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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ant - 새로운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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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20, 2018 15:44에 작성됨.

평소와 같이 아침을 먹고 버스를 타고 내리고 회사를 향해 걸어가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트럭에 치였다.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기억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묘한 모양의 트럭이 덮쳐오는 것까지였다. 미묘하게 번호판도 좀 이상했던 것 같은데.

지난 30여 년간 살면서 교통사고라고는 당해 본 적도 없기에 어떤 느낌인지, 어떤 상황인지도 잘 모르겠다. 주변에 목격자는 있었으려나? 설마하니 그 사람 많은 장소에서 본 사람이 한 명도 없지는 않겠지. 보는 눈이 많으니 뺑소니는 아니었을 것 같다. CCTV도 많고. 

내일 정기 점검도 해야하는데. 아니, 이미 지났으려나? 누군가 대타로 나왔으려나? 다른 사업팀 분에게 간단하게라도 인수인계를 해놓은게 다행이었다. 산재처리 해주나?



아무튼 보상 문제는 차치해두고, 확인해야 할 건 현재의 내 상태다. 당장 눈도 못 뜨겠고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기 어렵다. 어지간히 큰 사고였던 것 같다. 하긴 그렇게 큰 트럭이었으니 살아있는 게 용하지 싶다. 

각고의 노력 끝에 간신히 눈을 조금 뜰 수 있었다. 한참을 누워있던 것인지 눈이 부시다. 조금 적응이 되니 실눈으로나마 주변을 볼 수 있었다. 평범한 병원의 중환자실이었다. 많이 다치긴 했나 보다. 근데 그런 것치고는 다친 감촉이라고 해야 할까, 붕대라던가 상처 같은 건 오른팔 외에는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어으.. 어..."



혀가 굳어서 잘 돌아가지 않는다. 아기 옹알이 하듯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자니 바로 간호사 분이 달려왔다. 그리고는 뭐라고 뭐라고 물어봤다. 웅웅거려서 잘 안 들린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니 간호사는 바로 밖으로 다시 나갔다.

조금 누워서 기력을 회복하고 있으니 간호사 분이 의사 선생님과 함께 들어왔다. 뭐라고 물어보는데 아까보다는 좀 소리가 들린다. 근데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들리는 게 일본어였으니까.



왜 때문이죠? 나니? 난데?

다행인건 그나마 애니메이션도 좋아하고, 일본 게임도 많이 했고, 일본 여행도 1년에 한두 번은 다니던 경력이 있어서 어느 정도 청해는 가능하다는 거였다. 오타쿠 만세!

몸 자체에 큰 이상이 있는 건 아니었는지 간호사 분이 부축해주어 병상에 기대 앉을 수 있었다. 기대어 앉자 의사 선생님이 동공반사나 반응 검사 같은 것을 했다.



"지금 기분은 어떠세요?"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딱히 기분은 잘 모르겠는데, 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이 뭔가 이상한 표정으로 '어딘가 이상한 부분은 없느냐'라고 물었다.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다. 애초에 왜 내가 일본에 와있는지도 잘 모르겠으니까. 목을 사용하지 않다 보니 목소리가 좀 이상한 것 같긴 한데. 잠긴 것은 아니고 좀 톤이 높아진 것 같아. 새된 소리라고 표현해야 하나?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어서 그런가 눈도 좀 이상한 것 같다. 원근감이 이상한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 밖에서 들어왔다. 중년이라고 하기엔 조금 젊어 보이는 부부가 들어왔다. 면회 시간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구지. 내 쪽으로 오는걸 보니 이 주변 사람인가? 이쪽으로 오는데? 왜 나한테 말을 거는 거지?



부부가 나에게 괜찮으냐고 물어봤다. 누군지 모를 사람들이 물어보니 당연히 멍...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치었던 사람들이 이 사람들인가? 당연히 나는 '누구세요?' 하고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고, 두 부부의 표정도 굳어졌다.



일본어이다 보니 대화 내용 전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기억 상실이라던가 뇌 손상 같은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 같다. 그 정도로 큰 사고이다 보니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겠지, 물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멀쩡한 사람을 이상한 쪽으로 병자취급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며 항의하려는 순간, 난 들려진 내 손을 보고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들려진 내 손은 어린 아이의 손이었다. 그것도 가녀린 여자아이. 



잠깐, 이게 뭐시여?

나는 그제서야 놀란 표정으로 내 몸을 둘러보았고, 내 현재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아무래도 내 몸이 아닌 다른 육체로 들어온 모양이다.






진정하자. 이럴 땐 소수를 세면 되는 거야. 2, 3, 5, 7...

은 무슨! 나는 기묘한 모험 중이 아니라고!



상상도 못한 정체에 당황스러웠다.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차에 치였고, 일본에 있는 이 육체에서 깨어났다.

아직은 학생으로 보이는 몸이니, 당연히 저기 있는 두 분은 부모님이겠지? 의사 선생님이 처음에 이상하게 쳐다본 것은 일본 토박이 주제에 어눌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것에 뇌 손상을 의심하였기 때문 일거고. 화룡정점은 아마도 부모님일 것이 분명한 사람들을 보고 누구냐고 물어본 것이겠지.



사실 남자라면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마련이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며, 몇 살을 먹어도 남자는 애라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다들 잠자리에 누워서 망상들 하잖아? 마왕을 물리치는 용사라던가, 이세계 빙의라던가, 게임으로 전이라던가.

나만 그렇다고? 그렇다면 죄송해요 ㅎㅎ!



그리고 현재의 내 상황은 그런 망상을 현실로 가져온 것이겠지. 눈을 떠보니 다른 사람이었어요! 그것도 꽤 예쁘장한 여자애라니!

예전에도 TS물은 나름 좋아했고,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그런 소설 들에서는 대부분 옮겨진 몸이나 상황에 적응하는 것 까지 표현해주지는 않았었다. 지루할 까봐 그랬거나, 굳이 서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리고 난 그 사람들을 절찬리에 원망하고 있었다.



이전, 교통사고가 났던 몸이 아닌 새로운 몸. '하루카'의 몸으로 옮겨오고 난 뒤로는 불편함 일색이었다. 그나마 전반적인 기억과 언어능력에 장애가 생겼다는 의사의 소견 덕분에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씻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속옷을 착용하거나 화장실을 가는 것도 그저 어색했다. 브래지어 같은걸 착용해봤을 리가 없잖아? 풀어본 적은 있습니다만. 그나마 내 몸을 보면서 욕정 하거나 하지는 않아서, 나는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월경 주기 같은 것도 챙겨야 할 것 같다. 

그저 혼수상태였을 뿐이고 몸 자체에 크게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2~3주 후에는 퇴원을 하게 되었다. 여자들은 짐이 많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깨어나고 얼마 있지도 않았던 병원이지만 무슨 짐이 그렇게나 많은지. 가방을 이래서 들고 다니는구나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고 처음으로 내 방을 볼 수 있었다. 평범하디 평범한 여학생의 방. 물론 나야 어디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흥미진진한 대탐험이었다. 

이제는 내 방이 된, 방에서 침대에 앉았다. 이왕 몸을 바꿔줄 거면 군대라도 갔다 오기 전에나 좀 해주지. 군대에서 조금 다쳐서 두어 번 정도 수술을 했고, 요즘도 비만 오면 무릎이 쑤시는 상태였거든. 아, 이제는 비와도 무릎 쑤시는 일은 없겠네. 대신 손목이 쑤시게 될 것 같지만.

병원에 입원한 이유는 자살이었다. 정확히는 자살 시도라고 해야 하나. 일반적인 리스트 컷으로는 실제로 자살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뼈가 보일 정도로 잘라버렸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갈라버렸으니 당연히 이전의 '하루카'는 죽었다. 대신 내가 들어왔으니 실제로는 자살이 성공한 걸지도 모른다. 철학적인 논쟁이나 인과관계를 따지기는 머리가 아프니 넘어가기로 했다.



내 이름은 '아마미 하루카'였다. 빙의라고 표현하기는 조금 그렇지만,'이전'의 나는 아이돌마스터를 파는 평범한 오타쿠 1이었다. 모두의 리더이자 최애캐였던 하루카와 이름도 성도 같은 것은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한 순간 아이마스 세계관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억측이라고 여겼다. 아무리 빙의했다지만 설마 게임, 혹은 애니메이션 세계관 이기까지야 하겠어? 라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상식선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전의 '나'는 손목을 그었기도 하고. 마마유도 아니고 하루카에게 리스트 컷 상처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덕분에 당분간은 재활치료 지옥에 빠져들 예정. 이전에서도 무릎 때문에 몇 개월 정도를 재활에 매진했었는데 그걸 또 하게 될 줄이야. 상처도 꽤나 깊으니 손목 보호대라도 하고 다녀야 할 것 같다. 아니면 진짜 마마유처럼 리본을 감아볼까? 양 옆 머리가 아닌 손목에 리본!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현재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금방 익숙해졌다. 아빠, 엄마라고 부르는 것도 적응하기 어렵지 않았다. 소중한 딸이 깨어난 것에 대해 기뻐하시는 것은 좋았지만, 후유 장애가 남았다는 것에 안타까워 하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는 딱히 장애는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겠지.



그러고 보니 이전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계시려나? 이전 육체는 죽은건가? 이메일을 보내봤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스팸 취급한건 아니겠지, 이전의 나 놈아. 나중에 국제전화이긴 하지만 핸드폰으로 전화라도 해봐야겠다.



'이쪽'은 2009년이다. 이 때 뭐하고 있었지. 학교 복학했을 때 였던 것 같다. 이제 막 스마트폰이 보급되던 시기다. 슬슬 아이폰을 사야할 것 같다. 지금이면 3GS가 나올 땐가? 어른이었다면 주식을 사놨을 텐데 아쉽다. 

그렇다 보니 메신저도 없이 메일을 사용하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럴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하루카'가 가지고 있던 핸드폰의 메일함은 텅텅 비어있었으니까.

친구도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핸드폰에는 부모님과 단 두 명의 이름만 등록되어 있는 상태다. 물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연락을 하던 사이라면 나중에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올테니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내가 먼저 연락해서 '누구세요?'하는건 좀 웃기잖아.



한참을 방과 핸드폰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으니 어머니께서 밥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네, 하고 내려갔다. 부모님과의 대화는 며칠해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배려라기보단 깨질 것 같은 유리 취급같기도 했지만. 하기야 소중한 외동딸이 자살 시도로 병원에 입원해있다가 기억 상실에 말도 어버버하고 있으면 나같아도 그럴 것 같긴 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가 자살하게 된 이유를 물었고, 부모님도 정확한 사유는 모르지만 학교에서 이지메가 있었다는 사유서를 전달받았다고 말했다. 역시 이지메 선진국. 자살 시도까지 할 정도였다면 어지간한 왕따 정도는 아니었겠지 싶다. 더 물어보기는 어려울 것 같은 분위기라서 환기를 위해 이런 저런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부모님과의 관계라던가, 이전 추억이라던가. 떠올리면 기분 좋아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물론 내 일본어 실력이 아직 그렇게 좋지 못한 관계로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장애 등급이라도 받는거 아냐 이거?






학교는 가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왕따의 영향이지 않을까 싶다. 다행히 출석일수가 부족하진 않아서, 졸업은 가능할 것 같다. 어머니께서 학교에 면담을 하고 왔고, 졸업식에도 나가지 않는 걸로 했다고 한다. 어차피 나가봤자 아는 얼굴도 아무도 없을텐데 차라리 잘된 것 같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핸드폰에 있던 두 명에게서도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아마도 반 년 정도는 빈둥빈둥이 확정되었다. 적어도 겨울과 봄까지는. 고등학교는 조금 먼 학교로 가게된 것 같다. 덕분에 니트 라이프 확정.

적어도 나는 오른손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당당한 사유와, 재활치료라는 거창한 할 일 까지 가지고 있다. 안즈와는 다르다 안즈와는. 다행인 점은 지금은 꽤나 추운 겨울이기도 해서 상처가 덧나거나 냄새가 날 일이 적다는 것이다. 주기적으로 드레싱도 해야하고 완전히 상처가 아물 때 까지는 붕대도 감고 있어야 하다보니 매우 다행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쨌든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 물론 그 때문에 다소 과보호를 받는 것 같기도 하지만, 현재의 부모님은 친절하고 상냥하기도 하고.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쪽'에 최대한 빠르게 적응하는게 맞지 않아?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지금의 나는 아버지의 무릎을 베고 소파에 누워서 귤을 까먹고 있다. 딱히 사교성이 좋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가족'에게 최대한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 여러모로 붙임성을 보이는 중이다. 그 덕분인지 부모님도 함박웃음. 이전의 하루카도 밝은 성격의 아이였다고는 하지만, 최근의 이런 저런 사건들 때문인지 최근에는 어둑어둑한 저녁같은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귤 반의 반을 갈라 입에 넣고 아버지께 하나 넣어드리고는 다시 TV에 집중했다. 딱히 TV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따지자면 컴퓨터파라고 볼 수 있다. 어지간한 TV 프로그램은 라이브로 시청하기보다는 다운받아서 나중에 맥주라도 끼고 보는 편이다. 라이브로 보는거라고 해봐야 야구나 E스포츠 정도? 아... 당분간은 못먹겠네, 술도. 기왕 일본에서 살게된거 일본주도 섭렵하고 싶었지만, 4~5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슬프다. 나중에 꼭 야구장에 가서 맥주를 마셔야겠다. 딴 생각을 하면서 이리저리 TV 채널을 돌리는 중, 연예 프로그램에 눈길이 갔다.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괜시리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 것 같은데.



...



누구였지?

어디서 봤는데.

목소리도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일본 연예인은 딱히 알지도 못하는데.

유즈키 료카 목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



...

..

.



????????

유즈네 보이스?



히다카 마이잖아?!



아니, 잠깐만.

저 아줌마가 왜 있지?

'이쪽'에서는 디어리가 유명한가? 본가보다?



그럴리가 없다.

저건 TV고, 중계되고 있는'현실'의 방송이다. 2D따위가 아니잖아.

맙소사.



"아빠, 저 사람, 유명한가요?"



'이쪽'의 '현실'을 검증하려면 역시 주변인에게 물어보는게 가장 빠르겠지 싶어서 아버지에게 여쭤봤다. 아빠는 기억이 없어도 저 사람은 알겠냐머 허허 웃으셨다.

'모든 여성 아이돌의 궁극적인 목표' 히다카 마이.

아빠가 설명하기 전에 TV에서 설명해주었다.





사실 내 이름이 '아마미 하루카'인 것부터 의심하긴 했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있는 '아마미 하루카'는 당연히 리스트 컷 따위도 없었고, 손목을 보호대로 가리고 다니지도 않았다.

모두의 리더이자 불변의 센터. 유일한 빨간색 이미지 컬러. 아이마스의 상징.

현재의 '나'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히다카 마이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확실해졌다.

여긴 아이돌마스터 세계관이고,



나는 아마미 하루카다.






당장 방으로 올라가 리본을 찾았다. 그리고 리본을 묶어 양 머리에 리본을 달았다. 이제야 내가 알고있는 '아마미 하루카'의 이미지가 되었다.

나는 '아마미 하루카'가 되었다.



하루카의 기믹 중에는 '리본이 본체'라던가 '리본을 풀면 못 알아본다'라는 내용이 많다. 단결에서 언급하는 것 처럼 트레이드 마크가 리본인 것도 있고, 실제로 공식 이미지에서도 리본이 없는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10주년 등신대에서 리본이 없는 이미지로 제작되었다가 아무도 못알아봤다는 전설적인 일화가 있기도 하다. 니코마스에서는 당연하다시피 언급되는 내용이고 P라면 누구나 알고있는 우스갯소리지. 하핫~ 프로듀서님! 오늘 늦잠을 자서 늦었지 뭐에요~ 라고 했더니 아카바네P가 누구냐고 물어보는 4컷 만화는 지금도 기억하는 재미있는 만화다.



근데 그걸 내가 직접 체험하니 환장할 노릇이다. 왜 이걸 이제야 생각해냈지?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아이마스는 많은 종류가 있다. 아케이드용으로 출시되었던 최초의 아이돌마스터부터 가장 최신작인 샤이니 컬러즈까지. 그 중 어느 세계선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미 '나'가 오면서, 아니, 내가 알고있는 '아마미 하루카'가 내가 모르는 과거를 가지고 있는 것 부터 뒤틀렸다. 앞으로의 스토리를 알고 있는 것은 중요하다. 내가 하루카로서 살아가기로 한 이상, 미래를 알고있다는 점은 큰 이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게 문제다.

우선 천천히 따져보자. 나는 하루카다. 1st 비전, 2nd 비전을 통틀어서 내가 빠질 일은 없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내가 없다면 아이마스 세계선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그건 곤란하다.



곤란한가? 왜?

딱히 내가 아이돌이 안될 수도 있는 건데.



그럴리 없다.

나는 과거 P였다. 아이돌마스터2부터 플래티넘 스타즈에 이르기까지 전체 타이틀은 모두 가지고 있었고 (물론 구할 수 있는 선에서는 모두 초회판이나 한정판이었다.) 출판되는 만화책은 일본을 갈 때나 해외직구를 통해 모두 구매했다. 범람하는 2차 창작물은 마토메 블로그를 뒤져가면서까지 가능한 한 확인하러 다녔다. 아이마스는 내 가장 큰 취미였고 꿈이었다. 그 꿈을 내가 직접 이룰 수 있는 상황에 한 발 뺄리가 없다. 그럴 순 없다.



지금의 나는 14살이고, 아이돌마스터의 모든 스토리의 하루카는 16살부터 시작한다. 내 생일은 4월 3일이니 아직 최소한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다. 



아이돌이 될 것이라고 결심했다. 아니, 아이돌이 된다. 될 수 밖에 없고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아마미 하루카'로서의 운명이고 숙명이자 '나'의 꿈이다.



그렇게 되었으니 우선은 현상 파악부터 해야할 것 같다. 우선 지금의 세계가 어느 세계선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앞을 예측하기가 편하다. 

혹시라도 아케마스라던가 콘솔판의 세계관이면 곤란할 수 있다. 하루카 메인이라는 보장이 없다. 사이드로 빠지게되어서 스토리 진행이 되지 않고 다른 아이가 메인으로 넘어가버린다면 예측이 어렵다. 하물며 플래티넘 스타즈 같은 느낌이 되어버린다면 사자에상 시공에 같혀버릴 수 있다. 매우 곤란하다. 

타 소속사 관련은 과감하게 배제했다. 그쪽은 어쨌든 우리 이후의 세계다.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히다카 마이가 있으니 우선은 디어리 스타즈 이후 출시된 쪽이다. 2nd 비전 이후 세계라고 한정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코미컬라이즈 쪽 세계관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relations나 컬러풀 데이즈 같은 세계관이면 심각하게 내 방향성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Break! 같은 세계관이면 아이돌 안할거다. 난 그런 녀석을 프로듀서로 둔 적이 없네!

그냥 평범하게 애니만 보고 기껏해야 콘솔 정도나 하는 @ㅏ재였다면 더 편하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괜스럽게 내 취미가 원망스럽다. 생각해야 할게 너무 많아. 

우선 조금 더 지켜보자.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가장 우선시 해야 할 일은 역시 타카기 사장님 눈에 띄이는 것. '팅 하고 오는' 그 분 눈에 띈다면 바로 데려갈 것이다. 하지만 타카기 사장님을 대체 어디서 만나야 하지? 코토리 씨나 리츠코 씨의 앨범이라도 찾아봐야하나? 

그리고는 연습. 재활과 더불어 기초적인 체력 단련과 음악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가장 원만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애니마스 세계관이라고 가정하면, 데뷔나 지명도 상승이 너무 느리다. 더불어 필요없는 갈등도 많이 있는 편이고. 리더로서 좀 더 빠르게 끌고 갈 수 있는 부분은 이끌어 나가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내 개인의 지명도와 실력은 필수다. 체크 체크.



결론은 그거다.

765의 행보를 따라가다보면 알아서 관련 내용도 볼 수 있을테고, 어떤 세계관인지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겠지.

괜히 걱정한 것 같다. 나이 먹으면 느는게 걱정 뿐이라니까.

운동이나 하자.






'이쪽'에 적응하는 것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오래 걸리지도 않았고. 부모님은 친절하고, '하루카'의 인간 관계는 넓지 않다. 애초에 적응할 부분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보니 집에서는 딱히 할 일도 없다. 그러니 재활도 할 겸 걷기나 조깅을 하는 것은 금방 내 일상이 되었다.

아버지의 출근 시간에 맞춰 일어나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아버지와 같이 나간다. 30분 ~ 1시간 정도, 가능한 한 가볍게라도 뛰려고 노력한다. 아무래도 걷는 것 보단 뛰는게 칼로리 소모나 여러가지 면에서 좋지 않을까? '이전'과는 다르게 지금의 나는 무릎이 아프지도 않으니까. 뛸 수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거야. 



기초 체력은 중요하다. 무대 위에서 크게 움직이며 뛰고 노래까지 하려면 체력과 폐활량은 당연히 필요하다. 물론 K-POP에서의 칼군무같은 움직임은 아니지만. 흠, 오히려 먹힐 것 같다. 일본의 아이돌은 율동같은 춤을 기반으로 꺄삐꺄삐한 음악인 경우가 많으니까. I want 같은 느낌이 오히려 와닿지 않을까. 물론 내 기본 노선은 '아마미 하루카'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다. 하나의 방향성에 대한 검토 정도로 하자.



집에 들어와서 어머니와 함께 아침 식사. 그리고 모닝 커피 타임을 가지고 방으로 올라간다. 커피는 옳다.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각성 효과도 가지고 있으니까. 과잉 섭취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 아무튼 괜찮음.

방에 컴퓨터가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사달라고 하는 것도 애매하기에 감수하고 있다. 나중에 인터넷 서핑이라도 할 수 있는 노트북 정도는 사달라고 해야할 것 같다. 정보 수집도 필요하니까.



라디오를 켜고 이전의 '하루카'가 가지고 있던 참고서를 확인한다. 어차피 나는 이전에 고등교육까지 마친 사람이니 크게 어렵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름 이름 대면 알만한 대학교 출신이라고? 다만 문제라면 역시 독해다. 문장을 파악할 수 없다면 문제지를 풀 수도 없다. 덕분에 참고서를 볼 때는 끙끙거리며 지문과 씨름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다보니 최근에는 때 아닌 일본어 공부 중이다. 일본인이 일본어 공부라니, 내 처지가 너무나도 처량하다. 기왕 빙의시켜 줄거라면 그, 왜 있잖나. 트랜스 뭐시기 같은 자동 언어 습득 기능. 이런건 기본 탑재해주는게 맞지 않나? 번역이 옵션이라니 너무한거 아냐?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한탄을 하면서 이전에 보던 동화책을 집었다. 요미가나가 달려있는 동화책은 그나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어머니와 함께 점심을 먹고는 다시 커피 한 잔. 그리고나서는 베이킹 타임. 어머니의 추천이었다. 이전 '하루카'도 쿠키를 굽는 것을 좋아했고, 기억 회복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며 어머니와 함께 하고 있다. 물론 난 쿠키 뿐 아니라 빵이라던가 파이라던가, 가리지 않는다. 단지 불편한 점이라면...



"힘들어..."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왼팔이라는 페널티는 있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빵 반죽이든 휘핑이든 더럽게 힘들다. 머랭 치는 것도 일이다. 한 번 하고나면 팔이 빠질 것 같다. 핸드믹서는 꼭 사야할 것 같아 어머니께 사달라고 졸랐다. 어머니는 핸드믹서가 아니라 더한 것도 사줄 것 처럼 기뻐했다. 나중에 집이나 차 같은걸 사달라고 해도 넙죽 사주는게 아닐까. 내 버릇이 나빠질 것 같다. 아니, 사달라고도 안할거지만. 고등학생 때 부터 돈 벌 예정이다. 안할거야.

... 아마도.



구워진 빵을 꺼내서 한 김 식도록 치워둔다. 내일 아침에 먹으면 되겠지. 제빵을 하면서 아침 식사가 편해졌다고 어머니가 좋아하신다. 



그리고는 다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간다. 아침보다는 조금 길게 달리고 온다. 보통은 한 시간에서 한시간 반, 길게는 두 시간 정도. 걷다 뛰다를 반복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정도 체력이 붙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 애초에 '하루카'의 체력이 좋았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사소한 부분은 넘어가자. 신경쓰면 지는거다.

돌아와서 씻고 가족이 한 자리에 앉는 저녁 식사. 적당히 뒹굴다가 올라와서 재활을 위해 손을 움직인다. 소프트 볼이라던가 견인기라던가. 죽을 것 같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앞으로 몸을 쓸 일이 많을테니 재활에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물론 몸을 쓴다는 것은 아이돌과 관련된 일이다. 아니, 몸을 쓴다고 해서 당신이 상상하는 그런 일이 아니다. 아이돌과 관련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음란마귀들 같으니. 그리고 일찍 잔다. 성장기다. 성장 호르몬이 분비되는 시간을 준수해서 취침 시간을 가진다. 키는 중요하다. ...가슴도.



왜, 뭐. 가슴은 중대 사항이다. 하루카는 80+의 소중한 자원이다. 

158cm에 46kg, 시간 흐름으로 조금 늘은 거였던가? 가물가물하다. 

게다가 83이다. 56-82다. 슈가 하트의 말처럼 퐁-큣-퐁이다. 괘씸하다. 아직 성장이 진행 중인 현재의 나를 봐도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다. 국가적인 관리가 필요한 자원이다. 그러니 관리하는 것은 당연하다. 절대 내가 음란마귀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내 몸이야!



뭐,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간다. 소중한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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