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단편] 카오리 허밍(歌織 Humming) - 2

댓글: 1 / 조회: 1055 / 추천: 8


관련링크


본문 - 02-10, 2019 21:35에 작성됨.


4.


 사쿠라모리 카오리의 라디오 수록은 제법 성공적으로 끝났다.


 키사라기 치하야가 진행하는 라디오이니만큼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라디오였고,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전직 음악 교사답게 꽤 박학한 지식으로 치하야와 좋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준비시간까지 합쳐 대강 한 시간 정도 진행되었고, 자연스럽게 조금 늦은 점심 식사를 세 명이 같이 하게 되었다.


 늦지 않게 정시에 도착했다, 프로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출연 대기자실에서 이어폰을 케이스에 넣으며 나오는 치하야와, 뒤따라 겉옷을 팔에 두르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오는 카오리를 보았다.


 그는 손을 흔들어 두 명을 불렀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카오리와 치하야는 이내 그를 확인하고 총총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수고했어 치하야. 오늘은 특히나 즐겁게, 평소보다 많이 이야기하더라.”


 “안녕하세요 프로듀서. 저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하루카한테 물어보면 분명 나처럼 말할걸?”


 “뭐어...조금 즐겼다는 걸로 해 주세요.”


 “그래그래.”


 그리고 그는 뒤에서 빙긋 웃고 있는 카오리를 보았다. 방송국 실내가 더웠는지, 하얀 블라우스의 단추 하나가 풀어져 그녀의 쇄골이 살짝 보이는 것을, 그는 작은 한숨을 쉬며 지적했다.


 “사쿠라모리 씨. 단추, 풀어져 있네요.”


 “아앗! 잠근다는 것을 깜박했네요. 감사합니다, 프로듀서 씨.”


 아마도 라디오 수록 때 풀어둔 것을, 지금까지 잊고 있었을 것이다. 같이 방송하는 치하야도 여성이고,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PD와 음향장비 기사도 여성이니 긴장이 풀린 것이리라. 그리고 먼저 나온 치하야는 이를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확신이 든 때는, 카오리가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블라우스의 단추를 잠글 때였다.


 이상한 곳에서 신뢰받고 있는 것은 감사하지만, 가끔은 이 사람이 토요카와 후카처럼 그저 맹한 어른인지, 아니면 모모세 리오처럼 철딱서니 없는 어린아이인지 분간이 안 된다.


 “여간, 사쿠라모리 씨도 수고하셨습니다. 혼자 라디오 게스트로 출현하는 건 처음이셨는데, 어떠셨나요?”


 “키사라기 씨가 잘 이끌어 주셔서 즐겁게 말한 기억밖에 없네요, 후후후.”


 “즐기셨다니 다행이네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감사해요, 프로듀서 씨.”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닌, 프로듀서의 진심에서 나오는 말이다.


 아이돌이 자신의 일을 즐기지 못하면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그것이 작은 일이건, 큰일이건 간에 통용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아이돌이 즐길 수 있는 일을 가져다주는 것이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이다. 사쿠라모리 카오리가 치하야와 함께 이번 라디오 수록을 즐겼다는 말은, 사쿠라모리 카오리라는 아이돌에 대한 그의 분석이 정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맞다, 치하야. 스케줄 밀렸다면서? 디렉터 분께 이야기 들었어.”


 “네. 메인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새 카메라를 준비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조정을 다시 해야 하니까 한 시간 정도 밀릴 것 같다고, 죄송하다고 하더군요.”


 “이후에 레슨이나 스케줄이 없어서 다행이네.”


 “그러네요, 후후.”


 그 이야기를 듣던 카오리에게 일말의 불안감이 엄습했다.


 765 프로덕션 아이돌과 사무원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둔감듀서라 불리는 사람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상하게도 이런 쪽에서의 눈치는 기가 막히게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설마, 카오리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프로듀서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프로듀서가 이를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사쿠라모리 씨와 카페에 갈 예정이었는데, 치하야도 같이 가지 않을래?”


 “사쿠라모리 씨와 카페를요?”


 치하야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내 눈매가 살짝 가늘어지며 프로듀서와 카오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라디오 수록 전의 카오리가 생각났는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카오리만 부러운 일을 시킬 순 없다.


 “저는 좋습니다. 괜찮을까요, 사쿠라모리 씨?”


 “......그럼요.”


 썩 내키지 않는 표정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어른의 여유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교육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프로듀서에게 심술을 부리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약간의 투정쯤은 괜찮을리라. 카오리는 체념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프로듀서를 보며 말했다.


 “대신, 프로듀서 씨가 내는 걸로요.”


 “그거 좋네요.”


 의외로 치하야도 맞장구를 친다.


 두 명 사이에 낀 프로듀서의 얼굴이 팍, 구겨지는 것이 재미있다고 카오리는 생각했다.


 그 뒤로, 도란도란 세 명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 새 카페의 문을 열고 있었다.


 딸랑, 손님을 알리는 방울이 청아하게 울렸고, 세 명은 카운터 앞에서 멈추어 섰다.


 “커피 한 잔, 다과 하나. 치하야 너는 커피 안 돼.”


 고르세요, 프로듀서는 그렇게 말하곤 진열대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평상시라면 조용히 자리부터 맡아두고 올 터이지만, 지금은 두 명의 지갑이다. 얌전하게 주문을 기다리는 것이 이롭다.


 “저는 핫 초콜릿과 녹차 쿠키로 부탁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치하야의 주문은 큰 고민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으응...프로듀서 씨 먼저 주문하시겠어요?”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조금 고민이 되는 듯,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메뉴판을 따라가고 있었다.


 삼세번은 거절이라는 속담을 부정하는 프로듀서였기 때문에, 재빨리 점원에게 주문을 넣었다.


 “에스프레소 한 잔, 그리고 티라미수 한 조각으로.”


 “아, 저도 프로듀서 씨와 같은 메뉴로요.”


 카오리가 그의 뒤에서 방긋 웃으며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고르기 어려울 때에는 타인이 고른 메뉴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리고 티라미수를 듣자마자 달콤 쌉싸름한 맛이 입 안에서 맴돈 것도 한 몫 했다.


 그러나 점원의 입에서 티라미수는 한 조각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고, 슬그머니 프로듀서를 보았다.


 “저기, 프로듀서 씨?”


 “안 드릴 겁니다.”


 “그런 게 아니고요...이 가게, 티라미수가 정말 맛있다고 방송국 분들에게 들었어요.”


 “......”


 거절할 방법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해 보았지만, 예상외로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강적이었다.


 “그래서 한번 먹어보고 싶었는데...저도 티라미수, 맛보고 싶은데...어쩔 수 없는 거네요. 그렇죠, 프로듀서 씨?”


 “......”


 차라리 직설적으로 들어오면 직설적으로 거절이라도 하고, 죄책감이라도 덜 느낄 것이다.


 처음 스카우트 했을 당시는 눈빛 초롱초롱한 세상 물정 모르는 얌전한 아가씨였는데, 765 프로덕션에서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이렇게 여우같은 모습을 보이는 아가씨가 되었다.


 뻔히 알지만, 그렇다고 거절하기도 어렵다.


 바바 코노미, 모모세 리오와 붙어 다니더니 나쁜 것만 배워왔다고 프로듀서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좋던 싫던 담당 아이돌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프로듀서는 점원에게 말했다.


 “제 건 애플파이로 바꿔주세요.”


 “어머, 감사해요. 프로듀서 씨.”


 뒤에서 이를 보고 있던 치하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쿠라모리 카오리니까 가능한 행동이다. 키사라기 치하야가 저렇게 했다면, 프로듀서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열이 있는지부터 확인했을 것이다.


 차와 다과가 준비되는 동안 프로듀서가 자리를 잡았다. 4인용 테이블이었기 때문에, 프로듀서와 치하야가 같은 쪽 의자에 앉았고, 자연스레 카오리가 프로듀서의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


 프로듀서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다과의 준비를 알리는 벨소리가 들렸고, 그는 재빨리 다과를 가지고 와 테이블에 하나씩 올려두었다.


 향긋한 에스프레소의 향이 그의 코를 자극했고, 한 모금, 씁쓸한 맛을 입 안에서 충분히 맛본 뒤 애플파이를 포크로 한 스푼 잘라먹었다.


 카오리 역시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생각보다 쓰다. 남자들은 이런 걸 좋아하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쓰디쓴 입을 달래기 위해 티라미수를 한 스푼 떠먹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지자, 카오리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다과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치하야가 녹차 쿠키를 한입 베어 물고 나서, 담담한 표정으로 프로듀서에게 말했다.


 “프로듀서, 요즘에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일은 없나요?”


 치하야의 말은 점잖았지만, 프로듀서의 목덜미에는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1년 전쯤, 안나가 솔로 데뷔할 즈음에도 치하야가 노래할 수 있는 무대를 강하게 요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의 치하야라면 모를까, 시어터 프로젝트 이후의 치하야는 그녀의 요구사항을 강하게 이야기하는 편이 아니었다.


 프로듀서를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라는 것이 이유였다. 물론 프로듀서 역시 치하야가 만족할만한 수준의 일거리를 가지고 왔고, 그 때 이후로 큰 문제는 없었다고 프로듀서는 생각했었다.


 그래서, 프로듀서로서는 치하야의 이 발언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치하야로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언제였더라, 그는 치하야의 가장 최근의 라이브 무대가 언제였는지 생각해보았다.


 “......”


 6월, 전국 순회 공연 이후로 없었다.


 지금이 9월 중순에 막 들어서는 시점임을 생각한다면, 거진 3개월 간 라이브 무대가 없었다는 말이다.


 시어터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최근 들어 두 명을 더 스카우트하면서 자연스레 765올스타즈 아이들에게 신경을 많이 못 쓴 것 같았다.


 그렇다고 치하야 스파이럴은 사절이다. 그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치하야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일지를 생각했고, 당연하게도 답은 하나뿐이었다.


 “안 그래도 생각을 하고 있었어. 이번에도 작년처럼 작은 라이브 무대를 기획중이었는데, 치하야가 무대에 서 줬으면 해서.”


 물론 임기응변이다.


 근시일 내에 사쿠라모리 카오리의 솔로 데뷔를 겸하여 라이브 무대를 기획중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765올스타즈가 올라가는 무대가 아닌, 시어터 아이들 위주로 진행하려던 소규모 무대였다.


 4 Luxury를 메인으로 하여 각 맴버들의 독무대,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쿠라모리 카오리의 솔로 라이브로 이어지는 무대를 구상했었다.


 게다가 11월 말에 있을 감사제 무대를 생각하다 보니, 특별히 다른 라이브 무대를 기획하진 않았다. 그러나 치하야의 눈빛을 받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치하야 정도의 가희가 같이 무대에 서 준다면, 감사제 홍보 겸 시어터 아이들의 인지도를 올리는 일이 더 수월해질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이맘때쯤 있었던, 안나의 솔로 데뷔처럼 말이다.


 물론 예전과는 달리 대부분의 시어터 아이돌들의 인지도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기 때문에, 굳이 치하야를 비롯한 765올스타즈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관객 동원이나 홍보 자체는 문제 없을 것이다.


 그러나 키사라기 치하야의 아이돌로서, 그리고 가수로서의 명성은 분명히 같이 무대에 서는 아이돌들을 더 주목받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다시 생각해보니 치하야를 중심으로 시어터 아이들을 내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그런 프로듀서를 바라보는 치하야의 눈빛은 담담했지만 날카로웠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고작 십대 소녀일 뿐인데, 토모카도 그렇고 그녀들에게서 느껴지는 이 카리스마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프로듀서.”


 “아, 응?”


 “바쁘신 건 알지만, 그래도 조금 더 신경 써 주셨으면 합니다.”


 “미안, 반성하고 있어.”


 “정말인가요?”


 이번이 두 번째인데요, 라고 말하려는 것을 치하야는 가까스로 억눌렀다.


 765 프로덕션이 영세 프로덕션이었을 시절에 이 프로듀서가 얼마나 고생을 해 가면서 자신을 프로듀스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예전보다 신경을 못 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과거, 프로듀서에게 되도 않는 성질을 부리던 시절의 키사라기 치하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로 반성중입니다. 이번에 기획하는 무대에서는 작년과 다르게, 독무대를 꼭 넣어 주도록 하고, 치하야의 무대는 선곡도, 퍼포먼스도, 앙코르도 전부 맡겨 두도록 할 테니까.”


 “간만에 파격적이시네요, 프로듀서?”


 “신뢰하고 있으니까.”


 프로듀서가 치하야에게 보내는 신뢰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765 프로덕션의 간판 가희(歌姬)이며, 그 실력은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찬사받을 정도이다. 비록 키사라기 치하야가 아직 십 대 미성년이라지만, 그녀의 노래에 관한 실력은 진짜라고 프로듀서는 생각한다.


 아마 라이브 무대에 대한 이해와 구성만큼은, 프로듀서를 겸임하고 있는 리츠코보다도 나을 것이다.


 물론 냉정하게 말한다면, 프로듀서 자신이 치하야의 무대를 만드는 것이 조금은 더 나을 수 있겠지만, 그 약간의 차이 때문에 치하야와 주고받는 신뢰를 거두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면 성의로서 충분하지 않을까, 치하야?”


 “뭐어, 프로듀서가 그렇게까지 하신다면야.”


 후훗, 작게 웃으며 그제야 치하야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런 프로듀서와 치하야의 모습을,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맞은편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 프로듀서에게 스카웃되어 이 프로덕션에 들어왔을 때에는, 그녀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아이돌들이 프로듀서에게 달라붙었다.


 아이돌인데 저래도 돼? 라고 연예계에 대해서 거의 몰랐던 규중 아가씨가 생각했을 정도이니, 일반인이 본다면 놀라 까무러칠 수준이었으리라.


 그러나 신기했던 것은 사장도, 사무원도, 그리고 아이돌 겸 프로듀서인 아키즈키 리츠코까지, 도를 지나치지 않는 한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덕션 내, 외부에서 아이돌과 프로듀서가 다른 프로덕션처럼 공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순전히 765의 프로듀서가 아이돌들과 선을 그어놓고 일을 해 왔기 때문이다, 라고 모모세 리오와 바바 코노미에게 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시어터 멤버들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것.


 765올스타즈야 프로덕션 초기부터 같이 고생한 멤버들이기 때문에 프로듀서가 시어터 멤버들보다 조금 더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이름으로 부르는 것 외에는 시어터 맴버들과 동일하게 대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큰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키타자와 시호와 텐쿠바시 토모카가 그중에 들어가자, 하나둘씩 작은 불만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다른 아이돌들도 머리로는 이해했을 것이다. 시호도 토모카도, 프로듀서에게 반 강제적ㅡ어찌 보면 협박이라고 할 수 있는ㅡ제안을 통해서 이름을 불릴 수 있는 특권을 얻은 것이고, 분명히 철없는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이해가 감정을 넘어서기는 굉장히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프로듀서가, 그가 그어두었던 경계선을 조금 뒤로 물리면서부터 765 프로덕션의 내부 분위기는 급작스럽게 바뀌었다.


 그녀들의 특권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이전보다 프로듀서에게 더 다가가는 765올스타즈부터, 갑작스럽게 이름을 불리게 되어 당황하면서도 슬쩍 프로듀서에게 어필하기 시작한 시어터 멤버들.


 그러나 그 특권 아닌 특권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만 19세 이상의 성인조, 그리고 사무원들.


 ‘아이들이 아니니까요.’ 라는 프로듀서의 말 한 마디에 미우라 아즈사를 포함한 그녀들은 아무런 이의제기도 하지 못했다.


 아이였으면 좋았을걸. 아오바 미사키와 사쿠라모리 카오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


 프로듀서와 즐겁게 대화하면서, 슬쩍 그에게 팔을 두르는 치하야를 보며 카오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모금 더 홀짝인 에스프레소의 맛이 입 안에 맴돌았다.


 불과 몇 주 전의 프로듀서라면 정색하며 밀쳐냈겠지만, 지금의 프로듀서는 딱밤 한 대와 함게 웃으면서 살살 타이르는 것이 전부였다.


 보기 좋은 한 쌍이다. 남녀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오빠와 여동생의 사이가 좋다면 저런 느낌일까. 카오리는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조금 전에 치하야가 나지막히 물어보았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어떤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싶은가.


 아직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치하야와 프로듀서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프로듀서 씨.”


 그래서 고동치는 가슴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그리고 겸사겸사 프로듀서에게 심술을 부리고 싶어진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 사쿠라모리 씨. 죄송합니다. 저희들끼리만 떠들고...치하야 요 녀석이 글쎄 자꾸만ㅡ”


 “프로듀서? 자신이 담당하는 아이돌인데 이 정도도 못 받아들이시나요?”


 “도가 지나치잖아, 이 녀석. 가끔은 왜 이렇게 아이처럼 구는지 모르겠어.”


 “아직 십 대 아이니까요, 후훗.”


 프로듀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곧이어 그가 카오리를 반쯤 방치했다는 것을 깨닫고 재빠르게 그녀에게 사죄의 말을 할 때까지, 카오리는 빙긋 웃는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미지와 금기에 대한 호기심이다.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마음을 굳힌 채 프로듀서에게 말했다.


 “프로듀서 씨.”


 “네, 사쿠라모리 씨?”


 “아니요, 그게 아니에요.”


 프로듀서의 얼굴에서 의아함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그가 보고 있는 사쿠라모리 카오리, 자신의 표정 때문이리라.


 그러나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건,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을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오리, 라고 불러 주세요.”




5.


 “왜 저래요?”


 치하야와 카오리의 스케줄이 끝나고, 프로듀서와 함께 돌아온 그녀들을 본 오토나시 코토리의 첫 마디였다.


 그 물음을 받은 아오바 미사키는, 영문도 모른 채로 네? 하고 되물었고, 코토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프로듀서의 당혹스러운 표정.


 키사라기 치하야의 조금 언짢은 표정.


 그리고 사쿠라모리 카오리의 조용한 미소까지.


 특히나 카오리의 미소에서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이 퍼져 나오고 있어서, 오토나시 코토리나 아오바 미사키도 쉽사리 말을 걸기가 힘든 실정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단체레슨이 끝난 뒤, 사무소의 소파에 널부러져 있던 아마미 하루카와 모가미 시즈카도 그들의 표정을 보자 눈매가 가늘어졌고, 나나오 유리코와 하코자키 세리카는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텐쿠바시 토모카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미사키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뜨거운 녹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사쿠라모리 씨.”


 “......”


 프로듀서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카오리였다. 그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인지 어른인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은 모모세 리오 한 명으로 족했을 터다.


 “있잖아, 치하야.”


 “왜 그러시죠, 프로듀서?”


 프로듀서가 치하야를 부른 순간, 카오리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린 것을 하루카와 시즈카는 놓치지 않았다.


 저 사람 또 사고 쳤구나, 두 명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원인을 파악하자 자연스레 하루카와 시즈카의 긴장이 풀렸고, 소파에 앉아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치하야도 기분이 좋은 건 아니고, 카오리는 누가 보아도 화가 단단히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삼각관계, 치정 싸움, 막장 드라마. 십 대 소녀들이 좋아할법한 소재는 모조리 긁어다모은 이벤트다. 이런 이벤트를 두 명이 놓칠 이유가 없다.


 물론 하루카도 시즈카도 프로듀서에게 애정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차피 저 둔감한 프로듀서는 치하야나 카오리가 원하는 행동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들이 걱정해야 할 것은, 토모카처럼 직접 먼저 다가가는 경우이다. 하지만 어차피 치하야는 그녀들이 막아서기에는 너무 늦었고, 카오리는 직설적인 사람이 아니니, 여유롭게 상황을 관찰해 보아도 된다.


 “어떻게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무슨 말씀이신가요, 프로듀서? 저 같은 아이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


 치하야가 팔짱을 낀 채로 시선을 피하자,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카오리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저, 사쿠라모리 씨.”


 “......”


 역시나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고, 그는 축 늘어진 채로 터벅터벅 그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코토리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녹화를 하고있는 것을 말릴 기색도 없이, 그는 가방을 대충 던져두고 양복 상의를 걸어둔 채 자리에 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프로듀서 씨? 무슨 일 있었나요?”


 미사키가 슬쩍 물어보았지만,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누가 봐도 별일인데, 미사키는 살짝 볼을 부풀리며 다시 말했다.


 “무슨 일 있으셨지요? 말씀 해 주세요.”


 업무에 지장이 가니까요, 라고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프로듀서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미사키를 보았지만, 입은 열지 않았다.


 “저기, 카오리 씨? 무슨 일 있으셨나요?”


 프로듀서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미사키는 카오리에게 물어보았다. 답변이 어떨지는 빤히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원으로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원래는 오토나시 코토리가 이 역할을 해 주어야 하지만, 그녀는 지금 휴대폰으로 이 상황을 녹화하기 바쁘다.


 “아무 일 없었답니다.”


 “아니 그래도...”


 “아무 일 없었답니다?”


 “......넵.”


 카오리의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미사키는 경직된 표정으로 답했다. 그리고 프로듀서를 노려보며 사내 메신저로 ‘나중에 무슨 일인지 꼭 들을 테니까요’ 라고 짧게 보냈다.


 그러나 프로듀서는 미사키의 메시지를 본체만체 하며 컴퓨터로 다른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 미사키의 행동에 하루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루카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시즈카만이 그녀의 한숨을 눈치채고, 아하하,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765 프로덕션에 입사한 기간이 츠무기나 카오리와 크게 차이가 없는 아오바 미사키이기에, 이런 상황은 처음 겪어볼 것이다.


 그러나 765 프로덕션의 다른 아이돌들은 그렇지 않다. 이런 비슷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지는 않을진대, 일어난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765 프로덕션에서 가장 오래 있었던 아이돌 중 한 명인 아마미 하루카는, 으레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든 업무에 지장 없이 해결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아니, 적어도 더이상 상황이 악화되지 않을 방법을 터득했다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할 것이다.


 그녀가 어떻게 하던지 간에, 마지막에는 프로듀서가 마무리를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아직 전부 파악하지 못했지만, 키사라기 치하야라면 아마미 하루카가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치하야 쨩~♪”


 다른 아이돌이라면 기분이 다운된 상태의 치하야에게 함부로 말을 거는 행동은 자제하겠지만, 아마미 하루카는 다르다.


 치하야만큼이나 765 프로덕션에 오래 있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나름 치하야와는 절친한 친구다. 친구에게 겁을 먹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루카를 대할 때의 치하야 역시 마찬가지라고, 적어도 하루카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하루카의 부름에 치하야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프로듀서나, 옷을 걸어놓고 있는 카오리가 눈치채지 못했지만, 하루카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라디오 수록은 어땠어? 오늘 특별 레슨이 있어서 생방송으로 못 들었는데, 에헤헤.”


 “특별 레슨?”


 “응, 특별 레슨. 대학교 축제 행사 일정이 잡혀서 말이야.”


 “최근 들어 모가미 씨, 텐쿠바시 씨, 나나오 씨와 하코자키 씨와 같이 레슨을 하던데, Legend Girls!! 인 거지?”


 “역시 치하야 쨩! 나를 이렇게 신경 써 주고 있구나. 감동했다고!”


 조금은 과장된 리액션이라고 생각되지만, 하루카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카 옆에 앉아 있던 시즈카의 입꼬리가 부르르 떨리며 묘한 표정으로 하루카를 보았다.


 “안녕, 모가미 씨.”


 하루카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치하야의 인사를 받자 시즈카는 황급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치하야 선배.”


 “편하게 불러도 괜찮다니까.”


 “어어어어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제가 감히.”


 단순히 연예계에서의 서열이나 경력 때문이 아니다. 치하야의 노래를 들어 본 765 프로덕션의 아이돌이라면, 그녀에게 존대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그 경칭 따윈 내다 버린 호시이 미키마저, 치하야에게는 존칭을 붙여서 부른다. 말 다 한 것이다.


 그렇다고 치하야가 존칭을 생략하고 부르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법이다. 어려운 문제다. 치하야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765 프로덕션에서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제가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요.”


 “......응.”


 “저기, 치하야 쨩. 나도 좀 신경 써 주지 않을래?”


 방금 전만 하더라도 감동의 리액션을 취하고 있던 하루카의 입에서, 완전히 반대의 말이 나오니 치하야도 시즈카도 맥 빠진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네. 라디오 수록의 이야기였던가? 사쿠라모리 씨도 음악에 굉장히 박식해서, 재미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


 “아, 예전에 음악 교사를 하셨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런지, 클래식도 대중음악도 폭넓게 이해하고 계셨어.”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누가 우리 치하야쨩의 기분을 언짢게 한 거야?”


 프로듀서 씨, 임이 틀림없을 테지만. 하루카는 꿀꺽, 뒷말을 삼키고 시치미를 뚝 뗀 체 치하야에게 말했다.


 “......”


 물론 치하야가 그런 하루카의 속내를 모를 리가 없다.


 이 천진난만한 친구는 예전부터 이상하리만치 자신을 챙겨주고 배려해주었다. 한때는 둘이 사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날 정도로 말이다.


 같은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는 연적임에도 불구하고 깊은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정말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런 이유도 포함하여, 치하야에게 아마미 하루카라는 존재는 단순한 친구 이상이다.


 때문에 하루카의 의중을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치하야는 그런 친구의 배려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누굴까, 정말. 바보 같은 우리 프로듀서 씨 말고 누가 또 있으려나.”


 “프로듀서 씨가? 뭐, 보나 마나 또 설레이게 해 놓고 시치미 뚝 뗀 거지?”


 “그런 건 아니고, 그냥...조금, 아이 취급받아서.”


 “아.”


 아마도 765 프로덕션 소속 아이돌들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주로 미성년 아이들이 그 불만의 주체인데, 프로듀서의 아이 취급 때문에 다가갈 여지가 전혀 안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불만을 프로듀서에게 직접 이야기할 수는 없고, 대부분 일본인 특유의 간접적 돌려 말하기를 차용하고 있다.


 문제가 있다면, 프로듀서는 일본인의 돌려 말하기를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둔감하기까지 한 사람이다. 때문에 마지막에는 자연스레 치하야처럼 기분이 다운될 수밖에 없고, 프로듀서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마무리가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치하야 혼자가 아니다.


 사쿠라모리 카오리와 치하야가 함께 화가 났다면, 그 원인은 분명 다를 것이다.


 치하야를 아이 취급했다면, 카오리는 성인으로서 대우해주었을 텐데, 카오리는 무엇이 그렇게 불만이었을까, 하루카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런 힌트 없이 답을 알 수는 없다. 소파에 앉아 독서를 하고있는 카오리를 한번 슬쩍 본 뒤, 연이어 치하야를 보니, 그녀는 짐작가는 바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쿠라모리 씨는 무슨 일이래?”


 카오리나 프로듀서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하루카는 말했다. 치하야는 프로듀서를 한번 힐끗, 보더니 별일 아니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그냥 평소보다 사쿠라모리 씨가 강하게 나갔을 뿐이야.”


 “헤에~.”


 프로듀서가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사쿠라모리 카오리가 특별히 잘못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평소보다 아주 조금, 과열되었을 것이다. 그뿐인 일이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었냐 하면ㅡ”


 치하야가 말하고, 하루카가 응응, 고개를 끄덕이며 치하야의 말을 경청한다. 옆에 있던 시즈카는 읽던 책을 살포시 덮어놓고 슬그머니 귀를 기울여 두 명의 이야기를 듣는다.


 책을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있는 시즈카 옆에, 세리카와 잠시 나갔던 유리코가 토모카와 함께 돌아와 자연스레 시즈카에게 책을 넘겨받았고, 세리카는 자연스레 맞은편에 앉아 유리코에게 책의 내용을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었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아이돌들을 한번 힐끗 보고, 텐쿠바시 토모카는 창가 쪽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는 카오리에게 다가갔다. 유리코와 세리카에게 대강 무슨 일인지 들었지만, 오히려 토모카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사쿠라모리 씨~?”


 “아, 텐쿠바시 양?”


 “프로듀서 씨와 무슨 일이 있으셨지요~?”


 “......”


 카오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작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토모카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카오리가 한 발 빠르게 입을 열었다.


 “텐쿠바시 양이 어떤 생각을 하던, 정말로 아무 일 없었으니까요.”


 “흐응~?”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빙긋 미소짓는 카오리의 얼굴에서 더 이상 캐묻지 말라는 무언의 신호가 들려왔다. 토모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옆을 지나갔고, 한 마디, 나지막히 던졌다.


 “거짓말쟁이.”


 “......”


 토모카가 지나가고 나자, 카오리는 아랫입술을 살짝 물며 고개를 내저었다.


 눈치빠른 토모카는 대강 상황을 파악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직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자존심 문제다.


 사쿠라모리 카오리의 스물 셋 인생에 있어, 그녀의 작은 어리광을 들어주지 않은 사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거의 없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훈육을 위하여 어리광을 들어주지 않은 적은 몇 번 있지만, 그마저도 사쿠라모리 카오리의 20세 생일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크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보다 상사라고는 해도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사람이, 그것도 이성이, 대단한 부탁도 아닌, 정말로 작은 어리광 하나 들어주지 않고 그녀가 반론하지 못할 정도로 논리적인 대처를 했다.


 사쿠라모리 카오리에게 있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스스로의 매력에 대해 돌아보게 만들었다.


 물론 텐쿠바시 토모카의 말은 정확하다. 그래도 일 년 이상 프로듀서를 더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고, 최근의 프로듀서 또한 동료보다는 조금 더 나아간 감정으로 토모카를 대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다르다. 카오리에게 있어 이 작은 일의 시작은 동경과 호기심, 그리고 아주 조금 섞여들어간 질투였지만, 이제 와서는 자존심이다.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사쿠라모리 카오리는 그녀답지 않게 투지를 불태우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프로듀서를 노려보았다.




6.


 “......”


 바바 코노미는 뚱한 표정이었다.


 카오리를 제외한 4 Luxury의 레슨이 오전에 있었기 때문에 레슨 이후, 오전에 다른 스케줄이 있던 카오리와 프로듀서가 합류하여 스케줄을 진행하는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한 시가 조금 넘어 합류한 프로듀서와 카오리 사이의 분위기가 굉장히 어색하다는 것을 눈치채는 데에는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았었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한 사이였던 두 명에게, 고작 그 이틀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코노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키타카미 레이카도, 토요카와 후카도 얼마 안 있으면 둘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채겠지만ㅡ물론 토요카와 후카는 끝까지 모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ㅡ바바 코노미는 하필이면 누구보다도 빠르게 눈치 채 버렸다.


 둘 사이에 뭔가 격렬한 언쟁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두 명이 달콤한 분위기도 아니다. 뭐라고 할까, 묘하게 엇나가는 느낌이다.


 그런 분위기에서도 자연스레 조수석에 탑승하는 사쿠라모리 카오리에게, 코노미는 질렸다는 듯이 혀를 내두르며 운전석 뒤에서 의자에 턱을 기대며 두 명을 보고 있었다.


 레이카와 후카는 차에 탑승하자마자 식곤증이 왔는지 서로에게 기대어 슬며시 곯아떨어졌다.


 그래도 옆자리는 포기 못 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인가.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코노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사쿠라모리 씨.”


 어색한 침묵 속에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프로듀서였다. 하지만 카오리는 그의 부름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며 조금 딱딱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영업 미소다, 카오리의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강 눈치챈 코노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저 프로듀서가 무언가 또 사적으로 바보 같은 실수를 한 것이 틀림없다. 아니라면, 그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의 사쿠라모리 카오리가 저렇게 나 토라졌어요, 대놓고 광고하며 거리를 두는 행동을 할 이유가 없다.


 “저기, 사쿠라모리 씨?”


 물론 돌아오는 답변은 없다. 코노미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기 때문에 도와줄 수도 없다. 프로듀서가 스스로 생각하고 해결해야 하지만, 업무 문제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이다.


 프로듀서는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765 프로덕션 소속의 아이돌이라면 이를 마음에 지니고 있어야 정신건강에 이롭다.


 아마도 바바 코노미였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일일지도 모른다. 혹은,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사쿠라모리 카오리가 아직 프로듀서를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당분간 프로듀서와 사쿠라모리 카오리 간의 소통은 삐걱댈 것이 틀림없다.


 “......바바 씨.”


 우와아. 코노미는 질린 얼굴로 프로듀서를 보았다.


 거기서 제 3자를 부르냐, 자신이 카오리의 입장이었다면 정강이라도 한번 걷어차 주었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카오리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진 것을, 코노미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바보 프로듀서, 옆을 한 번 더 보라고! 속으로 비명처럼 외쳤지만 프로듀서가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노미는 프로듀서의 말에 대답을 해야만 했다. 업무와 관련된 말이기도 할 것이고, 설령 아니더라도 그녀가 대답하지 않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은 날이 선 말투로, 그녀는 대답했다.


 “왜, 프로듀서?”


 “아, 그게...”


 그런 코노미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프로듀서는 그답지 않게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녹음 작업 중간에 스튜디오 분들과 협의회가 있어서 말입니다. 작업 끝나고 30분 정도 기다리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 여쭈어보려고 했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며 카오리를 슬쩍 쳐다본다. 어느 틈에 다시 영업용 미소로 돌아와 있는 카오리를 보고 코노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면 따로 돌아가셔도 괜찮습니다. 택시비는 차후에 사무소로 청구하시고요.”


 “아니아니, 언제나처럼 기다릴 테니까.”


 “알겠습니다, 바바 씨.”


 바바 코노미 자신의 대답이기도 했지만, 사쿠라모리 카오리의 대답이기도 하다.


 프로듀서가 꺼낸 주제는, 그다지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765 프로덕션 모두에게 다 물어보아도, 부득이한 사정이라도 있지 않은 한 코노미처럼 대답했을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왔듯 늦는다, 라는 사실만 알려주면 된다. 프로듀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선택지를 제시하면서 별일 아닌 이야기를 했다. 그것도 굳이 카오리를 불러가면서까지.


 프로듀서 나름대로는 그녀와 대화를 이끌어 나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주제를 코노미에게 돌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흐아암...어라? 아직 도착 안 했나요-?”


 이 상황에서 키타카미 레이카가 일어나 준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시어터의 성인조 중에서는 모모세 리오와 함께 나름대로 분위기 메이커 역할에 충실한 사람이기도 했고, 워낙 특이하고 유들유들한 성격인지라 분쟁도 자연스럽게 넘겨버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준다면 좋으련만, 바바 코노미는 레이카에게 기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래서야 누가 연상인지 모르겠다.


 “거의 다 왔습니다.”


 “흐-응?”


 백미러 너머로 프로듀서의 얼굴을 본 레이카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다가 앞 좌석에 앉아 있는 카오리의 얼굴로 손을 뻗었고, 그대로 카오리의 볼을 양쪽으로 주욱 잡아당겼다.


 “꺄악?! 레이카 씨?”


 “굳어 있어요.”


 “네?”


 카오리가 반문했지만 레이카는 이를 무시하고 백미러 안에 있는 프로듀서에게 눈을 맞추었다. 살그머니 가늘어지는 눈매에, 프로듀서는 핸들을 잡은 채로 몸을 살짝 부르르 떨었다. 무슨 사고를 칠지 몰라서 불안하다.


 “프로듀서 씨. 무슨 일 있었지요?”


 “아니, 그게......”


 “아무 일 없었답니다.”


 그러나 레이카의 물음에 대한 답변은 의외로 조수석에서 들려왔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키타카미 레이카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정도로 단호하게 말하면, 제아무리 키타카미 레이카라도 머쓱해지기 마련이다. 4차원 천연인 그녀라지만,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키타카미 레이카가 사쿠라모리 카오리와 동료로서 함께 일을 한 지 몇 개월 되진 않았지만, 그녀의 저런 단호한 모습은 처음 본다.


 토라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카오리 스스로가 부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레이카가 보기에는 무언가 프로듀서에게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너무나도 뻔하지만, 원인은 프로듀서일 것이다.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기, 코노미 언니. 저거 무슨 일이래요?”


 프로듀서나 카오리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그는 코노미에게 사건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코노미가 알 턱이 없다. 작은 한숨과 함께 코노미 역시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나도 몰라. 우리가 차에 타고 나서부터 계속 저 분위기였다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원인은 프로듀서 씨, 이겠지요?“


 ”백 퍼센트 확신해.“


 그 이외의 원인이 있을 리가 없다. 코노미와 레이카 모두 확신에 찬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좋은 기회다. 그리고 좋은 핑계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니 요즈음 4 Luxury를 비롯한 20세 이상 성인조의 친목 도모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시점이었다.


 도쿠가와 마츠리는 영원한 18세이니 제외하도록 하자.


 ”이건...역시나 필요하겠지?“


 ”물론! 리오 씨도 부르자구요!“


 ”아즈사도!“


 ”치즈루 씨도 불러야지!“


 ”오늘!“


 ”오늘!!“


 꺅꺅거리며 점점 고조되어가는 코노미와 레이카의 목소리가 운전하고 있는 프로듀서와, 조수석에 앉아 있는 카오리에게 안 들릴 수가 없었다.


 카오리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말일까 생각했지만, 프로듀서는 시어터 성인조를 일 년 가량 프로듀스 해 왔기 때문에, 그녀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곧바로 눈치챘다.


 그래서, 프로듀서로서 가장 모범적이고 당연하면서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을 했다.


 ”사고치지 말고 적당히 드세요, 부탁입니다.“



8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