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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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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26, 2018 02:11에 작성됨.

"…이제 와서요?"                    
지금 이 한 마디를, 소녀는 마치 바닷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있던 무언가를 힘겹게 끌어올려서는, 땅바닥에 패대기치듯이 내뱉었다. 그리고 그것이 땅바닥에 부딪히며 조용히, 하지만 날카롭게 울려퍼지는 그 소리가, 소녀의 눈앞에 힘없이 서 있는 한 중년 여성의 가슴을 꿰찌른다.
정갈한 글씨로 '키사라기 家'라고 새겨진 비석만이, 이 모든 광경을 쓸쓸히 지켜보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적막만이, 마치 안개가 끼듯이 깔린다. 너무나도 차가운 안개가, 건너편이 아주 흐릿하게 보일 만큼 깔린다. 안개 속에선 모든 것이 뒤틀려 보인다. 차단된 시야 속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형체는 공포를 자극하고, 공포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렇게 부풀어오른 상상력은, 앙상한 나무도 거대한 짐승으로 보이게끔 한다.


적막 속에서 중년 여성은 떨고 있다. 소녀의 감정이 어렴풋이나마 전해져 온다. 느껴지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혐오? 적개심? 알 수 없다. 안개의 한기가 더욱 심해진다. 아마 그 가혹하다는 북풍도 지금 이 한기에 비하면 봄바람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렇게 안개가 더욱 짙어지려 하는 순간, 이곳에 갇혀있는 것도 이제 질렸다는 듯이 소녀가 먼저 적막을 깼다.


"하실 말씀은 그게 전부인가요?"


소녀는 혼자 안개 속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중년 여성의 주위에는 아까보다 더 짙게, 더 차가운 안개가 드리웠다. 이제는 흐릿하게라도 소녀가 보이지 않는다. 중년 여성도 더는 이대로 있어선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어떻게든 말을 꺼내야 한다,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할 수 없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지독한 한기를 띈 안개는 이미 중년 여성을 독방에 가두었다. 입을 연 순간 안개가 목구멍으로 파고들어, 그대로 폐까지 얼려버릴 것이다.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롭게 만들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느낀 중년 여성은, 소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요. 그럼…"


소녀는 안개에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흥미가 없다는 투로 말하며, 눈을 돌린다. 이 아이를 붙잡아두는 것조차 할 수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이 안개 속에서 스스로의 나약함을 원망하는 것뿐이다.
중년 여성이 그렇게 생각하며 안개 속에 틀어박혀 있으려는 걸 눈치챈 건지, 소녀는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안녕히 계세요―"






"키사라기 씨."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를, 하늘의 색만이 말해주고 있다. 안개는 중년 여성의 머릿속에까지 가득 낀 듯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안개가 새어나온다. 안개가 눈동자에 닿자, 물이 되어 흐른다.
지금까지 중년 여성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안개가 물이 되어 흘러간다. 물은 따뜻하지만, 차갑다.


그렇게 전부 흘려보내고 난 뒤에야, 확실하게 보인다. 너무나도 확실하게 보인다는 사실이 싫어질 정도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안개가 껴 있다. 짙게 깔린 차가운 안개는,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걸 결코 원치 않는다.
서로의 모습을 흐릿하게만 보여주고, 겁을 줘서, 이윽고 서로가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잊어버리게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그것이 명백한 사실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이 밤하늘은 별에 밝게 색을 칠하고 있다. 별들이 중년 여성의 눈동자에 선명히 새겨지자, 안개가 다시 중년 여성의 주위를 둘러싼다. 하지만 하늘은 가리지 않는다.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오늘 봤던 안개를 떠올릴 거라는 걸 깨닫자, 중년 여성은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힘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치하야는 천사도 성모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니까, 부모님을 원망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못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다고 생각한 게 시작이었습니다.

그야 치하야가 저렇게(?) 된 건 부모님에게도 책임이 있으니까…

'나라면 용서 못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썼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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