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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리아 고서당 X 데레마스] 아이돌 CAERULA 사건수첩 : 제2장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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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27, 2018 12:55에 작성됨.

[오리지널 주의]

본 소설에는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7권 이후 내용 및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에 대한 글쓴이의 독자적인 설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3


아스카를 따라 집 뒤편에 보이는 바닷가 쪽으로 돌아서자 서고가 눈에 들어왔다. 서고는 결코 작지 않은 크기였다. 크기를 보니 오히려 집안에 서재를 두지 않고 서고 건물을 따로 지은 이유가 납득될 정도였다. 우리가 서고 앞에 서자마자 뒤에서 슈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드디어 들어가도 되는 거야?”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한 기억은 없는데.”

“그래도, 왠지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막 풍기잖아. 문도 닫혀있고.”

“닫아놓은 건 내부 온도와 습도 유지 때문이고, 잠가놓진 않았어. 책만 소중히 해준다면, 출입은 얼마든지 환영이야.”


슈코의 말에 대답하며 아스카는 문을 당겼다. 안에서 시원한 바람이 확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에어컨을 틀어놓은 건가?


“어서 와. 나의 신전, 나의 낙원에.”


서고 안으로 들어서자 예의 시원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눈에 들어온 서고의 내부 모습에 시오리코 씨와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느새 우리 바로 뒤에 들어온 후미카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정말 개인 서고라고요?”

“대단하네요… 마치 도서관 같아요.”


그 말대로, 서고의 모습은 개인 서재라기보다는 도서관에 가까웠다.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것은 물론, 서재 중간중간에 놓인 책장들도 거의 꽉 차있었다. 도서관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서고 가운데에 놓인 탁자와 의자가 공공도서관에서 쓰는 것보다는 훨씬 고급으로 보인다는 것과 그 옆에 간이침대가 놓여있다는 점 정도였다.


흠이 있다면 책이 종류별이나 전집별로 꽂혀있지 않고 꽤 중구난방으로 꽂혀있다는 점이었는데, 책 사이사이에 꽂혀있는 라벨을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보통은 책의 종류나 저자의 이름을 써놓게 마련인 라벨에 일본 각지의 지명이 적혀 있었다. 아마 책을 산 고서당의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겠지.


“아타미의 공기는 습한데다 소금기도 많아서 책을 보존하기 좋은 편은 아니니 말이야. 제어장치가 고장 나지 않는 한 이 서고는 섭씨 25도와 습도 50%를 유지하게 되어있어. 휴식 장소를 겸해서 지으셨다더군.”


애서가가 서고를 따로 짓는 정도야 있을 수 있다. 출장매입을 다니면서 자주 보기도 했고. 하지만 이렇게 기온과 습도를 항시 유지하도록 하는 서고는 처음 봤다. 한눈에 보기에도 유지비가 엄청나게 들어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거, 지진이라도 나면 정리하는 것도 큰일이겠는데?”


슈코의 말에 작년 3월 11일의 대지진이 떠올랐다. 통로에 세워놓았던 책장이 쓰러져 책이 전부 바닥에 널브러졌던 비블리아 고서당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만약 누군가 통로에 서있기라도 했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그 때 비블리아 고서당은 꼬박 사흘 만에 정리를 마치고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다. 이 서고에 있는 책이 무너져 내린다면, 사람이 다치지 않더라도 정리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그럴 것 같지는 않네요.”


그새 책장 가까이 다가가 책을 살펴보던 시오리코 씨가 말했다.


“이 책장, 전부 내진장치가 되어있는 거 같아요.”


시오리코 씨의 말을 듣고 다시 보니 책장의 각 층 양끝에 하얀 봉으로 연결된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시오리코 씨가 그 장치를 가볍게 흔들자, ‘착’하는 소리와 함께 장치에 연결된 봉이 몇 센티 위, 즉 책 앞으로 튀어 올랐다. 흔들림을 감지하면 튀어 올라 책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구조인 것처럼 보였다.


“역시 고서점 주인은 바로 알아보는군. 맞아. 서고 건물은 물론 이 책장들도 전부 내진장치가 되어있어. 통로에 세워둔 책장들까지 전부 천장에 연결되어 있어서 쓰러질 일도 없지. 지진이 나면 책장에서는 떨어지는 게 좋다지만, 역설적으로 지진이 났을 때 이 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여기라고 봐도 될 정도야. 할아버지도 여기에서 지진을 맞으셨다고 하셨고, 진도 6까지는 끄떡없을 거라셨지.”


천장을 올려다보니 그 말대로 책장이 천장에 고정되어 있는 게 보였다. 바닥도 마찬가지로 견고한 고정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오히려 고서점인 우리 가게보다 훨씬 지진 대비가 잘 되어있다는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애서가의, 애서가에 의한, 애서가를 위한 낙원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서고였다.


“오! 이거 대단하네! 이런 책장도 있구나~”


재밌는 물건을 발견했다는 듯 슈코도 책장으로 쪼르르 달려가 장치를 흔들어보았다. 역시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봉이 튀어 올랐다.


“우리도 프로듀서한테 얘기해서, 휴게실 책장 이런 걸로 바꾸자고 할까?”

“보아하니 단가가 꽤 나갈 것 같은데, 프로듀서는 둘째 치고, 전무가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 전무 성격, 슈코도 알잖아?”

“음~ 카나데야말로 너무 상무 언니를 깐깐하게 보는 거 아냐? 상무 언니, 의외로 여리다구. 작년 같은 만에 하나의 상황에서 아이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하면 쉬울 걸? 아스카가 책장에 깔렸다고 했을 때 표정을 카나데가 봤어야 하는데.”

“두 사람 이야기하는데 미안하지만, 난 책장에 깔린 적은 없어. 슈코 씨가 상무…아니, 전무에게 과대보고를 한 것뿐이지. 덕분에 받지 않아도 될 걱정까지 받아버려서 곤란해졌었다고 말했을 텐데.”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서고가 안전한 것과는 별개로 도쿄에서는 책장 때문에 사고가 벌어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상무’와 ‘전무’는 분명 다른 직책일 텐데, 어쩐지 세 사람 모두 같은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난 거짓말 안 했다? ‘아스카가 책장…’까지만 말했는데 상무 언니랑 프로듀서가 사색이 돼서 뒷이야기도 안 듣고 휴게실로 뛰어가 버린 거지.”

“저기…”


세 사람의 이야기에 끼어든 건 뜻밖에도 후미카였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지 않을까요? 우선은, 책을…”


후미카의 시선은 마치 자기 시선을 따라가라는 듯 부자연스럽게 세 사람이 아닌 다른 쪽을 향해있었다. 그 시선의 끝에는 마지막으로 서고에 들어온 아야카의 옆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태블릿을 바라보는 아리스가 있었다.


세 사람의 표정이 부자연스럽게 변하더니, 뭔가 상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빛이 오가고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아스카가 말을 꺼냈다.


“아, 그래.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잊고 있었군. 시오리코 씨, 이쪽이야.”


아스카는 시오리코 씨와 슈코가 만져놓은 내진장치를 원래대로 돌려놓고는 시오리코 씨를 서고 반대편으로 대려갔다. 그 사이, 아야카가 슈코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 방금 그 얘기, 무슨 말이야? 아스카가 책장에…?”

“아… 그거?”


슈코는 주위를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아스카와 시오리코 씨는 물론, 아리스와 후미카도 그 둘을 따라 빠르게 걸어간 바람에 간격이 좀 벌어져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슈코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지진이 났을 때, 하필 아리스가 휴게실 책장 옆에 서있어서 엄청 위험했거든. 막 첫 번째 진동이 올 때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는데, 아스카가 아리스를 책상 밑으로 밀어버리고 감싸 안아줬어. 그 책장, 결국 책상 위로 쓰러지면서 책이랑 장식품들이 전부 떨어졌으니까… 아스카가 아니었다면…”


슈코가 양손으로 몸을 감싸며 가볍게 떨었다.


“미쳤나 봐. 내가 이 얘길 왜 했지?”


애써 가벼운 이야기인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넘겨보려 해도, 결국 그날의 끔찍한 기억, 그리고 공포와 마주하고 만다. 그날의 재앙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오랜 시간이 지나 상처가 아문다 하더라도, 깊은 상처였던 만큼 흉터가 남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아직 상처가 채 아물지도 못했는데 스스로 그 상처를 헤집었으니, 스스로에게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슈코를 대신해 카나데가 이야기를 받아서 마무리했다.


“사실상 아스카가 아리스를 구해준 거지. 지진 뒤에 아리스네 부모님께서 프로덕션에 달려오셔서 그 이야기를 들으셨는데, 아스카한테 또 이런 은혜를 입어서 어떻게 하냐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까지 봤어. 아스카네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아리스는 우리랑 같이 조문을 왔었는데, 아리스네 부모님도 일부러 따로 들르셔서 조문을 하셨다던가? 아무튼 아스카에게 굉장히 고마워하셨지.”

“‘또’라는 건 아스카가 전에도 아리스를 도와줬었단 얘기야?”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네. 두 사람의 과거사를 아는 건 아니라서. 내가 알기론 아이돌이 돼서 처음 만난 사이지만, 또 모르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우리가 간이침대 근처의 책장에 도착했을 때, 아스카는 막 허리를 숙여 가장 아랫단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푸른색 표지의 양장본이었다.


“이 책이야. 이 책이 왜 이 상태가 됐는지, 알아봐줄 수 있을까? 대략적이라도 좋아.”

“이 책은…”


아스카에게서 책을 건네받은 시오리코 씨가 책을 보고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나도 책 표지가 눈에 들어온 순간 기겁을 할 뻔 했다. 『이상한 나라不思議の国』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지만, 중요한 건 제목이 아니었다. 분명 푸른색인 양장본 표지가 검붉은 얼룩으로 한가득 물들어있었다. 표지뿐이 아니었다. 시오리코 씨가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책 안쪽까지 물들인 검붉은 얼룩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흔적인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핏자국이었다.


“시오리코 씨, 이 책…”


핏자국이 묻은 것 맞죠? 라고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시오리코 씨가 내 말을 끊고 내게 되묻는 게 더 빨랐다.


“네, 맞아요! 쿠스야마 마사오가 번역해서 1920년에 출간한 『이상한 나라』의 초판본이에요! 다이스케 군도 알아보는구나!”


아뇨, 전혀 몰랐는데요. 책이 피투성이인 것보다 무슨 책인지가 더 중요하다니, 역시 시오리코 씨답다.


책벌레끼리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건지, 시오리코 씨의 말에 후미카가 관심을 보였다.


“쿠스야마 마사오의 『이상한 나라』 첫 번역본… 정말인가요?”

“왠지 불길한 이름인데요.”


후미카 옆에 꼭 달라붙어있던 아리스가 중얼거렸다.


“『이상한 나라』라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말입니까? 유명한 작품인 건 알지만, 이 책이 그렇게 대단한 책인가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면 어렸을 때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봤던 기억이 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야기 전개가 굉장히 정신없었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당연히 대단하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일본… 아니 비유럽권 최초 번역본이에요! 내용을 각색하지 않고 원문과 언어유희를 살려 번역한 비유럽권 최초의 번역본이라구요!”

“윽…”


내 물음에 시오리코 씨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한 것과는 반대로, 아리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아리스가 자기 이름에 콤플렉스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앨리스Alice. 일본어로는 ‘アリス-아리스-’로 발음함.」 관련 작품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 싶기도 했다. 그런 아리스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시오리코 씨는 설명을 계속했다.


“이 『이상한 나라』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가 같이 수록되어있어요. 1부에는 「앨리스의 꿈」, 2부에는 「거울의 뒷면」이라는 제목을 붙였죠. 쿠스야마 마사오 이전에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번역하려는 시도는 있었고, 출간된 것도 여러 권이에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일본에 소개한 걸로는 나가요 시즈오永代静雄가 1908년 2월부터 1909년 3월까지 「소녀의 벗少女の友」이라는 잡지에 연재했던 게 최초죠.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1899년 하세가와 텐케이長谷川天渓가 『거울세계鏡世界』라는 제목으로 「소년세계少年世界」에 연재한 게 최초고요.

하지만 쿠스야마 마사오 이전의 번역은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전하기보다는 당시 일본 어린이의 감성에 맞춰 개작하고 줄거리를 재미를 전하는 데에 뒀어요. 종류에 따라서는 개작이라기보다 창작이라고 보는 게 합당한 것도 있고, 앨리스의 이름이 바뀌는 건 예사였죠. 나가요 시즈오만 해도 원작을 소개한 건 1908년 4월까지였고, 나머지 분량은 원작과 동떨어진 창작 판타지였어요. 하세가와 텐케이는 앨리스의 이름을 ‘미이’로 바꿨고, 그 뒤에도 앨리스의 이름은 아이, 아야코綾子, 아야あや, 스즈코すゞ子 등으로 다양하게 바뀌었죠. 완역본은 쿠스야마 마사오의 『이상한 나라』가 최초예요.”


이른바 ‘현지화’로 먼저 알려졌다는 얘기인가. 비유럽어권 최초의 완역본이라니, 시오리코 씨가 눈을 빛내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상태가 이러니… 저희 가게 기준으로는 매입하기 어렵겠네요. 좋은 책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스카 양, 저쪽의 탁자에 앉아서 살펴봐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


시오리코 씨는 아스카와 함께 탁자 앞에 앉아 책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의자가 셋뿐이었기 때문에 여덟 명 중 다섯 명은 서있어야 했는데, 나머지 하나의 의자는 남은 사람 중 책을 가장 잘 알만한 후미카에게 돌아갔다. 슈코와 아야카가 아리스는 간이침대에 누워서 쉬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아리스는 후미카가 시오리코 씨와 함께 책을 살피는 모습을 보겠다며 옆에서 버텼다. 결국 책 주인 아스카가 의자를 후미카 옆으로 옮기고 아리스에게 의자를 내주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면 직접 여쭤봤겠지만, 애석하게도 돌아가신 뒤에야 그런 생각을 하게 됐거든. 양친도 이 책에 관해서는 모르는 눈치여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영영 알 수 없게 됐고. 가능하다면 시오리코 씨가 알아봐줬으면 해.”


아스카는 책의 조사를 앞두고 간단하게 용건을 정리했다. 시오리코 씨는 고개를 끄덕이고 표지를 넘겼다. 시오리코 씨가 표지를 넘기자 ‘『이상한 나라』 / 루이스 캐롤 작 / 쿠스야마 마사오 역’이라는 글자가 써있었다. 이 페에도 검붉은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이렇게 핏자국이 묻어있으니 아스카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고 싶어 할만하다. 하지만 아무리 시오리코 씨라도 겨우 이 피 묻은 책 한 권으로 뭘 알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피가 묻어있다뿐이지, 그 외에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다행히 고인께서 생전에 남겨두셨던 흔적 하나가 책 사이에서 발견됐다. 가격표였다.



단권, 낙서 있음, 표지 얼룩 있음, 3,000 엔. 니노미야 서방二宮書房.



“니노미야… 인가? 묘하네.”


뒤에서 지켜보던 카나데가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스카 양, 혹시 이 서점의 이름에 관해서 아는 게 있나요?”


시오리코 씨도 서점의 이름을 의식한 것인지 아스카에 질문을 던졌다. 아스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다지 짚이는 건 없어. 할아버지는 물론 친척들 중에도 서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런가요?”


시오리코 씨는 고개를 갸우뚱 하고는 가격표를 원래의 자리에 끼워둔 뒤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겼다. 책의 마지막 장에 도달하자, 책갈피 하나가 꽂혀있는 것이 보였다. 시오리코 씨는 조심스레 책갈피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역시나 핏자국이 남은 책갈피의 앞면에는 익숙한 사진 한 장이 인쇄되어있었다.


“고베 포트 타워…네요.”


후미카의 말이었다. 고베 포트 타워라. 가본 적은 없지만 사진은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고베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니 당연한 이야기지만.


“후미카가 그렇다는데, 고베 출신 타치바나 선생님의 고견은 어떠신지?”


슈코가 아리스의 뒤에서 물었다. 아리스는 슈코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책갈피를 보며 대답했다.


“후미카 언니가 틀릴 리 없잖아요. 틀림없는 고베 포트 타워예요.”


책갈피의 뒷면엔 수필로 쓴 검은 글씨가 적혀있었다.



고베를 기억하며.



“그럼 적어도 고베에서 산 책인 건 확실한 거네? 그치?”

“확신하긴 힘들지 않아? 우선 이 글씨가 아스카네 할아버지 쓴 건지도 모르고, 아니면 다른 곳에서 산 책갈피를 여기에 꽂아뒀을 지도 모르고. 그냥 꽂아둔 건데 피가 나중에 같이 묻었을 지도 모르잖아?”


아야카의 추측에 대한 슈코의 대답이었다. 슈코를 만난 이래 최초로 두 사람의 의견이 갈렸다.


“날카로운 지적이네요.”

“그렇네. 슈코답지 않지만.”

“그건 그렇지만요.”

“나 상처받는다?”


아리스와 카나데도 슈코의 말에 동의를 한 것 같지만, 어째선지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 말들이 슈코를 향해 꽂혔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오리코 씨는 책갈피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만년필이네요. 이 글씨는 핏자국이 생긴 뒤에 쓰인 거 같고요.”

“어떻게 아는 겁니까?”


시오리코 씨는 사진이 그려진 면을 보여주며 내 질문에 대답했다.


“일단 잉크의 색감에서부터 차이가 나요. 그리고 만년필과 볼펜은 쓸 때 들어가는 필압이 달라요. 만년필은 종이에 펜촉을 대는 것만으로도 잉크가 흘러나오기 때문에 필압을 강하게 줄 필요가 없죠. 하지만 볼펜은 촉과 종이 사이의 마찰을 이용해서 볼을 굴려야 잉크가 나오기 때문에 필압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들어가요. 볼펜으로 썼다면 이 정도 두께의 책갈피에선 분명히 눌린 자국이 남았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없어요.”


시오리코 씨의 말대로 사진이 있는 쪽은 눌린 자국 하나 없이 깔끔했다.


“이 글귀가 쓰인 시점이 핏자국이 생긴 뒤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예요. 우선, 이 글에는 번진 흔적이 없어요. 내수성이 강한 잉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만년필 잉크는 대부분 물에 쉽게 지워져요. 글이 쓰인 다음에 피가 튀었다면 분명 번졌겠죠. 둘째, 혹시나 내수성이 강한 잉크로 쓰였다고 하더라도, 글이 쓰인 뒤에 피가 묻어서 굳었다면 피가 튄 부분의 색감이 달라졌겠죠. 검은 잉크 위에 붉은색이 덧칠되는 거니까요. 하지만 그런 흔적은 없어요.”

“그러면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 거지?”

“책에 피가 묻을 때, 이 책갈피는 글이 쓰이지 않은 상태로 책에 꽂혀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책에 피가 묻게 된 뒤에 글씨가 쓰였을 건데, 여행지를 기념하는 문구를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쓰지는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책에 피가 묻은 것과 이 글귀가 쓰인 시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진 않아요.”

“할아버지와 이 책의 인연이 생긴 장소는 고베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인가.”

“반드시, 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럴 개연성이 높아요. 문제는 이 글귀가 언제 쓰였느냐인데…”


시오리코 씨는 계속 책갈피를 확인했지만, 그 이상 짚이는 부분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 때 후미카가 말을 꺼냈다.


“저…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그 책갈피를 좀 봐도 괜찮을까요?”

“아, 네. 괜찮죠, 아스카 양?”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환영이야.”


책갈피를 후미카에게 건네주고 시오리코 씨는 다시 한 번 책 사이를 확인했지만 더 이상의 단서는 없었다. 또 다시 시오리코 씨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이상한데… 아스카 양, 다른 책들을 좀 살펴봐도 괜찮을까요?”

“뜻대로 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


아스카의 허락을 받은 시오리코 씨는 서재를 쭉 돌아보고는 다른 책 몇 권을 꺼내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오리코 씨와 후미카가 말없이 각자 책과 책갈피를 살펴보기 시작한 뒤 몇 분이 흘렀다. 성과가 없어 지루해진 듯 슈코와 아야카는 탁자 앞을 떠나 다른 책장을 뒤적였고, 아리스는 후미카에게 기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카나데는 나한테 아리스를 안아다 간이침대에 눕혀달라고 하더니, 아리스를 침대에 눕혀주자 아리스의 이마에 입맞춤을 해주고서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다시 탁자 앞으로 돌아왔을 때 탁자 앞에 남은 사람은 후미카와 아스카, 그리고 나뿐이었다. 후미카는 어느새 책갈피를 옆에 내려놓고는 필통과 노트를 꺼내 만년필로 책갈피에 쓰여있던 글귀를 옮겨적고 있었다. 또 몇 분이 흘렀을 때 즈음, 드디어 서고의 정적이 깨졌다.


““아스카 양,””


시오리코 씨와 후미카의 목소리였다. 동시에 같은 사람을 부른 것에 당황했는지, 두 사람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봤다. 시오리코 씨가 먼저 양보를 했다.


“머, 먼저 말씀하세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네, 네… 괜찮으니 먼저…”

“아… 그러면…”


지켜보던 아야카가 뒷목을 잡으며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어지간히 답답했나보다.


“아스카 양, 혹시 할아버님께서 쓰셨던 만년필이 남아있다면 볼 수 있을까요?”


아스카는 어려울 거 없다는 듯, 곧바로 탁자 서랍을 열어 작은 진청빛 상자를 꺼냈다. 상자 위에서 금빛으로 새겨진 닻 모양 문양이 선명하게 빛났다. 아스카가 상자를 열자 얇은 쿠션에 얹힌 검은색 만년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스카는 열린 상자를 후미카 쪽으로 밀어주었다.


상자를 받은 후미카는 만년필이 얹힌 쿠션을 살며시 들어냈다. 쿠션과 상자 바닥 사이에 종이가 몇 장 있었다. 그 종이를 펼쳤다가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고, 후미카는 만년필을 손에 들었다.


“뚜껑을 열어봐도 될까요?”


아스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후미카가 만년필을 들어 조심스레 몇바퀴 돌리자 만년필 뚜껑이 열리고 펜촉이 보였다. 후미카는 만년필을 옆으로 살짝 돌려 펜촉을 빛에 반사시켜보았다.


“할아버님께서 쓰신 만년필은… 이 한 자루뿐이었나요?”

“내가 아는 한으로는 그래. 책은 많이 모으셨지만, 만년필은 이 한 자루만 쓰셨어.”


아스카의 답을 들은 후미카는 다시 뚜껑을 닫아 만년필을 제자리에 돌려놓고는, 상자를 받았을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아스카에게 돌려주었다.


“실례했습니다.”

“어때? 알아낸 건 있었어?”

“네. 대략적이지만… 이 글이 언제 쓰였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대략… 5년 정도 범위로.”

“정말이요?”


서고 안 모두의 눈이 큰소리를 낸 시오리코 씨에게 향했다. 시오리코 씨는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방금 서재에서 꺼낸 책을 들고 탁자 앞으로 달려왔다.


“대체 어떻게…? 책이 매매된 게 90년대 이후라는 것까진 알았지만, 어떻게 5년 범위로 줄인 거죠?”


아니, 잠깐. 시오리코 씨도 책이 90년대 이후에 거래됐다는 건 알았다고? 나는 곧장 시오리코 씨에게 물었다.


“90년대라니, 그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가격표예요.”


시오리코 씨는 책 사이를 펼쳐 가격표를 꺼내들었다.


“단권, 낙서 있음, 표지 얼룩 있음, 3,000 엔. 이 책의 현재 상태와는 달라요. 혹시 이 상태의 책을 받아주는 고서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파손이면 ‘낙서 있음, 표지 얼룩 있음’이라고 기록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아요. 피가 묻기 전 이 책의 상태였겠죠. 그러니 이 가격표대로 책이 매매된 뒤에 피가 묻은 건 명백해요. 문제는 가격인데… 다이스케 군, 할머님의 나쓰메 소세키 전집이 얼마였는지 기억해요?”


우리를 만나게 해줬던 그 전집 말인가.


“그게 분명…”


나는 2년 전 일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다행히 내게 있어서는 기념비적인 책이었기에, 그 사이에 끼어있던 가격표의 내용도 정확히 기억났다.


전 34권, 초판, 장서인 있음, 3,500 엔. 비블리아 고서당.


“분명 전 34권에 3,500 엔… 아, 혹시!”


그 가격을 입에 담고 나니 시오리코 씨가 뭘 말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물가다. 할머니가 소장하셨던 소세키 전집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50년 전에 거래됐던 책이다.


“네. 물가예요. 귀한 책이긴 하지만, 표지 얼룩이 있고 낙서까지 있는 책에 3,000 엔을 매길 수 있는 시대는 한정되어 있어요.”

“일본의 물가는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 12배 가까이 올랐으니까요…”


후미카가 시오리코 씨의 말에 덧붙였다.


“맞아요. 그 중에서도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에 물가가 급격히 상승하죠. 1차 오일쇼크 당시엔 물가상승률이 20%에 달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즉, 이 책에 3,000 엔이라는 가격을 매길 수 있었던 건 대략 1990년대 초반까지, 아무리 길게 잡아도 1980년대 후반까지라는 이야기가 돼요.”


책의 가치와 물가만 가지고 그 정도까지 줄인 건가.  물가상승률을 안다고 하더라도, 책의 가치를 모르고서는 해낼 수 없는 생각이다. 시오리코 씨답다.


“하지만 그걸로는 5년 범위까지 줄일 수는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하신 거죠?”

“저는… 잉크와 만년필로…”


후미카는 방금 전까지 글귀를 옮겨적었던 노트와 책갈피를 함께 들어보였다.


“만년필의 잉크… 그 중에서도 염료 잉크는 영원불멸하지 않아요. 세월이 지나면 이렇게… 색이 바래거나 흐릿해지죠.”


과연 후미카의 말대로 노트에 쓰인 글귀는 진한 검정색이었지만 책갈피의 글귀는 그에 비해 색이 흐릿해져있었다. 책갈피만 볼 때는 몰랐는데, 직접 비교해보니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색이 어느 정도 바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날아가진 않았어요. 이 보존상태를 유지했다고 한다면, 아마 1990년대가 아닐까 하고…”


2000년대가 경우의 수에서 사라지면서, 시오리코 씨가 줄인 범위에서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후미카는 노트와 책갈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스카 양 할아버님의 만년필에서 확인한 것은…”


후미카의 눈이 만년필 상자 쪽으로 향했다.


“만년필의 종류와 보증서의 날짜였어요. 보증서의 날짜는 1994년 말로 되어있는데, 이 만년필의 보증서가 맞다면 글씨는 그 이후에 쓰인 것이 되겠죠. 상자에 담겨있던 만년필은 세일러 프로피트 21… 1981년에 처음 출시돼서, 작년에 출시 30주년을 맞은 모델이에요. 펜촉도 구형이고… 글씨의 굵기와 필체, 그 외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이 만년필로 쓴 것은 확실해 보이고, 보증서 역시 이 만년필의 보증서라는 게 분명해요. 운이 좋게도, 만년필을 구입하실 때 시필을 하셨던 종이가 있어서 필체도 일치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어요.”


그 말에 아스카가 만년필 상자를 열어 다시 종이를 꺼내보았다. 책갈피에 쓰인 것과 같은 필체, 비슷한 색으로 쓰인 글씨가 확실히 보였다.


“정리하면, 이 글귀는 1994년 말에서 1999년 즈음… 그 사이 언젠가에 쓰였을 거라 생각해요.”


감탄이 나왔다. 그러면 책에 피가 묻은 것도 그 사이가 된다는 말이다. 아무런 힌트도 없던 상황에서 꽤 범위가 좁혀졌다.


“놀라운데, 후미카 씨. 만년필 한 자루로 그만큼이나 범위를 좁히다니. 조금씩 진실에 가까워져가는 느낌이야.”

“제가 알 수 있는 건 이 정도… 책에 관한 나머지는 시오리코 씨에게 맡길 뿐이지만요.”


공이 다시 시오리코 씨에게 돌아왔다. 그러고보니 시오리코 씨도 아스카를 불렀었다.


“그래서, 시오리코 씨는 나를 왜 불렀지?”

“이 책에 없는 게 하나 있어서, 혹시 아스카 양은 알고 있나 해서요.”

“책에 없는 것? 뭐가 말이지?”


시오리코 씨는 방금 들고온 책들을 전부 펼쳤다. 낯익은 『안데르센 동화전집』을 비롯해 쿠스야마 마사오의 이름이 새겨진 책 몇 권이었는데, 시오리코 씨가 펼친 페이지에는 전부 명함이 끼어있었다.


“지난번에 봤던 『안데르센 동화전집』에는 있었는데 『이상한 나라』에는 없는 게 하나 있어요. 책을 구입한 고서점의 명함이에요.”


지난번 『안데르센 동화전집』 사이에 비블리아 고서당의 명함이 꽂혀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시오리코 씨의 말에 아스카의 표정이 변했다. 큰 낭패를 보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혹시나 해서 책이 꽂혀있던 자리를 찾아보러 갔던 건데, 명함은 없었어요. 혹시 아스카 양은 본 적 있나요?”

“본 기억은… 있어. 시오리코 씨에게 전화를 했던 날에도 이 책을 다시 살펴봤는데, 그 때는 있었어. 분명히 존재했어. 그런데… 그게 어디로 갔지?”


아스카는 머리를 싸맸다. 책 사이에 끼어있던 명함이 사라졌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힌트가 될 수도 있었던 명함이 사라졌으니 낙심이 클 것이다.


다행히 그 순간,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명함이라면, 혹시 이걸 찾는 거야?”


간이침대에 앉아있던 카나데였다. 카나데의 손에는 딱 명함 크기의 종이가 들려있었다.


“아리스를 재워주면서 보니까 침대 밑에 떨어져 있길래 주워뒀는데, 역시 아스카 거였구나. 관리를 잘해야지.”


카나데는 마치 모델 같은 걸음걸이로 탁자로 다가와서는 아스카의 앞에 명함을 내려놓았다. ‘니노미야 서방’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이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명함을 찾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스카는 카나데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카나데 씨. 이 답례는 뼈에 새겨야겠는 걸.”


카나데가 건네준 명함을 확인해보았지만, 별다른 특징은 없었다. 서점과 점주의 이름이 쓰여있을 뿐이었다.



니노미야 서방二宮書房

점주店主 미카미 아키히로三上 章弘



서점의 이름이 ‘니노미야 서방’인 이유는 이름 아래에 쓰인 주소에 있었다. 시오리코 씨가 그 주소를 읽었다.


“효고 현兵庫県 고베 시神戸市 츄오 구中央区 니노미야 초二宮町…”

“지명…이었네요.”

“그러고보니, 765 프로덕션의 아마미 하루카 씨도 니노미야 역에서 사무소까지 출퇴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거 같네.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던가?”


도쿄에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라면 아마 우리가 오면서 지나쳤던 나카 군 니노미야 마치일 것이다. 괜히 쉬운 문제를 어렵게 돌아갔던 것 같아 허탈해졌다. 생각해보면, 여기까지 오는 길에도 니노미야 마치를 지났으니 당연히 지명일 가능성도 염두에 뒀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옛 신사 중 각 율령국律令国, 일본의 옛 행정단위. ‘쿠니’라고도 부름에서 가장 급이 높은 신사를 가리켜 이치노미야一宮,  그 다음 급의 신사를 니노미야二宮라고 했죠. 해당 신사는 물론 그 주변 지역을 일컫는 명칭으로도 사용했으니 당연히 지명으로도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어야 하는데… 실책이네요.”


후미카도 나와 같은 자책을 했다. 여기에 아스카가 제동을 걸어주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내 성이 그런 걸 어떻게 하겠어? 빠지기 쉬운 함정이 파여 있었을 뿐이니, 잠깐 발을 헛디딘 거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뒷면도 살펴보는 게 어때? 주우면서 보니 뒷면에도 뭔가 적혀있던데 말이야.”


화제를 돌리려는 듯, 카나데는 우아한 손동작으로 자신이 내려놓은 명함을 반대로 뒤집었다. 단면 명함의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새하얀 면이 드러났다.


아니, 새하얀 면이었어야 했다.


명함의 뒷면에 익숙한 필체, 익숙한 색감, 익숙한 굵기로 쓰인 익숙한 단어들에, 우리는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기타가마쿠라 역

비블리아 고서당

시노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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