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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과 - 첫 번째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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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06, 2019 02:55에 작성됨.

일본의 여름은 후덥지근하다. 조금만 방심하면 온 몸이 녹아내려 버릴 것 같은 더위에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해 놓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군. 한 연예계 프로덕션에서 요청을 받아 일본에 온, 이름 없는 한국의 삼류 작곡가인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땀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이마를 한 번 손수건으로 닦아내고는 주변을 둘러본다.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더위에다가, 높은 건물들이 내리쬐듯이 토해내는 반사광에 나는 자신이 앞뒤로 잘 익어가는 돼지고기가 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돼지고기라, 그러고 보니 일본에서 먹는 차슈는 꽤나 별미라고 했던가. 삼류 미식가인 나는, 무의식적으로 일본에 온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생각을 하며 입맛을 다신다. 야들야들한 고기에 돼지사골 육수, 그리고 사케 한 잔... 나쁘지 않은 하루의 마감이다.


잠시 행복한 상상을 하다 나중에 꼭 찾아서 먹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나는 일본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다 미리 전달받은 번호가 붙어있는 건물을 발견하고 천천히 들어간다. 시원한 건물 안. 아니, 오히려 춥다는 느낌이다. 그 아이러니가 나를 조금 굳게 만들었는지,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에 잠시 몸을 두 팔로 감싸고는 건물 안에서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어디에서 어디를 어떻게 봐도 건물 안을 안내하는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은 보통 안내요원이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길을 잘못 든 행인처럼 가만히 서 있으니 어느새 다가온 양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내가 누구인지, 또 뭐하는 사람인지를 속사포같은 일본어로 물어온다. 난 일본어는 잘 모르는데. 아무리 노력해봐야 한 개 국어만 겨우 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만을 갖춘 삼류 작곡가인 내가 난감함은 일단 저 뒤로 미룬 채 손짓발짓과 짧은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자 그가 알겠다는 듯이 어디서 어디를 어떻게 봐도 흉악하다고 밖에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한다.


나를 아는 걸까,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짧은 영어로 자신을 프로덕션에서 보낸 프로듀서라고 소개한다. 아, 그런가. 프로듀서인가. 그건 참 다행이다. 이제 길을 헤맬 확률은 꽤나 줄었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은땀을 닦아 내리며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하자 자신을 프로듀서라고 소개한 남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 자신의 명함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나에게 내민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짧은 일본어로 질문하자 그가 그런 것을 알 필요 없다는 듯이 조금 입가를 무너뜨리고는 그저 손가락으로 서류만을 가리킨다. 아무리 봐도 서류를 읽고 사인하라는 모양새이다. 어쩔 수 없다. 여기서는 그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 나는 그가 내민 서류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무슨 내용인지 살펴본다.


내용을 보아하니 간이 계약서인 모양. 간이인 것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어쨌든 계약서이니 만큼, 나에게 불이익이 될 만한 것은 없는지, 수당은 메일로, 그리고 회사에서 받았던 초기 계약서대로인지, 그리고 그 외 여러 가지를 확인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귀퉁이에 조그맣게 공란으로 되어있는 곳에 내 서명을 그려 넣듯이 휘갈긴다. 한국어로 내용이 번역되어 있어서 다행이야.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일본어는 절대 하지 못할, 일개 월급쟁이에 불과한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마지막 내용을 읽어 내려가다 잠시 멈칫하고는 그를 다시 쳐다본다. 나의 시선에 담겨있는 어리둥절함을 읽었는지 프로듀서란 작자가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냐는 듯이 험악한 인상을 짓는다. 그 표정에 조금 기가 죽긴 했지만, 일단 궁금함이 생기면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어디선가 귓동냥으로 들은 짧은 일본어로 더듬거리며 이 내용은 무엇이냐고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내 질문에 프로듀서란 작자는 내 엉망진창 일본어를 듣고는 잠시 배꼽을 잡고 웃더니 짧은 영어로 나에게 불친절한 설명을 해준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앞으로 일할 이 일본 프로덕션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에 대한 내용이라고 한다. 무언가 이상하다. 이 커다란 회사에서, 기본적인 일본어도 잘 알지 못하는 나같은 무지렁이가 뭘 할 수가 없을 텐데.


마음속으로 그가 한 설명이 그다지 괜찮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이상 그를 건드리면 귀찮아질 것 같아 일단 그가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프로듀서란 작자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잠시 나를 두고 어딘가로 나가버린다. 갑작스런 상황에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 작자는 어디선가에서 자신의 비싼 장난감을 자랑하는 철없는 어린 주인처럼 자신의 아이돌을 소개해준다.


타카가키 카에데. 그것이 그녀의 이름.


어디를 어떻게 봐도 미녀와 야수로밖에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을 계속 쳐다보고 있으니 야수 쪽에서 왜 그렇게 쳐다보냐는 듯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약간은 거친 듯한 말들을 쏟아낸다. 그 말에 옆에서 주눅이 든 표정을 지으며 서 있던 여성... 그러니까 타카가키 씨가 왜 그런 말을 하냐는 듯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 이내 도로 쭈그린 표정으로 돌아온다. 아무래도 좋은 소리는 아니겠네. 나는 생각보다 여기서의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감지하고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어쩐지 돈을 꽤 세게 주더니. 내 원래 일터인 한국의 프로덕션에 돌아가면 불친절한 대응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까, 아니면 그들에겐 왜 불친절함 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해야 할까. 어느 쪽이 먼저여도 그 쪽에서 들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쳐다보니 프로듀서가 일그러지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더니 짧은 영어로 입을 연다. 아무래도 내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했다. 나는 왜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며 일단 진정하라는 의미로 두 손을 아래로 내린다. 그 반응을 본 프로듀서가 자신이 오해했다고 생각했는지, 그 험악한 얼굴에 다시 미소를 띄우며 짧은 영어로 타카가키 씨에게 어울릴 만한 곡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아니, 이건 강요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나는 곡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의무이고 여기 온 목적이니까. 뭐, 히트 친 곡은 한 곡도 없었지만 말이지.


프로듀서의 말에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단 타카가키 씨가 몇 소절만이라도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 달라고 더듬거리며 말한다. 나의 말에 프로듀서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타카가키 씨를 부스에 강제로 밀어 넣듯이 들여보낸다. 왜 저렇게 강압적으로 하는 거지. 그 의문이 목구멍 끝까지 차 올라 조금만 잘못하면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내뱉을 것만 같다. 하지만 힘없는 나는 그저 할 일만 마치고 가면 그만. 나는 질문 대신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타카가키 씨에게 노래를 부르라는 신호를 보낸다. 내 수신호를 본 타카가키 씨가 잠시 주저하더니 이내 숨을 한 번 고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래,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지상에서는 들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발퀴리어의 아름다운 발성으로.


그 고혹적이고도 어딘가 슬픔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내가 멍한 표정을 지으니 옆에 있던 프로듀서가 나를 툭 치며 짧은 영어로 목소리도 들었으니 빨리 곡을 만들라고 독촉한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조금만 더 들어보겠다고 말해봤지만 그는 이 이상은 들려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타카가키 씨를 부스 밖으로 끌어낸다. 프로듀서의 강압적인 손놀림에 그녀가 하릴없이 밖으로 나와서는 다시 주눅든 표정을 짓는다. 노래를 부를 때의 그녀는 정말로 천사 같았는데. 나는 보이지 않는 족쇄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일단 나가 달라고 부탁한다. 나의 표정을 보던 프로듀서는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타카가키 씨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이제 혼자의 시간. 나는 최대한 천사에게 걸 맞는 노래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의 날개는 꺾여버릴 테니까. 그러지 않으면 그 목소리는 다시 한 번 더 들을 수 없을 테니까.


새하얀 백지의 악보. 다섯 개의 줄이 마음껏 괴롭혀보라는 듯이 깔깔거리며 내 눈앞에 자리한다. 일단 가장 무난한 음 하나를 맨 앞줄에 그려 넣는다. 그려낸 음은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본다. 마치 왜 자신을 여기에 넣었냐는 듯이, 자신이 있을 곳은 이 곳이 아니라는 듯이. 아니야, 내가 원한 것은 이게 아니야. 단 하나의 음만 그려 넣었던 악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는 새로운 악보를 꺼내 다른 음을 그려 넣는다. 하지만 그 음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침묵의 아우성만을 내뱉을 뿐. 삼류 작곡가인 나는 몇 번이고 새로운 악보를 꺼내 첫 음 만을 그려 넣었다가 잠시 쳐다보고 버리는 작업을 반복한다.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 나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다 어느새 무거워지는 눈꺼풀의 무게감을 느끼며 천천히 책상 위로 쓰러진다. 눈앞이 깜깜해진다. 시간이 몇 시인지 보지도 못 했는데. 감각이 무디어져 간다. 이내 완전히 필름이 끊겨버린다. 천천히, 그리고 고요히. 마치 베토벤의 귀가 멀어져 가는 것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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