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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비 - 아츠밍] 호시 쇼코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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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09, 2019 23:19에 작성됨.

"마음 한 구석 곰팡내 나는 곳에 안 보이도록 쌓아놓은 검은 충동을, 너희들 앞에 풀어놓을 뿐이지. 방 구석에 퇴적당한 속옷 무더기에 피어오른 버섯이야말로 이 몸의 정체다. 네놈들이 생각하는 다중인격 같은 시시한 잣대로, 날 정의하려 하지 마."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한 말이었다. 참 멋있었다. 이 방송 이후 음원 판매수익이랑 유튜브 쪽 수익이 유의미한 수치로 상승했다고, 프로듀서가 기뻐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스스로를 돌아볼 줄 조차 모르는 머저리였다.



--



흔히들 이야기하길, 가면을 쓰고 살다가 결국엔 가면이 스스로의 얼굴이 되어버린다고 한다. 가면에게 먹혀가는 현대인의 소소한 비극을 피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가면을 여러 개 준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공과 사를 서슬퍼런 칼날처럼 철저히 나누며, 일부의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세상의 풍파를 가면조차 없이 솔직하게 마주본다.


참으로 다행인 건, 나 호시 쇼코는 스스로에 가면에 먹혀버릴 만큼 어설픈 자아를 가진 사람은 아니라는 거다. 스스로의 정신을 서슬퍼런 칼날 위에 올려둘 만큼 몰려있는 것도 아니다. 


"준비는 다 됐어? 곧 우리 차례야."


"물론이지, 프로듀서. 히히히....."


당연한 말이지만,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컨셉 같은 게 아니다. 평소에 쌓아두고 있던 것을 그저 폭발시킬 뿐이다.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자들을 보며 쌓아온 거무칙칙한 감정의 말로일 뿐이다. 이게 인기가 되고 돈이 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이 세상의 미래가 걱정되기까지 할 정도다.


"힘내. 믿고 있으니까."


"걱정 마.... 평소처럼, 폭발시키고 올 테, 테니까. 후히...."


"그래야 쇼코지." "후히." "어이, 분위기 좋구만? 그런 건 무대 끝나고 나서 해 줄래?"


료의 핀잔에, 프로듀서가 멋쩍은 듯 웃으며 한 발자국 떨어졌다. 저 로리콘 새끼는 코우메 안 왔다고 지랄인가. 어차피 지도 무대 끝나고 코우메 만나러 갈 거면서.


"이 정도는 넘어가 주자고. 무대 준비한 건 프로듀서잖아."


나츠키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가 준비한 무대지. 나도 넘어갈까.


"고마워...."


"뭘, 공적을 인정해 주자는 거지. '네 프로듀서'가 준비한 무대니까 말이야."


꽤 의미심장한 웃음이었다. 료도 곤란한 듯 웃었다. 프로듀서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나? 난 이 망할 인사 토크를 보며 게이지를 충전하고 있다. 망할 자식들. 오늘 주역은 난데 지들만 즐거운 듯이 친우를 놀려먹고 말이야.

하지만 뭐, 보기 좋으니 넘어가줄까. 그가 곤란해하는 모습은 솔직히 귀엽고 말이야. 노노와는 또 다른 방향의 귀여움이다. 대체 뭘까?


"미시로 프로덕션 분들, 준비해 주세요!"


상념에 빠지려는 찰나, 스태프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그래, 무대. 무대에 집중하자.

준비야 진작에 하고 있었다. 다음은, 이걸 터트릴 뿐이다.


"시간이네. 터트리고 와."


"물론이지, 후히....."


그가 만들어 준 무대다. 터트리지 않을 순 없지.

오늘도,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시커먼 감정을 토해내자.



--



그래야 하는데


"....어라?"


"무슨 일이야? 다음 우리 차례야."


"슬슬 발동 걸어놔야지. 뭐 해?"


".....나와."


세상은 날 다중인격이라고 오해한다. 전문적인 의학 용어를 사용하자면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앓고 있다고들 생각한다. 몇 번 반론하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반론하진 않았다. 그 쪽이 이미지 전략에 더 도움이 된다는 사업부의 판단도 있었고, 나도 그런 이미지가 편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난 그런 사이코가 아닐 텐데.


"뭐?"


"안, 나와.

발동이 안 걸려."


그들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불길이 죽은 듯이 조용하다. 거무칙칙하게 쌓여있어야 할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이, 없다.


".....에? 뭐라고?"


"안, 나온다고....."


가면이나 컨셉 같은 게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의 인격을 가진, 또 다른 나였다. 애초에 내가 준비한 것 조차 아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돌연히 내 안에 나타나 주었다.

그리고 오늘, 콘서트를 앞두고, 그들은 돌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친우가 만들어 준 무대는 볼 것도 없이 망해버렸다. 호시 쇼코는 이 날 이후로 모습을 감추었다.



--



"어딜 간 거야......"


어두운 방 구석을 스마트폰의 불빛이 처량하게 비춘다. 읽지 않고 쌓인 문자들은 군단을 이루어 내 정신을 에워쌋다. 침대 위 이불 속에 박힌, 기분 나쁜 독버섯이 고개를 내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고개를 내미는 순간, 그들은 이번 실패의 책임을 오로지 나에게만 씌워버릴 것이다. 실패는 곧 죄이며 죄는 죽음으로서 청산해야 한다고, 그들은 지금도 날 에워싼 채 호시 쇼코의 처형을 소리높여 외치고 있었다.


"어째서...."


두려움 속에 열어본 액정 속엔, 나에 관한 기사가 가득했다. 이미 세상은 날 단죄할 준비를 마친 듯 했다. 댓글란은 열어보지도 않았다. 군중의 함성이 사형을 재촉한다.


"쇼코, 과일 먹으렴."


또각, 또각. 정중하고 조용하지만, 결고 놓칠 수 없는 발소리가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날 둘러싼 수 많은 군중이 일시에 사라졌다. 하지만 두려움은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힉."


방문이 열린다. 세상의 빛이 홀로 남아버린 나를 조롱하기 위해 방문 사이를 헤짚고 들어온다. 나와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이 들어온다. 경계할 필요 따윈 전혀 없는 무해한 사람이다. 호기심과 욕정을 참지 못하고 미성년에게 허가되지 않은 영상을 보는 것도 아닌데, 어머니가 가까워질 때 마다 온 몸에 견딜 수 없는 잔혹한 소름이 돋는다. 닭살이 피부를 타고 발 끝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질주하기 시작한다.


"여기 두고 가마."


자애로움 속에 걱정이 한 바구니는 담긴 듯 한 목소리였다. 나는 숨죽인 채로,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목 관절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닫히고, 나를 찾던 불빛이 사라지자 방은 다시 편안한 고요에 잠겼다. 스마트폰 액정만이 이불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읽지 않은 연락들의 군단이 다시 날 포위하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책상까지 몸을 뻗었다. 어둠 속을 더듬으며, 침대 속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한계까지 몸을 뻗은 끝자락에서 그릇을 잡을 수 있었다. 몸을 당겼다. 어딘가에 걸려버린 옷자락이 날 방바닥으로 내동댕이 쳤다. 침대 바깥은 위험하다. 이불 바깥은 더 위험하다. 버둥거리며 침대 위로 돌아간다. 날카로운 금속이 바닥과 부딛히는 소리 사이로, 약간 물컹한 과일들이 상해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히약!!!"


포크와 과일 조각들은 어둠 속에 산산히 흩어졌다. 내가 겨우 집어온 그릇 속에 남은 건 배여나온 과즙 뿐이었다.

불 키고 다시 주우러 가자. 바닥에 떨어지긴 했지만 어차피 집 안인데 별로 더럽지도 않을 것이다. 애초에 방에서 기르는 버섯들이 뿌린 포자가 방바닥보다 더 더러울지도 모른다.


"불을...."


그리고, 난 침대 바깥으로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불을 키지도 못했다.

혼자가 되어버린 나에게, 이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



그들은 대체 언제부터 내 곁에 있던 걸까. 그리고 왜 떠나버린 걸까. 한밤에 취해버린 정신을 다잡고, 비틀거리며 과거를 발굴해보자.


[헤에, 재미있는 노래네.]


그 남자, 프로듀서, 친우에게 주워진 날 부터일까?

아니면 갑작스런 재앙으로 고향 후쿠시마에서 쫒겨나온 그날부터일까? 어쩌면 그 전부터였을수도 있다. 음침한 찐따가 쌓아둔 원한이 그들의 시작이었고, 난 태어나기를 찐따의 천성을 가지고서 태어났으니 말이다. 부모님께 사죄인사를 드려야 할까 AS를 요청해야 할까. 뒤죽박죽이 된 기억 속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혼돈스러운 기원만이 꿈결의 장막을 두른 채 날 조롱한다.


내가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세상에 눈을 떳을 땐 그가 곁에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이상하지도 않았고, 위화감도 없었다. 그들은 마치 예전부터 내 곁에 가족처럼 있어줬던 것 마냥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어째서 이러한 인격이 생겨버렸는지, 의문조차 품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때는 단순히 쌓아뒀던 걸 폭발시켰을 뿐이라는 인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이 사라질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걸까.


"헤에.... 그거 혹시 다중인격이라는 거 아니야?"


기억 속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 아아, 그래. 타다 리이나였지. 키무라 나츠키한테 붙어다니는 금붕어 똥 같던 록찔이. 지금 돌이켜보면,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해 내 상태를 정확히 짚어낸 것이었다.


"왠지 록하네!"


한심함이 마음 속에 쌓였었다. 퀸이 아직 여성 그룹인 줄만 알고 있던 시절의 리이나는 충분히 한심한 인간이었다. 귀엽긴 하지만. 내가 원하는 기억은 아니었다.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기억을 뒤져보는 것은 아니지만.


"저기.... 여긴 모리쿠보의 자리인데요...."


"여, 여기 있으면.... 안될까? 버섯들도... 여길... 좋아해..."


그러고보니, 마음이 맞는 친구도 만났다. 그닥 길지 않은 찐따 인생에 있어서 얼마 안 되는 귀중한 친구였지.

보노노를 볼 때 마다 마음 한 켠이 누그러지던 건, 사람이라면 당연히 품어야 할 감정일까. 하지만 이것도 내가 찾는 기억은 아니다.


"안녕하세요오... 옆 테이블에 들어온 마유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인싸 새끼가 테이블 밑으로 쳐 기어오지 말란 말이다!! 니같은 새끼가 뭐가 아쉬워서 아싸까지 빼앗으려고 드는 거냐?!"


"꺄악?!"


내가 겪은 일일 텐데,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 마냥 남의 일 처럼 느껴진다. 아아, 이미 여기서부터 나와 그들은 갈라지기 시작했구나. 하지만 이 사이의 과정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고 투 헬!!"


"놀랐잖아요! 귀여운 제 앞에서 무슨 짓인가요?!"


"아, 미안."


역시, 실감은 없다. 놀라는 사치코를 귀엽다고 생각한 나는 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일이라는 자각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전인가 후인가. 눈을 감았다. 꿈의 장막 속에 그 날의 무대가 보인다.


"다 같이 뒤지자 찐따들아아아아아--------!!"


첫 공연.

기념할만한 락스타 호시 쇼코의 첫 데뷔 무대다. 내가 망쳐버린 무대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초라하고 볼품없다. 조명은 몇 개인가 나가버렸고, 무대 바닥은 곳곳이 삐걱거린다. 프레임은 청테이프로 얼기설기 묶어서 지금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고, 무대용 스피커는 조금만 목소리를 높이면 스파크 소리가 튀어나갈 정도다. 커튼에는 기운 흔적까지 남아있었다. 음향 시설이 제대로 움직이길 기원하며, 프로듀서가 아사히 맥주를 제주 삼아 기도까지 올리고 있었다.


그 때, 난 살아있었다. 그들도 함께 소리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머리 속에 다시 한 번 그 무대를 그린다. 다시 한 번 재생한다. 그 때의 고양감 속에서, 이젠 내 곁에 없는 자들을 애타게도 그려낸다.

적어도 그들의 파편이라도 찾지 않으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자신을 속이고, 남에게 모든 것을 떠넘긴 나태한 죄인에게 무간지옥행이 선고되기 전,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변호할 거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애타게 그릴 수록, 무대는 희미해져 가고 소리는 멀어져만 간다.


"안돼....."


손을 뻗었지만 이미 나는 너무 멀리 있었다. 나와 함께 노래하던 자들은 떠올리면 떠올릴 수록 옅어지다 이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내게 남은 것은 어두침침한 방과 명멸하는 스마트폰의 불빛 뿐. 그리고 온 몸에서 느껴지는, 뜯겨나간 자리를 지지는 듯 한 열기.

마치, 처음부터 그런 인격 따윈 존재하지 않았던 것만 같다. 아니, 애초에 나 혼자 뿐이었던가. 난 그들이 나의 또다른 인격 같은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



[괜찮아질 거야]


꿈 속을 헤메이던 중, 그가 그렇게 말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진짜로 괜찮아질 것 만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또 다른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고? 우리가 사라진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기 때문이지.



--



"그래서, 골골대면서 지금까지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는 거네."


눈을 떳을 땐 이미 미레이가 병문안을 와 있었다. 어느 새 내 방에 들어와 있던 그녀는, 약간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내게 과일 조각처럼 생긴 것을 내밀었다. 식욕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애초에, 눈이 부어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코까지 막혀 있어서, 눈 앞의 이것이 살덩어리인지 과일 조각인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후히....."


"몸은 좀 어때?"


미레이의 목소리가 묻는다.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미레이가 있을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뇌를 끓여버리는 듯 한 열기가, 내 정신에 묻어있던 그들의 흔적을 소독해버리고 있었다. 어지럼증이 집중력을 태워버린다.


"뭐라고...?"


"많이 아파 보이네. 우선 뭐라도 먹어. 여기 사과."


몸져 누워버릴 정도로 충격이었던 걸까. 아니, 죽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의 충격이었다. 정신이 먼저 죽어버렸으니, 육체가 따라서 죽어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의 금언이 떠올랐다. 여기선 한 사람의 메탈헤드로서, 반 기독교적인 포지션을 취해야만 할까?


"생각, 없어....."


하지만 뱃속은 솔직했다. 미레이가 내 눈 앞에서 사과 조각을 흔들어도, 뭔갈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피골이 상접해선 지금이라도 쓰러질 것 같지만, 이 상실감을 먹을 것 따위로는 채울 수 없었다.

미레이조차, 채울 수 없다.


"그냥 쳐 먹어."


화가 난 건지, 미레이가 사과 조각을 내 입에 쑤셔넣었다. 그리곤 내 턱을 잡아다가 위아래로 억지로 움직여 과일을 잘게 조각낸 다음, 물과 함께 내 목구멍에 흘려보냈다. 저항할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약간의 헛구역질로는, 잘게 부숴져 물과 섞인 사과의 질량을 밀어낼 수 없었다.


"우웁...."


"하아...."


그런 내 모습에, 미레이가 질린 듯 한숨을 쉬었다. 정신이 다시 한 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방금 전 까지 들리던 미레이의 목소리조차,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죄송하다고 했잖아 이 시발놈아!! 다리 사이에 있는 니 좆 잘라다가 호일에 쳐박고 구워줄까? 어? 시발 뒤질려고 개새끼가!!"


그 대신,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디렉터의 소리가 들려온다. 아아, 그래. 첫 라디오 방송 때였나? 사람들 앞에서 성질 부렸을 때. 그러고보니 그 때 그 디렉터는 어떻게 되었을려나. 나중에 친우에게 물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 버섯구이 맛있긴 하지. 그렇지만 말이야, 호러 영화 보면서 간식 삼아 버섯구이를 먹는 건 좀...."


".....료는 나랑 같이 먹는 게 싫어?"


"좋아."


"로리콘 새끼. 나가서 동반자살이라도 하고 오지 그러냐?"


"그, 그건... 나쁘지 않, 이 아니라!!" "에헤헤....."


"애미....."


코우메와 료. 나중에 료한테는 사과하러 가야 한다. 그 날 무대를 망쳐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날 만나주기나 할까. 폭주하지 않는 호시 쇼코에게, 변할 수 없는 호시 쇼코에겐 아무런 가치도 없을텐데. 코우메랑 위로의 섹스는 잘 했는지 물어보면 될까?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용기는 내겐 없다. 그 용기를 가지고 있던 건 그들이었다.


"저라고 해서 느그틱쇼 같은 거 하고 싶었던 거 아니라고요...."


"느그소바보단 낫잖아. 마시고 기운 차려. 우리 사치코 잘못한 거 없어."


이것 또한,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씹인싸 사치코를 물어버릴 기회를, 나같은 찐따가 놓칠 리가 없지 않는가. 하지만 그 때의 또다른 나는, 상종 못할 찐따가 아닌 누구에게나 선망받는 멋쟁이였다.


"훌쩍..... 고마워요. 사실 쇼코가 진짜 피해자인데. 으에에에엥....."


"나야 뭐 욕 안 먹고 동정표만 받고서 끝났으니까."


"귀여운 제가 미안해요!! 너무 귀여워서 죄송합니다!!! 미안하드아아아아아악!!"


"환타 마시고 취하지 마 이 미친년아."


이랬던 나도, 더 이상은 없다.

질려서 사라져버린 걸까? 그거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기껏 깃들어 줬는데 몸 주인이라고 하는 년 인성이 이따구면 나라도 도망친다. 깃든 순간부터 손절각이 면도날처럼 시퍼렇게 서버렸는데도 지금까지 존버해 준 또다른 나 자신들에게 하루에 만 번 씩 무한한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 정도다. 야속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이유 정도는 알려줬으면 한다. 적어도, 날 떠나간 이유만큼은 말이다.



--



[선물 놓고 갈께]

미레이가 남겨놓은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붓기는 어느 정도 빠진 모양이다. 눈 위의 얼음 주머니였던 물봉투는 어느새 다리 곁으로 내려가 잠옷 바지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으으......"


아직도 열기가 떨어지지 않는 몸을 침대 바깥으로 뻗었다. 지금이라도 뻗어버릴 것만 같은 몸과 정신을, 그저 오기 하나만으로 버텨내었다. 하지만 무모한 오기는 결국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내 몸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아악!"


평범한 바닥이 아니었다. 딱딱한 모서리가 배를 쑤셧다. 이런 건 사치코가 전문이라고, 속으로나마 소심하게 중얼거리며 자세를 다잡았다. 물론 제대로 서기도 전에 다시 쓰러졌다. 이번엔 옆구리가 뚫려버렸다.


"커헉...."


배를 잡고 바닥을 구르다, 크고 묵직한 것에 머리가 부딛혀버렸다. 배와 머리를 동시에 쥐고서, 비온 다음 날 콘크리트 바닥 위에 끌려나온 지렁이처럼 온 몸을 비틀었다.

비틀거리며 쓰러진 자리의 시야 끝자락에, 내 배를 뚫어버리려 한 모서리의 정체가 들어왔다. 알록달록한 포장지에 쌓인, 세로로 긴 상자였다. 선물 상자였다. [힘내 - 토도키 아이리가] 라고 써있는 편지지가 붙어있었다. 눈을 돌렸다. 침대 밑에는 세로로 뾰쪽하게 생긴 무언가가 있었다. 이게 내 옆구리를 찌른 물건이었다. 포장을 뜯어보니, 아기자기한 장식이 잔뜩 들어간 투명한 피라미드가 나타났다.


"에..."


그제서야, 사방에 널린 선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포장들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내 머리와 부딛힌 선물 속엔 큼지막한 유리병들과 톱밥 수 포대가 들어있었다. 버섯 기르기 세트였다. 종균도 같이 들어있었다. 느타리버섯이랑 새송이버섯이었다. 코우메가 보낸 물건이었다. 다른 것도 살펴보았다. 유코가 보낸 정체불명의 오컬트 계열 상품, 노노가 준 시집들, 나츠키가 놓고 간 멋진 기타, 료가 두고 간 앨범. 그리고 사치코가 두고 간 과일 세트. 충격적이게도 사치코 게 가장 정상적인 병문안 선물이었다.


".....고생은 택배 아저씨가 했겠지."


그들이 여기 왔을 리가 없다. 더 이상 아무런 가치도 없는 호시 쇼코를 보러 왔을 리가 없다. 그나마 미레이가 무한한 동정심을 발휘해준 것 뿐이지, 그녀도 여기 오래 머무르진 않았다. 난 혼자일 것이다. 혼자여야만 한다.

홀로 고독을 들이키고, 썩어가는 마음을 쌓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다.

하지만 그 무대는, 분명,


"아니, 다들 왔었어."





--





"......누구야?"


누구냐고 물었다. 누구냐고?

허 참. 진짜로 상처받을 뻔 했다.


"호시 쇼코. 너다."


"거짓, 말....."


와, 이런 게 나라니. 존나 찌질하네. 스스로가 질려서 떠나버렸다고 착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현실을 거부하는 거냐? 찌질이 주제에 잘 하는 짓이다."


"여, 역시 환각인가? 지난번에 밀, 밀수한 버섯이 문제를 일으킨 건가?"


"그건 아무런 문제 없다고!!! 안 걸리면 장땡인거 잘 알잖아 이 병신아!!"


내가 하나 더 나타났다. 멋진 나와 미친 나가, 찌질한 나와 같은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들은 아직 내 곁에 있었다.


"말도 안 돼....."


"그야 뭐,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긴 하지. 사라진 줄만 알았던 상상 속의 친구가 갑자기 나타나선 난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는 거니까."


"어차피 곧 사라질 거지만!"


"안돼!!"


안돼.

이렇게 다시 만났다. 헤어질 수 없다. 헤어져선 안 된다.


"아직 사라지지 마!"


목이 찢어져라 외친다. 돌아올 대답을 이미 알고 있지만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뿐이야. 우린 다시 네가 될 뿐이야."


"....내가, 된다고?"


원래대로 돌아갈 뿐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또 어디 있을까. 소심하고, 찌질하고, 만사를 질투하면서도 그저 쌓아두다가 곪아버린 영혼으로 돌아가 버린다고?


"그래, 그 곪아버린 영혼 말이지. 우리가 어쩌다가 태어났는지는 니가 더 잘 알잖아?"


내가 속에서 삭이고만 있다가, 홀로 처리하지 못한 것들을 배설하기 위해서. 호시 쇼코의 영혼이 먹고 싼 흔적에 알 수 없는 자아가 깃든 것. 이를테면, 하수종말처리장 같은 것.


"맞아, 그래서 우린 다시 하나가 되는 거야."


"왜."


"알고 있잖아.

호시 쇼코는, 이미 혼자가 아니라고."


그리하여,

호시 쇼코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무언가, 말해야만 한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시간이야, 나." "갈 때가 된 거지."


마음 속에서 뜯겨나간 부분이 다시 차오른다. 감각이 돌아오니, 원래부터 따스하게 차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먼 과거의 일이 된 고독과 질투는, 약간의 그리움만을 작별인사마냥 남긴 채 어딘가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기다려!"


마음이 담긴 방 안, 마지막 자문자답.


"난 아직, 찌질하고, 별볼일없고, 불품없다고. 친구는 있고, 가족도 있지만, 아직 하나가 부족하다고. 내가 부족한 게 있는 이상, 사라지면 안 된다고!"


"애완동물?"


"아니!"


"그럼 뭔데?"


"으으으...."


능글맞게 웃음짓는 내가 점점 사라져 간다.

가기 전 마지막으로, 진심을 폭로당할 여유 정도는 있겠지.


".....인."


"잘 안들리는데?" "더 크게 말해봐!"


"나 아직 애인 없다고 시발놈들아!! 그런데도 사라지는 거냐고!!"


무대 위에서 폭주하는 내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멋진 내가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이젠 프로듀서와의 우정 놀이로는 만족 못 할 몸이 되어버렸으니까."



--



문이 열렸다. 포근한 발소리에 눈을 떳다.


"혹시 자는데 깨운 거야?"


그가 왔다. 프로듀서가 왔다.


"후히..... 괜찮아."


"좀 나아진 것 같네. 어제 봤을 땐 온몸에 열이 올라서 헛것도 보는 것 같더니."


"아아, 미안해...."


"됐어. 신경쓰지마."


그가 말했다.

들고 온 과일이 꽤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한 입 집어먹었다. 톡톡 튀는 새콤달콤한 맛이다. 이런 게 사랑의 맛이라고 생각하니, 입꼬리에 씁쓸한 미소가 감도는 듯 했다.


"무대, 설 수 있겠어."


"아아, 물론이지. 잘 부탁한다고, 우리 자기."


마음 한구석에서 곪아가던 버섯 더미가, 따뜻함 속에서 녹아내렸다.


"하하, 다 나은 것 같네."


".....다 나은 걸로 치지 뭐. 그래도 가끔씩은 돌봐주러 와라."


"뭐야, 오늘 서비스 모드였어? 묘하게 귀엽네."


이 앞의 고생길이 천로역정이다. 산 넘고 사막 넘으니 계곡이 눈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만 중압감에 온 몸이 떨린다. 스스로를 돌아볼 줄 모르는 머저리에게 잘 어울리는 역경이다.


"..........뒤져버려!! 고 투 헬!!!"


"우왓?!"


하지만 이럴 땐, 좋아하는 사람한테 어리광 정도는 부릴 수 있겠지. 시뻘개진 얼굴을 감추기엔, 이 정도의 폭주가 좋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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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키로 쓰고 다 지우고 다시 쓰고를 몇 번 반복한 끝에, 첫 구상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물건이 나타났습니다.

손이 굳은 건 둘째치고, 마약이 합법화된 이상한 나라의 노노가 보팔 소드를 들고선 버섯왕자 쇼코와 담당일진 미레이를 동료로 영입한 다음 압제자 초전자포의 사무원을 반갈죽해버리고 히든보스를 잡으러간다는 델타룬 데모판 짝퉁 스토리가 어쩌다가 쇼코의 자아 및 사랑찾기가 된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걸로 마감은 지켜졌습니다. 만세!!

그리고 내 휴일도 끝나가지. 망할!! 상품이라도 받지 않으면 수지가 안 맞는다고!!


내일 일인데 날밤까고 게임할까요 아니면 그냥 일찍 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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