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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카오리 허밍(歌織 Humming)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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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10, 2019 21:43에 작성됨.


 7.


 765 프로덕션의 회식 장소는 몇 군데 정해져 있다.


 아무래도 미성년인 아이돌들이 대부분이고, 프로듀서가 술을 먹지 않는 사람인 점도 있기 때문에, 보통은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고급 뷔페, 때로는 아래층의 타루키정에서 먹고 마신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성인들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한다. 프로듀서가 술을 먹건 말건, 신입 사무원인 아오바 미사키가 술에 약하건 말건 그녀들에게 맥주와 일본주, 그리고 때로는 와인까지, 나름대로의 삶의 활력소이다.


 그래서 미성년 아이돌이 귀가한 후의 2차는 언제나 술집이었다.


 아이돌 복지가 나름대로 잘 되어 있는 765 프로덕션답게, 일반적으로는 작은 술집을 대절하여 먹고 마신다. 성인조라고 해 봐야 몇 명 되지 않기 때문에 크고 화려한 가게를 빌리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프로듀서의 판단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한번, 만취한 모모세 리오와 만취당한 토요카와 후카가 사이좋게 공원에서 널부러져서 자고 있는 것을, 우연히 퇴근하던 프로듀서가 한번 발견한 뒤, 프로듀서의 재량으로 프로덕션 내에 금주령이 떨어졌었다.


 그러나 금주는 밀주를 부른다 했던가, 어떻게든 몰래 마시는 것을 제아무리 유능의 끝을 달리는 프로듀서라 하더라도 막을 수는 없었고, 성인조의 자칭 리더인 코노미와 협상을 타결했었다.


 765 프로덕션에서 반경 500m 밖으로 나가지 않거나, 자택에서 마실 것.


 가게에서 마시는 경우, 자정 전에 귀가할 것.


 모두가 취하지 말 것.


 이 세 가지 룰만 지키면 금주령을 풀겠다는 내용이었고, 술이 고팠던 바바 코노미 외 다른 성인 아이돌들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물론 여기에는 프로듀서의 ‘한 번만 더 누구 하나 술 먹고 나자빠져 있으면 전원 아이돌 은퇴시킬 겁니다.’라는 분노 가득한 일갈이 영향을 미쳤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연대책임은 부당하다고 반항해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프로듀서의 분노를 더 부채질 할 것만 같았기 때문에 조용히 입 다물고 넘어갔던 기억이, 코노미에게는 또렷하게 존재한다.


 ”그-으래서, 우리의 아지트가 이렇게 좁은 자취방이 된 데에는 이런 슬픈 사정이 있는 거라구-!“


 ”아하하......“


 당연하게도 코노미의 말을,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이해하지 못했다.


 미나세 이오리나 하코자키 세리카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유복하지만 엄한 가정환경에서 자라왔고, 부친의 과보호는 덤으로 따라다녔기 때문에 이러한 술자리에 참가할 기회가 적은 것이 현실이었다.


 때문에 안 마시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의문이 드는 것은 카오리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바바 코노미와 모모세 리오는 빠르게 이 사실을 인지했다. 선천적으로 주량에 타고난 강점이 있지 않은 이상, 술을 많이 마셔보지 않았다는 사실은 곧 술에 약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카오리의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을까, 옆에서 맥주를 홀짝이던 모모세 리오가 카오리를 보더니 히죽 웃었다.


 ”양갓집 규수께서 언제 이런 모임에 참석해 보셨겠어. 그래서 치즈루가 더 대단하다니까?“


 ”그럼요~. 저 위화감 없는 맥주 원샷.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걸요!“


 ”오, 오-호호호! 서민들의 삶에 대해서 많이 연구했으니까요!“


 모모세 리오와 키타카미 레이카가 추켜올려주자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하이 톤의 웃음이 나왔지만, 옆에 있던 코노미와 눈이 마주치자 흠흠, 하고 마시던 맥주 캔을 내려놓았다.


 ”가끔은 진짜 서민이 아닐까 싶지만.“


 ”무, 무무무, 무슨 소릴!“


 코노미가 이죽대며 한 마디 툭 던지자, 치즈루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젓는다. 이미 765 프로덕션 내에서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치즈루의 정신건강과 아이돌 컨셉을 지켜주기 위해 협력해주고 있다.


 프로듀서는 물론이거니와 성인조, 오토나시 코토리, 텐쿠바시 토모카는 확실히 알고 있으며 미나세 이오리와 하코자키 세리카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래서 술자리에서 니카이도 치즈루를 놀리는 것은 으레 있는 이벤트 같은 것이 되었다. 물론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이 사실을 모른다.


 ”와아. 치즈루 씨는 정말로 대단하시네요. 저는 술을 잘 몰라서요.“


 ”아, 아하하하하......“


 그래서 카오리의 진심 어린 칭찬에도 치즈루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나름대로 귀한 집 따님이 코스프레 귀한 집 따님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이다. 치즈루의 입가가 씰룩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뭐, 하여튼. 오늘 이렇게 술자리를 가지게 된 건 니세레브 치즈루를 놀리기 위해서가 아니잖아?“


 ”다, 당신! 쓸데없는 소리를...!“


 치즈루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코노미는 피식 웃어넘겼다. 어차피 머지않아 카오리도 알게 될 사실, 빨리 아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진정하고 앉아. 오늘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니까.“


 ”윽, 알겠어요.“


 치즈루도 알고 있다. 그리고 4 Luxury 멤버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코노미와 레이카의 연락을 받고 모인 것이기 때문에 대강의 사정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말을 꺼내기 전에 일단 해야 할 작업이 있다.


 ”사쿠라모리 카오리의 솔로 데뷔 예정을 축하하며! 건배!“


 
 [건배-!!]



 코노미의 재빠른 축사와 함께 카오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건배했고, 자연스레 잔에 담긴 술을 원샷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는 카오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옆에서 술잔을 비운 리오가 헤ㅡ, 풀어진 얼굴로 카오리에게 술을 권했다.


 ”카오리쨩도 한잔, 자자.“


 ”앗, 네에......“


 떠들썩한 분위기가 익숙하진 않았지만, 아이돌들의 뒤풀이가 그런가보다, 하고 주는 술을 쭈욱 들이켰다.


 알코올의 타는 듯한 느낌이 식도를 지나 위에 도달했고, 그녀의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오, 카오리쨩 제법 하는데?“


 ”어머어머, 숨은 강자였네요?“


 ”자자, 한잔 더. 한잔 더.“


 모모세 리오와 미우라 아즈사가 카오리를 추켜세우고, 그 틈을 타 코노미가 카오리의 잔에 일본주를 한가득 채워넣는다.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혹은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 시점이어서 그런지 카오리는 거절하지 않고 한 잔을 그대로 비운다.


 옆에서 이를 보는 치즈루의 눈빛에 동정과 연민이 깃들었다. 저 간악한 코노미 패거리들에게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오늘, 잘못 걸린 것이다. 바바 코노미의 저 입가에 흐르는 악마와도 같은 미소를 보라.


 물론 토요카와 후카는 이미 취해서 곯아떨어져 있다. 이를 키타카미 레이카가 다른 방 침대 위에 던져놓고 온 뒤에도 카오리에 대한 공세는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최근 들어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모모세 리오의 질문에, 카오리는 취기가 올라 살짝 붉어진 얼굴로 코노미를 보았다. 그녀에게 상담했던 내용을 공개할까 말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결정하고 입을 열었다.


 혼자 끙끙대는 것보다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믿음직한 동료들이지 않은가.


 ”그게, 프로듀서 씨께 작사를 부탁받아서요.“


 ”와아~ 카오리 언니 대단하세요!“


 레이카가 놀란 눈으로 기뻐했지만, 카오리는 오히려 조금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일 주일 조금 넘었는데 크게 진전이 없네요.“


 ”치하야쨩한테는 물어 봤어?“


 코노미의 말에 카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싶은가, 라고 반문하더라고요.“


 ”어떤 마음으로...라.“


 잠시 고민하던 코노미는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카오리에게 물었다.


 ”카오리쨩은, 무엇을 위해서 아이돌을 하고 있는 거야?“


 ”무엇을 위해서, 라니. 다른 분들은 어떠세요?“


 반문은 생각하지 않았는데. 코노미가 쓴웃음을 짓자, 옆에서 술을 홀짝이던 아즈사가 그녀 대신에 답했다.


 ”저는~ 운명의 사람을 찾기 위해서, 랄까요.“


 언제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카오리는 생각했다. 그런 것 치곤, 운명의 사람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낼 때, 항상 프로듀서를 슬쩍 쳐다보는 것도 알고 있다.


 ”저는...음, 그냥 재미있으니까?“


 키타카미 레이카 다운 이유다. 당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카오리는 생각했다.


 ”나는 역시, 섹시 아이돌 넘버 원! 이지.“


 맨 처음 모모세 리오와 만났을 때, 그녀가 포부처럼 내뱉었던 말이다. 같은 말을 프로듀서가 스카우트 했을 때에도 했었다는 것 같았다. 카오리는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네요, 라고 어떻게든 맞장구를 쳤다.


 ”저는...프로듀서 씨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서, 라는 이유겠지요.“


 니카이도 치즈루, 책임감이 강하고 타인의 기대를 잘 저버리지 못하는 그녀라면 프로듀서의 기대가 충분히 동기부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듀서의 기대 이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카오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후카쨩이야 뭐,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려고,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코노미의 말이 정확하다고 카오리는 생각했다. 토요카와 후카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말을 할 것이다.


 ”코노미 언니는요?“


 ”......“


 카오리의 물음에 코노미는 잠시 고민했다. 원래 사무원 지망이었다는 사실은 오토나시 코토리와 프로듀서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특별히 밝히고 싶지 않기도 하다.


 ”흥, 세상이 나의 어덜티-하고 섹시-한 매력을 원한다면, 어른으로서 전력으로 답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원인은 빼고 이야기했지만, 틀림없는 본심이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어른이기 때문에.


 옆에서 리오가 풉, 하고 웃는 것이 들렸지만 코노미는 애써 무시했다. 나중에 두고보자 모모세 리오.


 ”다들 아이돌을 하는 이유가 하나씩 있으시네요.“


 그렇게 말하며,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술잔에 남아 있는 술을 비웠다. 쌉싸름한 술의 향기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술잔에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저는...아직 잘 모르겠어요.“


 ”카오리, 쨩.“


 ”......?“


 카오리의 술잔에 술을 한 잔 더 따르며, 코노미는 입을 열었다.


 ”프로듀서한테 스카우트 받을 때, 카오리쨩은 어떤 마음으로 그 바보의 제안을 받아들였어?“


 ”......조금, 자유로워지고 싶었달까요.“


 ”그으래?“


 그녀의 부친이 굉장히 엄한 분임을 프로듀서를 포함한 대부분의 765 프로덕션 관계자들은 다 안다. 그런 부친 아래에서 자라온 사쿠라모리 카오리의 삶이, 꽤 경직되어 있었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 삶 가운데에서 이 아이돌이라는 세계에 손을 잡고 안내해 준 사람이 프로듀서다. 사쿠라모리 카오리에게 프로듀서는 그런 사람이었다.


 다만, 사쿠라모리 카오리 본인이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바 코노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적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게다가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분명 강력한 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또한, 동료를 무책임하게 내버려두는 것도 양심적인 행동은 아니다. 바바 코노미는 양심을 따르는 어른이다.


 힐끗 눈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니, 모두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는 끄덕였다.


 같은 유닛의 동료다. 동료를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바 코노미는, 사쿠라모리 카오리를 정면에서 응시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카오리쨩 마음가는 대로 뭐라도 써보면 좋지 않을까? 치하야쨩의 말도 분명 그런 의미였을 거야.“


 ”마음가는대로...인가요.“


 확실히, 카오리는 중얼거렸다.


 작사의 형식에 갇혀 있기 때문에 진행이 더뎌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물론 키사라기 치하야의 조언은 이런 의미 외에도 다른 함축적인 의미가 있었겠지만, 지금의 자신이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이 정도이다.


 어떤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싶은가.


 무엇을 위해 아이돌을 하고 있는가.


 그 기분을 담아 작사를 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카오리의 생각이 정리되었다는 것을 코노미는 파악했다. 눈에 총기가 돌아오고, 결심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그녀들의 조언은 여기까지이다. 지금부터는 정말로 사정 봐 주지 않고, 카오리에 대한 그녀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것이다.


 ”정리됐으면, 한잔 더 할까?“


 슬그머니 술잔을 카오리에게 권한다. 코노미와 리오, 그리고 레이카의 음흉한 흉계도 모른 채, 카오리는 코노미가 주는 잔을 받아다가 홀짝, 빠르게 마셨다.


 그러면 옆에 있던 리오가 다시 한번 술을 권하고, 다음에는 레이카가 권하고, 다시 코노미가 권하고. 카오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기까지 술잔의 순환은 반복되었다.


 그리고 결국, 카오리가 취기의 절정에 다다르기까지는 불과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카오리의 상태가 망각의 저편까지 다다르기 직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코노미는 카오리의 잔에 술을 따르는 것을 멈추었고, 동시에 리오와 아즈사, 그리고 어느 틈에 끼어든 키타카미 레이카도 행동을 멈추었다.


 ”저기, 카오리쨩.“


 ”네에에에?“


 평소보다 명백히 늘어진 답변이 돌아오자 코노미는 씨익 웃었다. 승자의 미소요 여유다. 남은 것은 심문뿐이다.


 ”프로듀서 씨랑 무슨 일 있었어?”


 코노미의 말에 모모세 리오도, 미우라 아즈사도, 키타카미 레이카도, 그리고 조금 멀찍이서 보고 있던 니카이도 치즈루도 쫑긋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오ㅡ”


 “정말로?”


 “그러엄요오~.”


 “흐으응...”


 이 상태에서까지 거짓말을 할 줄은 몰랐다. 의외로 카오리의 가드가 단단하다는 것을 깨달은 코노미와 리오는, 서로 눈을 맞추며 방법을 바꾸어 보기로 생각했다.


 그리고, 모모세 리오가 슬쩍 카오리의 옆으로 다가가서 한 마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프로듀서 군은 내가 안심하고 가져가도 될까?”


 물론 거짓말이다.


 프로듀서를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마음가짐은 변하지 않지만, 지금 당장 그럴 생각은 없다. 이는 여기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는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아이들은 꿈을 따르지만, 어른은 현실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프로듀서에게 대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잘못하다가는 아이돌을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가능성이 낮은 확률이라고는 하나, 아이돌을 은퇴하기 전까지는 현실적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취한 상태의 카오리에게 도발하는 용도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사쿠라모리 카오리의 프로듀서를 향한 호감이 얼마나 큰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낮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프로듀서에게 화가 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업무 관련으로는 이상하리만치 철두철미하고 실수가 없는 프로듀서인 데다가, 신참 아이돌인 사쿠라모리 카오리가 공적인 일 때문에 프로듀서에게 이런 어린아이 같은 화를 낼 이유도 명분도 가능성도 없다.


 당연히 사적인, 혹은 감정적인 영역에서 무언가를 건드렸을 공산이 크다. 코노미도 리오도, 그리고 술을 홀짝이며 재미있다는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아즈사나 치즈루도 이를 이해하고 있다.


 원체 4차원인 키타카미 레이카는, 코노미의 솔직한 생각으로는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사쿠라모리 카오리가 제정신이라면 물지 않았을 떡밥이지만, 만취 상태의 그녀라면 충분히 미끼를 물 것이다.


 “그건 안 돼요!”


 혀가 꼬부라지지도, 발음이 망가지지도 않았다. 명확한 발음과 또렷한 목소리로 그렇게 한 마디 던지자, 방 안 사람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아가씨, 사실 안 취한 거 아닐까.


 그러나 방금의 똑 부러진 한 마디가 거짓이었다는 듯, 카오리는 풀어진 얼굴로 헤실헤실 웃으며 일본주 병을 집어 들었다.


 “프로듀서 씨느은...바아보...”


 “......”


 옳거니, 키타카미 레이카는 눈을 반짝였다. 바바 코노미 역시 눈을 빛내며 카오리의 입에 온 신경을 쏟았고, 미우라 아즈사는 그녀의 뺨에 손을 대며 어머-, 하고 조용히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프로듀서가 왜?”


 능청스럽게 리오가 거들었고, 카오리는 동공이 반쯤 풀린 눈동자로 그녀를 잠시 응시하더니, 픽, 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에요오. 프로듀서 씨가 그을쎄...”


 곧이어 나온 카오리의 말에 리오도, 레이카도, 아즈사도, 멀리서 술잔을 홀짝이며 슬그머니 감청하고 있었던 치즈루도, 그리고 코노미도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야 카오리가 프로듀서를 대하던 태도가 이해가 가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프로듀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며, 그에게 큰 잘못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저, 그녀들에게는 으레 일어나는 별 것 아닌 사건이었을 뿐이었다.




8.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사무소 문을 열었다.


 평소라면 아홉 시 정도에 출근하여 레슨을 받거나 독서를 하며 스케줄을 기다리겠지만, 어젯 밤의 술파티 때문에 도저히 일찍 출근할 수가 없었다.


 사무소의 시계가 정오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 오늘의 레슨은 오후 두 시 이기 때문에, 간단히 점심을 먹고 쉬고 있으면 될 것이다.


 “......안녕하세요.”


 가까스로 오토나시 코토리와 아오바 미사키에게 웃으며 인사를 한 뒤, 책상에서 서류 정리를 하고 있는 프로듀서에게 시선을 돌렸다.


 “......”


 인사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카오리는 잠시 고민했지만 그녀의 자존심은 일 주일도 안 되어서 굴복하는 그런 수준 낮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꾸벅, 프로듀서가 보던 말던 작은 목례를 한 번 하는 것으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다, 라고 소파에 가서 털썩 앉으며 카오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라, 사쿠라모리 씨~?”


 “아...텐쿠바시 씨, 안녕하세요.”


 인사는 어찌어찌 했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다. 눈치빠른 성모는 이를 알아차리고 잠시 카오리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그럭저럭 괜찮아요.”


 보기보다 상냥한 아이일지도 모른다. 카오리의 머리에서 토모카에 대한 평가가 조금 바뀌었다.


 그러나 토모카는 카오리의 말이 예의상 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지, 흐응, 하고 미덥지 못하다는 얼굴로 카오리를 지나쳐 프로듀서에게 다가갔다.


 둘이서 자신을 보며 뭔가 소곤거리는 것이 잠시 시야에 들어왔지만, 카오리는 신경쓰지 않고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출근할 때는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냥 아무것도 먹고 싶지가 않다. 시원한 물이나 좀 마시고 쉬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다시는 술을 마시나 봐라,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그녀의 성격상 다음에도 또 술자리에 불려가 술을 마시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대단한 것은,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오전 일곱 시에 멀쩡하게 일어나 스케줄을 소화한 미우라 아즈사와 키타카미 레이카,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던 바바 코노미였다.


 토요카와 후카는 코노미와 리오의 공격에 일찍부터 나가 떨어져 있었기에 논외였고, 모모세 리오는 스스로도 술에 먹혀 카오리보다 늦게 일어났다.


 의외로 니카이도 치즈루가 술에 강했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반면에 카오리 자신은, 어젯밤의 기억이 어디서부터 나지 않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코노미가 권하는 술을 마시고, 프로듀서의 이야기가 잠시 나왔고, 리오의 도발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뒤에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부터는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힐끗, 토모카와 대화하고 있는 프로듀서를 쳐다보았다.


 자신와 대화할 때와는 다른 표정으로, 그는 즐거운 듯이 토모카와 대화하고 있었다. 토모카 역시 살짝 얼굴이 상기된 채로 그와 대화하고 있었고, 아마도 토모카 자신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곧이어 프로듀서가 토모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자, 양 팔을 가슴께로 꼬옥 모으며 고양이같이 갸르릉거리는 그녀의 표정에서 프로듀서에 대한 진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


 부럽다, 라고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솔직하게 생각해버렸다. 동시에 가슴 한 켠에서 칠흑같고 거친 감정의 소용돌이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모세 리오의 말에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을지 잠시 생각해 본 뒤,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마음속으로 작지만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결론이 그녀의 자존심을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이내 프로듀서와 토모카에게서 시선을 떼며, 사무소의 잿빛 천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라......?”


 지진인가, 천장이 움직이는 것만 같은 느낌에 카오리는 대피하기 위해 천천히 일어났고, 한 발짝 움직이고 나서 사무소의 카펫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통이 그녀의 두부와 발목에 엄습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키며 이를 악물었기 때문에 신음을 흘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명의 사무원들이 책상을 박차며 일어나는 소리와, 그녀에게 달려오는 프로듀서의 발소리는 또렷하게 듣고 있었다.


 “사쿠라모리 씨-!?”


 프로듀서의 목소리다. 어째서일까, 걱정 가득한 목소리다. 날이 서 있지만 다정한 목소리다. 적어도 카오리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더 듣고 싶다.


 그러나, 카오리에게 프로듀서의 목소리가 더 들리는 일은 없었다.



 

 9.


 사쿠라모리 카오리가 눈을 뜬 곳은 병실이었다.


 765 프로덕션 재력의 힘으로 응급실을 선점하다시피 한 뒤, 프로듀서는 카오리를 응급실에 맡겨두고 잠시 의사와 상담을 하기 위해 병실을 나왔다.


 두부에 충격이 가해져 단시간 기절을 한 것과, 넘어지면서 발목에 염좌가 생겼다는 의사의 소견을 토대로, 프로듀서는 사쿠라모리 카오리가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무대에서 데뷔를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프로듀서의 걱정과는 달리 두부의 이상은 없었고, 발목 역시 심하게 인대가 늘어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3-5주가량 안정을 취하면 회복이 될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프로듀서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의 담당 아이돌이 다쳤다는 것뿐만 아니라, 카오리의 솔로 데뷔 무대를 미루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여기에서 조용히 그녀의 솔로 데뷔 무대를 조금 미루면 해결될 일이다. 큰 진전이 없는 카오리의 작사 역시 조금이나마 시간을 더 줄 수 있을 것이다. 프로듀서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선택지는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준비한 라이브 무대까지 앞으로 3주다. 운이 좋아 카오리의 발목 염좌가 일찍 낫는다 하더라도 2-3주간 레슨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 보면 된다.


 아무런 레슨 없이 올라가는 독무대를, 아직 신입 아이돌이라 할 수 있는 사쿠라모리 카오리가 성공으로 이끄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수십, 수백 번의 연습을 하고, 안무의 합을 맞추고, 노래를 부르고, 최상의 상태로 무대 위에 오른다 하더라도, 압도적인 관중의 숫자와 함성 속에서 무대 위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면 어지간한 수준의 아이돌이라도 긴장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독무대가 처음일 아이돌이라면 어떨까.


 “......”


 하지만 프로듀서는 카오리의 의중을 알지 못한다. 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해 버린다면, 차후에 카오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경우 뒷감당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별개로, 프로듀서 자신에게도 죄책감이 끊임없이 따라다닐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는 프로듀서다. 나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숲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사쿠라모리 씨.”


 발목에 작은 부목을 덧댄 채 조수석에 얌전히 올라타는 그녀에게, 프로듀서는 차의 시동을 걸지 않고 말을 걸었다.


 “......네, 프로듀서 씨.”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카오리는 결심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직 토라져 있는 마음 그대로였지만, 언제까지고 떼만 쓰고 있을 수는 없다.


 카오리가 고분고분히 대답을 하자, 프로듀서의 눈이 놀란 듯 조금 커졌다. 하지만 금세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그녀에게 말했다.


 “완치까지 빠르면 3주, 혹은 더 걸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에,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제 재량으로 한 달 정도 안무 레슨은 모두 중단시켜 두었습니다. 근육통이 아니라 인대가 늘어났으면 충분히 쉬는 것이 좋아요.”


 “그, 죄송합니다. 그렇게 많이 마신 건 처음이라서, 다음날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요.”


 분명 한 소리 들을 것이다, 카오리는 긴장하며 몸을 살짝 움츠렸지만, 의외로 프로듀서는 화를 내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직접 드신 건 아닐 테고, 바바 씨 아니면 모모세 씨겠지요.”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화를 낼 대상이 카오리가 아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후후, 냉소를 짓는 프로듀서의 얼굴에서 한순간 아수라가 겹쳐보이는 듯 했다.


 “그보다, 아쉽게도 사쿠라모리 씨의 솔로 데뷔 무대는 조금 미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


 카오리는 얌전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쉽고 안타깝지만 본인이 잘못한 일이다. 스스로가 자초한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 어른이다.


 그러나 행동과 별개로, 카오리의 얼굴은 납득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프로듀서를 보았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할 프로듀서가 아니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물론 카오리 본인의 실수가 원인이지만 솔로 데뷔 무대가 미루어 진 만큼 적당한 투정이나 어리광은 받아주자, 라고 프로듀서는 생각했다.


 “3주 뒤의 무대면, 키사라기 씨와 같은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이었죠, 분명.”


 “예상하신대로, 맞습니다.”


 “그 무대, 이미 인선도, 대관도, 홍보도 모두 끝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맞습니다.”


 “제 솔로 무대 말고도 4 Luxury도 참가한다고도 알고 있어요.”


 “맞습니다.”


 프로듀서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기야, 4 Luxury를 무대에 올린 시점에서 카오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리고, 그제야 카오리의 납득하지 못한 얼굴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저만 무대에서 빠져야 하나요.”


 “다치셨으니까요.”


 “이미 인선도, 홍보도 끝나지 않았나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무대에요, 프로듀서 씨.”


 “부상은 예외입니다. 팬 분들도 보통, 이런 부득이한 사정은 이해해 주십니다, 사쿠라모리 씨.”


 분명 프로듀서로서 현실적인 생각이다. 발목 염좌가 완치되지도 않은 채로 무대 위에 올라가 춤추고 노래하는 것은 어렵다. 인대 손상은 앞으로의 아이돌 활동에 있어 치명적일 것이기에, 더 큰 그림을 본다면, 아쉽지만 솔로 데뷔를 미루는 것이 상책이다.


 "사쿠라모리 씨는 장기간 아이돌 활동을 하실 분입니다. 책임을 지려 하시는 것도 좋지만, 조금 더 미래를 보실 필요도 있습니다.“


 "저는.......“


 카오리는 천천히 입을 열다가, 주춤거리며 말하기를 주저했다. 여기에서 알겠다, 라고 한 마디만 말하면 끝나는 일이다. 지금으로서 크게 진전이 없는 작사의 일도 유예기간이 조금 더 늘어난다.


 결정이 어려운 일이다. 소중한 기회냐, 확실한 회복이냐,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음악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그만두고 이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쿠라모리 카오리라면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일까, 카오리의 표정은 프로듀서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커다란 선택이다. 사쿠라모리 카오리라는 아이돌이 765 프로덕션의 아이돌 중에서 나름 연장자 축에 속한다지만, 그래 봐야 스물 하고도 셋. 갓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막 사회 초년생으로 나올 나이다.


 그런데 이 결정의 최종 책임자는 그녀의 눈앞에 있는 프로듀서다. 카오리와 나이 차가 매우 큰 것은 아니지만, 초일류 프로듀서답게 이쪽 업계에서의 경험과 지식은 상당하다.


 카오리의 입장에서는 프로듀서의 결정을 따르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기회는 프로듀서가 만들어 준 것이다. 물론 프로듀서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차후에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지금의 기회는 아니리라.


 어떤 마음으로 노래하고 싶은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프로듀서라면 담당 아이돌이 어느 정도 투정부리는 것쯤은 받아줄 것이다. 입을 비쭉 내밀며 카오리는 여전히 납득 못 하는 표정으로 프로듀서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요, 조용하고 얌전한 항명의 표시였다.


 프로듀서는 곤란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카오리가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의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이돌이고, 그는 사쿠라모리 카오리의 담당 프로듀서다. 그녀의 스케줄과 업무, 그리고 무대까지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설령 프로듀서가 사후 통보를 한다 하더라도 카오리가 싫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프로듀서와 단순한 상하관계로 남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작사를 맏긴 것은 어느 정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쿠라모리 카오리를 믿었던 프로듀서의 그 작은 믿음에 한번 호소해 보자고 카오리는 생각했다.


 "프로듀서 씨.“


 "말씀하세요, 사쿠라모리 씨.“


 "프로듀서 씨는 저를 얼마나 신뢰하고 계신가요?“


 ”네?“


 무슨 말이지, 프로듀서는 그녀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해 눈을 껌뻑인 채로 카오리를 보았다.


 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 카오리는 안경 너머로 비치는 그의 눈동자가 귀엽다고 생각하며, 후훗, 작게 웃었다.


 ”제가 할 수 있다고 말하면 믿어 주실 건가요?“


 ”프로듀서로서는 믿지 않을 겁니다.“


 그의 대답에 카오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회피성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니다. 명확하고 직설적인 대답을 원했을 뿐이다.


 ”프로듀서로서가 아니라면, 믿어 주실 건가요?“


 ”......“


 카오리의 말에, 프로듀서는 순간적으로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의 급소를 관통했기 때문이다.


 토모카와는 다른 경우다. 한 걸음 잘못 내딛으면 아무런 유예 기간이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실수를 경계하고 있을 뿐이다. 프로듀서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거짓말쟁이.”


 그녀의 말에 프로듀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차가운 가을바람이 그의 목덜미를 도려냈고, 그는 자신의 담당 아이돌의 날카롭게 날이 선 눈빛을 오롯이 받으며 몸을 살짝 떨었다.


 “겁쟁이.”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는 지키고 싶은 최후의 보루가 있다. 겁쟁이라 놀림 받는다 하더라도 지켜내야만 한다.


 프로듀서는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지만, 그녀의 눈빛을 받아내기는 힘들었다.


 각오를 다진 여자의, 승부수다. 그가 프로듀서만 아니었다면 토모카처럼 진지하게 마주 보며 답변해 주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의 입장은 그녀가 낸 작은 용기에 답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 선을 넘어버린다면, 더는 공사 관계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틀림없이 그녀는 상처를 받을 것이다. 요 몇 달간 그녀를 프로듀스 해 왔던 그로서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사쿠라모리 씨께서ㅡ”


 그의 말에,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어깨를 살짝 떨었다. 이제야 그녀에게도 쌀쌀한 가을이 피부로 느껴졌다. 춥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그녀의 양쪽 어깨를 움켜쥐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지레 겁먹은 듯 보이는 카오리를 보며, 그는 무슨 말을 해야만 이 사태를 원만히 넘길까 생각했다. 그러나 연애와는 담쌓은 삶을 이십 년 이상 살아온 그이기에, 정답을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우회적으로 공격한다면, 직설적으로 방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프로듀서가 아는 사쿠라모리 카오리라면, 분명 통하지 않은 방법을 여러 번 시도하지는 않으리라.


 “프로듀서 씨는, 담당 아이돌을 조금 더 믿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에 카오리는 고개를 저으며 그 말을 부정했다.


 “......제가 전에 카오리, 라고 불러 달라고 하셨을 때, 프로듀서 씨가 하셨던 말씀, 기억나시나요?”


 “치하야를 비롯한 미성년 아이들은 동생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괜찮지만, 성인 여러분들은 스캔들이라도 나면 큰일 나기 때문에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말 한마디로 여성 두 명의 기분을 급격하게 다운시켰던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던 날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카오리는 천천히 숨을 고른 뒤, 프로듀서를 보며 말했다.


 “정론이세요. 하지만 그래서 더 비겁하세요, 프로듀서 씨.”


 “......”


 “사람의 마음은, 그런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아요?”


 “저는 그렇게 사랑받을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일개 프로듀서일 뿐이라고요.”


 받아서도 안 되고, 주어서도 안 된다. 선을 누그러뜨리고 한 걸음 더 다가갈 수는 있지만, 아이돌의 옆에서 걸어가면 안 된다.


 그것이 프로이며, 그것이 프로듀서다. 프로듀서 나름의 신뢰 방식이다.


 하지만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바바 코노미를 비롯한 다른 성인조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건 프로듀서 씨의 생각일 뿐인걸요.”


 “글쎄요.”


 그러나 또 하나, 프로듀서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군인 집안 출신답게 패배와 두려움을 생각하지 않는다.


 우회적으로 안 된다면 직설적으로. 직설적으로도 안 된다면 더더욱 직설적으로.


 한 번으로 안 된다면 두 번, 세 번, 여러 번.


 ”프로듀서 씨.“


 ”네, 사쿠라모리 씨.“


 그래서 다시 한번, 카오리는 직설적으로 말하자고 결심했다.


 ”카오리, 라고 불러 주세요.“


 ”......“


 그녀의 말에, 이 벌새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프로듀서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10.


 약속은 한번 뿐이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말에서,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었던 765 프로덕션의 특이한 점들이, 이제는 하나둘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로듀서가 왜 765 올스타즈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는지.


 최근 들어 극장의 아이들까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 이상 성인조들은 한 번도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는지.


 아마 미우라 아즈사 역시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765 올스타즈로서 제법 오랜 시간 프로듀서와 함께 했어도 강하게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 한 마디 때문에 변해버릴 관계가 분명 설레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하기에.


 잘못 건드리면 유리처럼 깨어져 버릴 것을, 다른 사람들도, 그리고 프로듀서도 마음 한켠에서 염려하고 있었을 것이다.


 양쪽 모두, 어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무가(武家)의 딸이다. 아무리 여자라고 할지언정, 속내가 연약할지언정, 스스로를 걱정할지언정, 그 정신만큼은 두려움을 모르는 칼날과도 같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프로듀서에게 강하게 요구했다.


 틀어져 버릴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산산조각이 나버릴 가능성도 생각했지만, 돌이킬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엇을 위하여 아이돌을 하느냐.


 어떤 마음으로 노래할 것이냐.


 그런 것,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스스로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한 발짝 나아가기 위해 기다리던 이 기분을, 노래로 표현하자.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프로듀서 씨.“


 ”......“


 ”저는 피하지 않아요.“


 그녀 나름의 각오다. 프로듀서는 작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를 미루는 것이 당연하지만, 카오리가 이 정도로 강하게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독단으로 처리해버린다면, 분명 그녀의 동기부여에 제동이 걸릴 것이다.


 철없는 어리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카오리가 간절히 바란다면 들어주어야 한다. 아이돌이 선택했다면, 프로듀서는 만들어주어야 한다. 상사이지만 아버지여야 한다. 그것이 프로듀서다.


 물론 카오리의 염좌가 깨끗이 낫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으리라. 며칠은 걷는 것도 힘들겠지만, 프로듀서가 아는 사쿠라모리 카오리라면 움직이는 것이 가능한 시점부터 재활과 레슨을 병행할 것이다.


 피를 토하는 한이 있더라도 최고의 무대로 만들 것이다.


 그녀는 분명 그렇게 할 것이다. 프로듀서는 카오리의 눈동자에서 강한 의지를 엿보았다.


 ”그러니, 프로듀서 씨가 최고의 무대였다고 생각 하신다면ㅡ“


 그렇기 때문에 프로듀서는, 결코 그녀를 말릴 수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그 때는 다시 한 번, 카오리, 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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