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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y Back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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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23, 2018 00:29에 작성됨.

너는 조용히 잠들어있어.
그래, 마치 동화 속의 공주님처럼.
잠든 너를 깨우러가는 일은 왕자님의 일.
그런데 왕자가 아닌 내가 너를 깨우러 가도 괜찮은걸까?


천천히 눈을 뜨고 주변을 보는 나.
평소와 같은 프로덕션의 안, 평소와 같은 집기들.
평소와 같이 내 앞에 놓인 모니터, 평소와 같이 내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분홍색 컵.
그런데 무언가가 부족해 보이는건 기분탓일까?


시계를 쳐다보면 아슬아슬하게 막차를 탈 수 있을 시간.
여기서 자는 것도 괜찮겠지만, 여기에서는 내가 편히 잘 수 없어.
아무렇게나 쌓인 서류들을 대충 정리해 가방 안에 넣고 사무실을 나서.
이상하다, 분명히 예전엔 조금 더 정리가 잘 되어있었는데.


나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듯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버스를 타고 간 다음 조금 걸어야만 해.
덜컹거리며 도로를 달리는 구형 버스 안을 두리번거려보면 이상할정도로 고요하고 차분해.
이상하다, 분명히 이 버스 안은 조금은 소란스러웠는데.


버스 안에서 눈길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면 어딘가 익숙한 가게들이 눈에 보여.
저 곳은 따뜻한 차를 마셨던 카페, 저 곳은 즐겁게 시간을 보냈던 공원.
천천히 손을 뻗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카페로 손을 뻗었어.
하지만 이내 버스는 움직여버려서 카페는 시야에서 사라져버렸어.
어라, 이상하다.
나는 왜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는듯한 기분인걸까?


홍차라, 그러고 보면 난 차의 맛에 대해 잘 몰랐었지.
분명히 내가 그 카페에서 먹었던 것은 차가 아니라 따뜻한 코코아였어.
달디단 코코아와 설탕의 맛, 그리고 그보다 더 달았던 그 무언가의 맛.
이상하다, 자꾸만 무언가가 떠오르려고 해.
나같은 삼류 프로듀서가 누군가와 같이 갔을리가 없는데 말이야.


저 공원만 해도 그래.
분명히 나 혼자 갔을텐데, 누군가와 함께 즐거운 대화를 나눈 듯해.
분명히 추운 겨울이었을텐데, 그 어떤 추위도 기억나지 않아.
이상하다, 이른 봄인 지금에도 나는 아직 한기를 느끼는데 말이야.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그건 누구일까?


내가 탄 구형버스는 계속해서 덜컹거려.
그래서 무언가에 대해서 떠올리려고 하면, 그 생각은 잘못됐다는 듯이 나를 한 번 튕겨내.
작용과 반작용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억지력이라고 해야할까.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렇게 생각나지 않는걸 보면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던 같기도 해.
그런데 어째서 창문에 비친 나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거지?
잘 모르겠어, 지금의 나는 무얼 생각하고 있는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집 앞의 버스 정류장에서 내 몸을 세워.
최대한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런데 어째서, 이 길은 왜 이렇게 삭막해 보이는 거야?


버스 정류장에서 조금 걸어 익숙한 맨션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려.
엘리베이터는 저 위에 있고, 나는 저 밑에 있어.
내려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겠네라고 생각하며 나는 로비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음악을 들어.
이상하다, 이 노래가 이렇게 감정이 실리지 않은 노래였던가.
다 무의미한 것처럼 들리는 음악소리엔 기교를 부리려 애쓰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참 좋아했던 노래였던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게 노래를 듣고 엘리베이터를 타려니 안에서 사이 좋아보이는 두 명의 남녀가 내려.
여자는 남자의 팔에 안겨있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어.
눈에서 꿀이 떨어질 것 같은데 왜 나는 그 모습이 부자연스럽지 않은걸까.
엘리베이터에 타니 은은한 향수 냄새가 온 공간 안에 나지막히 퍼져있어.
이상하다, 이 향은 분명히 어디선가에서 맡았던 향인것 같은데.
그게 내 것이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네.


내가 사는 곳은 맨션 7층의 가장 끝 방.
문 옆의 출구의 문을 열면 비상계단이 있고, 비가 오다 개이면 금방이라도 뛰어내려갈 수 있을것같아.
하지만 그 문을 여는 일은 절대 없겠지.
나에게는 그런 일이 있을리가 없고, 나는 이 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걸.
차가워서 들어가고 싶지 않은 집.
하지만 조금이라도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들어갈수밖에 없는 집.


집 안으로 들어가 옷을 벗고 멍하니 창문 밖을 쳐다보는 나.
여기에도, 저기에도, 욕실에도, 그리고 옷장에도.
그 어디에도 아까 맡은 향수의 냄새가 나.
창문을 열어놨을텐데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일까.
아니,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그 향수의 냄새가 사라질 수가 없는걸까.
멍하니 서 있다 벗어놓은 옷을 집어들고 옷장으로 가는 나.
모든 것이 두 벌씩 갖추어져있는 옷장을 열면 향수 냄새가 더 배어있어.
이상하다, 오늘 내가 여기에 향수를 뿌렸던가.


두 벌씩 있는 옷들 중 커다란 한 벌을 꺼내 내 몸에 걸치는 나.
사이즈가 딱 맞아서, 분명히 내 옷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럼 이 작은 옷들은 다 누구의 거란 말이야?
내 몸에는 맞지도 않을거고, 향수 냄새가 나는 것을 보아하니 누군가가 입었던 옷 같긴 한데.
버려야할까, 하지만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기분이 들어.
아직도 나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걸까?


옷을 갈아입고 물을 마시려 냉장고가 있는 부엌으로 향하는데, 나도 모르게 손으로 사진이 담긴 조그마한 탁상액자를 손으로 쳐 버렸어.
운 없는 액자는 땅으로 떨어져서 깨져버렸고, 그 바람에 안에 있던 사진이 조금 튀어나왔어.
한숨을 쉬며 액자를 치우려고 했는데, 튀어나온 사진을 보고 나는 그만 손을 멈칫거렸어.
그래, 거기엔 나와 한 여자의 사진이 있었으니까.
맞아.
그 사진은 케이트 너와 찍은 사진이었어.
이 집에서, 너와 함께 찍은 사진.


분홍색 컵도
잘 정리된 서류들도
덜컹거리는 버스 안의 기억들도
카페에서 홍차를 마시던 너의 모습도
공원에서의 즐거웠던 데이트도
엘리베이터에서 들렸던 노래들도
너의 몸에서 났던 은은한 향수의 냄새도
그리고 둘이 같이 쇼핑을 가서 맞췄던 커플옷들도.


그래, 나는 아직 너를 그리워하고 있는거야.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까?
동화 속의 공주님인 너는 울면서 잠들어있고, 나는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닌데.
나는 너를 추억하고 너를 껴안아도 괜찮은걸까?
나라는 사람이 너를 그리워해도 괜찮은걸까?
멈춘 시간 속에 잠들어있는 너를 깨워도 괜찮은걸까?


나는 어두컴컴한 집에 혼자 앉아 너를 생각해, 케이트.
혹시 너도 내 생각을 하고 있니?
하늘로 높이 날아올린 넌, 왜 아직도 나에게 되돌아 오는거야?
겨우 널 내 가슴 속에서 재웠다고 생각했는데, 왜 아직도 내 가슴 속에서 깨어있는거야?
어째서, 어째서 내 마음 속에서 살아있는거야?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나는 너를 잊으려고 노력했지만 잊을 수 없다는걸.
너와 있었던 곳을 이렇게 필사적으로 떠올리고 있잖아.
너와 함께했던 추억들을 떠올리며 미소짓고 있잖아.


돌아와줘, 케이트.
잊어보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어.
내 가슴 속에서만 잠들어있지만 말고 나를 안아줘.
나는 네가 필요해, 케이트.
그러니까, 이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우리 둘의 공간이었던 집으로 오는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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