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KATE [OFF]』

댓글: 2 / 조회: 615 / 추천: 3


관련링크


본문 - 05-26, 2019 06:26에 작성됨.

「Farewell, Producer. 부디, 건강하게 지내요. 제가 없어도 밥 잘 챙겨먹고요.」


케이트가 떠나갔다.
건강하라는 말과 계속해서 눈에 밟히는 그녀 자신의 그림자를 남기고 떠나갔다.
승강장으로 들어가는 케이트를 눈에 담고,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한참 뒤에야 떠나는 나.


갈 때는 둘, 돌아갈 때는 하나인 차 안.

이걸 돌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걸까.
아니, 이건 떠나갔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지.
한평생의 반쪽이 될거라고 생각했던 케이트가 떠나갔으니까.


어째서였을까, 갈증 때문에 목이 말라 기운이 없었던걸까.
누가 봐도 말도 안되는 변명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를 들려 페어 사이다 한 병을 샀다.
케이트에게 배맛나는 맥주라고 놀리면서도 마시다보니 어느샌가 빠져버렸던 음료다.
달달하면서도 새큼한, 마치 우리의 사랑과도 같았던 술.
아아, 그래.
잊어버려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너에 대해서 생각해버리고 있는거야.
그래도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케이트.
헤어진 날 당일은 어쩔 수 없는거잖아.


탄산과 맥주, 그리고 화이트 스파클링 와인.
페어 사이다는 세 가지의 맛을 모두 가지고 있어서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맛 또한 가지고 있어서, 언젠가 영국에 간다면 꼭 한 번 마셔보라고 케이트가 추천해주었던 음료다.
뭐어, 페어 사이다 자체는 이 곳에서도 파는 곳이 많으니까 말이야.
영국 본토의 맛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변함없이 상냥했던 케이트처럼 이 녀석도 본토의 맛을 온전히 가지고 있을거다.
그럼 혼자만의 독주회를 한 번 열어볼까.
매가리없는 말 몇 마디를 하고, 병을 따서 한 모금 마신다.
달달한 배의 맛보다는 조금은 씁쓸한 알코올의 맛이 먼저 느껴진다.
씁쓸하고 달달한, 하지만 비오는 히드로 공항에서 마시는 카페모카처럼 씁쓸함이 먼저 찾아오는 페어 사이다.


「Farewell, Producer. 부디, 건강하게 지내요.」


케이트가 떠나갔다.
건강하라는 말과 계속해서 눈에 밟히는 추억의 조각들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갔다.
마트에서 페어 사이다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미리 사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와 한 잔 할 수 있었을텐데.
하지만 케이트는 지금 내 곁에 없고, 나에게 남은 것은 빈 병 뿐.
이 병에 작은 손편지를 담아 바다에 흘려보내면 언젠가는 닿을 수 있을까.
뭐, 아마 닿을 수 있을리가 없겠지.
우리의 인연이 끊어져버린 것처럼, 그 편지도 그저 의미없는 희망을 담은 자기만족의 글일테니까.
그러니까 하지 말도록 하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리고 그 다음 마지막까지 케이트에게 추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빈 병을 봉투에 정리하고 가방에서 새로운 페어 사이다 한 병을 꺼낸다.
조금 전까지 냉장고에 담겨져 있어서, 오늘같은 여름 날씨에 두 사람이서 마시기에는 딱 좋았을 음료.
하지만 같이 마실 사람은 이미 떠나가버렸고, 여름은 그녀보다 한 발 늦게 도착했다.
여름이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좋았을텐데.
그녀와 함께 이 한 잔을 나눌 수 있도록, 시간이 조금만 더 허락되었다면 좋았을텐데.


조금은 가슴 아픈 현실에서 시선을 돌리면,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과 하늘을 보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강 위의 하늘, 그리고 모든 조명이 꺼져 어둑어둑해진 하늘.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같은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다, 머릿속에 떠오른 실없는 생각에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지금이라면, 혹시 지금 공항으로 돌아가면 케이트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


아니, 절대로 그럴리 없다.
내 손으로 그녀를 공항 안으로 배웅해줬고, 그녀가 탔을 런던행 비행기가 떠나가는 것까지 보고 왔잖아.
그러니까 그럴리 없다.
그녀는 나에게서 영영 사라져버린 사람인거야.
내가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해도, 물론 그래선 안 되지만, 만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Farewell, Producer. 부디, 건강하게 지내요.」


잘 있으라는 케이트의 인사, 그리고 진심이 섞인 당부.
네가 그저 인사만 했다면, 나는 그녀를 쉽게 보내줄 수 있었을까.
혹시 네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녀를 쉽게 보내줄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럴 수 있을리가 없다.
케이트는 상냥하니까 그 말을 하지 않을리가 없다.
그러니까 다른 가정을 하면서 시간을 흘려보내자.


그렇지.
만약 내가 그 거리에서 케이트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홀연히 서 있었던 그녀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쉽게 보내줄 수 있었을까.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헤어질 이유도 없었을텐데.
그래, 오히려 그녀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혹시라도 그랬다면.


「Farewell, Producer.」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의 관계를 끝내지 않았을텐데.
네가 그런 얼굴로, 그런 억지스런 미소로, 그런 말로, 그런 손길로, 그런 눈물로 가지 않을 수 있었을텐데.
만나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랬더라면, 우리는 어쩌면 서로 행복하지 않았을까?


불꽃놀이의 시작을 알리는 거대한 축포.
하늘을 쳐다보던 사람들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리면, 커다란 불꽃을 보며 기뻐하는 미소들이 한 눈에도 여럿 들어온다.


아아, 네가 여기 있다면 좋았을텐데.
이 불꽃놀이와 함께, 너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좋았을텐데.


「Farewell. Producer.」


난 그런 생각을 해, 케이트.
너에게 나란 존재가 없었다면 너는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야.
아이돌이라는 세계에 끌어들여서, 못볼 꼴을 너무 많이 보여주었잖아.
나 혼자 회사에서 쫓겨나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놈의 스카우트가 뭔지 그 거리에서 너를 스카우트해버렸잖아.
그리고 레슨이라는 명목으로 너를 힘들게 하고, 또 힘들어하는 너를 보면서 마음 약해져버린 너를 한 번 안아버렸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책임 못 질 행동을 해버린 셈이네.
네가 아무리 힘들어도, 네가 아무리 울어도, 나는 프로듀서라는 이름으로 너에게 다가갔어야 했는데.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그저 같이 일하는 동료로서 너를 대했어야 하는데.
그랬다면 너를 이렇게 아프게 보낼 일도 없었을텐데.


「Farewell, Producer.」


공항에서의 케이트는 의외로 의연했다.
이미 티켓팅까지 다 마쳐버려서 더 이상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던걸까, 아니면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일본을 떠날 수 있기에 조금은 행복했던걸까.
둘 중에 어떤 거라도 상관없지만, 나는 후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야 나도 일본 안에 포함되는거고, 프로덕션도 포함되는거니까 웬만하면 둘 다 잊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그녀에게 도움되는 일은 한 번도 못 해줬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좋은 이야기는 제대로 해 주지 못했으니까.
사랑한다는 이야기도, 네가 귀엽다는 이야기도 지나가는 말로만 몇 번 해주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잊어버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나도, 프로덕션도, 아이돌의 일도, 그리고 이 일본이라는 나라도.
네가 말하는 Farewell의 의미는 그런 의미니까 말이야.
작별을 고하는 시인의 말처럼, 치사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한 아이돌을 위한 마지막 배웅처럼.


「Farewell.」


잘 있으라는 말에는 얼마나 많은 뜻이 담겨져 있는걸까.
다시는 못볼 것같다는 의미가 조금은 내포되어 있지는 않을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야 노력하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만...


「Farewell.」


최소한 나는, 네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내가 잘못한 것은 너무나 많고, 너는 그런 나를 항상 상냥하게 껴안아줬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너를 따라 이렇게 속삭이고만 있는거야.


「Farewell.」


속삭이는 목소리로 작게 전한 나의 거짓된 마음.
그래, 이게 아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조금 더 애절한 말이었어.


「Farewell.」


지금의 말은 제대로 말 한마디 하지도 못하는 나 자신에게 하는 말.
그리고 나는, 화려하게 터지기 시작하는 불꽃놀이 아래에서 작은 목소리로 고백한다.


「사랑해, 케이트. 부디 행복해야해.」

3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