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아나스타샤와 KSP

댓글: 4 / 조회: 687 / 추천: 1


관련링크


본문 - 04-15, 2019 20:03에 작성됨.

아나스타샤와 KSP

아나스타샤라는 아이돌은 밤하늘에 외로히 빛나는 별이다. 은여우 닮은 외모도 그렇고 러시아계 일본인인 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천체관측이라는 매니악한 취미를 갖고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쉴 때 천문 잡지를 꼭 손에 들고 더러는 별 사진 찍는다고 비싼 카메라들 들고 어디론가로 가버린다. 그녀의 취미를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담당 프로듀서인 나를 비롯하여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녀는 고독하기에 홈파티를 매우 좋아한다.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기분 좋은 날이면 친애하는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나스타샤의 홈파티에 처음으로 초대받았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 홈파티를 연 게 개기월식 기념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였고, 연습생 시절이었으며 인종이나 취미가 독특해서 그런지 다들 바빴는지 모르겠지만 나 말곤 아무도 오지 않았었다. 내가 홈파티에 뒤늦게라도 허겁지겁 오자 그녀는 잘 꾸며진 쓸쓸한 방에서 벌개진 눈가를 다급히 감추며 나를 반겨줬었다. 그때 아나스타샤가 나를 보자마자 했던 말이 잊히지 않았다.

"즈베즈다...별은 별자리로 이어져도 서로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네요."



그리고 나는 어느덧 아나스타샤 솔로데뷔 기념 홈파티를 초대받았다. 아나스타샤를 처음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냥냥냥과 러브라이카라는 유닛활동을 거쳐 벌써 You're stars shine on me 솔로데뷔를 하게 되었고 활동 휴식기에 이르렀다. 초대장을 보면서 그동안 내가 아나스타샤라는 아이돌을 이 자리에 올리기 까지의 여정을 떠올리며 감회에 사로잡혔다. 친구라고 불리울만한 동료들도 늘었고 아이돌 생활에 적응을 잘 한 것 같았다. 그녀가 나에게 살짝 자기는 누구와도 거리감이 있다고 말해준 게 걸리긴 했지만.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북적이는 분위기는 절로 만족스러웠다. 대문을 열자 내 눈에 보인 건 니노미야 아스카와 하야미 카나데였다.

그 둘은 달을 보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스카는 어려운 말로 자기를 꾸미는 중2병 아이돌이고 카나데는 어딘가 아련한 비밀을 품고 있고 회의적이며 신비로운 아이돌이었다. 이 둘은 내가 있는 것도 모르고 얘기를 하는데 가관이었다.

"아아--, 「붉은 달」이로군. 저 붉은색은 우리가 진짜로 보고있는 걸까."

"글쎄. 달에 사람이 갔다는 것도 진짜라고 믿고 갈대처럼 흔들리는 사랑도 진짜라고 믿는데 붉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걸까. 그냥 해본 말."

나는 밤하늘을 보면 그냥 검은 하늘에 하얀 점과 원반이 박힌 걸로만 보이기 때문에 그런 감성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안으로 들어갔는데 뜻밖에도 나를 반긴 건 격앙된 아나스타샤였다.

"프로듀서씨, 아냐는 카나데에게 화났어요."

그녀가 보여준 건 데레포였다. 방금 전 카나데와 아스카가 달을 보며 토론한 걸 업로드한 내용이었다. 그녀가 가리키고 강조처리 한 건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달에 사람이 간 게 진실일까 아니면 그렇다고 믿는 걸까>

화난 그녀를 달래줘야 하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랐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카나데는 요즈음 데레포로 오글거리는 글을 잘 쓰는지라 평상시와 뭐가 다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아나스타샤는 나지막히 러시아어 욕을 하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무언가 심각하게 꼬였다는 걸 깨달았다. 북적이고 시끄러운 거실을 지나 쫓아가 그녀의 방문 앞에 섰다. 방문에는 달에 발자국 찍힌 사진이 걸려있었고 주위는 시끄러웠다. 아마도 오가타 치에리가 최근에 배운 디제잉을 해보겠다고 디제잉 장비를 설치하고 음향테스트를 하다가 사고친 것 같았다. 방문을 두드리고 그녀를 불러도 묵묵부답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지금은 홈파티 중이고 나와 그녀가 갈등에 놓인 걸 다른 아이돌들이 모르게 해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홈파티의 주인공이 지금 없다는 것도 모르게 하고 손님들을 빠르게 내보내야겠다. 그래서 우선은 거실로 가 당황하는 치에리를 달래고 손님들을 전부 모아서 이미지게임을 제안했다.

이미지게임이란 주제를 던지고 거기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참석자들을 익명으로 쓰는 파티게임의 일종이다.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이라든지 '클럽 죽돌이일 것 같은 사람'이라든지 주제는 다양하고 의 상하기 좋은 주제가 적당하다. 한창 진행을 하는데 아나스타샤가 어느덧 끼어들어 주제를 하나 던졌다.

<프로듀서와 가장 닮은 캐릭터>

호머 심슨이라든지 도라에몽 심지어는 오우거까지 나왔었다. 그 중 압권은 제베디아 커먼이었다.

누가 봐도 아나스타샤가 쓴 글씨에 그녀 스스로 제베디아 커먼에 대해 보여줬는데 좌중은 포복절도해 까무러쳤다. 나는 그녀의 비웃음이 가장 인상깊었다.

홈파티가 끝나고 그녀는 나에게 휴대폰을 맡기더니 별 사진 찍고 일주일 뒤에 오겠다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지금이 휴식기라고 해도 이 타이밍에 그녀가 사라지는 건 그다지 좋지 못한 현상이지만 나는 서로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그녀를 기다리기로 했다.

윗선과 주변에서는 그녀의 실종을 추궁하지만 나는 다른 아이돌에 비해 아나스타샤에겐 좀 더 큰 자유를 부여해주긴 했다. 그녀는 물론 성실하기도 했지만 나 자신이 그녀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국어도 못하는데 러시아어는 너무 어렵고 밤하늘은 봐도봐도 지루해서 천체관측이라는 취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하고 싶은 건 별 생각없이 다 해주는 편이었고 신기하게도 그녀의 본모습이 곧 세일즈포인트가 되었다. 톱아이돌이 되기 위해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아이돌들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그건 행운이었다.

나는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서랍에 넣은 그녀의 휴대폰을 보니 흑심이 생겼다. 그러다가 문득 걱정이 되었다. 혹시 다른 남자가 생겨서 사랑의 도피를 한 걸까. 이대로 러시아로 영영 도망치는 걸까. 프로듀서가 담당 아이돌의 휴대폰을 검열하는 건 사고방지를 위한 필요악이라지만 도의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악이 이겼고 나는 휴대폰을 열었다.

그녀의 휴대폰은 생각보다 굉장히 깨끗했다. 동료 아이돌과 나와 대화한 기록만 있다든지 사진이나 인터넷 검색 기록도 깨끗했다. 아이돌이라도 사람인데 사적으로 나쁘고 이상한 짓을 해도 괜찮을텐데 아주 성실했구나. 특이한 점이라면 내 이름을 '제베디아 커먼'이라고 저장한 것과 카나데가 전에 쓴 그 글을 캡처하고 강조처리 했다는 것이다.

제베디아 커먼이 뭔지 검색했더니 캐릭터 설명으로 '겁이 없는 건지 뇌가 없는 건지 누가 압니까'라고 쓰여져 있고 관련 검색어로 커벌 스페이스 프로그램이 나왔다. 나를 뇌없는 캐릭터에 비유한 것도 황당하고 우주선 발사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는데 나는 대체 너드를 위한 이딴 게임이 왜 있는지 이해 안 가 혀를 차다가 문득 아나스타샤가 혼자서 이런 게임을 붙잡고 낑낑댔을 생각을 하니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아나스타샤 담당 프로듀서나 되었는데도 담당 아이돌을 이해하기 위해 좀 더 노력을 하지 않은 게 떠올라서 그녀를 볼 면목이 없었다.

퇴근 후 낡은 컴퓨터를 켜 KSP를 사고 깔았다. 사양이 딸려서 안 돌아갔다. 수중에 있는 돈을 보니 고사양 컴퓨터를 맞추면 하루 세 끼를 라면으로 때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 굶주린 그녀를 생각하면 나의 굶주림은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바로 아키하바라로 가서 고사양 컴퓨터를 샀다. 왠지 블랙 말랑카우라고 불린 것 같지만 이것 저것 따질 게 아니었다. 그러고 바로 집에 가서 KSP를 깔고 실행했다. 우주선 발사라고 해도 게임이니 쉽게 생각하고 대충 조립하고 발사했다. 조종석에 앉아있는 캐릭터는 역시 아나스타샤가 말했던 제베디아 커벌이었다. 그리고 발사와 동시에 화려하게 폭발했다.

나는 눈이 동그라져서 수정하기 시작했다. 이것 저것 깨부수고 다시 고치고 하길 백 여 번 만에 드디어 우주까지 로켓이 날아갔다. 나의 제베디아는 이미 백 여 차례 죽어나간 후였다. 하다보니 재밌어졌다.

그 후 나는 근무 중 몰래 KSP 자료를 찾아보고 퇴근 후 KSP를 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드디어 미쳐서 정신나갔다고 수군거렸다. 3일 째에 인공위성 운용에 성공했고 그 후 모드를 깔아 새턴V 로켓과 아폴로 11호 데이터를 받았으며 달나라로 가기 위해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렇게 제베디아는 수 천 번 터져나간 끝에 달착륙에 성공했다.

어느덧 아나스타샤의 예상 도착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다. 달착륙한 커벌을 캡처하고 감개무량에 빠졌다. 일개 게임이고 이미 풍부한 자료와 데이터가 있음에도 달착륙은 이렇게나 힘든 일인데 無에서 모든 걸 쌓아올린 옛사람들은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이제는 못가는 달나라를 꿈꾸는 아나스타샤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다시 달나라로 갈 날을 얼마나 기다릴까.

이런 생각이 들자 달착륙을 의심하고 부정했던 카나데가 미워지고 아나스타샤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갔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초췌했지만 눈빛만은 별빛으로 빛났다. 나는 그녀가 몹시 그리웠고 보자마자 눈물이 나왔다. 그녀도 내가 반가우면서도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KSP에서 한 달착륙 스크린샷을 그녀에게 보여주면서 중력을 거스르고 우주선을 조종해 착륙시키는 게 너무나도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어쩌구 각운동량이 어쩌구 분리형 연료통 로켓이 어쩌구 물리학 그리고 항공우주공학적으로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는 식은 땀을 흘리면서 말했다.

"프로듀서씨, 천체관측과 항공우주공학은 다른 분야에요. 아냐도 KSP를 했었지만 너무 어려워서 도중에 그만뒀어요."

나는 아나스타샤를 이해하는데 또 실패했구나. 그녀의 눈을 약간 슬퍼보였고 나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는 사진 한 장을 꺼내서 나에게 보여줬다.

"프로듀서씨는 이 사진이 뭔지 아시나요?"

검은 김에 하얀 소금 가루가 뿌려져 있고 더러 하얀 빗금이 쳐져 있는 사진으로 보였다. 좀 더 나은 대답을 해야겠지만 눈을 씻고 봐도 그렇게로만 보였다. 그렇게 말하니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카메라 조이개 열고 장시간 노출로 사자자리 유성우를 찍어서 그 중 잘 나온 단 한 장의 사진이에요. 매년 이 맘 때면 유성우를 찍기 위해 아무도 모르는 한적한 곳으로 갔어요. 다음에는 반드시 아냐와 함께 가요."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고생 끝에 기껏 찍어온 유성우 사진을 메마른 감성으로 평을 내린 나를 보고도 같이 별 사진 찍으러 가자니 면목이 없었고 차마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녀가 전에 말했던 게 문득 생각났다. 별들은 별자리로 이어졌어도 서로의 거리는 이만큼이나 멀었던 걸까. 어색한 분위기를 깬 건 그녀였다.

"그래도 아폴로 호의 달착륙이 가진 의미를 알아주셔서 감사해요. 이걸로 우린 스푸트니크...동반자에요."

오늘 유달리 달이 크게 보였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남긴 발자국도 보일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린 같은 하늘을 보고 있구나, 그렇게 느끼니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것 같았다.


-----------


처음으로 올리는 소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1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