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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미야 아스카 『물 밑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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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03, 2019 22:22에 작성됨.

응, 비일상이란 느낌이네.
뭔가 물 속에 내려앉은 느낌이야.
햇살은 닿지 않고, 따스함은 물 속에서 잔잔히 녹아내려 흔적도 없는 것같아.
응, 그 말대로다.
정말 비일상이란 느낌이야.


너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에 「이 녀석은 아파오는 애」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어째서 그렇게까지 말했는지 이해되지 않지만, 그 때의 나로서는 니노미야 아스카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릴거라고 생각했던 것같아.
내가 생각하기에 나 자신은 어른스럽고 멋진, 소녀의 허물을 완전히 벗어던진 숙녀라고 말이야.
그래, 확실히 그 때의 나는 어린아이였지.
어린애 취급받는 것을 싫어하고, 쓴 것도 싫어하는 아이.
그래서 너에게 「너와의 공명은 영원의 난제」라고 말해버렸는지도 몰라.
후회하고 있는 현재의 나에게, 과거의 나는 뭐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지금의 나라면 너와 공명할 수 있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공명할 수 없는 녀석을 프로듀서로 맞이한 나의 불운을 탓할까?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면서, 나는 너와 파장이 조금씩 맞아들어간다고 느꼈어.
그건 기분 탓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 바랐기에 그렇게 인지한걸까.
그래도 네가 조금씩 나에게 맞춰주려고 한다는건 알 수 있었고,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던건지도 몰라.
그러고보면 너도 참 이상한 녀석이었어.
나에게 맞춰줄 필요까진 없었는데, 그저 나에게 어른다움만을 보여주었으면 되었을텐데.
하지만 그것도 어른의 대응이란거겠지, 프로듀서?


네가 보여준 새로운 세계.
그 세계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눈이 부셔서, 나는 조금 두렵기도 했어.
하지만 내 옆에 네가 있었기에, 나는 한 발자국씩 그 빛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
조금씩, 조금씩 걸어서 그 빛 안으로 들어가는 나를 볼 수 있었어.
빛 속에서 네가 나에게 추가해준 새로운 색상은, 마치 하늘 같아서...
그래, 뭐랄까.
비일상, 이란 느낌이었어.
마치 하늘을 나는 것같은 비일상이라고 해야 할까.
네가 나에게서 본 빛도, 분명히 그런 색이겠지?


차가운 밤의 거리.
사무소에 혼자 남아 커피를 마시며 일을 하고 있는 네게, 나는 그 거리를 걸어 불쑥 찾아와 무언가를 건네곤 했지.
기억나, 프로듀서?
내가 먹지 못하는 차나 커피 등을 팬들로부터 선물받았다고 하면서 주곤 했잖아.
커피나 차는 내가 마시지 못하는 거니까, 버리기보다는 조금이나마 더 쓸데가 있는 쪽으로 주겠다고 하면서 말이야.
고백해두는건데, 사실 그것들은 내가 산 것이었어.
조금이라도 네가 피로감을 잊어주길 바라면서, 나의 영혼과 공명할 수 있는 자를 위해서 조금의 수고를 아끼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아, 그럼 너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네.
그 때의 나는 니노미야 아스카가 아닌 그저 소녀였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야.
뭐, 그럴지도 몰라.
보편적인 카모플라쥬.... 아마도 그런게 아니었을까.


발렌타인데이 때 내가 초콜릿을 준 건 잊지 않고 있겠지?
너는 내가 준 것 말고도 꽤 많은 아이돌들에게서 받은 초콜렛들이 있었지만, 내 것을 받으면서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잖아.
프로듀서, 사실 그 녀석은 내가 만든 거였어.
내가 만든 것들중에 가장 완벽한 녀석 말이야.
물론 요리를 잘하는 아이돌들이 많은 우리 사무소에서 내 실력 정도는 그다지 튀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네가 좋아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만든 녀석이야.
뭐? 소녀같은 말을 잘도 한다고?
당연한 말을 하지 마, 프로듀서.
너에게는 어른스러워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분명한 열네살 소녀라고.


손을 뻗어 너의 손을 잡은 그 첫 날.
너는 깜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고는,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었지.
무슨 기분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냐면서, 아니면 걱정거리라도 있냐면서.
아니, 걱정거리같은건 없었어.
그저 나는, 너를 놓칠까봐 손을 잡은거야.
내 손에서 덧없이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네 체온이 내 손에 남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잡은거야.
그 때에는 조금 다급하게 잡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너는 어쩌면 내가 어린아이같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네.
뭐, 맞는 말이겠지.
나는 너보다 한참 어리고, 너는 나같은 아이돌에게는 관심조차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때의 너라면 조금 더 멋진 말을 해줬어야 하지 않을까?


손을 잡는것까지가 나에게 허락된 공명이었을까?
그날 이후부터 너는 다른 아이돌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아져있었지.
그와 동시에 나와 보내는 시간은 조금씩 사라져서, 나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조금씩 불안해졌어.
하지만 나는 어른이었으니까, 최대한 외로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그게 네가 어른인 니노미야 아스카에게 바라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네가 바라는 나의 모습은, 언제나 당당하고 멋진 아이돌의 모습일테니까.
그러니까 네가 다른 아이들과 공명하고 있어도 나는 기다렸어.
언젠가는 나를 돌아보며 웃어줄거라고, 그 미소와 함께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줄거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넌 돌아오지 않았어, 프로듀서.
결국 네게 중요했던 건 아이돌인 니노미야 아스카였던거야.
하지만 그것뿐이라도 좋았어.
네 시선을 조금이라도 뺏을 수 있다면, 그래서 나를 돌아보고 웃어준다면 행복했으니까.
아아, 공명하는 영혼을 찾은 나는 왜 이리도 슬픈걸까.
분명히 환희에 가득차야만 했는데, 그랬는데.
너와 내가 함께 있을 때에 보였던 미래는,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완전히 사라져 버린걸까.
물 속을 흐릿하게 통과하는 햇빛과, 나의 주변을 돌아다니는 이름 모를 물고기 무리들.
나는 언제부터 수면 아래에서 태양을 보고 있었던걸까?


몇 달만에 맞이한, 오랜만에 함께 퇴근하는 날.
나와 공명한다고 생각했던 너는, 나도 잘 아는 같은 프로덕션 소속 아이돌과의 결혼을 말해왔지.
그 아이돌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아름답고 성숙한 여자여서,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잘 됐다라고 말해줄 수 있었어.
어른인 척하는 나와는 다르게, 그 동료는 너를 더 포근하게 감싸안을 수 있을테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아, 어둠이 내려앉은 눈물의 호수.
이 호수 아래에서, 나는 홀로 걷고 있어.
태양조차도 보이지 않고, 그저 이름 모를 물고기 떼만이 나의 주변을 맴도는 하루하루.
나는 수면 아래에서 영원히 너를 기다리고, 다 쓰지 못한 젖어버린 편지를 품 속에 고이 묻어놓았어.
잔잔히 흔들리는 풍경 속에서, 가끔씩 편지를 꺼내 읽어내려가.
아아, 비도 구름도 잊을 수 있도록 멍하니 하늘을 보는 나날.


비일상이란 느낌이네.
심해 속으로 가라앉아, 떠오르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이야.
햇살은 닿지 않고, 따스함은 물 속에서 잔잔히 녹아내려 흔적도 없는 것같아.
응, 그 말대로다.
정말 비일상이란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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