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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리아 고서당 X 데레마스] 아이돌 CAERULA 사건수첩 : 제3장 - 5, 6, 7.

댓글: 1 / 조회: 671 / 추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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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31, 2018 22:41에 작성됨.

[오리지널 주의]

본 소설에는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7권 이후 내용 및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에 대한 글쓴이의 독자적인 설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5


다시 8명이 서고에 모였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아리스 대신 아리스의 어머니가 자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마담, 이쪽으로.”

“고마워요, 아스카 양.”


아스카가 의자를 끌어 아리스의 어머니가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아야카에게 슬쩍 물었다.


“아스카가 존댓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

“나도 몰랐는데, 아스카가 아리스를 구해준 뒤로 친해졌다나봐요. 기숙사로 먹을 것도 사서 보내주시고 그러신다던데?”

“그거랑 존댓말하는 게 무슨 상관이야?”

“아스카랑 아리스네 부모님이 만나는 걸 볼 때마다 아리스가 존댓말 제대로 안 하냐고 뭐라고 했다나 봐요.”


그래서 예외적으로 존댓말을 하게 됐다는 것일까.

이번에 자리에 앉은 세 사람은 시오리코 씨, 아스카, 그리고 아리스의 어머니였다. 나머지 다섯 사람은 아까와 같이 적당히 탁자 주위에 빙 둘러 섰다.

아스카가 가장 먼저 운을 뗐다.


“시오리코 씨가 이렇게 급하게 돌아와서 마담을 뵙겠다고 했다는 건, 뭔가 상황이 바뀌었다는 말이겠지?”


시오리코 씨는 수긍의 표시를 했다.


“네. 아리스 양의 어머님을 위해서, 지금까지 했던 추론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해야 할까요?”


시오리코 씨의 말에 아리스의 어머니는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우리가 오기 전까지 이 서고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이야기라면 대략 들었어요.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던데. 아스카 양의 할아버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책을 빼앗은 게 점장님의 어머님이시라면서?”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에 대해서 이미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이야기 시간이 길어지는 걸 피할 수 있었다.


“네. 그러면 결론부터 말할게요, 아스카 양. 아까 제가 했던 추측은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 틀려있었어요.”

“할아버지의 『파랑새』를 훔친 건 시노카와 지에코… 시오리코 씨와 아야카 씨의 어머니였다라는 부분이겠군.”


틀렸던 부분부터 다시 설명해야 하나 했는데, 예상외로 아스카가 먼저 핵심을 찔러왔다.


“잘 아시네요.”

“방금 아리스를 물리치면서 시오리코 씨가 그렇게 말했잖아. 마담의 1922년판 『파랑새』에 관해서 듣고 싶다고. 그렇다면 시오리코 씨는 그 『파랑새』가 할아버지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일 테고, 기타가마쿠라에는 갔던 적이 없는 마담께서 비블리아 고서당까지 찾아가 그 『파랑새』를 사셨을 리는 없으니 자연히 ‘할아버지의 『파랑새』가 시노카와 지에코에게 넘어갔다’라는 명제는 거짓이 되겠지. 시오리코 씨가 떠나고 나서 좀 냉정히 생각해봤는데,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쉽게 책을 넘겨주셨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말이야.”


내가 의문을 품었던 부분과 일치한다. 역시 그 부분이 시오리코 씨가 했던 추론의 최대 약점이었다.


“네, 맞아요. 그래서, 어머님께서 괜찮으시다면 가지고 계신 『파랑새』의 상태와 내용을 확인해보고 싶어요.”


시오리코 씨를 보는 아리스의 어머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러면, 제가 새로운 가정으로 세운 추측만 들려드리게 되겠죠. 그게 정답인지 아닌지는 이 자리에 게신 여러분 개개인의 판단에 맡기게 되겠고요.”


시오리코 씨와 아리스의 어머니가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다. 꼭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튈 것만 같았다. 평소의 시오리코 씨라면 금세 눈을 돌리고 말았겠지만, 책이 관련된 일이라서인지 시오리코 씨도 쉽게 기에서 눌리지 않았다. 먼저 눈을 돌려버린 쪽은 아리스의 어머니였다.


“좋아요. 그러면 먼저 왜 내가 가진 책이 아스카 양의 할아버님의 책인지, 그것부터 설명해줄래요? 먼저 이야기부터 듣고 결정할게요.”


시오리코 씨는 내게 차 안에서 해줬던 이야기를 하나하나 다시 설명해나갔다. 아스카와 아리스의 이름의 유래부터 시작해 쿠스야마 마사오가 번역한 1922년판 『파랑새』의 희소성, 아스카의 할아버님이 『이상한 나라』를 구하신 장소와 아리스가 어릴 때 살았던 동네가 일치한다는 점, 동일본 대지진 때 아리스의 어머니가 했다는 말과 그 뒤의 조문 이야기까지. 마무리도 시오리코 씨가 차에서 했던 독백과 비슷했다.


“마지막 두 가지는 제 억측일 수도 있어요. 어머님께서 가지신 『파랑새』가 할아버님의 것이 맞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성립하는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단순한 우연으로 일어났다고 보기 힘든 일들이 이렇게 연속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건 우연일까요, 아니면 필연일까요?”


시오리코 씨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아리스의 어머니는 아스카를 보며 말했다.


“아스카 양은 어떻게 생각해요? 내 책이 아스카 양 할아버님의 책일 것 같아요?”


아스카는 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글쎄요… 시오리코 씨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것도 그렇고, 정황을 놓고 봤을 때도 그렇고, 개연성은 대단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진 당시 마담께서 제게 하신 말씀에 대한 의문은 저도 가졌던 것이니, 시오리코 씨가 의심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겠죠. 하지만 설령 그 책이 원래 저희 할아버지의 것이었다고 해도, 마담께서 그걸 강제로 앗아가신 것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시오리코 씨가 제시한 가능성도, 마담께서 말씀하신 ‘은혜’를 베풀었던 것이 저희 할아버지일 가능성이니까요. 그렇지, 시오리코 씨?”


시오리코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확실히 밝혀두자면, 그게 아스카 양의 할아버님의 책이 맞다면, 그건 어머님께서 입으신 ‘은혜’와 관련이 있을 거예요. 저희 어머니 같이 타인에게서 책을 ‘빼앗는’ 사람이 잘못된 거죠.”


거기까지 이야기를 꺼낸 시오리코 씨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사실, 어머님께서 지금까지 이 이야기를 숨기신 이유는 알 것 같아요. 그래서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워요. 제가 감히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까 싶고요. 하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 시오리코 씨의 얼굴에, 어렴풋이 슬픈 표정이 스몄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이제는 말해주실 때가 됐다고 생각해요. 숨길수록 상처는 더 깊어질 뿐일 거예요. 이미 미루고 미루다 한 번 때를 놓치셨잖아요. 그리고 이제 아스카 양이 그 이야기를 알고 싶어서 제게 의뢰까지 했어요. 의뢰를 받은 이상, 어머님께서 반대를 하시더라도 저는 적어도 아스카 양에게는 이 이야기를 해줘야 해요. 그러니 아리스 양에게도…”


아리스의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오리코 씨의 감정은 복잡해보였다. 시오리코 씨의 어머니, 시노카와 지에코가 시오리코 씨에게 남긴 흔적만큼이나, 상처도 적지 않다. 시오리코 씨가 어머니를 쫓아 『크라크라 일기』를 찾아 헤맸던 때와 그 뒤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어머니 때문에 상처를 입은 딸의 기분을 알기에, 시오리코 씨는 아리스의 어머니가 숨기고 있는 이야기를 딸에게 털어놓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시오리코 씨가 망설인다는 것은, 이 이야기 뒤에 숨은 상처도 결코 작지는 않다는 뜻이겠지. 딸이 열세 살이 될 때까지도 숨길 이야기라면, 제삼자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아리스의 어머니는 한동안 시오리코 씨를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점장님 말대로, 더 늦추다가 또 다시 때를 놓칠 수 있곘다는 생각도 들고. 이왕 상황이 이렇게 된 지금이 적기일 수 있겠네요.”


잠시 숨을 고른 뒤, 아리스의 어머니는 가방에 손을 넣었서 책 한 권을 꺼냈다. 푸른 커버가 씌워진 책 한 권이었다.


“좋아요. 정확한 이야기를 하려면, 이 책이 필요한 거겠죠? 점장님이 찾는 책이 맞는지 확인해봐요. 그 책이 맞다면 점장님이 내린 결론이 뭔지, 내가 숨기고 있는 이야기가 뭔지 한번 말해보고요. 만약 맞힌다면, 아리스에게 말을 해줄지 어떻게 할지, 고민해볼게요.”

“정말… 괜찮으신가요?”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어느 정도 감은 잡은 거 같고, 우리와 아리스를 생각해서 해준 말일 테니까. 어떻게 알았는지도 조금은 궁금하고요.”


그 대답에, 시오리코 씨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리스의 어머니가 건네는 책을 받았다. 책을 건네받은 시오리코 씨는 조심스럽게 첫 페이지를 넘겼다. 우리가 생각했던 문구들이 그대로 적혀있었다.


파랑새(青い鳥)

마테를링크(マアテルリンク)

쿠스야마 마사오 번역(楠山正雄 譯)

신초샤출판(新潮社出版)


첫 페이지를 보자마자, 이 책이 『이상한 나라』와 비슷한 일을 겪은 책일 것이라는 건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첫 페이지에 『이상한 나라』에 남아있던 것과 같은 피얼룩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장 한 장,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서고를 메웠다. 책이 중간쯤 넘어갔을 때, 나는 이 『파랑새』가 『이상한 나라』와 다른 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상한 나라』는 책 표지와 첫 페이지에 피가 묻었을 뿐 다른 페이지들은 꽤 깨끗한 편이었는데, 『파랑새』는 대부분 지문 모양의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마치 손에 피가 묻은 채 닦지도 않고 책을 읽어나간 것 같았다. 시오리코 씨가 모든 페이지를 다 확인해보는 데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거의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자, 책의 발간 시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다이쇼 11년(1922년) 10월 18일 발행


마지막 장까지 모두 살펴본 시오리코 씨는 조용히 책을 닫았다.


“맞아요. 이 책은, 아스카 양의 할아버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파랑새』예요. 지금부터 이 『파랑새』, 그리고 『이상한 나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볼게요. 제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가장 개연성이 큰 상황을 추측한 것뿐이지, 확정된 사실은 아니라는 걸 명심해주세요.”


시오리코 씨는 책장에서 『이상한 나라』를 꺼내와서 『파랑새』 옆에 나란히 내려놓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자리에 있는 『이상한 나라』와 『파랑새』는 모두 아스카 양의 할아버님 것이었어요. 『파랑새』에는 가격표와 명함이 없어서 확인할 수 없지만, 『이상한 나라』는 고베 니노미야 초의 니노미야 서방에서 구하신 책이라는 걸 우린 이미 알고 있죠.


이 책들에 피가 묻은 게 한신・아와지 대지진 때인 것도 맞아요. 커버를 제거하진 않았지만, 아마 커버를 벗겨보면 『파랑새』의 표지에도 『이상한 나라』 못지 않은 피얼룩이 남아있을 거예요. 문제는, 이 『파랑새』가 왜 아리스 양의 어머님께 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파랑새』의 매 장에 묻어있는 지문 모양의 핏자국이 왜 찍혔느냐죠.


손가락에 피를 묻히고도 닦지 않은 채 책장을 넘기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고서를 소중히 하는 사람이 그럴 일은 더더욱 없죠. 즉, 이 책에 피가 묻었을 때는 그 피를 닦아낼 겨를이나, 그럴 수단이 없는 상황이었다고 봐야 해요.


아리스 양의 아버님도 여기에 관련되셨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여기서 적어도 할아버님… 그리고 어머님께서 당하신 사고가 뭐였는지는 도출할 수 있어요.


네. 두 분께서는 그날 지진으로… 건물 아래 매몰되셨던 거예요.”



“세상에…”


방안의 공기가 내려앉았다.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는 일이 없던 카나데의 입에서마저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작년의 기억이 떠오른 것일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작년 대지진의 충격은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시오리코 씨가 말하기를 꺼렸던 것도 납득이 된다. 진원지 근처에서 매몰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억지로 이 기억을 끌어내 상기시키는 일이니, 당연히 꺼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구출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모르겠어요. 구출이 될 때까지 두 분은 책을 읽으시면서 버티셨던 것 같아요. 먼저 읽으신 책은 『파랑새』였겠죠. 피를 흘리시면서도 책을 읽으셨기 때문에 남은 흔적이 있으니까요. 『이상한 나라』의 페이지에는 비슷한 자국이 없는 걸로 봐서는, 『파랑새』를 다 읽고 『이상한 나라』로 넘어가실 때 즈음엔 적어도 손가락까지 흘러내렸던 피는 어느 정도 멎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거기서 살아나신 뒤에, 할아버님은 함께 매몰됐던 아리스 양의 어머님께 당신께서 가져온 책을 남기신 거예요. 살아난 기념으로 말이죠. 할아버님께 책은 추억이자 기념이었으니까, 함께 생사의 위기를 넘은 사람에게 당신의 책을 선물하는 것 또한 기념이 됐을 거예요.


처음 만났던 날 아리스 양이 그랬었죠. 어머님께서 『파랑새』를 항상 들고 다니셨다고요. 그리고 집에 있는 책 중 그렇게 오래된 것은 『파랑새』뿐이라고도 했고요. 그 말이 이 추론을 끌어내는 데 큰 도움을 줬어요. 고서에 관심을 두지는 않으시는 분인데 유독 한 권만이 다이쇼 시대의 고서이고, 또 그걸 항상 휴대하시는 이유가 뭘까. 어떤 계기로 얻은 부적이나 기념품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설명이 돼요. 특히나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살아날 수 있게 도와줬던 것이라면 더더욱요.


그래서, 『이상한 나라』에 끼어있던 책갈피와 그 메시지의 의미도 바뀌게 돼요. 지금은 『파랑새』 안에 책갈피가 없지만, 제 추론이 맞다면 할아버님께서는 똑같은 책갈피도 함께 선물하셨을 거예요. 왜 하필 고베 포트 타워의 사진이었을까… 그걸 간과했었어요.


고베 포트 타워는 한신・아와지 대지진에도 불구하고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어요. 지진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야간 조명을 다시 밝힐 수 있었고, 그 모습이 고베를 재건하는 지역 주민들에게 큰 힘이 됐다고 해요.


책갈피 자체는 아마 지진 전에 고베 포트타워에 들렀다가 기념품으로 사신 것이겠지만, 책갈피에 쓰신 ‘고베를 기억하며’라는 메시지는 고베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한다는 의미가 아닐 거예요. 지진 전의 고베의 모습을 기억하며, 지진에도 끄떡없이 서있는 포트 타워처럼 다시 일어서길 바란다는 의미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는, 제격이었을 거예요.”



“잠깐만, 시오리코 씨.”


시오리코 씨가 거기까지 추론을 끌고 갔을 때, 아스카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래. 그 가설은 충분히 합리적인 것 같아. 아까의 가설보다 훨씬 희망적이고 말이지. 그런데 이야기가 그렇게 되면, 갑자기 이야기에서 소실되어버리는 사람이 생기지 않아?”

“시오리코 씨네 어머니 말이지?”


카나데도 거들었다. 물론 맞는 말이다. 아까의 가설까지만 해도 절대악으로 등장했던 지에코 씨가 이야기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시오리코 씨도 그 점을 인정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말인데요…”


그 때, 후미카가 슬쩍 손을 들었다.


“저기… 그 부분은 저도 생각해봤습니다만… 제 생각을 말씀드려봐도… 괜찮을까요? 시오리코 씨도 말씀을 길게 하셔서 목이 타실 테니…”


시오리코 씨가 긍정의 표시를 하자, 후미카가 추론을 이어받아 완성해갔다.


“니노미야 서방의 명함 뒷면에 있는 필기가 남아있으니… 할아버님께서 시오리코 씨의 어머님… 지에코 씨를 만났다는 사실은 분명해요. 문제는 어디서 어떻게 만났느냐…겠죠.


한신・아와지 대지진 이후 나흘간… 고베의 최저기온은 영상 1도 근처였고 영하로 내려가기도 했어요. 운이 좋아 물이나 식량이 충분했다고 해도… 장기간을 버티기는 힘든 날씨예요. 그러니… 할아버님과 아리스의 어머님께서 지에코 씨가 고베에 도착하기 전에 구출되셨을 건 확실해보여요.


그래서 생각해본 것인데… 할아버님의 부상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고, 그대로 고베에서 피해 복구를 위한 자원봉사자에 지원하셨던 게 아닐까요…? 그러면 할아버님께서 지에코 씨가 도착할 때까지 고베에 남아계셨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요. 하루 평균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했던 일본 자원봉사의 원년(日本のボランティア元年)으로 불리는 해이기도 하고요.


시오리코 씨가 말씀하셨던, 지에코 씨가 ‘좋은 사람 덕분에 괜찮은 책을 많이 구했다고 웃던 모습’도… 어쩌면 문자 그대로의 뜻일지도 몰라요. 할아버님께서 『파랑새』나 『이상한 나라』를 갖고 계셨다면… 지에코 씨의 눈에 띄었을 거예요. 그렇게 할아버님과 만난 지에코 씨가 봉사 중에 고서를 처분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주는 방식으로 협조를 받았다면… 지에코 씨가 고서를 찾는 데에 도움이 됐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지에코 씨가 아스카 양을 찾아와서 했다는 ‘할아버님께 신세를 졌다’라는 말도 설명이 돼요.”


후미카의 설명에 시오리코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후미카 양과 같아요. 그 외에는 마땅히 상황을 설명할만한 추측이 없어요. 다만,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기는 해요. 어머니가 그런 ‘협조’를 구했다면, 분명 어머니는 명함을 할아버님께 보여주셨을 거예요. 그런데 왜 어머니에게서 받은 명함이 『이상한 나라』에 남아있지 않느냐의 문제가 생기죠.


저는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첫 번째는 단순히 자원봉사 활동 중에 주머니에서 빠지는 등의 이유로 분실하셨을 가능성이에요. 그 당시의 분주했던 고베 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죠.


그리고 두 번째는, 어머니의 명함이 『파랑새』에 끼어있었을 가능성이에요. 이 경우에는 할아버님께서 아리스 양의 어머님께 『파랑새』를 주신 시점에 변동이 생겨요. 매몰에서 구출되신 직후가 아니라, 자원봉사를 마친 뒤, 고베를 떠나기 직전에 선물로 남기고 떠나셨다고 하는 쪽이 자연스러울 거예요. 바쁘신 와중에 습관적으로 책 사이에 명함을 끼워두셨다가 선물을 한 뒤에 뒤늦게 깨달으셨겠죠.


어느 쪽이든, 봉사 활동 종료 뒤 돌아오시던 할아버님께서는 그걸 뒤늦게 깨달으시고, 갖고 계시던 『이상한 나라』 사이에 끼어있는 명함의 뒷면에 기억나는 대로 비블리아 고서당의 위치와 상호, 그리고 어머니의 성만 써넣으신 거예요. 일본 각지의 고서점을 들르는 것이 취미이셨던 할아버님께서는 기타가마쿠라에 갈 일이 생겼을 때 들를 서점의 상호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었을 테니까요.


여기까지가, 제가 추론할 수 있는 전부예요.”



아무 말 없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리스의 어머니는, 시오리코 씨의 추론을 들은 소감을 단 한 마디로 정리했다.


“잘 들었어요.”


그녀는 책을 꺼냈던 가방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더니 탁자 위에 놓고는 시오리코 씨를 향해 밀었다.


“자, 확인해봐요. 그 책 사이에 끼어있던 책갈피와 명함이에요.”


탁자 위에 올려진 것은 고베 포트 타워 사진이 인쇄된 책갈피였다. 시오리코 씨가 책갈피를 뒤집자, 낯익은 필체의 낯익은 글귀가 나타났다.


고베를 기억하며.


명함에 새겨진 글귀 역시 낯익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블리아 고서당(ブリア古書堂)

통신판매 담당(通信販売 担当) 시노카와 지에코(篠川智恵子)


“놀랍네요. 어떻게 거기까지 알아맞힐 수 있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아리스의 어머니의 표정은 꽤 복잡해보였다. 놀라움과 회한, 그리움, 그 외의 다양한 감정이 뒤섞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아스카를 보며 말했다.


“그래요, 아스카 양. 이 점장님의 말이 맞아요. 나는 17년 전부터 할아버님… 아니, 이젠 이렇게 불러도 되겠죠. 니노미야 선생님과 아는 사이였어요. 돌아가시기 전 까지도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고요.”

“…시오리코 씨 말대로, 제게 숨기신 이유가 있으셨던 거겠죠, 마담?”


아스카의 목소리는 가라앉아있었다. 이쪽도 여러 감정이 교차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듣고 싶어요?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전부 얘기해줄게요. 니노미야 선생님과 우리 부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왜 숨겨야했는지까지, 전부요.”


아리스의 어머니는 그리운 시절을 떠올리는 것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6


“네. 맞아요. 니노미야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우리가 결혼을 했을 때까지만 해도, 남편은 고베에서 잡화점을 하고 있었어요. 나는 지금처럼 회사에 다니고 있었죠. 나는 출근을 하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으니까, 남편도 다른 가게의 영업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문을 열었어요. 5시 30분 정도였죠.


니노미야 선생님은 아침 이른 시간부터 고베를 둘러보시려는 거였는지, 문을 일찍 연 우리 가게에 들르셔서 물이랑 간식을 사가려고 하셨어요. 니노미야 선생님께서 막 계산을 하시려는 순간, 세상이 뒤집어졌어요. 그 때는 긴급지진속보도 없을 때였으니까,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겠어요?


그 당시 고베의 일본 전통 가옥들이 지진에 구조적으로 취약했다는 건 지금 와서는 유명한 이야기죠. 우리 가게는 그야말로 속절없이 무너져내렸어요. 그나마 세 명이 계산대 근처에 모여있다가 함께 생존공간을 확보한 건 운이 좋은 편이었죠. 거기에 가게에서 팔던 과자와 물까지 함께 매몰됐으니, 이걸 불운이라 해야 할지 행운이라 해야 할지.


그런데 후미카 양이 말한 대로, 문제는 날씨였어요. 그나마 가게를 열던 중에 손님을 맞아서 외투를 입고 있던 남편은 좀 나은 편이었고, 한겨울에 여행을 하시려고 방한대비를 철저히 하신 니노미야 선생님은 얼어 죽을 걱정은 없으셨죠. 문제는 나였어요. 출근 준비를 하다가 잠깐 1층에 내려왔던 거라서 양복 위에 걸친 옷이 없었거든요. 이대로 있다간 얼어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 남편이 얼마나 귀여운지 알아요? 아리스가 귀여운 건 다 자기 아빠 닮아서 그래요. 막 매몰돼서 놀란 와중에도 내가 양복밖에 안 입은 걸 보니까 자기 외투를 벗어서 덮어주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 외투를 벗으려고 하니까, 니노미야 선생님께서 당신의 점퍼를 벗어서 저한테 건네주셨어요. 두 사람 사랑하는 건 예쁘고 막 신혼부부가 된 당신의 아들과 며느리 생각도 나지만, 옷 몇 겹 입지도 않은 사람이 서로 자기 옷 벗어주면 비극밖에 안 된다셨던가? 당신께서는 점퍼 안에도 옷을 몇 겹이나 껴입으셨으니 괜찮으시다고 어서 걸치라고 하시면서요.


그 다음부터는 기다리는 게 문제였어요. 어떻게든 흐르는 시간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어요. 생각해봐요. 구조는 언제 올지 기약도 없지, 여진이 와서 땅은 또 흔들리지, 언제 내 위에 쌓인 나뭇더미와 기와 잔해는 무너져 내릴지 모르지… 이건 안 미치는 게 이상한 거라니까요.


그 때 니노미야 선생님께서 가방에서 가지고 계시던 책을 꺼내서 읽어주셨어요. 네. 『파랑새』와 『이상한 나라』요. 얼마 되지 않는 양이었지만,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우리는 하루를 버텼어요. 처음에는 그 동화들로 현실을 부정하게 되더군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거울나라의 앨리스』, 『파랑새』의 공통점이 뭔지 알죠? 전부 꿈으로 끝나요. 사실 나는 안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눈을 뜨면 끝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두 번, 세 번 읽다 보니 점점 책 속의 세상에 빠지게 됐어요. 마치 내가 치르치르가 되고, 미치르가 되고, 앨리스가 된 것처럼.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로 정신이 몽롱해지다보니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밤이 지나가고 두 번째 해가 뜨고 있었어요. 또 굉음과 함께 바닥이 울리더군요. 또 여진이 온 줄 알았어요. 아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는데, 다시 굉음이 울리더니 기와 잔해가 깨져나가면서 빛이 들어오더군요. 꼭 앨리스가 잠에서 깨는 것처럼. 네. 살아난 거예요.


하늘이 도우셨는지 우리 모두 크게 다친 데는 없었고, 니노미야 선생님도 가족과 연락이 닿으셨어요. 당연하지만, 댁에서는 어서 돌아오라고 난리셨죠.


그런데 니노미야 선생님도 진국이신 게, 당신께서도 매몰됐다가 구조되셨으면서 그 뒤에도 한 달이 지나도록 고베를 떠나지 않고 자원봉사 활동을 하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셨어요.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정말… 우리가 읽었던 책에서 봤던 모습이 겹쳐보이더라구요. 이상한 나라에 뚝 떨어지고도 흔들림 없이 길을 찾아나가는 ‘앨리스’, 그리고 아무리 힘든 때라도 항상 우리 곁에 있어주는 행복의 상징, ‘파랑새’.


점장님 말이 맞아요. 니노미야 선생님께서 『파랑새』를 우리에게 주신 건, 건물잔해 아래에서 살아나온 직후가 아니라 자원봉사를 마치시고 댁으로 가실 때였어요. 저희에게 『파랑새』를 주시면서 그러시더군요. 지금 당신보다 더 행복이 필요한 사람들은 우리들이니, 우리에게 당신의 행복을 놓고 가신다고.


감상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진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함께 생사의 위기를 넘기고 지금까지 우리를 도와주셨던 분께서 해주신 말씀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예요.


우리 집을 다시 지은 뒤부터, 우리는 니노미야 선생님과 다시 연락을 주고 받았어요. 아스카 양이 태어났다는 소식도 편지로 받아서 알았죠. 아스카 양 이름, 사실 ‘미치루’가 될 뻔 했던 거 알아요? 마지막까지 꽤 고민하셨대요. ‘새’라는 이미지를 따서 지을지, 이나면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지을지요. 니노미야 선생님께서 손녀분의 이름을 『파랑새』에서 따서 지으셨다고 했을 때, 남편이랑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 우리는 딸이 생기면 『이상한 나라』에서 따서 지으면 어떻겠냐고. 그때는 그게 근사하다고 생각했죠. 『파랑새』와 『이상한 나라』 덕분에 우리가 살아났으니, 자녀의 이름도 거기서 따서 짓자고요. 아무튼 아스카 양이 태어난 지 2년 반 정도 지난 뒤에 우리에게도 딸이 생겼고, 그래서 아리스의 이름이 아리스가 된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우리 아리스 말버릇 알죠? 슈코 양이 잘 알 텐데? 네, 맞아요. ‘타치바나입니다’요. 아리스가 그렇게까지 자기 이름을 싫어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원래는 아리스가 적당히 자라서 자기 이름의 유래를 물어보면 니노미야 선생님과 우리가 만나게 된 이야기를 해주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아이돌이 된 지금은 어릴 때에 비해서 훨씬 나아진 수준이라고 말한다면, 아리스가 자기 이름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겠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숨겨두기로 했어요. 아리스가 커서, 자기 이름을 좋아하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이름을 너무 싫어한 나머지 개명을 생각하게 됐을 때, 이런 뜻이 있었노라고 말해주기로 했죠. 사실 이건 우리 가족끼리의 문제니까 니노미야 선생님까지 숨기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왕 같은 인연을 가진 이름을 지었으니 알려주는 것도 같이 알려주시겠다면서 아스카 양에게도 이 이야기를 숨기시기로 하셨다고 들었어요. 나중에 두 사람이 같은 프로덕션에서 만났다고 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놀라면서도 반가워했는지 알아요?


사실 아리스에게 이 이야기를 해줄 기회가 있기는 했어요. 지난 번 지진 때예요. 아스카 양 덕분에 아리스가 살았을 때, 얼마나 하늘에 감사했는지 몰라요. 또 이런 은혜를 입다니, 니노미야 선생님과 아스카 양에게 천번만번 절을 해도 모자랄 지경이죠. 아리스도 아스카 양에게 고마워했고요. 그래서 이참에 이 이야기를 해주자고 생각했어요.


여진이 오기 전까지는요.


여진이 올 때마다 그 때의 기억 때문에 벌벌 떠는 아이에게, 집이 무너져서 잔해에 묻혔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될 거 같아요?


그렇게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다가… 니노미야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조문을 왔던 날, 아스카 양의 부모님과 이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두 분도 당연히 니노미야 선생님과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계셨지만, 선생님의 뜻에 따라 함구하고 계셨으니까요. 결국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적절한 때를 기다리기로 했어요.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요.


그런데 설마 이 이야기를 다 꿰뚫어보는 사람이 나타나서 아스카 양에게 모든 이야기를 설명해주게 될 줄은 몰랐네요.”


7


아리스의 어머니의 이야기가 끝났다. 요약을 하자면, 아스카와 아리스의 이름은 아스카의 할아버님과 아리스의 부모님이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매몰됐을 때 읽었던 책에서 따와서 지은 이름이고, 그 뒤로도 편지가 계속 오갔으며, 그럼에도 세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숨기게 된 것은 아리스가 이름에 가진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살짝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분명 아리스가 이름에 콤플렉스를 가진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게 이런 일을 아스카에게 15년, 아리스에게 13년 동안이나 숨길 이유가 되나?


슬쩍 주위를 둘러보며 눈치를 살폈는데,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인 모양이었다. 특히 당사자인 아스카는 이걸 대체 뭐라고 반응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마담… 저희 할아버지께서 한신・아와지 대지진 때 마담, 무슈와 함께 매몰되셨었고, 재난 현장에서 봉사까지 하셨었는데 저는 할아버지께서 명을 다하실 때까지 알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입니까?”

“아스카, 처음 듣는 얘기야?”


아야카가 물었다.


“할아버지께서 그 날 고베에 계셨다는 것도 오늘 시오리코 씨에게 처음 들은 참인데, 이런 무대 뒤의 이야기가 있었다는 걸 알았을 리가 없지. 그걸 할아버지, 양친, 마담과 무슈까지 모두 입을 모아서 숨겼다니. 그 이야기의 존재를 귀띔해준 게 나와 인연의 끈이 전혀 없었던 제3자였다는 것보다 더 놀라울 지경이야.”

“아스카 양에게까지 숨기게 된 건 미안해요. 할아버님의 뜻이 그러셨어요. 아스카 양을 보면서도 그 말을 할 수 없는 나도, 힘겨웠어요.”


그 순간 아스카의 얼굴에 떠오른 낯빛은 참으로 뭐라 한마디로 말하기 힘들었다. 황당함, 당혹감, 배신감, 어쩌면 분노까지 뒤섞여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어머님…”


어색한 분위기를 지켜보던 후미카가 입을 열었다.


“혹시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달려라 메로스』가 쓰이게 된 배경을 알고 계시나요?”


아리스의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후미카는 간략하게 그 이야기를 설명했다.


“바로 이 곳… 아타미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다자이 오사무와 단 가즈오는 무라카미 여관에서 수중에 돈이 떨어져… 식대와 숙박비를 내지 못하게 됐어요. 다자이는 단을 여관에 인질로 잡혀두고… 스승 이부세 마스지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도쿄로 상경했죠.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다자이가 소식이 없어… 결국 단은 여관의 양해를 얻어 자신도 다자이를 찾아 상경했어요. 단이 다자이를 찾은 곳은 이부세의 집이었어요. 그 때… 다자이가 뭘 하고 있었을 것 같으신가요?”

“글쎄요. 스승이 돈을 빌려주지 않아서 곤란해하고 있었나요?”


그런 이야기였다면 차라리 다자이를 변호해주고 싶은 마음이라도 들 것이다.


“다자이는… 그때까지도 이부세와 장기를 두고 있었어요. 언제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꺼내야 할까… 혹시나 불호령이 떨어지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하면서요. 다자이가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도 단은 여관에 붙잡혀있었는데 말이죠. 어머님께서 단 가즈오의 입장이었다면… 어떤 기분이셨을까요?”

“그야… 화가 났겠죠.”

“네. 당연히 단은 화를 냈어요. 그러자 다자이는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서…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기다리는 이가 괴로울까,

기다리게 하는 이가 괴로울까.””””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네 명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후미카, 시오리코 씨, 아스카, 그리고 나였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에서 이렇게 힘을 실어주니 자신감이 붙었는지, 후미카의 어조가 유약한 모습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다자이의 말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면은 있어요. 네,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웠겠어요. 친구는 여전히 여관에 붙들려있는데, 불호령을 듣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스승에게 말도 못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라니요. 하지만, 과연 다자이는 그 상황에서 계속 장기를 두고 있어야 했을까요? 단이 여관에 붙잡혀있는 것에 마음을 쓰고 있으니, 계속 그걸 의식하면서 장기만 두며 시간을 보내야 했던 걸까요?”


다자이가 그때 했어야 하는 일은 명백하다. 스승에게 돈을 빌려, 아타미로 돌아갔어야 했다.


“메로스는 어땠나요? 자신 앞에 닥친 시련들 앞에서, 메로스는 친구를 생각하며 발만 구르고 있었던가요?”


아니, 그렇지 않았다. 불어난 강물을 건너고, 도적떼와 맞서고, 작열하는 태양에 지쳐 쓰러지면서도, 메로스는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나는 신뢰에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은 그것 하나만 생각하자.”

“달려라, 메로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슈코와 카나데, 아야카가 어느 틈에 책장에서 『여자의 결투(女の決闘)』라는 제목이 새겨진 책을 꺼내서 들고 있었다. 「달려라 메로스」가 실린 단편집이다.


“어머님.”


후미카가 다시 아리스의 어머니를 불렀다.


“아예 아리스에게 말해주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이렇게 말씀드리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어머님은 계속 망설이고 계셨다고 하셨어요. 망설이고만 있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는 것, 저희보다 잘 아시리라 생각해요. 다자이가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한 결과 돌아온 것은, 단의 분노뿐이었어요. 이미 때를 한 번 놓쳤다고 하셨죠. 하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 중 가장 이른 때는 바로 지금이 아닐까요?”

“…잘 모르겠네요. 확신이 없어요. 물론 아리스가 아이돌이 된 뒤에는 예전보다 이름에 대한 거부감이 덜해진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혹시나… 혹시 이 이야기를 듣고, 자기 이름이 이렇게 된 게 아스카 양의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시오리코 씨가 단호히 말했다.


“전 오늘로 아리스 양과 만난 지 이틀째예요. 하지만 아리스 양은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다고 해줬어요. 정말 자기 이름이 싫은 거라면, 그렇게 쉽게 이름으로 부르라고 하지는 않을 거예요.”

“의외로 슈코가 이름 부르면서 장난치는 것도 잘 받아주고, 점잖은 아이니까. 슈코보다는 말야.”

“카나데도 참~ 아무리 천하의 슈코 님이라도, 정말로 기분 나빠하는 것 같으면 장난 안 친다구. 아리스가 장난으로 넘겨주니까 같이 놀 수 있는 거지.”

“지난번 팬미팅 때도 그랬어요. 이름을 마음에 안 들어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 그 이름 덕분에 더 많은 팬들에게 기억될 수 있어서 기쁘다고요. 오히려 알려주시려면 지금이 가장 좋을 때 아닐까요?”


다들 한 마디씩 하는 걸 보니, 나도 뭐라고 거들어야 할 것 같았다. 말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내가 내 경험에서 느꼈던 대로 말하는 수밖엔 없었다.


“그… 아리스 양의 경우엔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외할머니께서 좋아하시던 소설 주인공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그 사실을 들은 건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시오리코 씨를 통해서였고요. 할머니께서도 사연이 있으셔서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해주시지 않으셨지만… 직접 말씀을 해주셨더라면 불필요한 오해를 풀어버리고 보내드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말씀하시고 싶어도 말씀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 경위를 집안의 다른 사람이 아는 날에는 외할머니 말씀대로 당장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책을 읽지 못하는 이 체질을 갖게 된 것도, 결국 이 이름, 그리고 그 책에 관련된 사건 때문이다. 할머니는 그 뒤로 평생을 책을 읽지 못하는 날 보시며 그 죄책감에 시달리셨다. 차라리 이유를 말씀해주시고 후련해지셨더라면,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덕분에 시오리코 씨와 만날 수 있었던 것에는 감사드리고 있지만.


다자이 오사무 이야기 뒤로는 계속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입을 다물고 있던 아스카가 우리 중 마지막으로 말을 꺼냈다.


“마담, 오늘 들은 이야기에 대해 제 감정을 모두 풀어놓자면, 이 밤이 모자랄 겁니다. 그만큼 드리고 싶은 말씀이 많습니다. 하지만 모두 과거의 일이기에,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감정은 잊고 현재의 마담과 교류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아스카의 얼굴을 덮은 것은 지금껏 본 적 없는 슬픔에 찬 표정이었다. 시노카와 지에코가 범인으로 몰렸을 때의 표정에는 분노가 물들어 있었다면, 지금의 표정은 순수한 슬픔 그 자체였다.



“…그저 조금만 더, 일찍 말씀해주셨으면 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떠나시기 전에, 할아버지께서 책을 수집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셨다는 걸 알려주셨다면… 제가 할아버지의 유언을 제멋대로 받아들이기 전에 말씀해주셨다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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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커뮤 기준으로는 5절, 6절, 7절 모두 독립 연재 분량을 충족하는데 이걸 한 번에 올릴까 따로 올릴까 고민하다가, 이 부분은 나누면 괜히 흐름만 끊길 거 같아서 한 번에 올리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길었습니다... 단행본 한 권(후기포함 290p) 분량이라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고, 타 연재처(타입문넷, 조아라) 평균에 비하자면 엄청나게 짧은 분량입니다만, 한 절에 들어가는 정보량이 많다보니 특히 3장에서 고생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내일 에필로그와 후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읽어주시는 여러분께 늘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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