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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21, 2013 23:48에 작성됨.




창작글판에 있는 '시작' SS와 이어집니다

보시고 오시는게 아마 나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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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3가지 키워드가 있다. 여자 아이돌, 성인용품, 택배기사.
이 3개 단어들이 무슨 연관성을 갖느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 수 있을까.
아이돌과 택배기사 사이라면 - 조금 억지스러울 수 있다만- 실낱같은 연관성을 잡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일일 직업체험과 같은 형식으로, 어여쁜 아이돌들이 그날 하루 택배기사가 되어 물건을 배달하는 형식.
느닷없이 방문한 아이돌에 깜짝깜짝 놀라는 택배 수령인들과 허름한 택배회사 유니폼 아래서도 빛나는, 아이돌의 미모에 즐거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성인용품이 끼어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택배기사로 변장한 아이돌. 배달 물건은 성인용품.
기가 막힌 미모, 혹은 숨막히는 몸매, 어쩌면 두가지 모두를 겸비한 여자 아이돌이, 성인용품을 들고 택배 기사로서 수령인을 방문한다.
수령인은 왠지 남자이고, 어쩐지 독신이며, 마침 집에 혼자 있는데다가, 불가사의하게도 집에 침대까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그러므로?
어떤 상황이, 화면이, 소리가 당신의 상상 속에 펼쳐질지는 모른다. 그것이 신사적이건, 비신사적이건, 상상은 자유니까.
하지만 상상이 자유인 만큼, 착각도 자유일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할 필요도 있겠다.

 

때는 2월 중순. 그칠줄 모르고 떨어지던 기온처럼, 지상에 피어난 모든 식물들도 바싹마른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가지를 부여잡고 있던 나뭇잎들도 여지없이 추락하게 만드는 매정한 계절.
나는 치하야를 데리고 사무소 바로 옆에있는 연습실로 찾아갔다.
연습실은 새것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오래됐다고 하는 것도 호들갑인, 여러모로 애매모호한 3층짜리 건물이었다.
1층과 2층은 댄스연습, 3층은 노래연습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3층까지 올라가기가 귀찮았는지 모두 1층 연습실만을 애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됐던 나는 3층으로 올라갔다. 뒤따르던 치하야가 말한다.

 

"1층...보다 더 위로 가시는..거에요?"

"여기 1층부터 3층까지 다 우리 사무소꺼야. 1층만 쓰지 말고 골고루 써줘.
모처럼 아저씨가 돈좀 써서 산 건물인데 슬퍼한다고"

"...사장님이 슬퍼하신다면 그건 프로듀서 때문이라구요"

"왜"

"하기와라한테 건물 2층이랑 3층에는 밥먹다 사래들려 죽은 귀신이 있는데
때깔이 너무 고와서 누구한테나 보이니까 올라가지 말라고 하셨다면서요"

"그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믿었구나. 유키호도 참 바보같으니라고.."

"역시 거짓말이었군요"

"알고있었어? 그럼 너가 앞장서서 2,3층도 쓰게 하지그랬어"

"전..."

"무서웠어? 귀신 나올까봐 무서웠어? 치하야도 무서웠구나?"

"....몰라요. 얼른 가요"

 

더 장난치면 정말로 화낼 것 같아서 관뒀다.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은, 오늘만은 자제가 필요했다.
오늘은 능력있고 이름있는 작곡가들에게 돌릴 키사라기 치하야 홍보CD를 제작하기로 한 날이였기 때문이다.

 

그 전에 사무소의 근황을 잠깐 이야기 하자면, 오디션이 끝나고 총 12명이 아이돌로서 합격했다.
오디션 지원자중 기본적으로 태도가 불량하거나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가 그 12명이었다.
능력무관, 학력무용, 예의바르고 의지가 있다면 우리 765사무소에 지원하세요.
아이돌 사무소보다는 자원봉사단체 지원자 모집에나 어울릴 듯한 문구다.
뒤집어 본다면 스타가 되고싶어하는 사람중에 태도가 올바르고 의지가 굳은 사람은 많지 않다는 의미였다.
흔하디 흔한 '아이돌 과거사 구설수'를 피하기 위해서 그런 지원자는 재능과 무관하게 잘라내야했다. 아깝지만, 필요하다.

 

오디션 이후 약 한달간은 아이돌로서 성장할 방법과 계획에 대해 청사진을 짜는 작업에 들어갔다.
성격도 재능도 겹치는 구간이 없는 12명의 아이돌. 덕분에 순조롭게 진행된 작업은 아름답도록 깔끔하게 끝났다.
치하야를 겨냥한 4단계 불법 어획 작전은 12개 작전중 가장 먼저 틀이 잡힌 작전이었고, 때문에 가장 먼저 실행에 들어갔다.
남은 11개 작전 실행을 위한 첫단추다. 때문에 중요하다. 무척이나.

 

"방음시설이 제대로 되어있네요. 이 방"

 

3층 노래연습실의 방음벽을 쓰다듬으며 치하야는 감탄한 듯 눈을 밝혔다.
사무실을 낡은 건물에 차려놓고 연습실에 돈을 더 투자한 것은 아저씨의 의도일 것이다.
쓸데없이 긍정적이고 태평하지만 이런 데서는 안어울리게 철저한 인간이다.

 

"그나저나 여기서 뭘 하시려고요?"

"녹음"

"녹음?"

"녹음"

"녹음...이라면.."

"간단해. 너가 노래를 CD에 녹음하면, 내가 여러장으로 복사해서, 뿌릴거야"

"30V나 60V짜리 곡을 만드는 사람들에게요?"

"똑똑하네"

"근데 좀 새롭네요"

"뭐가"

"보통 관계자들에게 주는 CD는 오리지널 곡이 들어가는 미니앨범이나 정규앨범 아닌가요?"

"...."

"다른 가수의 곡을, 스튜디오도 아닌 연습실에서 녹음한걸 나눠주는건.."

"흐응..."

 

그녀는 은연중에, 자기도 모르게 내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보통'

 

많은 아이돌의 행보는 '보통' 이러하다. 인지도가 전무한 상태에서, 역시나 인지도가 전무한 작곡가들의 곡을 받는다.
작곡가의 인지도가 전무한 까닭은, 업계 신출내기인 이유도 있겠지만, 실력부족이다.
신인 아이돌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다. 그들은 실력없는 신출내기 작곡가에게 곡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신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작곡가들이 쓴 곡으로 꾸려진 앨범은, 좋게 말하면 노력의 결실이지만, 앨범 수록곡 완성도는 높다고 볼 수 없다.
그들은 완성도 낮은 앨범을 관계자에게 돌리며 자신들을 홍보하고, 그것을 구실로 TV에 데뷔한다.

 

신인인 만큼 그들은 지방에서 행사를 돌며 얼굴을 알리려 노력한다.
그들은 확실히 기가 막힌 미모, 혹은 숨막히는 몸매, 어쩌면 두가지 모두를 겸비하고 있다. 그룹이던 솔로던 구성원 모두가.
그런데도 그들은 지방행사를 전전한다. 지방행사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에 '전전'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지방행사만 열심히 뛰는 와중에도 그들은 핑크빛 미래를 상상한다.
몇만명이나 되는 관중들이 내지르는 환호성과 눈부시게 춤추는 조명아래서 노래하고 춤추는 자신을 떠올린다.
차트 1위 진입에 눈물흘리고 정규 예능방송에 고정출현하는 자신을 상상한다.
하지만 날개없는 이상주의자가 현실에 발을 디딜 틈은 없다.
여전히 그들의 무대는 지방행사이며, 좋다고 하기 힘든 노래로 공연을 이어간다.

 

결국 그들은 깊은 늪에 발이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처럼, 지방행사 수준 아이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곳에서 빠져 나오려 몸에 힘을 주고 이리저리 움직일수록, 조용하고 냉정하게 밑에서부터 집어삼켜진다.

 

늪지대 위로 차갑게 식어 누워있는 변사체. 아이돌인생을 포기하고 일반인으로 살아가는 사람. 맥락은 같다. 거기서 거기.
수많은 아이돌이 이런 과정 속에서 태어나고 사라진다. 완성도 낮은 곡을 시작점으로 잡았다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고장난 발판을 밟고, 수준낮은 점프를 한 다음, 잘못된 착지를 한 것이다.

 

"....하아.."

" '보통'은 이게 현실이야"

"그럼 우린 어쩌죠?"

 

치하야가 근심어린 눈길로 나를 올려다본다.
놀려먹고 싶은 생각이 사무치게 들지만 오늘은 참아야한다.

 

"보통이 되길 거부하면 돼. 일단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줘"

"네"

"노래 3곡을 녹음해. 한 곡은 원곡과 반대되는 느낌으로.
하나는 정말로 자신있는 노래. 한 곡은 평소에 부르지 않는 분위기를 가진 노래."

"셋 다 자신있는 노래로 하는건.."

"보통이군"

"..."

"원곡을 자기 느낌대로 바꿔서 부르면 목소리가 가진 분위기나 음색을 듣는이에게 호소할 수 있어.
자신있는 노래를 시원하게 부른다면 듣는이는 가창력에 주목하겠지.
마지막으로 평소 부르던 것과 다른 분위기를 가진 노래를 괜찮게 부르면 여러 장르를 소화할 수 있다는 인식까지 줄 수 있을거야"

"....보통이 아니네요"

"당연하지. 누가 생각한건데. 아무도 이렇게는 안 할거야"

"너무 모험적이지는 않을까요"

"도발적인 모험은 관심을 끌고, 그 모험이 성공적이라면 관심은 호의와 긍정으로 바뀔거야"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를 자신있게 풀어놓았다. 하지만 거짓 구렁텅이에 치하야를 끌어들이려는 것은 아니었다.
난 나의 검증되지 않은 이 방법이 제대로 먹힐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녀도 확신을 가져주기를 바랬다.

 

"해볼게요. 갑자기 의욕이 생겼어요"

 

설득 성공

 

"참고로 무반주로 노래하는거야"

"보통은 반주에 맞춰서 노래하나봐요?"

"알면 됐어"

 

똘똘한 딸래미를 둔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아, 쓰다듬어주고 싶다.
무반주로 노래하도록 시킨 이유는 목소리를 부각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여타 데모CD에서 찾기 힘든 생생하고 날것같은 느낌을 담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아마 치하야도 어느정도 이해하고 수긍했을 것이다. 똘똘하니까.


"난 밖에 있을게"

"여기 안계시고요?"

"노래는 혼자해. 간다"

"아, 잠ㄲ.."

'쿵-'

 

치하야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에 문을 닫아버리고 나왔다. 기본적으로 할 말 끝나면 뒤돌아보지 않는게 내 성격이다.
정당해보이는 이유를 들자면, 3곡이나 되는 노래를 전력으로 부르기 위해서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녀는 자기 목소리가 가진 모든 것을 작은 CD에 담아내야 한다.  내가 낄 자리는 없다.
부당해보이는 이유를 들자면 - 사실 매정하게 연습실을 나온 가장 큰 이유다 - 담배가 필요했다.

 

오랜만에 혼자서 담배를 태우며 보낼 시간에 조금은 들뜬 채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옥상문은 애매모호한 건물과는 대조적으로 이상하리만큼 새것이였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건가.
문에는 옥상 모습을 대충이나마 볼 수 있도록 작은 유리창이 만들어져 있었다.
문을 열기 전 창문을 통해 슬쩍 옥상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좋았어.

 

'끼이이익...'

"후우..."

"응? 아, 자네"

"....."

 

제기랄. 아저씨는 옥상 창문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서있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두꺼운 패딩점퍼에 목도리를 꽁꽁 싸매고 귀마개까지 하고있다.
손에는 낡은건지 새것인지 구별할 수 없는 - 마치 이 건물같은 - 가죽장갑을 끼고있다.
추위에 강하지도 않은 늙은이가 왜 온 몸을 겨울옷으로 중무장 하고서 옥상에 서있는건지.

 

"뭐해 아저씨.."

"그냥 있지"

"늙은이들은 왜 그리 그냥 있는걸 좋아하는건지"

"노인이란 65세 이상이 되는 사람을 정의하는 단어일세. 난 아직 50대야"

"모든 노인은 늙은이지만, 모든 늙은이가 노인이라는 법은 없지"

"하하하.."

"늙은 몸으로 찬바람 맞으면 무릎 시려서 다음날 일어나지도 못할껄"

"그러니까 그정도는 아니래도"

 

나는 아저씨 옆에 서서 아마도 아저씨가 보고있었을 풍경을 눈에 담아보았다.
개성없는 도시형 건물들만 가득한 지역이다. 유리빌딩, 아파트, 아파트, 유리빌딩. 시멘트빌딩. 그리고.

 

그리고 그 가운데에 한없이 높게 위로 뻗은, 961프로 본사빌딩.
아저씨도 참 알기쉽다.

 

"...."

"응? 왜그러나?"

"분해? 뒤쳐진 것 같아?"

"무슨소리를..."

"시치미 떼지마 아저씨. 벌써 눈치 깠어"

 


난 아저씨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고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르켰다. 손가락 끝은 화려하고 웅장한 961프로 건물을 향한다.
아저씨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더니, 쓰디쓴 술을 삼키듯 입꼬리를 올렸다. 씁쓸한 웃음.

 

"자네는 못속이겠구만"

"이런데 서서 우리 앞날이나 걱정하고 있었겠지. 언젠가 저렇게 될까 어쩔까"

"..."

"아저씨는 '우리'를 못믿어? 그래서 그래?"

"그럴리가.."

"그럼 이런거 이제 하지마. 나랑 리츠코가 다 알아서 할거야"

"..."

"아저씨는 그냥 코토리가 심심하지 않게 말동무나 해주면서 편히 있으면 돼"

"하하하. 그래 알겠네. 알겠어"

 

그러고서 우리 둘은 한동안 말없이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시선은 961프로 본사빌딩에 던져둔 채.
업계 1위 프로덕션이 자랑하는 위풍당당한 고층건물. 누군가는 우러러보고, 누군가는 두려워하고, 누군가는 혐오한다.
그래, 우리 아이돌들은 우러러보고, 아저씨는 두려워한다. 나는 그들을 혐오한다. 혐오하고 증오한다.

 

"아저씨. 쫄지마"

"응?"

"쟤네들은 애초에 돈으로 큰 녀석들이야. 아저씨도 알잖아"

"그렇기때문에 더 무서운걸세"

"아저씨.."

"자본으로 업계를 장악할 수 있는 시대가 무섭다는거야. 누구보다도 자네를 믿고 존중해.
잘 해나갈 수 있으리란 것도 굳게 믿어. 하지만 그 패기와 능력이 고작 돈때문에 생명력을 잃게될 수 있다는게 무서워"

"현실이 엿같다고 투정만 부리고 벌벌 떤다고해서 저 빛나는 금자탑이 혼자 무너지진 않아"

"..."

"실력으로 제대로 이기자. 이딴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소리는 하지 않을래.
그렇다고 진짜로 부닥쳐보기도 전에 아저씨처럼 빌빌대면서 쪼그라들지도 않을거야.
만약 정말로, 우리가 잘나갈 때, 저들이 돈으로 우리를 막고 견제한다면 글쎄... 화가나서 때려 눕히던지 어쩌던지 하겠지.

"자네.."

"아저씨가 하고있는 그런 바보같은 걱정은 쟤네가 견제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우리가 성장한 다음에나 하라고.
쟤들 입장에서 우린 아직 현미경으로도 보기 힘든 나노입자 수준으로 하찮으니까"

"..."

"하지만 이건 장담할게. 머지 않아서 961이 우릴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될거야.
난 우리 애들을 믿고 나를 믿어. 때문에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어.
그 이후로는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아저씨는...글쎄 그냥 있어"

 

아저씨는 고개를 돌려 여지없이 커다래진 동공을 내게 향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떨구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까 전처럼 씁쓸한 미소는 아니었다.
그것은 확신에 찬, 희망적인 웃음이었다. 그리고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돌아서는 순간 그의 얼굴은, 3일 묵은 변비가 한 번에 날아간 듯한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아저씨는 말없이 옥상 밖으로 향했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남자는 등으로 말한다.
라기보다는 사실 추운데 이리저리 움직이기 싫었고, 담배 한 대가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왠지 옥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자네라서 다행이야. 고맙네. 정말 고맙네"

'끼이익..쿵-'

 

아저씨는 자기 할 말만 내 등짝에 던져버리고 가버렸다.
너라서 다행이야. 고마워. 진짜로. 말이 지닌 짧은 여운을 귀로 씹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꽤 시간이 지난 후. 옥상문이 다시 한번 열리더니 치하야가 들어왔다.

 

"나가실 때 옥상에 있겠다고 말이나 해주시지.."

"찾았어?"

옥상에 있을거란 생각은 안해서 1층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어요"

"그럼 찾는데 얼마 안 걸렸겠네 뭐"

"그건.."

"내려가자. 감기걸려"

"이 추운 곳에 여적 계셨어요?"

"왕바보랑 왕천재는 감기 안 걸린데"

"...어느쪽이세요?"

"알아서 판단해"

 

3층 노래연습실에는 시계가 있다. 나올 때가 12시 20분. 지금은 1시 25분.

 

"녹음은 제대로 됐어?"

"네"

"잡음이 끼어들었다던지.. 뭐 그런거 없이?"

"네"

"그럼 됐어"

 

CD플레이어에서 CD를 빼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CD를 복사하는 작업은 오랜 시간을 요하지 않는다. 아마 내일쯤이면 본격적으로 CD를 돌릴 수 있겠지.

 

"저,저기 프로듀서?"

 

치하야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불러세웠다.

 

"....왜"

"저기...안들어보세요?"

"뭘"

"CD요.."

"뭣하러"

"엣.."

"노래 3곡 녹음했지?"

"네.."

"3곡 다해서 몇분이지?"

"십...이분? 십삼분? 정도.."

"근데 넌 몇분을 녹음했지?"

"한시간..정도요"

"열심히 했지?"

"그거야..그렇죠"

"됐잖아 그럼"

"아..."

 

치하야는 멍하니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디션때 보여줬던 모습과 똑같다.
아마도 납득할 수 있는 허무함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다.
그녀와 내가 얼굴을 마주한지 약 4주정도가 됐다. 그런데 내 행동에 대한 치하야의 반응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둘중 하나는 문제가 있다. 어쩌면 둘 다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

 

"치하야"

"네"

"만약 너가 십삼분만에 녹음을 전부 끝내고 나를 찾아왔어도 난 똑같이 행동했을거야"

"...왜요?"

"널 믿으니까"

"...."

"내가 이러는게 너한테 무관심해서 그러는게 아닌건 너도 알잖아. 그치?"

"네.."

"됐네 그럼. 어지럽지 않아?"

"조금요"

"밀폐된 공간에서 한시간이나 노래를 불렀으니 당연하지. 나가서 핫초코 같은 거라도 먹을래?"

"단건 별로.."

"....그냥 먹어라 좀"

 

우리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때는 마찬가지로 2월 중순. 겨울은 마지막 힘을 다해 새찬 바람을 뿜어댔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적신다. 거센 역풍에 이따금씩 눈을 뜨기조차 힘들다.
지금 내가, 우리가 맞는 이 역풍이 훗날 내가, 우리가 마주할 고난과 역경을 예고하는 걸까.
우리가 들어설 길에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바뀌지 않는 사실은, 장애물이 반드시 있으리란 사실 뿐이다.

 

작곡가 5명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5주가 지난 후였다.

 

[자투리]

"그러고보니 단 음식이 성장 발육에 좋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애.
그러니까 핫초코는 너를 위해서는 가장 좋은 음식일지도 몰라"

"...놀리지 마세요"

"아니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몰라요"

"흐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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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5부작 계획중입니다.

[시작 - 초반 - 중반 - 후반 - 끝] 요렇게요.

분할 없이 하나씩 올릴려고 했는데요.

쓰다보니 길어지고 읽는 분들 호흡도 생각해서 나눌건 나누려고 합니다.

아무튼 봐주셔서 감사...

그리고 의도적으로 뿌린 떡밥은 다 회수 할겁니다.

혹시나 불안해 하실 분들, 그러지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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