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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이 내리면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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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1, 2018 03:53에 작성됨.

 유성이 내리면 좋겠어.

 아파트 옥상 난간 앞에 서서 소녀는 생각했다. 거세게 부는 사람에도 미동 않고 초연하게 호흡하며 거리를 내다봤다. 순간순간 시야를 하얗게 가리는 입김에도 빛을 잃지 않는 도시를 바라봤다. 그것 밖에 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일을 할 기력조차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천천히 하늘로 고개를 올리는 행위조차도 만약 누군가 보았다면 매우 위태롭게 여겼을 것이다.

 하늘은 어두웠다. 그러나 별이 없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압도적 칠흑만 소녀의 눈에 비쳤다. 유심히 보고 있어야지 커다란 구름이 장막처럼 가리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어두웠다. 조금만 눈동자를 굴려도 환하게 닿는 도시 야경과는 정반대였다. 원래 저기 있어야 할 빛을 뺏어 창문마다 박아 넣은 느낌이었다.

 소녀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 지상의 빛에 눈이 부셨다. 따가웠다. 아프다. 그게 솔직한 감상이었다. 자꾸 보고 있으면 저들도 나를 보고 있을 것 같았다. 새어나오는 빛은 안광, 창문마다 한 사람씩 서서 두 눈으로 자신에게 시선을 던지는 거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 손이 떨리고 두려웠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천천히 떠보려다가도 호흡이 가쁘게 올라와 방해했다. 하늘로 눈을 돌리자 이번엔 어둠이 입을 쩍 벌리듯 소녀를 반겼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도시에서 별이 안 보이는 이유는 구름이나 대기오염 탓보다는 빛 때문이라고. 도시의 불빛이 너무 밝아 별빛이 묻히는 광공해 현상이라 했다. 아쉬웠다. 소녀는 별이 좋았다. 반짝거리는 이미지가 사랑스러워 그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는 했다.

 그럼 되자. 결심한 소녀가 난간을 넘었다. 아슬아슬하게 옥상을 등지고 두려운 불빛으로 다가섰다. 이대로 중력에 몸을 실어 유성이 되기 위해.

 걸음을 디뎠다.


 *


 기숙사에서 나오자 늦가을의 쌀쌀함이 피부에 닿았다. 앞서 나간 아이들이 몸을 움츠렸지만 아나스타샤만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앞질러 갔다. 고향인 홋카이도에 비하면 이 정도 기온은 여기 겨울 같은 소녀에게 추위의 축에도 끼지 못 했다.

 선두를 내준 아이들이 그 모습에 작은 감탄사를 낸다. 오, 역시 러시아 출생. 아나스타샤가 움찔했다. 바람이 불 때보다 크게 몸을 움츠렸으나 금방 못 들었다는 듯 걸음을 재촉했다. 쟤 고향은 홋카이도 아니었냐? 한 여자애가 되물었다. 그래? 러시아 사람인줄 알았는데. 다른 아이가 끼어들 듯 답했다. 홋카이도 맞아, 러시아는 어릴 때 살던 곳이고, 근데 일본보다 러시아에서 오래 살았으니 사실상 러시아 사람이지. 그렇네, 생긴 것도 그렇고. 쟤 일본어도 잘 못하잖아, 말하는 거 들어보면 외국어로 블라블라 거리는데 뭔 말인지 알아들 수가 있어야…….

 발걸음을 재촉해 뒷말로부터 도망쳤다. 소녀는 아직 말하는 건 서툴러도 듣는 것은 그럭저럭 이해가 빨랐다. 내용도 익숙하기에 더욱. 고개를 숙이고 걷다 모퉁이를 돌았다. 멈춰 서서 불안하게 옥죄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죄 지은 것도 없는데 땅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하루를 시작하다니. 그럴 수는 없다. 크게 심호흡하고 얼굴을 들었다. 장식품가게에서 꺼내놓은 커다란 거울에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햇빛을 반사해 반짝이는 은빛 머리칼. 눈처럼 새하얀 피부.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내리는 눈송이가 앉을 만큼 긴 속눈썹과 살짝 날카로운 눈매가 만드는 차가운 눈빛. 깊고 푸른 동공에 지금의 심각한 표정이 더해지자 자기 자신도 속내를 알 수 없는, 남들에겐 무서워보일지 모르는 겨울의 소녀가 있었다.

 아버지가 러시아인, 어머니는 일본인. 따라서 아나스타샤는 혼혈이었고 홋카이도에서 태어났으므로 분명한 일본인이다. 외모가 서양인스럽고, 일본어가 좀 서툴고, 그래서 의사소통이 조금 불편하고, 말수가 적어졌을 뿐이다. 그 뿐이다. 그렇게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었지만 이제는 스스로도 남들의 시선에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아나스타샤는 누구인가. 누군가 그렇게 물었을 때 확신을 갖고 대답할 자신이 소녀에겐 없었다.

 슬슬 말소리가 가까워져 소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새로 나온 화장품이나 옷, 같은 학교의 누구누구가 사귄다느니 따위의 그 나잇대 소녀들의 사소한 대화였지만, 그 대화에 끼지 못할 것을 알기에 차라리 피해버리기로 했다.

 “아냐 일찍 왔네?”

 사무실 문을 열자 하품을 하던 프로듀서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Привет(안녕하세요), 프로듀서, 어제도 집에 안 들어간 건가요? 직구로 들어오는 물음에 프로듀서는 찔리는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까치집 진 머리, 흐트러진 정장 매무새, 일찍 온 아나스타샤보다 더 일찍 회사에 와 있는 것까지.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이 많았다.

 “오늘 아침까지 작성해야 할 서류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좀 이따가 바로 회의거든. 큰일 하나 마쳤으니 오늘은 들어갈 수 있겠지.”

 그럼 나 가본다. 프로듀서는 급히 자리를 떴다. 차가워 보여도 실은 속이 여린 이 소녀가 자신이 쉬지도 못 하고 일하는 중인 걸 안 이상, 어떤 곤란한 표정을 지어올지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전에도 몇 번 비슷한 일이 반복된 바람에 잔소리 비스무리한 걱정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안다. 오히려 아나스타샤에게 있어 프로듀서는 좋아하는 사람에 속했다.

 서툴러도 괜찮다며 소녀의 말을 끈기 있게 들어주는 사람. 고민이 있을 때 조언해 주는 사람. 그 때마다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는 사람. 무엇보다 아나스타샤를 반짝이는 별, 아이돌로 만들어주는 사람. 그게 프로듀서였다.

 시작은 홋카이도에서의 우연한 만남이었다. 그 때도 지금처럼 아침. 당시 프로듀서는 출장을 내려와 역시나 전날 밤을 새고, 현대인답게 피곤한 하루를 커피로 시작하는 중이었다.

 의외로 입맛이 까다로운 이 남자는 항상 찾아가는 커피숍이 따로 있었다. 프랜차이즈라서 전국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고, 전국 어디서나 한결 같은 맛을 유지하는 게 특징인 그 카페에서만 파는 커피에 케이크 한 조각. 아침 식사로는 조촐해도 프로듀서는 항상 그 메뉴를 주문했다. 지금 다니는 회사, 프로덕션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까닭이었다. 그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1층에 그 커피숍이 있었다. 심지 직원할인도 해준다.

 입사 첫날 이 아름다운 혜택에 감명 받은 프로듀서에게 그의 선배가 물었다. 이 회사까지 들어와선 겨우 그런 게 좋으냐고. 줄지은 건물들 사이 우뚝 솟은 20층 사무실 건물을 보며 프로듀서는 말했다. 네, 아침은 이렇게 보내야 운이 좋아요.

 선배는 담배를 물었다. 미친 놈. 몇 년 후에 아나스타샤를 스카우트 해오기 전까지 계속 그런 취급을 받았다. 소녀의 고민이야 어쨌건 아나스타샤의 외모는 아이돌로서 좋은 소재였다.

 아름다운 얼굴에 쿨한 매력과 먹히는 설정은 가진 아이. 회사 뒤에서 오고 가는 말로 내려진 평가가 프로듀서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 어린 아이를 도구처럼 여기는 것 아닌가 하는 순수한 불쾌감이었다. 드러내진 않았어도 이 생각은 확고해서 프로듀서는 아나스타샤에게 말해두었다.

 나는 별처럼 순수한 너의 매력이 좋았어, 그래서 아이돌이 되어줬음 한 거야.

 신뢰의 증거라고 아나스타샤는 받아들였다.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다. 낯선 도시 도쿄에서 힘들 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믿음직한 사람이다.

 그런 프로듀서가 없는 사무실은 반대로 불안의 공간이었다. 프로듀서 말고도 좋은 사람들은 많지만, 그게 속내를 드러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니까. 애초에 아무에게나 그럴 수 있다면 이런 고민도 들지 않았을 터였다. 시간이 흘러 한 명 씩 사무실에 모이면 이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사람이 모인다는 건 그룹이 형성된다는 것. 레슨이 끝난 뒤나 일을 마치고 이동하는 남는 시간 등에 그룹들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식으로 서로 간에 관계를 만들어 간다. 아침에 스쳐간 아이들처럼 나이에 맞는, 혹은 조금 조숙하거나 반대로 유치한 취향과 호기심을 드러냄으로써 함께 시간을 보낸다. 이 모든 이야기는 아나스타샤와는 동 떨어진 세계였다.

 오전에 안무 연습. 트레이너의 지도대로 몸을 움직이다 보면 흐르는 땀만큼 시간이 지나 있다. 그 때는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도 벅차고, 어쩌다 지적을 받으면 머리가 굳어버린다. 그러다 타월로 땀을 닦고 열을 식히는 시간에 자각한다. 벽에 기대어 창밖만 바라보는 사람은 나 밖에 없구나.

 나에게만 이 시간은 텅 빈 시간으로 작용하고 있다. 자각을 기점으로 스위치가 눌리듯 내면에 불안이 차오른다. 이 순간, 아나스타샤의 ‘밤’이 시작된다.

 밤은 두렵다. 혼자 있는 밤은 외롭고 쓸쓸하다. 자꾸 떠오르는 잡생각은 어둠이 되어 아나스타샤를 잠식한다. 밤을 보내기 위해선 빛을 찾아야 했다. 하늘의 별을.

 천체관측은 소녀의 오래 된 취미였다. 어릴 적 러시아에서는 깨끗한 밤하늘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특히 사랑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는 교외는 도시의 빛이 닿지 않아 더욱 선명하게 별이 보였다. 소녀의 커다란 눈을 채우고도 남는 무수한 점들. 자연스레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져 만들어지는 별자리. 어둠이 뜨고서야 비로소 보이는, 어둠으로도 가릴 수 없는 진정 위대한 빛의 아름다움에 아나스타샤 매료되었다.

 아이돌을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프로듀서가 발견한 ‘별처럼 순수한 매력’에, 어쩌면 나도 저 하늘의 별처럼 될 수 있겠다는, 꼭 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의심이 든다. 내가 정말로 저런 별이 될 수 있을지.

 해가 뜬 하늘에 별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도시의 밤은 해가 지고서도 별이 보이지 않는다. 반짝이는 건 오로지 지상의 빛. 하늘은 게걸스레 입을 벌린 어둠에 먹혀버린 지 오래였다.

 아나스타샤의 눈이 허공을 헤매었다. 구름이 지나가는 파란 하늘에 보일 리 없는 별을 찾아 간절히 눈동자를 굴렸다. 지쳐서 고개를 내리자 프로덕션의 넓은 부지가 눈에 들어왔다.

 일본 굴지의 대기업에 자회사 중 하나로서 존재하는 프로덕션. 아이돌이 아니어도 모델이나 영화 배우, 가수 등 수많은 스타가 즐비한 커다란 성. 이곳을 거대한 우주라고 본다면, 얼마나 많은 별들이 모여 있는 걸까. 창마다 하나씩만 서 있다 쳐도 자신은 티끌에 불과해 보였다. 누군가의 눈에 띄길 원하는 외로운 소행성, 하지만 다가가지도 섞이지도 못하는 별. 그것이 아나스타샤가 객관적으로 바라본 자신이었다.

 혼다 미오가 다가온 것은 그 때였다.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는 아나스타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을 걸었다. 아냐, 뭐해?

 ‘아냐’는 아나스타샤의 별명이었다. 러시아에서는 스타샤, 아샤라고 불리는 게 일반적인 애칭이라면, 이건 어머니가 지어준 애칭. 그 소중한 이름을 밝고 명랑한 목소리가 불러와서 소녀는 조금 당황했다.

 “아……. 무슨 일인가요, 미오?”

 “무슨 일이긴. 혼자만 떨어져 있으니까 심심해 보여서 그렇지. 같이 수다나 떨자.”

 자연스러운 권유였다. 아나스타샤가 무의식적으로 풍기는 차가운 분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오히려 자신의 분위기로 밀고 물들이듯 손을 내밀어 왔다. 거절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아나스타샤는 미오를 따랐다. 두 소녀는 다른 소녀들의 무리에 섞여 들었다.

 다들 무슨 얘기 중? 역 앞 상가에 들어선 가게들 얘기, 액세서리랑 화장품 파는데. 오오, 이건 또 풋풋한 소녀들의 토크로구만! 뭐야, 아저씨 같아. 아저씨라니! 나도 엄연한 소녀, 그 가게들 정도는 가봤다구. 맞아, 미오는 전철 타고 다니지. 올 때마다 보겠네, 거기 진짜 귀여운 거 많지 않아? 그렇지, 생긴지 얼마 안 돼서 계속 새 물건이 들어오더라고, 놓칠 수 없어서 매일 체크해야 해. 그렇긴 한데 매일 가는 건 좀 힘들지, 집이랑 좀 멀어서. 우리도, 요새는 일이 많아져서 주말에도 바쁘거든. 에이, 아쉽다, 시간되면 같이 가자고 하려 했는데……, 아, 그럼 아냐는?

 차례가 넘어왔다. 배구를 하다 예상치 못하게 날아온 공처럼. 시선이 한데 모여 아나스타샤의 대답을 기다렸다. 얼음 조각 같은 입이 쭈뼛거렸다. так(그러니까)…….

 “가봤어요. 한 번.”

 “그럼 어딘지는 알겠네. 괜찮으면 오늘 나랑 같이 갈래? 혹시 스케줄 있어?”

 “Нет(아뇨). 오늘은 아무 일 없어요. 같이 가면, 저도 좋아요.”

 “신난다! 아냐랑 같이 간다!”

 미오가 과장된 몸짓으로 기뻐했다. 장난스러우면서도 이렇게나 좋아할 수 있을까 싶은 행동이었다. 보고 있으면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일정은 순식간에 짜여졌다. 오늘은 다른 일 없고, 레슨 끝나면 네 시니까 같이 상가 가서 쇼핑하고 저녁까지 먹자! 이런 식으로 비어있던 시간에 일정이 채워지자 아나스타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쇼핑 후에 이른 저녁, 카페와 노래방, 게임센터까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하나의 도전이라고 아나스타샤는 여겼다.

 쇼핑이라면 당연히 여러 번 가봤다. 예쁜 귀걸이나 목걸이 등 다양한 액세서리를 구경하거나 사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에게 있어 그것은 보통 혼자 혹은 가족들이랑 함께 하는 일이지 또래 친구와 함께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어릴 적, 감정의 계산 없이 하고픈 대로 행동할 수 있던 시절엔 아이들과 같이 문구점이나 과자가게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기억들이 눈에 덮이듯 잊혀 가끔 어쩌다 흔적을 드러내는 지금, 친구와의 쇼핑은 아나스타샤에게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인지, 떠올리려 애쓰진 않았다. 그건 분명 괴로운 일일 테니까.

 이거 예쁘다! 명랑한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청녹색 별모양 헤어핀을 미오가 아나스타샤에게 건넸다. 이거 한 번 해봐도 되죠? 점원이 네, 라고 대답했다.

 “미오는 하지 않나요?”

 “이건 아냐랑 어울리는 것 같아서. 잠깐만…… 짜잔!”

 거울 앞에 서서 보니, 과연 잘 어울렸다. 은색의 머리칼 사이에서 빛나는 액세서리는 마치 눈 속에 묻힌 별 같았다. 점원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단순히 물건을 팔려는 것만 아니라 진심이 담긴 말이었으나, 아나스타샤의 관심은 다른 곳에, 같은 거울 안에서 환하게 미소 짓는 미오에게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보기에 프로덕션의 아이돌 중에는 별처럼 빛나 보이는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미오도 그 중에 하나였다. 그리 꼽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활발함에서 나오는 밝은 매력. 미오에겐 친화력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먼저 다가서고 쉽게 친구가 되는 친화력. 레슨 후 쉬는 시간에 아나스타샤에게 다가온 것처럼 말이다.

 아나스타샤는 미오의 그런 점이 좋았다. 동경했다. 그래서 이건 기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오. 다른 액세서리를 고르던 미오가 고개를 돌렸다. 응? 굳게 마음먹고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저에게, 친구가 되는 법을 가르쳐 줄래요?”

 “……어?”


 두 소녀는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으로 이동했다. 방금 막 튀겨 따끈한 김이 나는 치킨을 앞에 두고 진지하게 마주했다.

 미오는 원래 치킨을 좋아했다. 특히 집에 돌아가는 길에 출출함을 달래주는 편의점 후라이드 치킨을 선호했고, 그에 못지 않게 이런 가게에서 파는 치킨 또한 좋아했다. 평소라면 당장 닭다리부터 잡고 바삭한 튀김과 보드라운 고기에서 흘러나오는 육즙을 즐겼겠지만, 전에 없이 진지하게 자신의 도움을 구하는 아나스타샤 앞에선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애한테 이런 면도 있었구나.’ 갑작스럽고도 저돌적인 면모에 속으로 놀란 미오가 아나스타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요컨대, 내가 친구들이랑 잘 어울리는 비결을 말해달라는 거네. 맞아?”

 “Да(네). 꼭 배우고 싶어요.”

 아나스타샤의 커다란 눈이 빛났다. 청명한 호수 같은 그 눈에서 얼마나 많은 별빛이 광채를 발하는지 안다면, 누가 과연 이 소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미오는 닭다리를 집었다. 다른 하나를 아나스타샤의 손에 쥐어주고 둘을 맞부딪쳤다. 먹자, 아냐.

 “친구의 첫 걸음은 함께 맛있는 걸 먹는 것부터야.”

 “미오. 그럼…….”

 “당연히 도와줘야지. 우린 친구인 걸.”

 새삼스럽다는 듯 미오가 씨익, 웃어보였다.

 그랬다. 한 회사에서 무대를 목표로 노력하는 또래 소녀들이 친구라는 것은 의식할 필요도 없이 당연하다. 하지만 말 한 번 안 섞어본 같은 반 아이를 ‘반 친구’라고 부르는 것처럼, 의식하지 않던 것을 입 밖에 내어 의식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묘한 변화가 온다. 그 전까지 우린 정말 친구였던 걸까. 물음이 시작되고 관계를 되돌아본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절대로 쉽고 단순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지금껏 아나스타샤가 무의식적으로 품고 있던 생각이 작은 흐름에 바뀌기 시작했다. ‘우린 친구인 걸.’ 짧은 한 마디와 치킨 한 조각에 마음이 동했다. 눈송이를 뚫고 새싹이 자라나는 기분이었다.

 칼로리를 잊고 치킨 한 마리를 해치운 뒤 두 소녀가 향한 곳은 노래방이었다. 미오는 능숙하게 음료를 주문하고 아나스타샤에게 첫 곡을 양보했다. 리모컨을 잡은 아나스타샤는 잠깐 동안 화면만 바라봤다. 왜 그래? 미오가 묻자 머뭇거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 미오가 끄덕였다. 음, 그럴 수 있어, 첫 곡은 부담스럽지.

 “그럼 난 이걸로 결정!”

 미오가 재빨리 리모컨을 눌렀다. 요즘 유행하는 댄스곡이 나오자 반주에 맞춰 열정적으로 추임새를 넣기 시작했다.

 사실 아나스타샤가 망설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친구와 노래방에 온 게 처음이라 말 그대로 이럴 때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아무 노래나 불렀다가 분위기가 쳐지면 어쩌나. 그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미오는 날려버렸다. 그냥 평소대로 노는 것인지, 아나스타샤의 마음을 읽고 센스 있게 맞춰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후자이리라고, 노래방에선 즐기는 게 이득이라는 말을 해주려던 것이라고 아나스타샤는 결론 내렸다. 그래서 지금은 즐기기로 했다. 즐기기만 했다.

 아이돌이니까. 노래 부르는 게 당연하니까. 마이크에 대고 목청껏 소리 질렀다.


 *


 “후우. 정신없었어요. 하지만, 뭔가……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

 “한바탕 소리 지르고 나니까 후련해졌구나.”

 “후련하다. 그래요. Облегчённый(후련하다). 후련해졌어요!”

 “잘 됐다. 우울한 기분은 얼른 날려버려야지. 뭐든지 신나게 즐기면 돼. 친구를 사귀는 법은 그게 다야. 누구보다 즐기는 사람 주변엔 즐거운 기분이 가득한 법이라고. 그러니 우울해질 것 같을 땐 노래방! 미오 선생님의 첫 가름침이야!”

 “Спасибо(감사합니다), 미오 선생님. 그런데.” “응?”

 “미오도 우울해질 때가 있나요?”

 “그야, 나도…… 없진 않지. 그보다, 나 노래를 너무 힘차게 불렀더니 목이 쉬어버린 것 같아.”

 “Нет(안 돼요)! 내일 레슨도 있는데!”

 “농담이야, 농담. 헤헤.”


 *


 효과가 있어 보였다.

 즐거운 기분으로 남들에게 먼저 다가가 대화에 섞인다. 못 따라가도 좋다. 자기 기분을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분명 닿을 거다. 미오의 짧은 강습 내용이었다. 요점은 속으로 되뇌일수록 신기하게도 자신감이 생겨났다. 기운을 나눠받은 것처럼 몸 안에 긍정적인 사고가 돌았다. 이런 모습을 프로듀서가 신기하게 보았다.

 “Доброе утро(좋은 차임이에요). 프로듀서.”

 “좋은 아침. 오늘은 시작부터 기분이 좋은가 봐. 무슨 일 있었어?”

 “Да(네). 실은 말이죠…….”

 어제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액세서리점에 갔고, 노래를 부르고, 게임센터에서 지칠 때까지 놀았다고. 얘기를 들려주는 내내 아나스타샤의 얼굴에 평소의 얼음 같은 이미지는 없었다. 마치 별을 얘기할 때의 느낌이었다. 회사 안에서도 프로듀서를 제외하면 아무도 본 적이 없을 모습. 이 소녀가 이렇게 밝은 성격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 만큼 환한 미소였다.

 진귀한 광경을 봤네. 프로듀서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남자는 오늘도 역시 매일 가는 카페에서 매일 먹는 커피와 케이크를 아침으로 삼았다. 그것이 정말로 행운을 깃들게 해준 것일지도 모르지만, 진짜 원인은 따로 찾아야 할 것이다.

 “미오가 좋은 얘기들을 해줬구나.”

 프로듀서는 차를 내왔다. 아나스타샤가 동의하며 녹차를 받았다. 맞아요, 미오 덕분이에요.

 “미오는 Звезда, 별처럼 반짝반짝거리는 사람이에요. 저는 프로덕션에 와서 동경하게 된 사람이 많지만, 지금 가장 Хотите походить, 닮고 싶은 건 미오예요. 제가 모르는 것들을 잔뜩 가르쳐줬어요.”

 “그렇구나. 공감 가는 말들이네.”

 “프로듀서도 같은 생각인가요?”

 프로듀서는 잠시 동작을 멈췄다가 컵을 들었다. 무언가를 떠올리려는지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홀짝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대답을 기다리며 그를 유심히 지켜봤다. 이내 프로듀서가 잔을 내리고 말했다. 나는 살짝 다른 것 같아.

 “이렇게 되고 싶다기 보다는, 이런 사람이 쭉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또 내가 쭉 그 애 곁에 있을 수 있으면 좋겠고.”

 “쭉 곁에서…… 프로듀스 해주는 거군요.”

 피식, 웃어보인 그가 끄덕였다. 맞아.

 “아마 어렵겠지만. 이 마음 변치 않고 쭉 프로듀스 할 수 있기를 바라.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물론 아냐 옆에서도 마찬가지. 프로듀서가 말을 돌렸다. 왠지 어색한 표정을 지어보여서 아나스타샤는 갸웃했다. 그런 의미에서, 둘이 친해진 건 나로서도 기뻐, 미오랑 잘 지내줘.

 “너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건 상대에게도 친구가 생겼다는 거야. 서로에게 좋은 일이지. 긍정적인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해.”

 “좋은 일……. 제가 미오에게…….”

 미오에게 도움되는 무언가가 자신에게 있을지, 아나스타샤는 갸웃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담백하게 내린 결론이었다. 평소에 보이는 미오의 이미지는 완벽은 아니어도 만능에 가까웠다. 어떨 때는 리더, 어떨 때는 팀원으로서 분위기를 이끌거나 환기시키고, 공부도 운동도 평균 이상. 눈치가 빨라 다른 사람의 고민을 금방 알아챈다는 평을 들었다. 반대로 본인에겐 고민 같은 건 없어보였다.

 설마 정말로 없는 건 아니겠지만 긍정적인 마인드로 금방 털어낼 것이었다. 혼자서는 해결 못 할 일이 닥치더라도 미오의 주위엔 도와줄 사람도 많다. 프로듀서를 포함해 같이 유닛을 짜거나 활동했던 아이돌들이 있고, 프로덕션 밖에도 친구들이 있을 테니까.

 아나스타샤는 그 반짝이는 소녀를 중심으로 곁을 둘러싼 별무리를 상상했다. 그 사이엔 인력에 이끌려 자신도 그 사이에 합류해 있었다.

 아침의 대화로부터 시작된 이 상상 덕에 하루 종일 외로움과 공허함을 잊고 지냈음을 깨달은 건, 방송 출연 준비를 하면서였다. 사실에 놀랄 새도 없이 프로듀서가 응원의 말을 건넸다. 그 기분 그대로 즐기고 와. 카메라 앞에 선 아나스타샤는 그 말을 연거푸 되새겼다.

 오늘 출연하는 방송은 토크쇼였다. 매번 다른 주제를 선정해 게스트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신인들이 편한 분위기로 촬영하도록 신경 써주는 호스트들이 특징이라고 프로듀서는 설명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그의 배려라는 것을 아나스타샤는 알고 있었다.

 일본어가 서툴더라도 아나스타샤는 카메라 앞에서 되도록 일본어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때문에 팬들과 만나는 행사 등에서 시간이 지체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프로듀서가 이를 막은 적은 없었다. 너의 말은 네 것이니 네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해. 언젠가 자신 없어하던 아나스타샤에게 그가 해준 말이었다.

 여기선 조금 서툴러도 괜찮아. 대놓고 말하진 않았어도 그의 뜻이 전해졌다. 일부러 의도를 설명하지 않은 것도 부담 가지지 말라는 또 하나의 배려일 것이다.

 오늘 출연한 게스트들 중에 같은 소속사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들도 거의 신인이라 전부 이번이 첫 만남이었다. 그런데도 소녀는 혼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주변의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토크 순서가 돌아왔을 때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오늘 주제는 ‘최근에 있던 멋진 경험.’ 무엇을 말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대기실에서 연습한 대로 입을 뗐다.

 “어제, 처음으로 친구랑 노래방에 갔어요.”

 처음으로? MC가 되물었다. 여기저기서 반응이 들려왔다. 방송 특유의 과장된 리액션에 ‘아냐랑 그런 장소는 매치가 안 되긴 하지’라는 의견이 섞였다. 아나스타샤는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네, 저, 그런 이미지이기도 하고…….

 “무대에서 부를 때, 녹음할 때와는 달리, 노래방은 연습을 못 하니까 친구들과 가는 건 포기 했었어요. 하지만.” 얘기하며 스튜디오를 훑어봤다. 모든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었다. 순간 긴장이 올라와 혀가 마비됐다. 안 돼, 능숙하게 해야 돼. 작게 피어오른 강박이 머릿속을 눈밭처럼 새하얗게 덮었다. 다들 내 이야기를 기다리는데. 입술이 닫히지 않고 뻐끔거렸다. 자아내지 못한 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생각이 뒤엉켜 뒤죽박죽으로 된 실타래가 되었을 때 MC가 말을 끊었다. 아냐 양이 뭔가 벅차오르는 게 있나 봐요.

 여자 호스트가 말을 받았다. 멀리서 와서 적응하기 힘들었잖아요. 남자 호스트가 맞장구쳤다. 저도 고향이 멀리 있는데 거기가 완전 시골이었거든요, 처음 도시 올라왔을 땐 아는 사람도 없고 어쩌나 힘들던지. 너도 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다. 슬펐다, 외로웠다, 그래서 힘들었다. 우리는 다 안다. 네가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니 너도 힘을 내라.

 형식적인 위로인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출연진 입장에선 촬영이 끊기는 걸 막아야하니 안 되겠다 싶을 때 얼른 다음으로 넘어가려는 것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원치 않았다. 토크가 마무리 되어간다. 이대로는 자신의 경험이 슬픈 추억의 한 장으로 남게 된다. 소녀의 하얀 피부에 혈색이 돌았다.

 아니야. 내가 말하려던 건 그런 게 아니야. 그 때 내가 느낀 솔직한 기분. 그건 슬프기는커녕…….

 “즐거웠어요! 정말로!”

 다급한 고음이 마이크를 때렸다. 놀란 눈들이 다시 아나스타샤에게 집중됐다. 이제 얼굴은 아주 새빨갛게 상기됐으나 아랑곳 하지 않았다. 상태를 인식할 겨를도 없었다.

 겨우 하고 싶은 말이 튀어나왔다. 또 놓쳐선 안 된다. 숨을 고르고 평소의 톤으로 돌아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했다. 처음 하는 일이지만, 처음 하는 일이라서.

 “눈치 보지 않았어요. 그럴 필요 없다고 그랬거든요. 크게 부르고 싶다면 크게, 신나게 하고 싶다면 신나게. 춤 춰도 되고, 탬버린도 흔들고. 먹고 싶고 마시고 싶은 것들, 전부 주문할 수도 있었어요. 신기했어요. 말을 틀리거나, 의미를 잘못 이해했을 때, 뒤늦게 부끄러워진 적이 많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오히려, 웃음이 나오고, 평소 신경 쓰던 일들은 전부 사소해졌어요. 사소한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아요. 신경 쓸 필요, 전혀 없어요. 지금, 이 순간,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전, 후련해졌어요. 다들 말해준 슬프고 우울한 기분들이 다 사라졌어요. 그걸 말하고 싶었어요. 최근에 있던 멋진 경험에 대해서.”

 정적이 남았다. 섣불리 깨어서는 안 될 진한 정적을 안색이 하얗게 돌아오고서야 아나스타샤는 자각했다.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굴렸다. 저, 잘한 건가요? 옆에 프로듀서가 있다면 묻고 싶었다. 대답을 대신한 건 MC와 호스트들이었다. 정말, 멋진 경험이네요!

 이야기가 뒤따랐다. 저도 옛날에, 친구들이랑 노래방 가면 되지도 않는 고음 파트 막 부르고 그랬거든요. 남자 호스트의 말에 여자 호스트도 덧붙였다. 공부 안 하고 밤새 춤 연습해서 노래방 가면 막 추고는 했잖아요, 우리 때도 그렇고 아냐 양 나이면 다들 그렇게 노는 거죠. 아까와는 분위기도 반응도 달랐다. 출연진들의 얼굴이 하나 같이 즐거워 보였다. 스튜디오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소녀의 입가에 자연히 미소가 걸렸다. 말하길 잘했다. 이제야 내쉬는 안도의 숨 뒤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것도 연습한 거야? 촬영이 끝나고 프로듀서가 제일 처음 물어본 말이었다.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 먼 곳을 바라보다, 저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해서 프로듀서의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그 만큼 진심이 담겼겠구나.

 “미오 온다고 했어. 전화왔길래 ‘네 덕에 아냐가 잘 해주고 있다’ 했더니 보러 오겠다고 하네. 이미 다 끝났다는 데도. 같이 저녁 먹자. 괜찮지?”

 “Да(네)! 미오가 와주면 기뻐요.”

 “뭐 먹을지 생각해두고 배고프면 먼저 가서 먹어. 난 좀 오래 걸릴지 몰라.”

 디렉터와의 대화를 위해 프로듀서는 자리를 비웠다. 기다리는 동안 아나스타샤는 대기실에 있기로 했다.

 복도를 거닐며 회상했다. 그 순간의 감각들을. 한 마디를 입 밖으로 낼 때마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긴 시간 쌓여온 감정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해방되는 것이었다. 즐거웠어요. 말이 떠나지 않고 입 안과 가슴 속에 맴돌았다. 걸음이 활기를 띄었다.

 대기실은 신인 아이돌들 여럿이 하나를 사용한다. 지금 들어가면 아마 다른 소속사의 아이돌들과 마주칠 것이다. 이전의 아나스타샤였다면 머뭇거리거나, 심하면 피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다르다.

 대기실 앞에 섰다. 문고리를 잡고 살며시 내렸다. 그리고.

 “아나스타샤 걔, 뭐냐. 재수 없게.”

 들렸다. 토크쇼에서도 들었던 낯익은 목소리가.

 멈췄다. 손도, 몸도, 사고도. 오직 소녀의 귀만이 피할 수 없는 소리들을 잡아 충실하게 역할을 수행했다.

 “내내 말더듬이처럼 어버버 거리더니. 자기 차례 뺏길 것 같으니까 아주 청산유수로 말을 뱉더라.”

 잘못들은 게 아니다. 함께 출연했던 아이돌들이었다. 그녀가 어째서인지 자신에게 혐오를 비치고 있었다.

 소름 돋더라, 내 생각이 맞았어. 한 명이 더 있었다. 역시나 다른 소속사의 아이돌이. 걔 지금껏 코스프레 한 거야.

 “나 일본말 못 해요. 그래도 마음만은 일본인. 혼혈 컨셉 잡고 있던 거지. 예쁜데 살짝 부족한 점 좀 보이면 눈에 띄기 좋잖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했더니 속으로 쭉 계산하고 있던 거네. 언제쯤 말문 트이면 동정표 받을 수 있을까. 호스트들도 진짜 멍청해. 그런 거에 넘어가주고.”

 “그 사람들이 설마 모르겠냐? 업계 몇 년 차인데. 이미 다 계산 끝난 거지. 대형 소속사 배경에 얼굴 되고 먹히기 좋은 애 밀어주기로. 우린 그냥 들러리였던 거야. 챙겨주는 척 하면서 생색냈지만, 다들 한패였던 거라고.”

 “연예계 진짜 더럽다. 다 같은 신인인데 누구는 빵빵한 소속사 덕에 편하게 원샷 받고, 누구는 방구석으로 밀려나고.”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느 곳에서나 아나스타샤는 이방인이었고 그곳의 사람들은 소녀를 낯선 존재로 대했다. 가끔 있는 흥미를 느끼고 가까이 와주거나 대화를 시도한 이들도 있었지만 인내는 길지 않았다. 아나스타샤의 영역에 발 딛은 이들은 오래 머무르지 못 하고 금세 멀어졌다. 그들이 그들의 영역에서 흘린 말들은 멀리 날아가지 못 하고 어떤 식으로든 아나스타샤에게 닿았다.

 그러니 익숙하다. 누군가 나를 뒤에서 판단하는 것 쯤. 몇 번이나 있던 일이다. 앞으로도 있을 것이며 아마 평생 따라다닐지도 모른다. 이 정도로 아파해선 안 된다. 익숙해질 것이다. 익숙해져야만 한다. 그렇게, 그런 식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는데.

 “여우같은 년. 그딴 건 어디서 배워왔는지 몰라.”

 “누구겠냐. 얼빵해 보이는 걔네 프로듀서가 다 시킨 거겠지.”

 아프다. 이번 말들은, 소녀만이 아니라 소녀의 소중한 사람들을 노리고 던진 칼날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게 날카롭고 깊고 예리했다. 호흡을 난도질하고 중심을 무너뜨렸다. 쌓아올린 자존감과 자신감, 보람, 추억, 감사함, 노력이 모두 부정당하고 산산이 무너졌다.

 아니, 떨어졌다. 소중한 보물처럼 소중히 두 손에 담아 잘 보이는 하늘에 올려둔 별들이 맥없이 추락했다. 시커먼 어둠에 잠겨 흐르는 궤적조차 남기지 못 하고 우주 공간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잊고 있던 고독이 인사했다. 뭘 그리 절망하는 거니,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단다.

 누구도 너에게 다가오지 않아. 네가 다가가려 해도 그들이 널 멀리할 거야. 너의 모든 것이 부정당하겠지. 왜냐하면 넌 그들과는 많이 다르거든. 사람들은 다른 것을 싫어하지. 그러니 모두 널 싫어할 거야. 넌 틀렸으니까. 머리색도, 피부도, 표정과 말투까지. 너는 평생을 나와 함께 할 거란다. 그러니 그만 인정하고 편하게 떨어져 버리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돌아선 그곳에 미오가 있었다.

 “…….”

 침묵.

 그 뒤에 이어지는 침묵을 깨고 미오가 손을 내밀었다. 가자. 아나스타샤의 팔을 잡았다.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 이 이상의 말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


 “괜찮아, 프로듀서. 디렉터 씨랑 얘기하는 거 중요한 일이잖아. 저녁 정도야 우리끼리도 먹을 수 있어. 응, 응. 진짜로 정말로 괜찮아. 그렇게 많이 먹을 것도 아닌 걸. 돈 많이 안 들어. 프로듀서의 월급은 아껴뒀다가 비싼 거 사줄 때 써야지! 헤헤. 농담인 거 알지? 지금은 일에만 집중. 늦어도 좋으니까 완벽하게 끝내고 와. 끊을게.”

 폰을 무음 모드로 돌리고 미오가 돌아섰다. 방송국 옥상에 조성된 작은 정원의 벤치에는 아나스타샤가 앉아 있었다. 전원이 꺼진 듯한 소녀의 모습은 그럴 리가 없음에도 추락할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 옆에 다가가 앉았다. 차가운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나는 알아. 피부가 맞닿았지만 온기가 전해지지 않았다. 아냐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

 “프로듀서도 알고, 아냐의 부모님도 알 거야. 찾아보면 더 있을 걸. 아냐가 노력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프로덕션에 잔뜩…….”

 “정말로, 알아줄까요.”

 목소리의 온도가 낮았다. 늦가을의 바람이 한기를 더해 갔다.

 “애초에, 알아주기는 하는 걸까요.”

 “…….”

 “방송 중에는…… 제가 말을 하지 못 해서 몰라준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어요. голос, 목소리를 높여도 들어주지 않아요. 사람들은 저를, 저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은 거예요.”

 자기와 다르니까.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숙였다. 들어주지 않는다면,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깊이, 더 깊이. 능숙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애초에 말할 필요가 없었어요. 심연의 그림자가 닿을 곳까지 숙여 내렸다.

 “같은 사람이라면 들어줄 거야.”

 “그런 사람이 어디에…….”

 “2년 쯤 전에, 나, 죽으려고 했었어.”

 턱, 하고 떨어지던 고개가 걸렸다. 아나스타샤의 눈에 의문이 서리자 미오는 말을 이었다. 그 때도 이런 옥상에서, 응, 우리 아파트 옥상에서.

 “오늘보다 더 추울 때. 난간 밖으로 나가서 섰어. 확 떨어져 버리려고.”

 담담한 어조였다. 너무 담담해서 진의가 구분이 안 가다가도 그 초연한 표정을 보면 거짓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째서……. 소리가 나오지 않아 눈으로만 물었다. 그것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미오는 고백을 이어갔다. 왕따 당했거든, 학교에서.

 “우연히, 정말 우연이었어. 책을 놓고 가는 바람에 방과 후에 다시 교실에 갔거든. 아직 집에 안 간 애들이 있었어. 같은 반 애들. 먼저 인사하려 했더니 한 애가 그러더라.”

 나보고 재수 없다고. 목소리가 떨렸다.

 괴로움. 아나스타샤가 느낀 것과 같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반 남자애들 아무한테나 웃어주는 게 짜증났대. 자기들 얘기하는데 불쑥 끼어드는 것도 싫고. 더 말하려는데 거기까지만 듣고 도망 왔어. 무서웠거든. 바로 그 날만 해도 정답게 얘기했던 애였는데, 아니었나봐. 나만 그랬나봐.”

 내가 혹시 잘못들은 건 아닌지 몇 번이나 부정해 봤는데. 떨림이 강해졌다. 부정하기엔 너무 선명하게 기억에 남더라고. 맞닿은 손을 타고 떨림이 전해졌다. 그래서 다음에는 잊어보려고 했지만.

 “내가 들었다는 걸 걔네들이 알았나봐. 그 다음부턴 당당히 앞에서 말해왔어. 그리고…….”

 어떤 얘기도 통하지 않았다. 소녀가 웃는 것도 즐기는 것도, 가까이 오는 것도 반대로 피해가는 것도, 혼자 걸어가거나 아예 가만히 있는 것조차도. 그들에겐 거슬리는 일이었다. 미오의 존재 자체가.

 욕은 아무 의미 없이 내뱉어도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준다. 그들은 미오를 이와 같이 취급했다. 처음에는 일부러, 나중에는 습관처럼. 갈수록 수위를 더해 물리적인 형태를 취하고 그 이상으로 무형의 상처를 수도 없이 남겼다. 도움을 받아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더 큰 상처가 남았고 어느 밤, 미오는 옥상으로 향했다. 생각했다.

 유성이 내리면 좋겠어.

 별에게 소원을 비는 거야. 나를 죽여 달라고. 괴롭힌 애들은 죽이지 않느냐고? 당연하지. 걔네들이 죽는다 해도 또 누가 나를 괴롭힐지 모르잖아. 그러니 내가 죽는 거야. 아니면 다 같이 죽어버리던가. 하지만 도시에선 별이 안 보여. 유성은 내리지 않아.

 그러니까 되자. 내가 직접. 유성이.

 결심한 소녀가 난간을 넘었다. 아슬아슬하게 옥상을 등지고 두려운 불빛으로 다가섰다. 이대로 중력에 몸을 실어 유성이 되기 위해.

 걸음을 디뎠지만.

 “무서웠어. 발에 아무 것도 닿지 않으니까.”

 “…….”

 “난간을 꽉 붙잡고 천천히 안으로 돌아갔어. 혼자 한참을 울다가 집으로 내려가니까 부모님이 걱정하시고 계셨고. 늦은 시간에 어디 갔다 왔냐고, 눈은 왜 부었냐고. 숨기지 못 하겠어서 다 털어놨어. 얘기가 끝나니까, 부모님이 우셨어. 난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고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어. 상담사 언니가 좋은 분이라 정말 큰 도움 되더라. 덕분에 다시 친구도 사귈 수 있게 된 거야.”

 떨림이 사라졌다. 나 있지. 곧 이어 소름 돋는 한기가 아나스타샤의 손에 닿았다. 그 일 이후로 별로 잘 못 웃어, 남들 앞에서만 필사적으로 웃는 거야. 한 순간 스쳐간 표정이 강렬하게 뇌리에 담겼다.

 같다. 어느 아침에 거울 속에서 보았던 속내를 알 수 없는 소녀의 표정을 미오도 짓고 있었다. 우리는, 같다.

 “그래도, 나도 이렇게 웃으니까, 한 번 더 사람들이랑 어울릴 수 있게 됐으니까. 아냐도 가능할 거야. 분명!”

 미오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오늘은 별이 좀 있어. 손을 확성기처럼 만들어 크게 소리 질렀다. 야, 이 나쁜 놈들아!

 “난 이렇게 아이돌 해서 잘 살고 있다! 네들은 나중에 확 벌 받아라!”

 “미오……?”

 “소원 비는 거야! 후련하게!”

 미오가 손을 쭉 뻗었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끔뻑거리고 멍히 바라보다 결심한 듯 그 손을 잡았다.

 아이돌이니까 남들 앞에서 나쁜 말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돌이기 전에 소녀니까. 누구도 보고 있지 않으니까. 목청껏 소리 낼 수 있으니까. 아나스타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저도!

 “나쁜 말 하는 사람들은 싫어요! 다들 кара, 벌 받을 거예요!”

 폐 속에 남은 모든 호흡을 비워냈다. 목이 가렵고 입 안이 건조했다. 두 소녀는 서로 마주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아냐, 그게 뭐야, 약하잖아! 미오도 마찬가지예요!

 아직 작은 별들이 빛나기에는 도시는 밝고 어둠은 진했다. 언제 안개가 끼거나 먹구름이 드리울지 모르는 날씨였다. 하나 이런 날이더라도 별은 항상 그곳에 있다. 지금 보이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빛나는 날이 온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지나서 그 날이 왔을 때 누군가에게는 닿기를 바라며 소녀들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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