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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터의 어떤 하루 _ 19.01.0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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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08, 2019 01:03에 작성됨.

 자고로 됨됨이가 바른 사람이란, 받은 것을 제대로 돌려줘야 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로 인해 은혜를 준 사람의 덕은 치하하고, 은혜를 받은 사람 역시 그 마음의 빚을 갚게 되는 것. 

 극장 대기실 한 켠에 달린 지 얼마 안 된 빳빳한 새것의 달력. 츠무기는 특정한 하나의 날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조금 전 그 각오의 탈을 쓴 잡념의 이유이기도 한 1월하고도 8일. 극장에서 시즌 그리팅으로 나온 굿즈용 대형 달력은 그날의 주인공을 해당 날짜에 다양하게도 표시해놓았다. 에밀리 스튜어트. Happy Birthday. 케이크 모양. 폭죽 모양. 에밀리의 고유색으로 표시된 별표까지. 달력을 본 누구도 그 날의 주인공이 누구라는 걸 모를 수 없게 만드는 디자인에서 츠무기는 남몰래 막중한 임무를 두 어깨에 짊어 멨다. 

 시라이시 츠무기. 이번 에밀리씨의 생일에 반드시 후한 축하로 그동안 받았던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

.

.

 탁상 앞에 턱을 괸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츠무기에게선 감히 함부로 접근하면 안 될 것 같은 아우라 같은 게 풍겼다. 언뜻 옆에서 보기에 츠무기의 자세 자체가 물음표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주위를 조심스럽게 돌던 세리카는 방해되지 않게 의자를 살짝 들어서 뒤로 뺀 후 착석했다. 무심결에 바짝 당겨 앉으려다가 끼이익. 듣기 싫은 마찰음에 홀로 놀라 츠무기의 눈치를 살폈다. 요란에도 미동이 없었다. 다행이라 생각한 것도 잠시. 아주 혹시. 혹시나 싶어 세리카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츠무기의 코 밑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인중에 닿을 듯 말 듯.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뜨거운 숨결이 손가락을 적셨다. 살아계시는구나. 안도와 함께 거두려던 손이 탁-. 츠무기의 코끝을 건드려버렸다.

 "읏"

 찰나의 코끝 어택. 놀라 당긴 손가락이 무색하게 츠무기는 이미 당황스럽다는 눈초리를 세리카에게 한없이 보내고 있었다.

 "그... 너무 미동이 없으셔서... 죄, 죄송해요!"

 "그 말인즉슨... 제가 죽은 줄 알고..."

 "그..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어...!"

 울먹거리는 눈망울. 한없이 쳐진 팔자 눈썹. 어쩔 줄 몰라하며 쩔쩔매는 세리카의 모습에서는 악의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츠무기는 경계로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에 힘을 뺐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만큼 제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는 말이 되겠군요."

 "시끄러운 소리에도 가만히 계셔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죄송해요. 츠무기씨."

 "아닙니다. 거듭된 사과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츠무기는 손가락으로 몇 번 코끝을 쓰다듬었다. 아프진 않았다. 단지 놀랐을 뿐이었다. 그 덕에 조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함께 날아가 버렸지만 말이다. 복잡하던 머릿속이 갑자기 공허함으로 뻥 뚫려버렸다. 뭘 생각하고 있었을까. 츠무기는 옆에 앉아 대본을 펼치고 있는 세리카의 행동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몇 장 뒤적거리더니 수학 공식을 풀 것 같은 기세로 연필을 집어 들곤 밑줄을 긋고 있는 행위 그 자체를 동공에 담았다.

 "......츠무기씨?"

 "......네?"

 "......."

 서로의 의문을 담은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 보이지 않는 대화는 꽤 한참 동안 이뤄져 이젠 시선을 먼저 거두면 그게 더 이상해지는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이 어색함을 길게 끌어선 안 돼. 딱히 할 말은 없지만 할 말을 만들어보자는 다짐을 한 채 저기... 하고 입을 열려는 찰나.

 "츠무기씨. 혹시 고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정적 아닌 정적을 세리카가 먼저 깨트렸다. 연장자임에도 망설임을 이겨내지 못했다는 자책도 잠시.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고민이라는 두 음절은 백지가 되어버렸던 츠무기의 머릿속을 도로 복잡하게 채워 넣어주었다. 

 "저기... 하코자키씨."

 "네. 츠무기씨."

 "그... 그 나이의 또래는 생일 축하라는 것을... 어떻게 전하는지요."

 "... 생일 축하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하코자키씨 나이대의 그... 축하 말입니다."

 "생일 축하라고 한다면. 생일 축하해!!! 하고 축하해줘요!"

 "... 아. 생일 축하해."

 그렇지. 자고로 생일을 축하하려면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는 게 우선이겠지. 물어보려던 건 이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

 "아니면... 해피 버스데이! 하고 축하하기도요."

 "해피...버스데이. 도.. 도시에서는 그렇게 축하하는거군요. 아.."

 "......네?"

 해피 버스데이. 역시 도시답게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도 영어로 주고받는구나. 아니, 그러니까. 물어보려던 건 이게 아니었다. 이상하게 정말 제대로 물어보고 싶은 게 머릿속에서도 잘 정리되지 않는다. 입에서도 쓸데없는 말만 저주걸린 것 처럼 맴돈다.

 "그러니까... 생일 축하를 말이죠."

 "......아! 츠무기씨. 혹시 에밀리쨩의 생일을 축하해드리고 싶으신 건가요?"

 "네? 아. 아. 마, 맞습니다. 어, 어찌 알았능교?"

 튀어나온 사투리에 합. 입을 다물어버린 것도 잠시. 저 해맑은 미소가 머릿속이라도 들어갔다 나온 것일까. 츠무기는 벙 찐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기 달력보고 알았어요. 츠무기씨, 에밀리쨩이랑 많이 친하시죠! 그래서 생일을 어떻게 축하해야 하는지 물어보신 게 아닌가 해서."

 그대로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달력을 쳐다보았다. 청자색에 가까운 색으로 물든 8일. 멀리서 봐도 단박에 알 수 있게 표시된 건 마찬가지로구나. 달력 덕분이든 세리카의 신통력 때문이든 어쨌든 고민의 원천을 파고든 이상 숨길건 없었다. 츠무기는 마음 놓고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보여주기로 했다.

 "극장에 들어온 후 저는, 에밀리씨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히나 제가 센터로 공연을 해야 했을 때에는 에밀리씨에게 폐를 끼치기도 했었죠. 여태껏 그에 대한 답례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생일이라면, 에밀리씨에게 그동안의 답례를 제대로 해 드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조금은 특별하게 축하해주고자 하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질 않아서 말입니다."

 "우와아. 츠무기씨. 정말 멋진걸요! 특별하게 축하해준다는 게 조금 어렵긴하지만 그 축하에 츠무기씨의 진심이 담긴다면 에밀리쨩은 분명 좋아할 거예요!"

 "진심... 말인가요."

 "네. 마음이 담긴 축하라면 분명히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축하에 진심을 담아라. 이토록 올곧은 정답이 있을까. 틀린 말이 될 수 없는 세리카의 답변에 츠무기는 일단 수긍했다.

 "그렇다면 마음을 담은 축하란 것을 한 번 연습해보겠습니다."

 "네?"

 "하코자키씨. 오늘. 이 추운 날을 뚫고 극장에 출근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츠무기씨?"

 "아아. 그 반응은 축하에 마음이 담기지 않았다는..."

 "아, 아녜요! 이런 축하를 받을지 몰랐어요. 출근을 축하받다니. 상상도 못했는걸요."

 "크흠. 그런가요."

 다시 대기실의 공기가 어색해졌다. 대화가 끊겼다는 걸 서로 인지했으나 서로가 서로에게 건넬 말을 찾지 못했다. 세리카는 손과 시선을 대본으로 옮겼다. 츠무기는 자신의 앞으로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 괜한 부끄럼에 숨겨왔던 금붕어 인형의 존재가 간절했다. 궁여지책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뭘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기에 손 가는 대로 앱을 터치했다. 열린 것은 인터넷이었다. 비어있는 검색창을 한 번 누르니 자판이 떴다. 그 위에서 엄지손가락이 멈칫했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츠무기는 버튼을 눌러 활성화를 종료시켰다. 슬쩍 옆을 보니 세리카도 마찬가지인지 대본의 공백에 작은 소용돌이를 끊임없이 돌리고 있었다. 

 "아... 츠무기와 세리카가 아닌지요."

 특색있는, 안정적인 목소리. 그리고 솔솔 풍겨오는, 허기를 자극하는 냄새. 두 사람은 단번에 어떤 사람이 대기실에 들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쟁반 위로 숙주가 산처럼 쌓인 라멘을 들곤 태연하게 츠무기와 세리카 앞에 착석한 사람은 타카네였다. 

 "두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두 사람의 몫도 같이 주문했을 텐데요."

 "아닙니다. 그. 맛있게 드시길요. 시죠씨."

 "네! 타카네씨! 오늘도 숙주 듬뿍 라멘인가요?"

 "차슈도 더블. 입니다. 그... 드시고 싶다면 지금 당장 탕비실에 다녀오겠습니다."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아까 밥을 먹고 왔거든요. 아. 그렇지."

 세리카는 가져온 가방 속을 뒤적거렸다. 밝은 표정으로 꺼낸 것은 쿠키 한 봉지였다. 

 "간식거리로 싸 주셨거든요. 이거 먹을게요. 타카네씨도 라멘 다 드시면 드셔주세요. 츠무기씨도 여기, 하나."

 동그란 쿠키에 까맣고 하얀 초코칩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시중에서 일괄적으로 판매하는 쿠키의 느낌이 아니었다.

 "쿠우키를 보아하니 직접 만드신 것 같군요."

 "네! 집에서 마마... 아니 어머니와 함께 만들었어요. 많이 남아서 오늘 싸 왔거든요."

 "역시. 직접 만든 음식은 그 정성이 눈에 보입니다."

 배경음악처럼 세리카와 타카네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쿠키를 한 입 오물거리던 츠무기는 타카네에게서 나온 한 구절에 멈칫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들리지 않고 타카네가 라면을 호록호록 넘기는 소리만이 BGM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먹을 때는 건드리는 게 아니라지만 

 "저기. 시죠씨. 죄송하지만 방금 그 말.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면..."

 무례를 무릅쓰고 츠무기는 입을 열었다. 한 번의 젓가락질로 한 타임을 넘긴 타카네는 옆에 있던 티슈로 입을 정리했다.

 "어떤 말을 말인가요?"

 "그.. 직접 만든 음식이요."

 "아아. 직접 만든 음식은 그 정성이 눈에 보인다는..."

 "그래요. 그겁니다."

 "아! 츠무기씨! 해답을 찾으신 건가요?"

 츠무기의 사정을 알던 세리카는 츠무기의 깨달음에 격하게 반응했다. 반면 알 턱이 없는 타카네는 조용히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울 뿐이었다.

 "시라이시 츠무기. 그거라 함은 무엇을 말씀하신건지요."

 젓가락을 들어 올리며 타카네가 물었다.

 "축하를 위해 제 마음을 담을 선물입니다."

  지금껏 고민했던 것들의 해답을 정리한 한 줄의 문장. 청산유수로 나온 답에 내심 츠무기도 놀랐으나 평정심을 유지했다. 

 "와. 츠무기씨. 멋진 말이네요!"

 순수하게 감탄하는 세리카의 칭찬에 표정이 풀어질 뻔 했으나 츠무기는 한 번 헛기침 하는 것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 짧은 새의 변화를, 눈치챈 건지 아닌지 모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타카네는 마저 해야 할 자신의 할 일을 재시작했다. 후루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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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으로 나눠 올리겠습니다. 잦은 수정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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