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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the Wild Wind Blows

댓글: 3 / 조회: 744 / 추천: 3



본문 - 03-01, 2019 23:55에 작성됨.

오늘의 시어터는 한산하다.

햇살 한 줄기가 창문을 뚫고 들어오며 인사를 건넨다.

햇살에게 다시 인사를 건네러 창문을 바라보면, 언제나처럼 맑고 푸른 캔버스가 활짝 미소짓고 있다.

다들 Vacation을 간 건가...”

넓은 방이 약간 공허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서서히 발걸음을 떼 본다.

 

야구를 하자 조르다가 코토하에게 끌려가던 스바루가 없다.

방 어딘가에서 항상 넷이 떠들며 게임을 하던 안나, 유리코, 아미, 마미가 없다.

항상 노래를 부르다 시호에게 뭔가 잔소리를 듣는 카나가 없다.

 

, 코로쨩!”

“CHIZURU! Roco는 코로가 아니라 Roco인 거에요!”

그래도, 내심 반가운 건 변하지 않는다.

, CHIZURU, 혹시 다른 분들은 왜 아직 안 온 건지 아세요?”

, 코로쨩, 혹시 오늘 뉴스는 봤니?”

? 그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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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THE WILD WIND BL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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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뉴스에서 뭐라 했는지 들었어?

우리 모두에게 뭐가 일어날 지 들었어?

우리가 아는 이 세상이 끝날 거란 걸 들었어, 들었어?

.

.

.

 

구름이 흘러간다.

저 창공이 그에게 이제 때가 왔음을 고하고 있다.

창문 너머 비치는 얼굴에는 이미 잔혹한 시간이 그 상처를 문득문득 남겨놓았다.

그는 이미 늦었지만, 딸만큼은 세상에 굴복하는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보다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램이었다.


딸이 세상에 색을 칠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딸을 막지 않았다.

딸이 아이돌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딸을 막지 않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고, 도와주고, 받쳐주었다.

뉴스를 보자마자, TV를 끄고 딸의 사진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이제, 그가 딸을 위해 할 일은 모두 끝났다.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뜻을 펼치고 있을 그녀를 떠올리며 작별을 고한다.

가슴 한 켠이 깎여나가는 그 감각은, 기이하게도 몹시 편안했다.

.

.

.


그래, 로코는 떠올릴 수 있었다.

최후의 날, 심판의 날, 아마겟돈, 그 날을 부르는 거창한 말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옛날 사람들의 달력이 이걸 예측하고 있다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그 날은 바로 오늘이다.

우리가 들은 적 없는 재앙이 있을 거야,

하늘을 환히 밝히는 무언가가 있을 거야,

세상은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이 아니게 될 거야,

알고 있었니, 알고 있었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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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식기들을 전부 지하실로 가지고 들어간다.


치즈루가 로코를 부를 새도 없이, 로코는 어딘가로 급히 뛰어갔다.


지하에는 사람 둘 정도가 누워 잘 공간과 테이블 위의 라디오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냉동식품으로 차 있었다. 전자레인지는 물론 공간만 차지하기 때문에 위에 남겨놓았다.


사다리를 끌며 비상계단을 오른다. 복도에는 이미 군데군데 페인트가 흘러넘친 자국이 있다.


하루에 한 끼 정도만 먹으면 몇 달은 버틸 수 있겠지.


지체할 수 있는 시간은 이제 단 1초도 없다.


이 날을 대비하기 위해, 얼마의 시간을 투자했는가.


이 날이 끝나기까지, 얼마의 시간만이 남아있는가.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이 정도 준비해두면 됐겠지, 하고 마지막으로 문을 닫을 준비를 한다.


이제 더는 생각해선 안 된다. 아무렇게나 준비물들을 흩어놓고, 널빤지를 자르기 시작한다.


뉴스에선 별 신경쓰지 말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의 형제들과 친척들도 그렇다.


치즈루같은 로코가 사랑하는 동료들도 그렇다.


하지만 뉴스를 그대로 믿기에는 너무 많은 걸 봐 왔다.


부동산이 무너지기 전에도 그랬다.


무명의 아이돌 한 명이 말 못할 비리로 고통받았을 때도 그랬다.


그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말해,

그들은 절대 진실은 이야기하지 않지,

그들이 원하는 것들만 우리에게 이야기하지,

알고 있었니, 알고 있었니?


마지막으로 집을 둘러본 후, 아내와 함께 지하실 문을 걸어잠근다.


그녀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녀의 심장이 두근대며 그려나가는 대로, 뼈대를 만들어나간다.


그와 그녀는 끝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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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작은 가족 사진을 바라본다.


대충 뼈대를 세운 후, 시어터 기념품샵에서 아무렇게나 가져온 물건들을 매달기 시작한다.


그의 아내의 볼을 따라, 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이자, 아마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MEGUMI, 이건 DEKOSAN, 하고 누가 그려진 상품인지를 굳이 소리내어 불러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내의 손을 잡고, 하소연하듯이 둘이 처음 만났을 때를 죽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한 문장을 몇 번이고 되뇌어보며, 그들의 시간을 최대한 생생하게 읊어본다.


이름을 부르며 열쇠고리를 걸고, 텀블러를 붙인다. 무슨 곡을 불렀고, 시어터에선 무슨 일이 있었고, 연습은 어땠으며, 라이브는 얼마나 훌륭했고, 팬들이 어땠고, 하는 이야기들.

죽 떠올려보며, 이젠 흩어져 사라져가는 기억의 파편들을 다시 맞춰간다.


그들이 이 날을 위해 지하실을 준비한 시간은 이제 몇 주를 훌쩍 넘겼다.


로코가 옥상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끓여놓은 차를 마시며, 지하실 안에서 이불을 덮고 시간을 보낸다.


거친 바람에 두 갈래로 묶은 머리가 휘날리지만, 개의치 않고 살을 붙여나간다. 아름다운지 어떤지는 이제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은 대로 몸이 따라 움직인다.


심판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소란 떨 필요없이, 그냥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끝이다.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다. 이제 조형물에서 손을 뗀 후, 롤러와 스프레이 캔을 꺼내든다.

온갖 가나와 알파벳과 여러 형상, 도형들이 머릿속에 떠다닌다. 무언가를 고를 시간은 없다. 바닥에 끌리는 빛깔을 흩뿌리기 시작한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쓰는 도중에 글자가 바뀌면 지우지도 않고 그대로.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딸에게 마음속으로 당부해 본다.

이 모든 게 끝나고, 혹시나 살아남는다면,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 살아가달라고.

서로가 서로를 돕고, 살아갈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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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다.

너무나도 즐겁다.

온 세상을, 마지막으로 한 번 나의 색으로 물들여본다는 게.

온 세상에, 마지막으로 한 번 내 진심을 크게 외쳐본다는 게.

온 세상에, 마지막으로 한 번 나 자신을 던져본다는 게.


지금이 아니면 언제겠는가?

이 곳이 아니면 어디겠는가?

바닥이 색으로 물들어간다.

마음도 색으로 물들어간다.

오늘만큼은, 이 극장의, 이 무대의, 이 세상의 주인공은 바로 나인걸.

몇몇 군데는 색이 번지고 섞여서 형상을 잘 알아볼 수 없게 된 구간도 보인다.

그 구간마저도 페인트가 소용돌이치며 섞이는 모습이 좋아보인다.

자잘한 곳을 건드릴 이유도, 시간도 없다.

실수한 곳까지 작품으로 받아들이며, 그러면 그런대로 그 부분은 그릴 것을 아예 바꿔가며, 이젠 그저 옥상을 캔버스로 물감을 마음 가는대로 흩뿌린다.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다채로운 그림이 마음을 뜨겁게 달군다.


남은 공간에는 스프레이 캔으로 아무런 글자들이나 그려본다.

동료들의 이름들, 765프로덕션, 72, 자신의 이름, 소중하고 특별한 문자열들을 그래피티 주변에 그려넣는다. 읽을 수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 가는대로, 때로는 와일드하게, 때로는 섬세하게, 크고 작게. 서서히, 분명히, 불규칙적인 어떤 형상이 생겨난다.


주변에 있는 라디오에서는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해달라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멸망은 오지 않는다고, 내일 사람들은 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상을 살아갈 것이라고.


라디오를 끄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네모반듯한 두 글자를 새긴다.

이내 피곤함의 물살에 휩쓸려, 저 멀리 꿈 속으로 떠난다.

이내 잠에 빠져든 로코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게 웃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라디오에서는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해달라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멸망은 오지 않는다고, 내일 사람들은 또 여느 때와 다름없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인생을 살아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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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되는 소리.


거짓과 탐욕이 겁에 질려 사라지고 진실된 마음만 남는,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은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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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 보니, 가운데에 세워놓았던 조형물은 부서져 바닥에 열쇠고리가 아무렇게나 돌아다니고 있었다.

옥상은 어제 칠해놓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 뒤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비몽사몽한 채로 내려가보니,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난리였던 것 같다.

연락이 하나도 안 됐다고, 지진이 작게 났다는데 옥상에서 나무로 뭘 세워놓고 자고 있으면 뭐하자는 거냐고 프로듀서에게 소리도 엄청 들어서 조금 울 뻔 하기도 했다.

그렇게 어찌어찌 진정이 되고, 주위를 둘러본다.

몇 명은 연락이 아직도 안 닿고 있어서 다들 걱정하고 있다고,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그래피티는 정말 멋있어서 남기기로 했다는 등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다.

아직 안 온 동료들에게도 Art를 보여주면 어떨까 하고 서로 떠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제 뉴스 이야기는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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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그 부부를 찾아냈을 때, 그들은 서로 껴안고 있었어,

옷가지 옆에는 수면제 통이 굴러다니고 있었지.

그 날 그들은 지진을 종말의 순간으로 착각했어,

그저 흔한 거친 바람이 불던 날이었지...






작가의 말: 로코 생일 축하해!

네 저 메탈로 글 쓰는 미친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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