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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London Step 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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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17, 2019 15:38에 작성됨.

「오늘 런던은 흐리고 비가 오겠습니다. 강수량은-」


문득 쳐다본 작은 벽걸이 TV에는, 음울한 색의 옷을 입은 기상캐스터와 함께 런던의 날씨가 나오고 있었다.


「프로듀서 씨, 뭘 그렇게 보세요?」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나를 보며 별일이라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어오는 초록색 옷의 사무원.
어서 다시 일하라고 하는 것만 같은 사무원의 재촉에, 나는 잠시 변명거리를 생각하다 이내 포기하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아, 치히로 씨. 잠깐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TV요? 뭐 재밌는 뉴스라도 나왔나요?」


「아뇨. 그저 런던의 날씨에 대한 내용이 나왔습니다.」


「런던의 날씨요?」


나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되묻는 사무원 씨.
뭐, 그렇겠지.
이 시간에 방영하는 세계 각국의 날씨 같은 것을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 따위는 없을테니까.
다시 쳐다본 TV 속의 기상캐스터는 너무나도 밝은 베이지색의 원피스를 입고 각국의 날씨를 짚어주고 있었다.
 
「갑자기 런던의 날씨는 왜요?」


「글쎄요, 그럴 기분이 들었달까요.」


나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사무원 씨.
아, 저 표정은 나에게 한 마디 단단히 야단치려고 하는 얼굴이다.


「정말, 그렇게 농땡이 부릴 시간이 있으시면 일에 집중해주세요. 사무의 진도가 전혀 안 나가고 있잖아요?」


「예, 죄송합니다.」


사무원 씨와 하는 대화가 늘 그랬듯이, 이 대화도 나에 대한 힐난으로 끝이 난다.
그래, 하는 것마다 실패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프로듀서들의 밀린 사무를 대신하는 것 정도이겠지.
아이돌 스카우트도 잘하지 못하고, 아이돌 레슨도 잘 시킬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사무를 해주는 것뿐이니까.
그러니까.


「아, 비가 오네요. 우산, 안 가지고 왔는데...」


문득 창 밖을 쳐다보던 사무원 씨의 작은 푸념이 들려온다.
그 목소리를 따라 깨알같은 작은 글씨들이 잔뜩 쓰여져 있는 모니터가 아닌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 곳에는 그녀의 말처럼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저 비는 소나기일까, 부슬비일까, 아니면 그저 지나가는 한 때의 비일까.
세상이 조금씩 젖어올 수 있도록 내리는 비는, 끊길 듯하면서도 끊기지 않는 하나의 애달픈 독주곡을 연주한다.


「프로듀서 씨, 혹시 우산 있으세요?」


「예? 아, 저 말입니까?」
 
「네. 혹시 있으시면 좀 빌릴까 해서요.」


「음, 그렇네요...」


사무원 씨의 말에 책상 밑 서랍을 뒤져본다.
이런저런 잡동사니들과 폐서류들이 가득한 서랍을 뒤져 찾아낸 것은, 꽤 오래 전부터 이 공간을 지키고 있었던 듯한 작은 접이식 우산 하나.
이 녀석은 언제부터 이 곳에 놓여져 있던걸까.
적어도 내가 여기에 놓은 기억은 없다.


「있으신가요?」


「아, 네. 있습니다. 좀 낡은 접이식 우산이긴 합니다만...」


「그거면 괜찮아요. 한 번 줘보시겠어요?」


「여기 있습니다.」


나의 손에서 사무원 씨의 손으로 건네진 우산.
우산을 받아든 그녀는 우산을 펴 보기도 하고 물을 부어보기도 하며 이리저리 실험해보다, 이내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오늘 퇴근은 이걸로 문제없겠네요. 고마워요, 프로듀서 씨.」


「별말씀을요.」


「그런데... 어라? 이거, 프로듀서 씨의 것은 아니죠?」


갑작스러운 사무원 씨로부터의 질문.
그 물음에 내가 순순히 그렇다고 대답하고 그것을 어찌 알았느냐고 묻자, 그녀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대답을 하며 우산을 돌려준다.
그녀의 대답과 그녀의 표정과 그녀가 돌려준 우산에 있는 것.


「아.」


기억에서 사라졌어야 할 이름.
하지만 절대로 사라지면 안 되었던 이름이, 그곳에 쓰여 있었다.


「이 우산은...」


「쓰지 않으실 건가요?」


사무원 씨의 한 마디가 깊숙이 나의 가슴을 찔렀다.
밖에는 비가 오고, 나의 손에는 작은 우산이 들려있다.
마침 오늘 출근할 때에 대중교통을 이용했기에, 나는 우산을 쓰고 돌아가야만 한다.
이 우산을 놓고 간 그녀도 그것을 바랐을 테지.
하지만, 그렇지만 나는 그 이름을 볼 낯이 없다.


「예. 오늘은 차로 이동했기에 사용하지 않을 것 같군요. 사무원 씨만 좋으시다면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그런가요. 정말, 그 아이도 불쌍한 아이라니까요.」


나의 말에 혼잣말을 하고 다시 우산을 건네받는 사무원 씨.
빗줄기는 조금씩 강해지고, 검은 하늘은 밝혀진 가로등이 조금씩 점멸하기 시작한다.
오늘 이렇게 많은 비가 예보되어 있었던가, 분명히 아침에 출근했을 때에는 맑았을 터인데.


「프로듀서 씨.」


「예, 사무원 씨.」


「저는 이만 퇴근해 볼테니까, 프로듀서 씨는 거기 있는 사무를 다 끝내고 난 뒤에 퇴근해 주세요.」


난데없는 사무원 씨의 힐난.
하지만 그것도 그녀 나름의 다독임이라면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지.
지금 나에겐 우산도 없고, 이 비를 막아줄 것이라곤 이 프로덕션 건물밖에 없으니까.


「예, 그러도록 하죠. 지금 퇴근하실건가요?」


「네, 안되나요?」


「아뇨, 그럴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내일 뵙도록 하죠.」


「내일 뵐게요. 참, 우산은 제가 쓰고 갈께요?」


「예, 그러시죠. 조심히 들어가세요.」


「프로듀서 씨도요.」


나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우산을 가져가는 사무원 씨.
그런 그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하고 배웅하는 나.
그녀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비가 오는 거리로 나가면, 이제 사무실에는 나 혼자만이 남게 된다.
나 혼자, 이 넓은 곳에 홀로 남게 된다.


「하아...」


사무원 씨가 나가자마자 터져나오는 한숨.
밀린 사무에 대한 한숨일까, 아니면 비가 오는 것에 대한 걱정이 몰려왔기 때문일까.
잠시 창 밖을 멍하니 보던 나는, 이내 다시 내 자리에 앉아 사무원 씨가 당부한 사무를 하기 시작한다.
깨알같은 글씨들과 하얀 바탕이 모여 비가 내리듯이 흘러내려간다.
검은 눈물들이 빗발치듯이 치덕이며 맺히는 유리창.
마치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듯이 빠르고 느리게 움직이는 손가락.
그리고 결국에는 곡이 끝나는 것을 알리는 듯이 멈추는 손.


「하아...」


두 번째의 한숨.
사무는 진작에 끝났을 터인데, 나는 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걸까.
비는 멈추지 않고, 유리창에 달라붙어 조금씩 미끄러지는 빗물들도 어느샌가 창틀에 모여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런던의 중심가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멈추지 않는 비.
런던에서도 이곳처럼 비가 오려나,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자리를 정리하고 바깥을 쳐다본다.
세찬 비가 내리는 바깥에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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