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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 성-프로젝트 크로네 [Prologue:나오, 카렌- 재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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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02, 2019 14:30에 작성됨.




<2015년 7월 24일 오후 5시경, 구 아이돌 캐슬 시어터 지하 주차장>

"으헤에에엫...."

힘이 빠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조수석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목에 힘을 풀며 고개를 돌려보니, 웬디 씨는 몸속에 모터라도 돌아가는 것처럼 여전히 지친 기색 없이 휘파람까지 불면서 운전석에 자리 잡는다.
검은색 렌즈로 눈을 완전히 가리는 고글과 야구모자를 쓰고는, 좌석 어딘가에서 투명한 렌즈의 고글을 꺼내 내 눈에 씌워주었다.

"그렇게 춤췄는데 지치지도 않아?"

스리슬쩍 물어보자 웬디 씨는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도 카미야 양한테 똑같이 묻고 싶네요. 점검하고 인수인계는 3시에 끝났는데, 그 이후로도 한 시간 반 안 어떻게 쉬지도 않고 춤을 출 수가 있죠?"
"이래 봬도 체력은 자신 있다고. 결국 졌지만."

3시 즈음에 모든 작업이 끝난 후, 웬디 씨와 나는 무대 바닥 상태를 점검할 겸 댄스 레슨을 하게 되었다. 웬디 씨가 소위 '뮤지컬 무대 점검으로 다져진 춤 실력'으로 나를 가르치고, 나는 그 춤동작에 아주 무난하게 따라가는 훈훈한 분위기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누가 먼저 뻗는지 겨루는 저세상 체력대회가 되고 말았다. 초반 이후부터는 춤을 잘 췄는지 못 췄는지조차 모르겠다. 그 때는 이미 웬디 씨조차 지적이나 칭찬을 잊어버린 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스텝을 밟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참 특이한 자동차네."
"케이터햄 7. 고객이 직접 조립하는 자동차라길래 끌려서 한번 사봤습니다만, 꽤 물건이더군요."

웬디 씨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높고 경쾌한 엔진소리와 함께, 자동차는 버려진 물건들이 어질러져 있는 주차장을 가로질러 큰 도로로 나와서 달리기 시작했다.

경차와도 맞먹는 크기의 조그만 스포츠카. 두 사람이 겨우 탈 수 있는 공간에는 에어컨, 오디오, 시계, 심지어 문과 지붕도 없다. 
조수석의 바로 옆을 쏜살같이 지나가는 포장도로의 잔상에 약간 겁이 나서, 내 몸을 묶고있는 안전벨트를 양손으로 꼭 붙잡았다.
그나마 차가 달릴 때마다 바람이 온몸으로 불어왔지만, 아직 여름날 햇빛의 열기를 머금은 바람은 시원한 건지, 후끈한 건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드시고 싶은 건 정하셨나요?"

엔진과 바람 소리에 묻힐까 봐 웬디 씨가 소리쳐서 물어왔다.

"웬디 씨는 주로 외식하면 어떤 걸 먹는데?"
"먹을것 보다는 마실 것에 사치를 부리는 스타일이라고나 할까요? 선술집에 술만 마시러 간 적은 있어도 외식하러 돌아다닌 적은 없네요."
"그럼 평소에 먹는 건?"
"카미야 양이랑 저녁때마다 맨날 먹던 거요."
"죽? 매일 꼬박꼬박 죽만 먹는 거야?"
"고기죽, 계란죽, 어떨 때는 오트밀도 먹죠. 죽도 은근히 종류가 많아요."
"뭔가 체질적인 문제라도 있나 보네."
"그렇다고 해두죠."

그런 식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 저녁 메뉴 의논을 하며 우리는 도쿄 시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서서히 퇴근하는 자동차들이 몰리기 시작해서, 나는 오늘 저녁을 시어터 근처의 맥도날드에서 먹자고 했다.
퇴근 정체도 문제였지만, 이 차는 그다지 오래 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웬디 씨는 난처한 듯 계속 다른 맛있는 걸 더 먹고 싶지 않냐며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웬디 씨가 아무것도 못 먹을 때 나 혼자 스테이크를 썰 수 없다'라는 내 대답에 납득한 모양인지 체념하며 핸들을 가까운 패스트푸드점 쪽으로 꺾었다.

"그나마 콘 스프는 있네요."

가게 안으로 들어왔는데 야구모자를 벗지도 않고, 불편하게 카운터 위의 메뉴판을 올려다보는 웬디 씨.

"카미야 양은 천천히 골라주세요. 양이고 가격이고 저는 상관없으니까."

마음씨와 씀씀이는 고맙지만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사람이 지금 하는걸 보면 콘 스프로 대충 때울 것같은데, 그런 사람 앞에서 진수성찬을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일단 빅맥은 안 되고, 그랜 클럽하우스는 얼마전에 카렌이랑 먹었으니까 빼자. 데리야키 맥버거는 소스가 너무 달고, 그래. 간단하게 치즈버거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사이드 메뉴는 그냥 감자튀김으로, 디저트는 필요없겠지. 그런데 메뉴판을 훑어보다보니 문득 어린이 장난감 진열대에 낮익은게 보이는데 저게 뭐지?

[지금 해피밀에서는? : 절찬 방영 중인 애니메이션, '유체이탈 풀봇코™와 선물 도둑 사탄 클로스'의 주인공들을 장난감으로 만날 수 있어! 7월 25일부터는 새로운 모습의 풀봇코와 친구들의 장난감이 들어오니까 기대하라구!]

...그냥 아예 얻어먹을 생각을 하지 말자. 이건 팬심 때문에라도, 웬디 씨에게 미안해서라도 내가 사야 한다. 특히 '선물 보따리 풀봇코'장난감을!

"저기, 웬디 씨?"
"주문 도와드릴까요? 손님."

어딘가 나른해보이는 실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웬디 씨는 어설프게 종업원 흉내를 내보였다.
별로 웃기지도 않았지만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먼저 주문하고 자리 잡아도 돼. 내건 내가 살 테니까."
"아뇨아뇨.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리려고 한다.

"마음은 고맙지만, 좀, 그, 개인적인 걸 좀 사려고. 왜, 월급은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거잖아!"
"패스트푸드점에서 '개인적인 거'요?"
"그, 저거."

약간 머뭇거린 후, 나는 어린이용 장난감이 진열되어있는 카운터 옆의 진열대를 가리켰다.
 퇴근 이후에 혼자 와봤자 문은 이미 닫혀있을 것이고, 내일이면 장난감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거기다 어린이 세트는 귀엽고 눈에 잘 보이는 빨간색 상자에 담겨서 나오기 때문에 어차피 숨길 생각은 없었고, 숨길 수도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런 거 모아?'같은 말이 돌아올까 봐 약간 겁이 날 뿐이었다.

"유체이탈. 아하~. 와이어를 타고 올라갈 때 했던 구호가 여기서 나오는 거였군요?"
"...응."
"그렇군요, '풀봇코'라. 오!"

나한테만 들리게끔 속삭이며 장난감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웬디 씨는 갑자기 몸을 움찔하더니, 손가락으로 장난감들 중 하나를 가리켰다.

['빙글빙글 미치광이 사탄 클로스' 태엽을 감으면 돌아가면서 말해요!]

"카미야 양."

웬디 씨는 아주 해맑게, 하지만 어딘가 불길하게 웃으며 내 옆구리를 한손으로 안았다.
...마네킹을 공중사출시켜버리기 직전의, 그 '필요 이상으로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다.

그리고 잠시 후,

[명왕성으로부터의 선물! 조금만 맛봐라아앗!☆]
[다같이 빙글빙글 돌자구나!! WAHA!WAHA!WAHA!]

여고생과 작업복을 입은 어른이 마주보고 앉아있는 테이블 위에는 큼지막한 어린이 세트 상자가 두 개, 콘 스프 세 컵, 그리고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장난감 두 개가 놓여있었다. 

"웬디 씨는 의외로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기계장치의 기본은 회전이니까요. 무대 관련 일을 질리도록 해와서 그런지 언젠가부터 이런 것만 보면 사족을 못 쓰겠더라고요. 아니, 멋지잖아요?! 여러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서 막대한 힘을 전달하고 그 힘을 여러 곳으로 나눠서 전달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변환도..."

뜬금없이 그런 이야기가 왜 나오나 싶었지만 즐거워 보이니 지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카미야 양은 저랑 같은 이유로 이걸 사고 싶었던 건 아니잖아요?"

한참을 그렇게 혼자 즐겁게 떠들다가 갑자기 그렇게 물어왔다. 아직 한참 남은 콘 스프 컵을 내려놓고, 내 눈을 마주 보며. 
약점을 잡았거나 놀리는 얼굴이 아닌, 그저 편안하게 웃는 얼굴.
그녀는 나를 추궁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나와 비슷한 눈높이와 시각으로 다가와 이해해주고, 함께 해주고 싶은 것이다. 

'땡볕에서 그렇게 안무를 열심히 연습한 사람을 또 달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 무언가를 혼자서 고민하는 것을 알아채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웬디 씨는 나에게, 그리고 나는 카렌에게. 
그 속마음이 뚜렷하다 못해 마치 마주 보고 있는 거울처럼 내게 전해져왔다.
학기 초, 홀로 외로워 보인 데다 이상한 소문까지 달고 다니던 카렌의 모습을 내가 도저히 참지 못했듯이.
어떻게든 외롭지 않게 해주려고, 자신도 없던 요리까지 담은 도시락을 싸서 카렌에게 다가갔듯이.
그리고 내가 미처 알지 못한, 아이돌에 대한 카렌의 고민을 이해하려고 했듯이.
종종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온기가 느껴지는 상냥함.

웬디 씨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장난감을 가리켰다.

"혹시 이 캐릭터의 뒷사정을 알고 계신가요? 디자인은 별로지만 하는 짓이 마음에 드네요."
"웬디 씨의 장난감은 이번 분기의 악당인 사탄 클로스야. '산타 클로스의 정 반대'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라서, 여름날에 어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나 개념을 선물상자 모양으로 바꿔서 뺏아가지."
"단순하지만 흥미로운 설정이네요! 그럼 카미야 양건요?"
"주인공인 풀봇코! 명왕성 616에서 온 여자아이고,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유체이탈 능력으로 자신과 악당을 영혼 세계에 가두고, 영혼 상태에서 멋지게 날아다니면서 악당과 싸운다고!" 

카렌 이외의 사람과 이런 식으로 즐겁게 취미에 대해 얘기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중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는,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는 반 친구들과 그런 얘기를 했다가 정말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는데.

"유체이탈, 뭐시기... 미안해요. 어쨌든 정말로 이걸 좋아하시는 모양이네요."
"정확히 말하면 이런 느낌 비슷한 특촬물하고 애니를 좋아했어. 어렸을 때부터 말이야."
"...이름에 사탄이 들어가는 배불뚝이 스머프 노인네가 발광하는 느낌이요?"

난감해하는 걸 보니 농담으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차라리 농담이었으면 이해가 됐겠다!

"왜 그런 이상한 쪽으로 생각을 하는 거야?! 자, 역시 보는 게 빠르겠지?"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저장되어있던 동영상 클립 중 하나를 꺼내서 웬디 씨에게 보여주었다.
몇 달 전에 나왔었던, 풀봇코가 적의 탄막을 피하면서 지팡이를 현란하게 휘둘러 마법을 발사하는 장면이다.

"주인공의 움직임과 복장은 확실히 화려하네요."

바로 그거야! 하고,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귀엽고 멋진 옷을 입고 춤을 추듯 날아다니는 그런 모습이 이 마음에 들어서, 이 클립을 따로 저장해뒀었지.
그래도 이런 건 허울 없이 대할 수 있었던 카렌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다. 
내가 바랬던 꿈과 가장 가까울지도 모르는 이 영상이, 한낱 유치한 것 취급 받는 게 두려웠다.
굳이 '이미 아는 사람한테 변명해서 뭘 어쩌겠어'. 어쩌면 웬디 씨라면, 비록 실전은 아니었지만 나름 멋진 무대로 이끌어주고, 나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준 이 사람이라면, 믿고 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한테 부족한 건 뭘까?',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어쩌면 틀린 방향을 잡고 있는게 아닐까?'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민. 
비록 그녀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특이한 기술자일 뿐이지만, 346 프로덕션에서 일하면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자신의 꿈을 무대에서 이루고자 하는 많은 사람을 도와주지는 않았을까?  

"이렇게 예쁜 옷을 입고 화려하게 움직이는 만화 속의 주인공들을 동경해왔거든.
"마치 아이돌처럼요."
"응. 처음부터 아이돌을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잘 보면 서로 닮았잖아."

하지만 그 꿈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넘어가자마자 무너져내렸다. 그때까지 그런 꿈을 붙들고 있는 것은 나 혼자뿐이었으니까. 
내 꿈이 '유치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는 어떻게든 반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나 자신을 숨겼다. 고등학교로 넘어온 지금까지도 '같이 어울리고 싶은 카미야 선배','동급생','후배'가 될 수 있었지만, 꿈과 솔직함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래도 만약 아직 늦지 않았다면,

"만약 내가 아이돌이 되면 지금 이 영상의 풀봇코처럼 될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는요?"

조심스레 되묻는 웬디 씨의 얼굴에는 약간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경청하는 얼굴일까? 혹은....

"날아다닌다던가, 특수한 능력을 쓴다던가, 춤추고 노래를..."
"어림도 없습니다. 꿈 깨시죠."

갑자기 내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 조금 전의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메마른 표정의 얼굴.
지금까지 조금씩 조금씩 부풀어 올라왔던 희망이 다시 차갑게 식어버린 듯 했다. 
그런 갑작스럽고 맥락 없는 변화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이 상황을, 돌변해버린 웬디 씨의 태도를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내가 뭔가를 잘 못 한 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둔 눈이 조금씩 아파오고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혹시 나는 지금까지 이 사람의 장난감같은 게 아니었을까? 눈요기를 위해 샹들리에를 떨어뜨렸듯이, 나는 그저 잠깐 갖고노는,

"카미야 양의 취향을 욕하려는건 아니지만 컴퓨터 그래픽이 7할 이상인 영상에 제 지인이 출연하는건 절대 용납 못하거든요!"

 뭐?
"뭐?"

꿈 깨라고 말하자마자 왜 그런 이해가 안되는 소리를 하는걸까?
티슈로 입을 닦는 척, 찔끔 새어나온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어 웬디 씨를 보았다.

"자...자,자자자! 카미야 양이 저한테 영상자료를 보여주셨으니까, 이제 제가 카미야 양에게 영상, 은 아니지만, 시각 자료로 보여드려야겠군요!"

그녀의 얼굴의 그림자는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열이 받은 건지 좋아서 흥분하는 건지 모를 애매모호한 표정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작업복의 주머니를 이곳저곳 쑤셔대고는, 꼬깃꼬깃 구겨져 있는 모눈종이와 어딘가 낡아 보이는 만년필을 꺼냈다. 곧바로 오른손으로는 풀봇코의 영상이 나오고 있는 내 스마트폰을, 왼손으로는 모눈종이 위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조금 전의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은 알겠지만 뭘 하려는 거지?

"우선 날아다니는 건 훈련을 받아서 와이어를 사용하면 간단합니다. 만약에 관객들의 눈에 직접 보여주는 게 아니라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하는 거라면 카메라의 움직임과 눈속임으로 속도감을 낼 수도 있어요. 풀봇코의 유체이탈 능력은 배우와 똑같은 비율의 인형과 조명을 사용하면 되겠군요. 당연히 가짜라는 게 눈에 보이기 마련입니다만, 조명과 특수효과를 풀봇코의 영혼이나 악당들 같이 다론 곳에 집중시키면 어느 정도 관객들의 시선을 떼어놓을 수 있을 겁니다. 폭발은 간단 무식하게 폭죽을 쓸 수도 있지만, 안전상의 문제가 있으니 붉은 계통의 조명과 연기를 응용하는 게 더 좋겠죠. 그리고...."

웬디 씨는 동영상을 앞뒤로 돌려보면서 자신의 설명대로 모눈종이 위에 그림을 그려갔다. 
그저 작대기 인간에 와이어에 매달려 날아가거나, 점선 인간-풀봇코의 육체-으로부터 작대기 인간-풀봇코의 영혼-이 튀어나오는 식의 간단하고 소박한 그림이었지만, 설명이 진행됨에 따라 모눈종이를 점점 가득 채워가고, 그것들이 한데 모여 수많은 기믹을 품은 하나의 거대한 무대가 되었다.
이렇게 그린 그림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만약 이런 무대가 실제로 만들어진다면 아주 멋지고 화려한 장면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제가 직접 손댈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입니다."

작대기 인간의 손에 풀봇코의 무기, 삼지창을 그려넣는 것을 마지막으로 웬디 씨는 만년필의 뚜껑을 닫았다.

"노래와 춤같은 경우에는 제가 직접 만들고 통제해드릴 수 없어요. 오늘 췄던것도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운 거고, 작곡에는 재능이 없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
"카미야 양을 위해 '어떻게 해 줄',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야겠지요. 음악이면 작곡가, 춤이면 트레이너, 그리고..."

아주 잠깐, 짧지만 어딘가 이상한 침묵이 감돌았다.

"끝까지 함께 해줄 수 있는, 상냥하고 유능한 프로듀서가 말입니다."

막연하게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웬디 씨 같은?"

내 말에 피식하고 웃으면서 웬디 씨는 목을 젖혀 두 번째 잔에 남아있던 내용물을 전부 들이키고 세 컵째의 콘 스프에 손을 댔다.

"고작 일주일 정도 알고 지냈는데 평가가 너무 후하시군요. 안 그래도 잊을만하면 미친년 소리를 듣는 게 일상인데."
 "담배 피운댔지? 내가 있을 때에 담배 피운 적 있어?"
"...없네요. 솔직히 슬슬 말려옵니다."
"만약에 내가 아이돌이 된다면, 웬디 씨는 내 무대를 만들어줄 거야?"
"필요하다면 사비를 털어서라도 만들 겁니다. 이미 몇 번 저질러봤으니까. But!"

기세 좋게 왼손을 들고, 검지와 중지를 펴 V자 모양을 만들었다.

"오직 잠재성과 의지를 가진 위해서지요. 그런데 어이쿠, 잠재성이 있는 카미야 씨는 이미 조건 하나를 충족하셨네요?"

마술쇼의 마술사의 멘트를 흉내내는듯한 말과 함께, 웬디 씨의 중지가 접혔다. 남은 것은 검지.
즉, 정말로 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그렇다면,
남들이 보기에 유치한 꿈이라도, 도전해볼 가치는 있는 거겠지?

"웬디 씨."
"듣고 있습니다."
"나, 아이돌이 되고싶어."
"I know(알아). 그럼 혹시 이번에 346의 오디션을 준비하시는건가요?"
"응. 그래서 웬디 씨한테 오늘 했던 것 처럼 연습하는걸 부탁하고싶어. 알바를 할 때보다는 웬디 씨를 따라가기 힘들지도 몰라. 그래도 도와줄 수 있을까?
"Anytime(언제든지)!"

웬디 씨는 야구모자를 벗어 내 머리에 푹 씌워주었다. 약간 흐트러진 머리를 한번 가볍게 손으로 넘기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Anytime, indeed(언제든지 되고말고)."

하지만, 그 전에 도와줄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웬디 씨, 그리고 내가 도와줘야할 사람이.

>>>>>>

[●REC: 2015/7/23, 14:24~][01:07:20]

화면의 정면에 비친 것은 거울을 등지고 있는 카에데.

그녀는 소매가 짧은 여름용 운동복을 입고,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다. 이미 온몸에 땀방울들이 맺혀있다.

"1, 2, 돌, 고, 5, 6, 7, 8!  왼, 쪽! 1, 2, 꺾, 고, 오른팔!"

뒤의 거울에 비치는 것은 올려묶은 흑발의 여성. 민소매의 체육복을 입은 그녀는 박자에 맞추어 손뼉을 치며 카에데를 주시하고 있다. 여성의 옆에는, 비록 카에데의 모습에 가려져 있지만 춤동작에 따라 드문드문 보이는 삼각대 위의 캠코더가 붉은빛을 깜빡거린다.

"오른, 쪽,  제자리! 왼, 팔... 그만! 방금 약간 어긋났다!"

거울 속의 여성이 박자를 깨고 외친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카에데는 숨을 들이 내쉬며 등을 거울에 기댄다.

"레이 씨, 잠시, 쉬어도 될까요?"
"슬슬 그럴 때가 됐지. OK, 15분간 휴식한다."

레이라고 불린 여성이 화면 안으로 들어와 미끄러지듯이 거울에 기대어 주저앉는 카에데에게 작은 물병을 건넨다. 다시 화면 밖으로 나가 거울에 비친 레이가 캠코더에 손을 대는데, 카에데가 하지 말라는 듯이 손을 젓는다.

"뭐, 끄지 말라고?"
"댄스 레슨이 끝날 때까지는 그냥 두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개인적인 일기같은거라 방송이나 공적인 자리에 나갈 일도 없고."
"그런 거였군. 꽤 체력을 썼으니까 이거라도 도와줄까 했는데 오히려 훼방을 놓을 뻔했어."

거울 속의 레이가 캠코더에서 손을 떼고 그 옆에 다리를 펴고 앉는다.

꿀꺽, 꿀꺽,꿀꺽.
고개를 젖히고 페트병 안의 물을 전부 다 마셔버리는 카에데.

"푸하아아아~!"

"누가 들으면 맥주라도 마시는줄 알겠군."
"고작 4일정도 안 먹었는데 벌써 그리워지는거 있죠? 레이 씨, 이번 라이브가 끝나면 뒷풀이 가실래요? 카와시마 씨가 양주를 준비해놨다고 하더라구요."
"그거 좋지. 하지만 나는 술을 별로 안 마시고, 트레이너로서 너희들의 술 마시는 양을 통제할텐데 괜찮나?"
"이제 그만하고 퇴근해도 될까요? 갑자기 의욕도 없어지고 생각이 자꾸 딴데로 가려고 하는데."

카에데는 아이처럼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양 볼을 부풀린다. 
레이는 그 말에 코웃음 친다.

"어림도 없지. 그리고 지금 내가 볼 때는 술 말고 다른 데에 마음이 가있는 것 같은데?"

정면을 향하는 카에데의 눈이 약간 흔들렸지만, 이내 쓴웃음을 짓는다.

"티가 났나요? 혹시 아까 동작을 하나 틀린 것 때문에?"
"거긴 애당초 틀리기 쉬운 부분이었어. 타카가키의 경우는 실수는 했지만 다른 아이들보다도 더 성공에 가까웠지."
"그럼 어떻게...?"
"얼굴이다."

거울 속의 레이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킨다.

"아이돌은 춤출 때도 미소를 유지해야 해. 그래서 레슨 중에 지적하기 위해 유심히 아이들의 얼굴을 보다보면 딴 생각을 할 때나 힘들 때의 얼굴이 어느 정도 보이거든."
"헤에. 그럼 다른 생각을 하던 제 얼굴은 어땠나요?"
"비밀이다. 어차피 이 캠코더로 돌려봐도 모를 테고, 타카가키가 알게 돼서 그 연기력으로 숨겨버리면 내가 써먹을 수가 없어."
"후훗, 칭찬 고마워요, 레이 씨."
"칭찬이 아니다만은. 그래서, 뭐가 그렇게 고민이라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지?"
"그게 말이죠..."

카에데는 입을 열려고 하다가 잠시 머뭇거린다.

"혹시 '호죠 카렌'이라는 아이에 대해서 제가 말씀 드린 적이 있었나요? 바로 옆 호에서 사는 이웃집 아이인데."

 레이는 잠시 고개를 숙여 골똘히 고민한다. 대략 10초 정도.

"아아, 기억났다."

번뜩 고개를 든다.

"작년 중순즈음에 동생들이 나한테 말해줬었지. '자기들이 담당하는 아이돌이 제대로 레슨을 못하고 침울해하는데, '카렌'이라는 아이가 아이돌 오디션에서 떨어져서 그러더라'라고 말이야."
"...작년 일 치고는 꽤나 구체적으로 기억하시네요?"
"위로해주려고 너랑 같이 술자리에 같이 가준 내 동생들을 아주 알코올로 뻗게 만들었던게 누구더라?"
"아~. 아,아하하하하...."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가서, 이번엔 그 아이와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이번에 346에서 아이돌 오디션을 하잖아요? 그래서 한번 더 도전할 기회를 주면 어떨까 싶어서 오디션 용지를 그 아이와 몇달 전에 새로 알게 된 아이에게 주었는데..."
"거절당했나?"
"처음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카렌 양은 직접적으로 거절하진 않았지만, 그 이후에 제가 오디션에 관해서 물을 때마다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거든요."

카에데는 빈 페트병을 바닥에 세우고 검지 손가락 끝으로 페트병을 여러 방향으로 기울여본다.

"그런데 나오 양이... 이웃 아이가 그러더라고요. 스스로는 이미 포기했고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하지만, 아직 춤과 노래를 완전히 포기한 것 같진 않다고." 

카에데의 시선은 정면, 화면 밖에 있는 레이에게 향한다.

"그래서 그 아이를 도와주고 싶다?"
"네. 작년의 카렌 양의 실패는 어느 정도 제가 모자란 책임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방법을 몰라서..."
"그렇다면. 한번 타카가키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어떻게 도움을 받았는지 되짚어보는게 어떻겠나?"
"네?"

카에데는 이해 못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레이가 말을 잇는다.

"아이돌 일을 시작한 후부터 지금까지, 좀 더 넓게 잡고 싶으면 모델로 일했을 때 시절부터 포함해도 좋아. 그동안 도와주었던 사람들, 그중에서도 타카가키가 가장 의지할 수 있었던 기억에 남았던 한두 명을 흉내 내 보는 거지. 사람은 아무리 천부적으로 기본 스펙이 좋아도,"

카에데의 눈썹이 살짝 움찔하고 떨렸다.

"본인이 의지를 갖추고 그 의지를 서포트해줄 사람이 필요하기 마련이니까. 그게 정녕 흉내라고해도 말이지."
"가장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
 
[RRRR! RRRR! RRRR! RRRR!]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소리가 난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카에데.

"미안, 잠시 실례하지."

거울 속의 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거울 바깥으로 사라진다.
벨소리가 멎는다.

"아아, 세이. 아니, 지금은 휴식중이니 상관없다. 응? 그래, 얼마 전에도 썼었지. ...뭐?"

레이의 소리가 점점 멀어져간다.

"대체 그 '웬디'가 누구길래 우리 매트리스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가져간거지?!"

이윽고 정적이 찾아온다.
홀로 남은 카에데는 껴안은 무릎에 턱을 얹고 초점없는 눈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흉내. 가장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의 흉내라." 

침묵.

[01: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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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뜬다.

"아직도 남아있으려나?"

몸을 일으키고 종종걸음으로 화면 바깥으로 나간다. 거울 속의 카에데는 창가의 선반에 놓여있던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어 무언가를 누른다. 귀에 갖다 대고, 신호음이 멈추기를 기다린다.

"여보세요, 이와마츠 씨? 네! 오랜만이에요. 별일 없으셨죠? 다름이 아니고 여쭈어볼 게 있어서요,"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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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예전 글이 글 항목에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전까지는 완성하는 걸로 마감기한을 두리뭉실하게 잡고 있습니다만 이번엔 실패했군요.
그래도 마감 기한을 정해놓으니 없는 것보다는 빨리 진행되는 느낌입니다.
....질적인 면은 역시나 좀 문제지만요. 
무리수,무리수 신나는 노래...

P.S. 글자 크기가 들쑥날쑥하는데, 어디까지나 사이트 스크립트와 제 프로그램이 충돌해서 그렇지 따로 의도한 바는 없습니다.

앞으로 약 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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