다. 골수 속의 조혈모세포가 활발히 움직이는 거 같아. 시키가 바늘 꽂히지 않은 손을 흔들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일 했으니 좋았다는 걸로 받아들일게. 적당히 넘기고 여우 인상의 소녀는 익숙한 자세로 누웠다.

 “프로듀서 씨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몸이 안 좋다니 어쩔 수 없네.”

 “네. 근래 들어, 몸 상태가…….”

 “응. 응. 날도 더운데 무리하면 안 되지. 그러다 빈혈로 쓰러져. 피 빠지는 느낌이 좋은 건 아니니까.”

 바로 몇 초 전에 묵은 체증이 어쩌구 하지 않았나.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양 슈코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피가 잘 빠져나가도록 스펀지를 쥐었다 폈다 하는 손짓이 전문가의 낌새였다. 자기 몸에서 정확히 몇 리터의 피가 빠져나갔는지, 몇 억 개의 세포가 이동했는지까지 꿰고 있으면서 눈 감은 채 우리를 감시하는 느낌이었다.

 백야는 흰색 계열의 머리를 좋아하는 구나. 시키가 슈코에게 시선을 보냈다. 예의 없는 고개를 돌려주고 나는 부정했다. 아니야.

 “아까도 말했잖아. 방송국에서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쳤어. 선배 따라다니다가. 서로 얼굴만 알지 그 이상은 몰라.”

 정말이었다. 최소한 나에게는 시오미 슈코란 딱 그 정도의 의미와 존재감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상대에게는 그게 그렇지 않았는지 의외로 날 알아보았다. 나만이 아니라 시키까지. ‘방송가에 소문 퍼진 인상 죽여주는 프로듀서’와 ‘개성 넘치는 아이돌들이 우글우글한 프로덕션’, ‘그 중에서도 최고로 미친 아이돌’이 슈코가 보는 우리의 이미지였다. 정작 이쪽 아이돌은 당신을 알아보지도 못 했는데 저쪽에선 우릴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니. 쿨하게 넘어가줘서 다행이지 실례를 범하고 말았다.

 흐응. 무뚝뚝한 대답을 흘려듣고 시키는 붉게 물든 호스와 혈액 팩을 관찰했다. 동맥, 정맥, 헤모글로빈. 수상한 가사로 노래를 불렀다.

 게임 센터에서 우연히 만난 현역 아이돌들이 갑자기 헌혈원에 와 있는 데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슈코의 취미가 헌혈이었고, 오늘도 가볼까 하다가 하필 날씨가 더워서 고민하고 있는데, 하필 거기에 흥미를 보인 시키가 가자고 졸랐기 때문이다. 나랑 둘이서만 와도 될 텐데 전도한 김에 같이 가겠다며 슈코도 따라왔다. 여긴 자주 오는 곳이라 연예인이 있어도 호들갑 떨지 않아. 직원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슈코가 귀띔해 주었다.

 세련된 공간이었다. 에어컨이 시원하고 시설이 깔끔하고 직원들은 친절했다. 특히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말발이 끝내줬다. 몸 상태만 멀쩡했음 나도 저 침대에 누워있었겠지. 피가 모자란 좀비 꼴을 하고서.

 “헌혈한 날은 무리한 움직임을 취하면 안 된다니까 오늘은 레슨 쉬어야겠다.”

 “너 설마 그걸 노린 거냐.”

 “그럴 리가. 슈코를 만난 것도, 여기 온 것도 전부 다 우연인 걸. 실종 중에 생긴 우연. 자, 그럼 여기서 알려드리는 시키냥의 실종노하우 두 번째!”

 시키가 검지와 중지를 들었다.

 “실종에는 목적지가 없다. 정처 없이 떠돌다가도 꽂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향해라.”

 “지금 막 적당히 생각해냈다는 거 다 알아.”

 “냐하하! 들켜버렸네. 그치만 이것도 노하우를 실천하는 방식이야. 목적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

 “머리가 좋으면 좀 써. 적당히 둘러대는 데만 활용하지 말고.”

 “무리. 시키냥 머리는 좋아도 집중력 3분밖에 안 되니까. 한 가지 생각에만 오래 머물러 있으면 재미없는 걸.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을 즐기는 게 훨씬 좋아.”

 “네 삶의 방식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진 않아. 그렇지만 전에도 말했다시피 그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면 사회에 섞여서 살아갈 수 없어.”

 “백야는 섞이려는 거야, 아니면 숨어드려는 거야? 자신을 전부 가리고 남들 기준에, 시선에 맞춰 살아가면 ‘나’라는 존재는 뭐가 되는 건데? 백야는 만날 우리한테 말하잖아. 하기 싫은 일은 시키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을 해라.”

 “그건 네가 하는 일이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을 때의 이야기지.”

 “아까 말했잖아. 백야는 우리에게 피해 안 끼친다니까. 오히려 커버해주는 사람이지.”

 이야, 두 사람 사이좋아 보이네. 한참 오가는 논쟁에 슈코가 끼어들었다. 외국어라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만.

 “그쪽 프로듀서는…… 겨울P? 맞지? 어디서 왔다고 했더라.”

 “한국에서, 살다가 왔습니다.”

 “참고로 시키냥은 아메리카에서 왔어.”

 “둘 다 화려하네. 슈코는 원래 교토 토박이에 도시로 올라 온지도 얼마 안 됐는데 말이야.”

 “지금은, 잘 적응하신 것 같은데요.”

 “고마워. 어쨌든 1년은 살았으니까. 그래도 처음에는 뭘 하고 지내야하나 막막했다고. 막 상경했을 땐 빈털터리에 가진 것도 없었으니. 기숙사라도 주어지는 아이돌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업계는 업계대로 룰이 있지만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으니 자유분방한 점도 있고. 운 좋게 인기도 끌고, 돈도 벌었고.”

 “와아. 슈코는 인기 있는 아이돌이구나.”

 “바로 그러하옵니다! …… 뭐, 내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그런데 올해는 랭킹에서 본 기억이 없는…… 읍.”

 당장 입을 막았지만 늦고 말았다. 얼른 슈코의 눈치를 살폈다. 순간 굳어있던 눈빛이 풀리고 태연함을 되찾았다.

 “괜찮아. 신경 안 쓴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크게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도 않아. 떠오르는 아이돌도 언젠가 지기 마련. 나는 남들보다 그 시기가 빨랐던 거야.”

 시키가 눈을 끔뻑였다. 뭔가를 말하려 하길래 입을 더 세게 막았다. 웁웁웁, 소리가 나자 슈코가 웃었다. 둘이 진짜 잘 맞네.

 “보기 좋구나. 아이돌과 프로듀서가 죽이 잘 맞네. 만담 콤비 같아.”

 이제 빼겠습니다. 직원이 두 사람의 팔에서 바늘을 빼냈다. 알코올 적신 솜으로 누른 뒤 반창고를 붙이고 휴게실로 이동했다. 이거지, 이거, 기다렸다니까. 푹신한 소파에 앉은 슈코가 쿠키 봉지를 뜯었다.

 “헌혈 뒤에 먹고 마시는 과자랑 음료수. 이거 때문에 헌혈한다니까.”

 “과자 때문에 헌혈을 하다니. 슈코는 불순한 아이구나. 냐하하.”

 “어쩔 수 없는 걸. 쿠키에 초콜릿, 서양과자들이 잔뜩 있잖아. 어렸을 때 처음 헌혈을 해보고 과자의 나라를 발견한 거 같았어.”

 “목적이 어떻더라도, 시오미 씨가, 좋은 일을 했다는 건, 변함없습니다.”

 “좋게 봐줘서 땡큐. 헌혈이라는 게 자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보니 나한텐 일 년에 몇 번 없는 즐거움이거든. 그마저도 아이돌이 된 뒤로는 소속사라던가, 팬들이라던가, 눈치 보여서 자제하게 됐지만. 헌혈 자체는 좋은 일이어도 과자를 너무 많이 먹는다는 게. 그런데 여기 헌혈원은 많이 먹어도 눈치 안 주고 오히려 더 갖다 줘서 계속 올 수밖에 없어.”

 쭉 말을 하면서도 슈코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탁자 위에 뜯겨진 과자 봉지가 하나, 둘, 셋……. 순식간에 늘어났다. 모자란 피를 전부 당으로 보충할 심산인가. 넋 놓고 보는 사이 식사에 가까운 간식 시간이 끝났다.

 밖으로 나오면서 들었다. 헌혈원을 만난 건 내겐 운명 같아, 아이돌을 시작한 것처럼. 과장 같기도 진심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지만. 그 때, 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슈코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만 기다려줘. 조금 떨어진 옆으로 이동했다.

 “엄청 특이한 사람이네.”

 “네가 할 말이냐.”

 “그래도 덕분에 좋은 말을 들을 수 있었어.”

 “선배에게 하나라도 배웠다면 다행이군.”

 “목적이 어떻더라도 좋은 일을 했다는 건 변함없어.”

 시키가 내가 했던 말을 되돌려줬다.

 “우리를 위해 백야는 좋은 일을 했어.”

 “…… 방식이 비뚤어졌다면 그건 잘못된 일이야.”

 “우리가 해를 입는 것보단 낫잖아. 또 너는 아무에게나 그런 짓 하는 사람 아니고. 예전부터 쭉, 그랬다면서. 해결사로서.”

 뭐라 답하기 전에 슈코가 돌아왔다. 미안, 미안, 소속사에서 연락 왔거든. 이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카에데 씨가 사라졌다고 하네.

 “누가, 사라졌다고요?”

 “타카가키 카에데. 이 사람은 시키도 알지? 어제 집에서 갑자기 사라져서 저쪽 소속사에서 찾고 있대. 언론이 모르게 막고 있지만 소문이 새버려서 업계 사람들 중 일부는 알고 있고. 그래서 나도 혹시 사라져버린 건 아닌지, 어디서 뭘 하는지 확인하려 전화했다나. 오늘 휴일인데 말이지.”

 아이돌은 피곤한 일이야. 슈코가 그늘을 찾아 걸었다. 피부가 흰 편이라 나처럼 햇빛에 약하다고 했다. 마음껏 쉬지도 못 한다니까.

 “그러고 보면 난 좋은 걸지도. 어쩌다 보니 당분간은 일이 쭉 없게 됐거든.”

 “시오미 씨. 아까, 시키가 한 말은…….”

 “신경 안 써도 된다니까. 이건 그냥 혼자 하는 말이거든.”

 “카에데 씨는 어떤 사람이었어?”

 갑작스레 시키가 말했다. 흥미를 찾은 눈이었다. 으음. 잠시 과거를 회상한 슈코가 입을 열었다. 작년에 우리 둘 다 총선 순위권에 들어서 같이 녹음을 했거든.

 “그때 기억으론, 다가가기 어려운 성격? 엄청 예쁜데, 엄청 신비롭게 보여서 함부로 말 걸기 어렵더라고. 나한테도 몇 년이나 선배인데다 업계 톱이잖아. 황송하다 해야 할지, 만나서 영광이라 해야 할지. 분위기 풀어보려고 농담도 해봤는데 조금 웃더니 금세 무표정이고. 속을 알기 어려웠어. 나쁜 뜻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쉬는 시간 내내 폰만 들여다봐야 했다니까.”

 “우리랑 만났을 때와는 다르네. 먼저 말 걸어주고 그랬는데.”

 “정말? 그럼 너는 눈여겨보는 걸지도 모르겠네. 나의 뒤를 이어 업계를 이끌어갈 후계자를 찾았다, 이런 걸지도.”

 “다른 소속사에서, 말입니까.”

 “아. 이건 좀 아닌가. 그럼…… 부담이 사라져서 그러려나. 듣기로는 꽤 오래 압박 받았다더라고, 카에데 씨. 소속사에.”

 소속사. 듣고 보니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외모도 가창력도, 모든 것이 톱의 반열에 이르렀다는 카에데가 올해에서야 총선에서 1위를 차지한 까닭. 전문가와 팬들은 그 이유를 소속사에서 찾았다.

 업계에서 카에데의 소속사는 오로지 카에데 하나로 뜬 거나 마찬가지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중소 프로덕션이 어쩌다 대형 신인 하나 발굴해 낸 덕에 성장했지만, 그 이상은 해내지 못 하는 곳이라고. 카에데 외에는 눈에 띄는 아이돌이 없다는 게 그 증거였다. 때문에 소속사에선 어떻게든 카에데를 총선에서 상위권으로 올리는 데 혈안이었다. 다른 아이돌들은 버린다 싶을 정도로 카에데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건 분명하다. 나는 카에데에게서 가시밭길을 느꼈으니까.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지. 나는 카에데를, 내게 프로듀서를 할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 카에데를, 숙원을 이루고도 사라져버린 카에데를 떠올렸다.

 그 사이 슈코는 헛, 하고 짐짓 놀란 체를 했다. 설마.

 “작년에 내가 1위해서 싫어한 건 아니겠지? 그래서 말도 안 받아주고. 나한테만.”

 “그건, 아닐 겁니다. 만나보니, 그럴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래? 그럼 다행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업계 최고 선배에게 미움 받는 건 싫잖아.”

 정말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금방 다음 목적지를 찾아 정처 없이 떠돌았다. 낙천적이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을 잘 하거나. 그래보였다. 저런 자세를 배울 수 있다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려나.

 그보다 문제는 시키였다. 카에데의 이야기가 나오자 보인 눈은 단순히 흥미를 찾은 눈이 아니었다. 위험한 본성을 내면에 숨기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뭘.”

 “그 선배는 왜 사라졌는지에 대해서.”

 “글쎄.”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을 하는 거야?”

 “왜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건데.”

 “왠지 그 사람이랑 만난 후로 백야의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진 거 같아서.”

 날카로웠다. 말 속에 메스를 숨겨둔 것처럼.

 “난 백야가 항상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 하면 화가 날 거 같아. 나를 항상 재밌게 해주지 못 하잖아.”

 “내가 어떤 상태든 간에 너 하나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야. 엉뚱한 곳에 화풀이 할 생각 마.”

 시키가 눈을 굴렸다. 흐음. 동공이 흰자위를 몇 번 구르더니 원래의 빛을 되찾았다. 백야가 그리 말한다면 들어야겠지. 입가에 고양이 같은 웃음도 돌아왔지만 아직 칼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래도 알아둬.

 “나랑 한 약속, 지켜야 한다는 거.”

 슈코를 따라 발을 움직였다. 우리의 실종에 일행이 늘어났다. 상점가에 들어서자 시키는 노점과 가게들에 기웃거렸다. 냄새를 맡아보고 비교해 보면서도 지갑을 꺼내지는 않았다. 아마 지갑이 없는 거겠지.

 어쩔 수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옆에서 슈코가 아무렇지 않은 척 가게들을 살피고 있었다.

 “같이, 드시겠습니까.”

 “엇. 그래도 돼?”

 “얼마든지요.”

 “이렇게 얻어먹으면 안 되는데. 그렇지만 사 준다는데 또 거절하기도 그렇고……. 잘 먹을 게. 고마워!”

 눈치를 보다가 금방 호의를 받아들이는군. 나는 노점과 가게를 사이에서 과자를 고르는 두 아이돌을 지켜보았다. 나는 만쥬, 슈코는 뭐 먹을래? 야츠하시? 그러게, 크레이프 먹을까, 딸기랑 초코 중에 뭐가 나으려나. 이런 식의 대화가 오고갔다. 아까 그렇게 과자를 먹고도 또 들어가는 건가. 관리 안 해도 되는 건가. 쉬는 날이라고 하니 괜찮은가.

 구름이 하늘을 덮어 세상이 옅은 그림자에 잠겼다.

 달달한 팥과 부드러운 크림, 고소한 와플 굽는 냄새가 여름 안에 눅눅하게 뒤섞였다.


 *


 배우가 되고 싶었어.

 그래.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어. 배역과 혼연일체가 되어 극을 이끌어가는 존재. 지나가던 사람에게 내 이름을 말하면 ‘아, 그 배우! 그 역할로 유명하잖아!’ 라고 바로 튀어나오는 사람.

 히스 레저와 조커처럼 말이지.

 그 외에도 많아. 커트 러셀, 실베스타 스탤론, 브루스 윌리스. 외국 배우 아니어도 돼. 최민식도 있고 송강호도 있지. 사진 한 장 찍으면 당장 영화 포스터 되는 사람들 말이야. 나로 하여금 관객들이 영화의 세계에 빠져들기를 바랐어.

 멋지네.

 어릴 때 위플래시란 영화를 봤어. 주인공이 드럼을 치는데, 정말 살벌하게 치는데 교수가 그보다 더 살벌하게 주인공을 찍어 눌러. 러닝 타임 내내. 마지막엔 손에서 피까지 나. 광기가 느껴져. 난 거기에 빠졌어. 내가 저런 연기를 하고 싶었지.

 영화를 잘못 봤네. 거기선 천재를 이렇게나 혹사시켜도 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잖아.

 어쩔 수 없었어. 난 그 때 초등학생이었거든. 미친놈의 새싹이 그걸 보고 발아해버렸지. 난 연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어. 머리가 커갈수록 더했지. 절름발이 역을 맡으려고 내 발을 망치로 찍은 적도 있었고.

 훌륭한 미친년이 되었네. 그때부터.

 예고 나오고 예대 들어갔어. 실기 성적 1등으로. 공부를 소홀히 하지도 않았지.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히려면 할 줄 아는 게 많아야 했거든.

 알아. 서울대 들어갈 성적이었다며. 과외 해서 학비 벌고 뮤지컬 하려고 악기 배우고 보컬 교실 다니고, 몸 만들어서 액션 준비하고.

 어느 순간 부모가 날 무서워하더라고. 그 때부터 아무 지원을 못 받았어. 안 받았어. 내가 거절했으니까. 독하게 마음먹고 날 이해 못 하는 인간들이 언젠가 작품으로 날 인정하게 만드려고 했지. 근데. 그런데.

 그만 말해. 메서드. 너 많이 취했다.

 대학 들어가서 처음, 처음으로 주역을 따냈어. 교수가 소개해준 극단 무대에 서기로 했는데 장르가 스릴러였고 내가 맡은 건 스토커였어. 사랑하는 사람 집까지 쳐들어가고 그 사람 옆에 떨거지가 붙으면 칼 들고 쫓아가는 역할.

 메서드.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 있었어. 어떤 역할도 나보다 잘 소화해낼 놈은 없었지. 내가 그 역할 맡는 게 당연했어. 나는 그 역할이었지. 주인공이었어. 진짜로.

 그만.

 진짜로…… 진짜로 스토킹을 했어.

 …….

 난, 상대 배역을 정말로 좋아했고, 밤마다 뒤를 밟았고, 문 따고 집까지 들어갔어.

 …….

 그리고 그 사람의 실제 애인을…… 찌를 뻔했지. 수상함을 눈치 채고 누가 신고 안 했다면 정말 찔렀을 거야.

 힘들면 더 얘기 안 해도 돼.

 이 이상은 연기를 할 수 없었어. 부모가 날 두려워한 건 당연했어. 나는 어느새 ‘나’를 잃고 각본에 쓰인 대로 행동하는 인형이 되어버렸거든. 광기였지. 가면을 쓰면, 가면에 먹혀버려. 스스로를 먹이로 내줘.

 지금은 어떤데. 이제 더는 연기 할 필요 없잖아.

 다행히 지금 일을 하면서 조절하는 법을 익혔지. 다시는 무대에 서서는 안 되는 놈이 되었지만. 그런데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말하자면?

 미련이 남아. 내 인생, 내 꿈, 내 가치. 모든 게 거기 있었으니까. 난 내가 너무 싫지만, 연기를 하는 나는 좋아. 떠나온 그 자리를 자꾸 돌아보고 싶어져.

 언젠가. 언젠가는 떨쳐낼 수 있을 거야.

 백야. 넌 어딘가를 떠난 적이 없지.

 고아원을 나온 것 말고는. 없지.

 그럼 아직 몰라. 미련을. 새로 자리를 잡아도 자꾸 떠오르는 의문을. 내가 여기에 맞는지, 도움이 되는지. 되도록 모르는 게 좋지만.

 아마 평생 모르지 않을까.

 넌 뭐가 되고 싶었던 적도 없냐. 꿈같은 거.

 되고 싶던 적은 없지만, 꿈은 있었지.

 뭔데.

 살아남는 거.


 *


 스스로의 천재성을 감당 못한 사람은 광기에 잠식된다. 망가지고 자기 자신을 파괴하며 주변으로부터 멀어진다. 사회가 그들을 받아들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도 사회를 받아들이지 못 한다. 미친놈들의 세상을 원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나는 그들에 대해 잘 안다. 강이가 그러했고, 메서드가 또한 그러했으며, 또한 나도 그런 부류니까.

 시키를 볼 때마다 고민한다. 내가 저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내가 억누르고 있는 광기가 저 아이를 자극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면 늘 대답은 ‘그렇지 않다’로 기울어진다. 그리고 하나에게 악영향을 준다면 다른 둘에게도 그럴 것이라고 확답을 내린다.

 곁에 있으면 안 되는 걸까. 떠나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나는 이미 한 번 떠나왔는데.

 한국을 벗어난 이유는 내가 형님들, 동료들, 동생들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어쩌다가 일이 잘못 되어서. 그 업계에서 일이 잘못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 때는 특히나 더 크게 잘못 되어서. 내가 떠나야만 내 주변이 편안해지니까.

 오늘을 보내면서 조금이나마 내 안의 의문을 파헤칠 수 있었다. 나의 불안은 무엇인가. 나를 흔들리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내가 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 하는 것을, 그래서 간신히 도망쳐온 이곳에서마저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신기하군. 다시 한 번 시키를 보았다. 슬슬 저물어가는 태양이 회색 구름 사이로 빛나는 거리에서 하늘을 보기 보단 과자를 먹고 있었다. 어려운 수식조차 간단히 풀어버리는 천재가 겨우 저런 것에 만족하다니.

 너는 우리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아. 그렇게 말했었지. 그 말대로, 나는 그 아이들에게 해를 끼치기는커녕 오히려 영향을 받고 있다. 어제는 미오에게, 오늘은 시키에게. 어둠 속을 걷던 내 앞에 유성의 빛이 길을 내어주고, 주의를 끄는 향기를 따라 걷다보니 머릿속이 조금 맑아져 있었다. 그래도 겨울은 멀지만, 이대로 여름을 보내면 어느새 돌아와 있겠지. 그러겠지. 부디.

 “네 프로듀서는 무슨 생각을 저렇게 심각하게 해?”

 “아마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거 아닐까.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면 쾌락을 느끼면서 행복감이 들거든.”

 “어머. 사랑과 그리움이라니. 눈앞에 아이돌을 둘씩이나 두고서도 떠올릴 정도면 멀리 떨어져 있는 그녀에 대한 마음은 얼마나 깊은 것인지…….”

 다, 듣고 있습니다. 찔리는 것을 최대한 티내지 않고 말했다. 시키는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 안 했어? 꿰뚫어본 것일까, 떠보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간에 나불대는 입을 막으려고 과자를 집어 물려줬다. 단팥 가득한 만쥬로 볼이 빵빵하게 차올랐다.

 옆에서 슈코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진짜 재밌다.

 “아, 웃어서 미안. 둘이 보고 있으니까 좋다. 나도 그쪽 소속사로 가고 싶을 만큼.”

 농담이야.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운 무언가를 좇는 눈이었다.

 구름이 흘렀다. 내리는 석양이 구름 사이 구멍에 절묘하게 걸쳤다. 세상은 황혼. 그늘진 어둠에 금빛이 물들어 모든 것이 흐려지는 시간대. 우리는 각자의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노을을 등지고 슈코가 말했다. 슬슬 가봐야겠다, 오늘 즐거웠어. 피부가 희고 백금발로 물들인 머리에 뾰족한 귀가 솟아있을 것만 같은 사람. 이대로 뒤돌아 가면 탐스러운 꼬리가 살랑거리고 있을 듯한 분위기.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세상에 구애 받지 않고 갈 길을 가는 여우.

 진짜 여우라고 해도 그리 놀랍지는 않겠지. 세상엔 이상한 것들 천지니까. 이대로 그냥 보내도 나와는 아무 상관없을 거야. 방송국에서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 나에게 시오미 슈코란 딱 그 정도의 의미와 존재감을 지닌 사람이니까. 하지만.

 “시오미 씨.”

 두 아이돌을 번갈아 봤다. 둘 중에 시키에게 아주 조금 더 오래 시선을 두었다. 아무래도 나는 여우보단 고양이에게 홀리는 타입이었나 보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슈코가 뺨을 긁었다. 으음, 기숙사겠지. 형식적인 답이었다. 그 뒤에는, 어쩌실 겁니까. 나는 무례임을 알면서도 조금 더 깊은 영역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 백야? 식어버린 공기에 시키가 의문을 가졌고 슈코는 거부했다. 뜬금없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 걸.

 “돌아가실 겁니까. 당신의, 현실로.”

 “겨울P. 나 정말로 무슨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어.”

 “아이돌의 세계를, 벗어나서.”

 “…….”

 “가실 수는, 있습니까. 이대로. 길 잃은 채로.”

 “그거, 내 인터뷰에 나오는 이야기? 맞지?”

 “혼자서, 가실 수, 있습니까. 이미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시는 거, 아닙니까.”

 슈코의 눈이 차게 굳었다. 예리하면서도 능글맞게 둥글어지던 눈이 처음 내보이는 모양이었다. 무슨 얘기를 들은 거야. 건조한 음성을 냈다. 어디까지 알고 있고. 여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한낱 인간의 실체였으나 몰아붙이거나 화내는 투는 아니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였다.

 “언제부터 알았는데?”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거짓말. 다 안다는 듯이 말했으면서. 누가 시켰어? 설마 그 사람은…… 아니겠지. 혹시 소속사? 내가 못 나가게 막으라고 부탁한 거야?”

 “역시, 떠났군요. 그 사람은.”

 “…… 날 떠본 거야?”

 “죄송합니다. 함부로, 끼어들어서.”

 고개를 숙였다. 사과를 받을 생각이 없는지, 혹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건지. 슈코는 미동도 없었다. 나는 다가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제가, 당신을 맡을 수는, 없겠죠. 멍하니 보던 슈코가 명함을 받았다. 그럴 능력이, 제겐 없습니다.

 “그래도, 다른 방식으로, 도와드릴 수는 있습니다. 혹여, 미련이 남았다면, 연락 주십시오.”

 “…… 과자 얻어먹은 값이라고 생각할게.”


 *


 슈코가 떠나고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흐릿하게 사라지는 그림자에 여우 꼬리가 비친 것 같았다. 어쩌면 오늘 밤은 귀물의 밤. 천벌을 받아도 할 말은 없겠지.

 그 전에 내가 할 일은 끝마쳐야 해.

 “기다렸지.”

 “응.”

 시키와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고 보니 우린 아직 실종 중이었다. 설명해줄 시간은 넉넉하겠군.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긴 이야기에 앞서 목을 가다듬었다.

 “슈코는 작년에 총선거에서 1위를 거머쥔 아이돌이었어. 너처럼 업계 지식이라곤 관심도 없는 게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지. 특히 아이돌 매거진에 남긴 인터뷰는 꽤 유명해. 그럴 수밖에 없지.”

 “올해 권외였으니까?”

 당사자가 없다지만 너무 직설적이군. 덕분에 슈코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관련 없는 나조차도 안타까운 결과인데 본인은 오죽했을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 결과로부터 비롯된 일련의 사건들은 추측만으로도 슈코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슈코는 업계를 떠나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

 데뷔한지 1년 만에 아이돌 그랑프리 1위를 차지한 대형 신인. 여유롭고 장난기 넘치는 성격, 여우처럼 종잡기 어려운 매력. 기념으로 받은 노래 ‘푸른 일번성’까지. 남들이 보는 놀라운 기록과 이미지는 슈코에겐 모두 꿈과 같았고, 이는 인터뷰에 그대로 실려 있었다.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의 경계가 애매해지는 시간대. 난 이제야 원래 세상으로 돌아온 건 아닐까? 아이돌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건 아닐까? 이대로 현실에 남아야 할지도.

 슈코는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갑자기 주어진 커다란 상에 부담을 느끼고 흔들렸다. 그래도 도와준 이들에게, 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꿈이 1년 만에 부서졌다.

 “내가 물어봤지. 길을 잃었던 아이돌의 세계를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갈 거냐고. 듣자마자 슈코는 자기 인터뷰를 인용했다는 걸 알아들었어.”

 “단서를 흘린 거네. 약점을 찔려서.”

 “쭉 마음에 두고 있던 거야. 회의감이 들었겠지. 이번에야 말로 깨달았다고, 나는 정말로 길을 잃었을 뿐이라고. 아이돌의 세계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그런데 바로 떠나진 않았네.”

 시키가 속편한 소리를 했다.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슈코는 소속사의 감시를 받고 있어.”

 헌혈원을 나올 때 소속사에서 온 전화에 슈코는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온종일 능글맞던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짜증나게 굴었다는 뜻. 다른 소속사 아이돌이 사라졌다고 해서 휴일의 아이돌을 신경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슈코는 카에데와 친하지도 않으니까. 찔리는 것이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해진 거겠지.

 딱 한 번 미끄러졌을 뿐이다. 슈코 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더라도 소속사 입장에선 선거 권외쯤이야 빈번한 일. 팬층이 아주 사라졌을 리도 없고, 원인을 분석하여 대책을 강구하면 된다. 그들은 전문가다. 더군다나 공들여 프로듀스 한 대형 신인을 1년 만에 잃기는 싫었을 것이다.

 “일본 연예계는 특히나 소속사의 힘이 강하지. 흔히 말하는 블랙 기업들도 많고. 아마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거야. 질릴 만도 하지.”

 “듣기만 해도 재미없네. 나라면 바로 도망쳤을 거야.”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니까. 계약이 있으니까. 그래도 은퇴를 생각한다는 건 계약 기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거겠지. 소속사는 재계약에 혈안이고.”

 “만약 재계약을 하면 어떻게 되려나.”

 “다시 인기를 얻더라도 신뢰를 회복하긴 어렵겠지.”

 “안 한다면?”

 “받아주는 회사는 얼마 없을 거야. 슈코의 소속사는 영향력이 강해. 어지간한 규모의 회사가 아닌 이상 안 좋은 관계를 갖고 싶진 않겠지. 연예계에서 계속 일하긴 힘들어. 그래서 슈코가 더 고민하는 거야. 아이돌을 그만두면 당장 갈 곳이 없거든.”

 슈코는 집을 나왔어. 시키의 눈썹이 씰룩였다. 우리와 같지, 떠나온 사람이야.

 ‘처음에는 뭘 하고 지내야하나 막막했다.’ ‘막 상경했을 땐 빈털터리.’ ‘기숙사라도 주어지는 아이돌을 할 수 있어서 다행.’ ‘운 좋게 인기도 끌고, 돈도 벌었고.’

 슈코의 아이돌 활동은 예정에 없었다. 지낼 곳도 정하지 않은 소녀가 계획도 없이 혼자 도시로 왔다는 건 가출이거나 쫓겨났거나. 크게 불미스러운 일은 아니다. 잘 모르는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시원하게 털어놓을 정도니. 그러나 소속사에 입장에선 이런 자그마한 흠집도 공개해선 안 됐다.

 “아이돌에게 퇴학 기록을 남기면 안 되는 것처럼.”

 “아하.”

 “그래서 더 소속사가 맘에 안 들었겠지.”

 소속사는 슈코의 고향이 교토라는 점을 적극 홍보했다. 전통미를 강조하고 교토 홍보 대사로 만들 정도로. 그러나 그 이상은 신비적인 이미지 뒤로 숨겨왔다. 총선 1위를 차지하고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서도 일을 시킬 정도로. 집에 가는 것 자체를 막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슈코는 자유분방한 성격이다. 아이돌을 마음에 들어한 것도 그런 이유였고, 대화하다 보면 귀찮은 일이나 너무 깊게 파고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소속사에서 이런 성격으로 마찰을 빚는 걸 보면, 아마 집에서 나온 것도 이런 성격 때문이 아닐까.

 “슈코의 집은 아마 화과자 가게일 거야. 그 지역에선 나름대로 인지도 있는.”

 헌혈원에 자주 가는 이유는 과자, 그 중에서도 서양과자를 먹기 위해. 처음 헌혈을 해보고 과자의 나라를 발견했다고 했지. 취향의 영역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어린 시절 받은 환경의 영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과자 집에서 태어나 화과자를 자주 접하고 먹었다면 거기에 질렸을 수도 있겠다고. 인터뷰에서는 야츠하시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시키와 과자를 고를 땐 일부러 크레이프를 고른 것처럼.

 그러면서도 인터뷰에선 화과자 집에서 일할 때 익숙하게 접객을 하고, 화과자를 먹으며 그리운 맛이라 표현했다. 자그마한 애증. 유명한 아이돌이 되어서도 찾아갈 수 없는 집에 대한 마음. 돌아갈 수 없기에, 자꾸 돌아보고 싶은 떠나온 곳.

 “만약 그렇다면 헌혈이 취미인 이유를 공식적으로는 숨기는 이유도 알 수 있지. 고향과 연결되는 자그마한 단서조차 공개하지 않으려는 거야. 적당주의 성격을 종잡을 수 없는 신비스러움으로 포장하기 위한 소속사의 노력이지. 마치 내가 너의 괴짜 성격을 천재성으로 포장하는 것처럼.”

 “냐하하. 고생이 많구나. 그러면 다음은…….”

 아까 나왔던 ‘그 사람’이라는 건 누구야? 시키가 핵심에 접근했다.

 그는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이제는 곁에 없으나 현재진행형으로 영향을 끼치는 인물. 슈코가 우리에게 관심 보인 이유. 슈코가 우리에게서 본 것. 아이돌, 그리고.

 “프로듀서.”

 슈코는 우리를 유심히 지켜봤다. 게임 센터에서, 헌혈원에서, 거리에서, 오늘 하루를 들여서. 티격태격 대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했다. 추억했다.

 “딱히 무언가 될 생각은 없던 화과자 집 딸에게 운명처럼 아이돌을 권한 사람. 이후 갑자기 찾아온 그 소녀를 1위로 만든 사람. 늘 곁에 있으며 사이좋게, 만담처럼 잡담을 나눈 사람. 간섭이 많은 소속사에서 아이돌 일의 자유를 보장해준 사람. 스스로를 특별하다 여기지 않는 아이를 특별하게 만들어준, 특별하게 노력한 사람. 소속사에 반대하고 슈코를 위하다 떠나가게 된 사람.”

 “슈코의 프로듀서는 그런 사람이었구나.”

 떠나온 자리만큼이나 떠나간 빈자리는 공허하다. 그 사람 없이 그 사람과의 추억이 담긴 장소를 떠날 수 있을까. 떠나서 무엇을 해야 할까. 이미 나는 한 번 떠나왔는데. 갈 곳도 없는데.

 이제 마지막 질문이야. 충족된 호기심에 만족 못 하고 시키가 마지막 답을 구했다. 왜 도와준 거야? 갑자기.

 “솔직히 조금 뜬금없었거든. 그 전까진 관심 없었잖아.”

 “그건.”

 닮아 보였다. 나와 슈코는. 떠나온 사람. 목적지를 잃은 실종자. 방랑자. 교토와 도쿄, 해결사의 영역과 프로듀서의 영역에서 어느 쪽이 자신이 남아야 하는 현실인지 헤매는 이. 지금의 자신을 자신으로 만드는, 멀리 있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여우도 늑대도 아닌 한낱 인간. 신경이 쓰였고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괜한 짓일지 모르는 참견을 해버렸다.

 무시해도 됐을 것이다. 나 자신도 갈피를 못 잡는 주제에 남의 인생에 관여할 자격은 없으니. 그래도 아주 작은 도움이 허락된다면. 별 거 아닌 명함 한 장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보내면 네가 실망할까봐.”

 사실 나머지는 전부 핑계에 불과해. 이 이상의 이유는 필요 없겠지. 드디어 만족한 시키가 포만감을 드러냈다. 정답.

 폰이 울렸다. 치히로의 메시지. 퇴근 시간인데 미안하지만 잠깐만 와달라는 연락이었다. 농땡이를 친 주제에 가지 않을 핑계는 없겠지.

 우리는 걸음을 옮겼다. 시키가 묘하게 신나 보여 까닭을 물으니 본인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실종의 노하우 세 번째, 실종에는 찾는 사람이 있다. 그래. 그렇구나. 드디어 오늘 우리의 실종은 완성된 건가.

 고양이에게, 여우에게. 향기와 향수에 홀려 실컷 쏘다닌 하루였다. 아나스타샤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일이 바쁜지 오늘은 근황이 뜸했다.

 근처 도로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밤을 미끄러지는 차 안에서 나는 시답잖은 문자를 작성해 보냈다. 정말 시시콜콜하고 누구에게 내용을 말하기도 부끄러운 그런 것이었다. 전송을 누르는 순간 문득 생각해 보니 사적인 일로 내가 먼저 말을 걸은 건 처음 같았다.

 앞으로는 좀 더 늘릴까. 그래도 되려나.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시선이 따가웠다. 어느새 배운 능글맞은 미소로 시키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방심을 못 하겠군. 나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창밖을 바라봤다. 잠시 후 프로덕션에 도착함과 동시에 우리의 실종은 끝을 맺었다.











원래는 어제 완성 예정이었지만,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시간을 들인 만큼 깔끔하게 끝난 거 같군요.

앞으로도 이 정도로만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세한 후기는 창작이야기판에 금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상 후 댓글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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